特愛

1. 만남

감자는 듣지 않긔

“상자?”

 

낡은 나무상자를 줍는다. 손목을 이리저리 돌리며 상자를 살핀다. 뚜껑 위에 붙어있는 종이는 낡다 못해 부분부분 찢어졌고, 글자는 색이 바래 뭐라고 적혀있는지 알 수 없었다. 종이 뿐만 아니라 상자의 겉표면에도 세월이 까맣게 내려앉았다. 한눈에 봐도 오래되어 보이는 상자라 이타도리 유지는 상자를 쓰레기통에 버릴지 잠시 고민했다. 

 

“백엽상 근처이긴 한데. 설마 선배가 말한 게 이거?”

 

유지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백엽상을 열었다. 끼익 소리는 내며 열린 내부에는 온도계와 습도계 외 선배가 준비했을 것으로 보이는 지푸라기 인형이 놓여있다. 흔히 저주 인형이라 불리는 인형의 몸에는 어울리지 않게 곰돌이 모양의 포스트잇이 붙어있었다. ‘용감한 부대원에게!’로 시작하는 짧은 글은 동아리의 부대원이 된 것을 축하한다는 내용이었다. 글을 전부 읽은 유지는 피식 웃으며 인형을 집어 들었다. 아무래도 선배가 말한 건 이 인형인 것 같았다. 

 

“그럼 이건, 그냥 쓰레기인가? 음, 그런 것 치곤 아직 쓸만한데.“

 

확실히 낡았지만, 손에 쥐고보니 생각보다 튼튼했기에 머릿속에서 [쓰레기통에 버린다.'] 라는 선택지를 깔끔하게 지운 유지는 나무 상자 안에 뭐라도 들었나 하고 귀 근처에서 살살 흔들었다. 바스락, 종이 소리가 미세하게 들렸다. 아무래도 일반적인 내용물은 아닌 것 같았다. 학교 비품인가? 꽤 그럴싸한 추측이었다. 우선 선배들한테 보여줄까, 유지는 나무 상자를 주머니에 챙기고 부실로 돌아갔다.

 

 

 

特愛 

1. 만남

 

 

 

의식이 부유한다. 깊은 잠에서 깨어나는 것과 같은 기분을 느끼며 료멘 스쿠나는 천천히 눈을 떴다. 높이 든 손과 파편으로 흩어진 주령의 육편들을 보아하니, 늘 그랬듯이 손이 먼저 나간 것이 분명했다. 고개를 들면 푸르스름한 보름달이 보였다. 손을 내리고 달빛을 등불로 삼아 몸을 살폈다. 수육체가 된 몸은 본래의 몸에 비해 훨씬 작았고, 훨씬 약했다. 술식 하나 없는 비술사의 몸이었다. 그러나 매우 잘 맞았다. 자신만 쓸 수 있도록 맞춤으로 마련된 것처럼 너무 잘 맞았다.

마치 누군가 일부러 준비한 것처럼.

 

‘결국 이렇게 되었나.’

 

얼마나 이 '내기'에 이기고 싶었던 건지. 스쿠나는 스쳐 지나가는 얼굴을 잠깐 떠올리다가 작게 한숨을 쉬며 앞머리를 넘겼다. 이마가 답답했던 탓이었다. 스쿠나는 근처에 누가 있든 말든 신경 쓰지 않았다. 흔하디흔한 주술사 중 한 명이겠거니 하고 넘겼다. 지금 신경을 쓸 대상은 주술사 따위가 아니었기에.

스쿠나는 옥상 난간에 등을 기대며 눈을 감았다. 스무 개의 영혼으로 쪼개어 주물로 만든 손가락 중 하나가 깨어났다. 곧 연쇄적으로 다른 손가락들도 반응하겠지. 생각을 끝낸 스쿠나는 이윽고 수육체, ‘이타도리 유지’의 기억을 살폈다. 스쿠나는 확인이 필요했다. 재앙이라 불리고 저주의 왕이라 칭해진 제 손가락은, 먹기만 해도 사망할 정도의 맹독성을 지니고 있다는 걸 알았다. 첫 번째 손가락 주물을 완성했을 때의 독기는, 분명 제 것이었음에도 기피하고 싶을 정도였으니. 그런 맹독성의 주물을 먹고도 죽지 않고 자신의 수육체가 되었다는 건, 어떠한 목적을 가지고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면, 자신의 사후 오랜 세월이 지나고서야 태어난 인재 중의 인재라는 의미일 터였다. 만약 후자가 아니라 전자라면, ‘누군가’의 개입이 있었을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그것은 이 '내기'의 승패를 가를 분기점이 될 것이었다.

과거로, 더 과거로.

추운 겨울을 지나, 풍족한 가을을 거슬러 푸르른 여름으로 다다를 때──────────

‘아’

보였다.

칠흑보다 깊은 어둠을 품은 눈동자를.

현세에 강림한 후 처음 본 사랑에 빠진 눈이었다.

 

”…하, 하하하!"

유쾌함에 절로 웃음이 났다.

이 '내기'는 자신의 승리였다.

"천 년인가, 천 년만인가.“

 

설마 시작부터 운명이 제 편이었을 줄이야!

'내기'에서 이기기 위해 필요한 수많은 조건들과 그로인해 발생할 수많은 변수를 고려해야 했다. 그리고 이조차도 승리를 확정시키는 요소로 적용되진 않았다. 이기기 위해 정말로 필요한 것은 하늘이 내린 극한의 행운 뿐. 제 행적을 생각하면 결코 주어질 리가 없는 행운이었으나, 보란듯이 손에 넣은 행운이었다. 어찌 안심하지 않을 수 있을까. 자칫 잘못하면, 그녀와의 ‘약속’을 이행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을테니.

그러나

그 모든 사실들을 떠올리기도 전에 안심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따로 있었다.

그것은 아마도,

달빛을 담은 그녀의 미소를 봤기 때문이겠지.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스쿠나는 이번 생의 자신의 역할은 정해졌음을 깨달았고, 받아들였다. 그것이, 그것이야말로 그녀를 향한 자신의 구애이자, 그녀와 맺은 속박이었기에. '내기'에서도 이겼으니 거리낄 것도 없었다. 짜증이 나지만, 앞으로도 짜증이 많이 나겠지만, 스쿠나는 이번만큼은 참기로 했다.

이번에도 인내를 발휘하기로 했다.

스쿠나는 두 쌍의 눈을 뜨며 달을 바라봤다. 천 년 전에도, 지금도 달은 시리도록 아름다웠다. 달빛을 받은 그녀 또한 아름다웠지. 스쿠나는 이제는 먼 추억을 잠시 떠올렸다. 그리고 그 때, 의식 아래 파문이 일었다. 주도권을 잡으려는 움직임이다.

그래, 그런 움직임이라도 있어야 안심이 되지 않는가.

제게 어울리지 않는 말이라는 걸 알면서도 스쿠나는 안심을 입에 담았다. 고개를 내리면 저를 경계하는 새파랗게 어린 주술사가 보였다. 이 시대는 그 어느 때보다도 여자도, 아이도, 심지어 주령까지도 구더기처럼 우글거리고 있지만, 그만큼 늘어나야 했을 주술사의 수준은 많이 낮아진 듯했다.

 

”이봐, 주술사.“

”!“

봐라, 부른 것 뿐인데도 벌벌 떠는 꼴을.

원인이 자신임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스쿠나가 한숨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나는 몹시 자비로운 상태다. 그러니 경고만 하마.“

 

이 몸에 상처 입히지 마라.

파문이 강하게 일었다. 그것에 스쿠나는 기꺼이 주도권을 내주었다. 의식이 수면 아래로 가라앉는다. 위로 부상하는 영혼을 본다. 벚꽃을 닮은 색과 호박을 닮은 색이 눈에 띈다.

닮았다. 새삼스럽게도.

그녀의 취향이 어땠더라? 이미 잘 알고있는 것을 생각을 하며 스쿠나는 자신의 생득영역으로 돌아갔다.

얼굴의 문신들이 사라진다. 눈가 아래 열려있던 두 눈이 서서히 닫힌다. 처음부터 전부 지켜보고 있던 후시구로 메구미는 긴장감에 침도 삼키지 못하고 있었다. 특급 주물이, 그것도 헤이안 시대에 살았다던 저주의 왕이 현세에 다시 깨어났기 때문이다. 예상보다 저주의 왕은 얌전한 반응을 보였지만, 갑자기 혼자 웃음을 터트리는 것에 메구미는 움찔했다. 웃는 것뿐인데도, 난간에 기대는 것뿐인데도, 저주의 왕이 취하는 행동 하나하나가 메구미에게 공포로 다가왔다. 곧이어 가소롭다는 눈으로 저를 보던 저주의 왕은, 그 이명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경고를 하며 남은 눈을 감았다.

힘없이 떨어진 고개가 번쩍 들어 올려졌다.

 

”후시구로! 괜찮아?“

 

다시 뜬 눈은 살의도, 악의도, 뭣도 없이 반짝이는 호박색의 눈동자였다. 눈가 아래 또 다른 눈은 열리지 않아 상처처럼 보였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전부 이타도리 유지라고 말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메구미는 두 주먹을 교차하며 이타도리 유지를, 아니, 이타도리 유지인 척 연기하고 있을지도 모를 저주의 왕을 경계했다.

 

”후시구로?“

”이타도리 유지, 지금 너는“

 

정말로 너야? 메구미는 그렇게 묻고 싶었다.

 

”요! 무슨 상황?“

 

평소에는 전혀 믿음직스럽지 않지만, 이런 상황에서만큼은 약간은 믿음직스러운 인물의 등장으로 꺼내지 못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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