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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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세 좋게 발을 내디뎠던 첫 모습과는 다르게 소년은 지금 꽤나 지쳐 있다. 그도 그럴 것이, 그의 몸통만 한 알을 실은 수레를 끌고 이 끝도 없는 숲을 헤맨 지 한참이 됐기 때문이다. 수레 손잡이를 잡은 손이 미끌거렸다. 앞머리 아래에도 구슬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카일은 한숨을 푹 쉬곤 뒤를 돌아보았다. 거대한 알은 그를 얕보기라도 하는 듯 여전히 담요 위
아이비는 좁은 구멍 속에서 몸을 둥그렇게 만 채 곤히 잠에 빠져들어 있었다. 주기적으로 흘러나오는 안정된 숨소리는 그녀가 아늑함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준다. 그녀의 거대한 친구는 아이비에게 자신의 일부를 내어주기를 즐긴다. 잔잔한 평화는 그로부터 몇 시간 후, 어느 낯선 소년에 의해 깨졌다. “마법사님-!” “숲의 마법사님-!” 아이비는 인상을
소년은 이웃이 어디에서 무엇을 하는지 다 알 수 있을 정도로 작은 마을에서 우체부 일을 하며 하루를 보낸다. 그는 이 작디작은 자신의 고향이 마음에 들었다. 시도 때도 없이 내리쬐는 햇빛은 그의 옅은 갈색 머리를 무성히 자란 갈대같이 보이게 해주었으며 그의 녹색 눈동자가 더욱 생기 넘치도록 만들었다. 소년의 하루는 이른 아침 누군가가 통에 넣어 놓은 서너
친구가 죽었다. 경찰이 조사를 하고, 장례식이 열렸다. 눈물을 쏟아내는 그 애의 어머니를 뒤에서 안았다. 나는 가장 친한 친구였기에 가장 오랫동안 조사를 받았다. 지금 그 애의 책상에는 하얀 국화꽃이 한 송이 물도 없이 멀건 화병에 꽂혀있다. 앞으로 며칠에서 몇 주, 저 꽃이 책상 위에 버티고 있는 동안은 누구도 책상 가까이 가지 않을 것이다. 꽃이 그 애
7시쯤 이른 잠에 들었다가 깼다. 냉장고에서 저녁으로 먹다 남은 닭발을 꺼내 뚜껑을 뜯어냈다. 옆에는 냉수 반 컵이 담긴 반투명한 머그잔. 갓 꺼내 차가운 닭발은 생각보다 맛있었다. 두 개쯤 먹자 슬슬 무언가 매움을 중화시켜 줄 만한 것을 먹어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물은 기본, 거기에 냉장고에서 아몬드 치즈를 꺼내왔다. 가장 좋아하는 맛이라 그런지 치즈는
또록. 똑. 귀를 기울여야만 들리는 작은 소리였다. 이슬에 젖은 손가락 끝이 잠시 시원해졌다가 곧 미지근해졌다. 나는 곧 잎사귀를 튕기기를 그만뒀다. 매점 안은 더웠다. 에어컨도 선풍기도 없었다. 빨간 플라스틱 의자에 비뚜름하게 앉아 차가운 캔을 움켜쥐었다. 이슬에서 느껴졌던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시원함을 넘어 손바닥이 시릴 정도의 물방울들. 맑은 이
“수족관 갈래?” “갑자기?” “응.” 날씨는 무더웠다. 햇빛에 정수리가 지글지글 익는 것만 같았다. 손에는 땀이 차 끈적해졌다. “언제?” “지금.” 남유리는 멈췄다. 내 쪽으로 몸을 돌리자 대충 하나로 묶은 머리가 흔들렸다. “시간 안돼?” “안 될 건 없는데···갑자기 왜?” “그냥. 싫으면 말고.” 남유리를 지나쳐 몇 걸음 걸었다. 양옆의 길에는 그
연보라색 꽃이 하늘거린다. 얇은 잎이 열매처럼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사방은 온통 연보라색이다. 나는 그 속을 천천히 거닌다. 발을 내디딜수록 온종일 신경을 거슬리게 했던 두통이 사라져 간다. 기억이 희미해져 간다. 이리저리 날 뒤흔들어댔던 온갖 감정들도 서서히 소멸해 간다. 나는 걷는다. 옅은 미소를 띠고, 손끝으로 꽃잎을 쓰다듬으며 계속해서 걷는다. 나
청춘. 엄마는 나를 종종 그렇게 부른다. 청춘이네, 하고, 묘한 그리움이 실린 어조로. 그럼 나는 말없이 설거지를 계속한다. “청춘.” “응?” “아무것도 아니야.” “뭐야, 싱겁게.” 친구는 그대로 다시 시선을 휴대폰으로 돌렸다. 청춘. 입속으로 계속 되뇌어봤다. 창문 너머엔 새싹이 막 돋아나고 있는 마른 나무가 있다. 통 수업에 집중이 되지 않는다
-교시. 선생님의 말소리가 귓가에서 점점 잦아든다. 남모르게 호흡이 빨라지고 있었다. 원인 모를 진동으로 책상 한 귀퉁이의 병 속 물의 표면이 흔들렸다. 찰랑. 시선이 저도 모르게 투명한 물로 미끄러졌다. 호흡이 더 가빠졌다. 관자놀이 아래로 차게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잔뜩 쪼그라든 뇌가 요란하게 경보음을 울리며 곧 다가올 한계점을 알리고 있었다. 일순간,
산들바람에 나뭇잎이 슥슥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따사로운 햇빛은 부드럽게 호수 표면으로 내려앉아 잔물결과 함께 일렁였다. 평화롭기 그지없는 어느 봄날이었다. 호숫가에서 그리 멀지 않은 작은 둔덕 위 웅장한 목조 저택이 풍채를 자랑했다. 지은 지 꽤 되어 군데군데 오래된 티가 났지만 그 위엄마저 사그라들지는 않았다. 저택 한가운데에서 짙은 고동색 문이 열리더
방에 있는 의자는 바퀴 달린 것 하나뿐이다. 의자 위에 올라가면 창문이 보인다. 조금 흔들거려서 불안하긴 하지만 숨을 가다듬으며 천천히 의자에 발을 올렸다. 여전히 미묘하게 구역질이 올라오고 있었다. 불쾌하게 치미는 느낌과 함께 눈물이 나오려다 다시 들어갔다. 숨을 한 번 크게 들이쉬었다. 역한 감각이 조금은 옅어졌다. 활짝 열린 창문 새의 바람이 시원했다
삐걱거리는 나무 문틈 사이로 어두운 인영 하나가 모습을 드리웠다. 그는 그대로 오두막 안으로 들어와선 이불 속에 온몸을 파묻었다. 아이비는 익숙하지 않은 자세로 눈을 떴다. 꼴을 보니 거처에 오자마자 뻗은 것이 분명했다. 목에서 뻑적지근한 느낌이 들었다. 오랫동안 익혀진 습관은 썩 좋지 않은 몸의 상태를 가뿐히 무시했고 그녀는 그대로 몸을 일으켰다. 간밤
큰달은 알 수 없는 곳에서 눈을 떴다. 의아함에 상체를 일으켜 앉으니 찰랑이는 물로 가득 찬 바닥이 느껴졌다. 시선을 내리자 색색의 물감을 뿌려놓은 듯한 마법소년의 교실이 뒤집힌 채 지금 자신이 앉아 있는 공간과 바닥을 맞대고 있었다. 그는 이곳이 자신의 정신에 연결된 공간이거나 혹은 꿈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으면 물 표면에 비친 익숙한 외관이
무의식적으로 지금이 때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나는 즉시 글라이더를 들어 그것을 향해 꽃아넣었다. 은빚 몸체가 배를 뚫고 나와 사방에 피가 튀었다. 고블린은 상관없다는 듯 섬찟한 소리로 웃어댔다. 역겨웠다. 끊임없이 그것의 얼굴을 가격했다. 더 붉어지도록. 더 흐려지도록. 모든 게 빨간색이 됐다. 손도, 시야도, 주변까지도. 고블린은 이제 미동이 없다. 아
아지트가 하나 있다. 눈을 감고 평평한 길, 울퉁불퉁한 길, 질퍽한 길, 갈라진 길, 부드러운 길을 순서대로 걸어가자 커다랗고 하얀 나무문이 보였다. 주머니 속 열쇠를 꺼내 들었다. 고리에 달린 장식이 햇빛에 반사돼 오색 빛깔로 영롱히 변한다. 조그만 열쇠를 구멍에 넣고 찰칵 소리가 나게끔 돌리자, 문이 슬며시 열렸다. 문 안쪽의 공간은 마치 바깥세상과
냉장고 문을 열고 조그만 원통형 상자를 꺼냈다. 눈을 향해 내리쏟는 빛을 무시하며 뚜껑을 열자 끝이 둥그런 큐브형 초콜릿들이 모습을 보였다. 곧장 하나를 집어 입 안에 넣었다. 이리저리 굴러다니는 쓴맛이 퍽 마음에 들었다. 문을 닫고 그대로 방으로 왔다. 슬리퍼를 신지 않은 맨발이라 그런지 오는 내내 바닥이 조용했다. 올려달라고 꼬리를 치는 강아지와 함께
냉장고 구석에 처박혀있던 호두 파이를 꺼냈다. 접시에 올려놓은 뒤 비닐을 씌워 전자레인지에 30초 간 돌렸다. 데워진 파이를 방으로 가지고 와 조용히 포크를 집었다. 파이가 혀 끝에 닿자마자 진한 시나몬 향이 곧바로 파고들어왔다. 호두가 무심히 씹혔다. 정말이지 내 취향은 아니었다. 한 입 삼킬 때마다 자꾸만 누군가의 잔상이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까맣게 그
몇 걸음만 걸어도 금세 이마가 땀으로 촉촉해지는 그런 날이었다. 고개를 들자 빈 의자들이 보였다. 점심시간이었다. 애들이 나가면서 에어컨을 껐는지 교실 안은 선풍기 한 대만 털털거리며 돌아가는 채 말 그대로 후끈거렸다. 고개를 다시 책상에 박았다. 땀에 젖은 몸을 일으키기가 귀찮았다. 하지만 더 이상 이 더위를 견딜 자신은 없어서 비척비척 에어컨이 있는 곳
깊고 검은 숲, 아니 이젠 푸른 숲 한가우데에는 둥글고 투명한 막 속 자그마한 공간이 하나 있다. 그곳에는 계절이 없다. 간혹 바뀌긴 하나 대부분 화창함을 유지하는 날씨가 있다. 허리까지 오는 갈색 머리를 하나로 묶어 내린 소녀가 있다. 연보랏빛 머리카락에 형형한 노란빛의 눈동자를 가진 소년이 있다. 이 둘이 함께 있는 한 시간은 영원히 깨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