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해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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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워를 마친 종수가 욕실에서 나왔을 때에도 병찬은 침대에 누운 채였다. 깨끗한 등을 내보인 채 허리 아래로 이불을 감고 모로 누워 웅크리고 있다. 종수는 허리에 감은 수건을 고치며 침대 곁으로 다가가 섰다. “박병찬. 자는 거야?” “아니.” 조금 허스키하게 잠겨 있지만, 잠기운은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럼 일어나. 언제까지 퍼
최종수라는 남자는 한 번도 눈을 깜빡이지 않았다. 양초가 세 개 끼워진, 영화에서나 보았던 고풍스러운 촛대 하나로만 밝혀진 어스름한 실내에서 그는 반쯤 어둠에 녹아 든 모습으로 가만히 서 있을 뿐이다. 한참 그를 지켜본 후에야 병찬은 처음 그를 만났을 때부터 느꼈던 위화감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이 남자는 움직임이 없다. 사람은 좀처럼 가만히 있을 수
보던 유튜브 동영상이 끝나 다음으로 볼 영상을 고르고 있던 때였다. 놀란 목소리가 사운드가 멈춘 이어폰을 비집고 들어왔다. “헉, 큰일 났다!” 종수는 소리가 들린 버스 통로 건너편 좌석을 돌아보았다. 버스 창에 양 손과 이마를 댄 채 내다보고 있던 병찬이 허둥지둥 일어나더니 통로를 따라 빠른 걸음으로 걸어 나간다. 병찬이 떠난 창 쪽을 주시했지만
그리 넓지 않은 거실 구석에 시커멓게 버티고 있는 것은 큼직한 구형 안마의자다. 종수네 부모님이 신형 안마의자를 구독 서비스로 들이면서 처치 곤란해진 이전의 구형 안마의자가 종수와 병찬이 함께 지내는 아파트로 옮겨진 것이다. 프로구단에서 선수로 뛰고 있는 종수는 구단에서 고용한 스포츠 마사지사로부터 마사지를 받을 수 있지만, 대학 농구팀에서 뛰고 있어 그
One. 교외라기보다 숲속에 숨어있는 것처럼 보이는 저택이었다. 꽤 오래 방치되었던 장소 같았다. 널찍한 정원의 정원수는 모두 말라 죽었고, 굳어진 흙 위를 잔디 대신 잡초가 뒤덮고 있었다. 그런 마당의 풍경과 걸맞게 저택 역시 오랜 기간 사람 손길이 닿지 않았던 것으로 보였다. 커튼도 달리지 않은 창문 몇 개가 활짝 열려 있는 것을 확인한 최종수는
누군가 어깨를 흔들고 있었다. 귓가에 부르는 소리도 들린다. “주장! 병찬형! 일어나요. 기상 기상!” “으응… 알았어….” 잠결에 대답하고 겨우 눈을 뜬 병찬이 처음 떠올린 생각은 자신을 깨우는 목소리가 생경하다는 것이었다. 벽 쪽으로 돌아누운 몸을 돌려 목소리의 주인을 확인하니 낯선 얼굴이었다. 병찬이 잠에서 깬 것을 확인하고 멀어지는 행동이 지
만석이 되는 일이 드문 평일 공연이지만, 오늘 라이브 클럽에는 좌석만이 아니라 입석 손님들까지 들어찼다. 최근 인디 씬에서 독보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밴드, 장도가 공연 리스트에 있어서다. 장도는 아직 정규 앨범은 없지만 디지털 싱글로 발표한 세 곡이 모두 좋은 평을 받고 있는 모던락 밴드였다. 지방의 작은 영화제에서 급한 주말 공연 섭외가 들어오는 바
황제의 처소가 있는 태청궁 위로 무지개가 내렸다. 예로부터 무지개란 오색으로 빛나는 긴 몸을 가진 짐승이나, 다리와 꼬리가 없어 용과 같은 상서로움은 갖추지 못한 것이라 하였다. 내린 자리에 재앙을 가져온다 하는 그 무지개가 황제의 머리 위에 드리운 것이니 이는 분명 흉조였다. 나라의 점복을 전담하는 관상감에서는 이 괴이한 일이 의미하는 바를 알기 위해
* 스핀으로 올려 주신 썰을 베이스로 조각글 연성. * 로판 풍을 원하셨지만 종뱅 이름으로 로판은 제가 못견뎌서… 어느 시대 어느 배경인지 구분 안되도록 모호하게 썼습니다. 원하는 시대 원하는 배경으로 상상해서 즐겨주세요.ㅋㅋ 한 주의 가운데 날, 그 하루의 중앙을 약간 지난 시간. 황태자에게는 황실 북쪽 별궁에 머물고 있는 속국의 왕자를 찾아가
“어떤 새끼야?” 3학년 선배가 주먹을 휘두르며 내지른 고함이 체육관 벽을 울렸다. 1학년들은 바짝 얼어붙었다. 3학년 선배의 손에 들린 노란 포스트잇 조각을 차마 쳐다보지도 못하고 고개만 푹 떨구고 있다. 저 커다란 주먹이 실제로 휘둘러지는 일은 없을 거라는 정도는 예상하고 있지만, 그렇다 해도 하늘같은 운동부 선배의 고성과 흉흉한 표정 앞에서 태연하게
3월도 중순에 들어섰지만, 올해는 좀처럼 기온이 오르지 않는다. 해가 떨어지고 나면 금방 싸늘해지고 만다. 아침 일찍부터 밤까지 내내 비어 있던 원룸 안의 공기는 차가웠다. 아침나절에 잠깐만 햇빛이 들고 마는 방이니 건물벽조차 데워질 틈이 없었을 것이다. 종수는 사 온 물건을 냉장고에 넣고 편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벽 한쪽 이단 행거에 걸린 옷들을 보니
종수의 손가락 끝이 병찬의 셔츠 세번째 단추를 쥐었을 때였다. 병찬이 종수의 손목을 붙잡아 세웠다. 턱을 바짝 당긴 얼굴 위에서 치뜬 눈만 서늘하게 종수를 향하고 있었다. “너, 이러려고 나 만나니?” 그 말에 종수는 그대로 굳어버리고 말았다. 얼굴에 핏기가 가시는 것이 스스로에게도 느껴졌다. 병찬이 벌레라도 떼어내듯 종수의 손을 집어 셔츠에서 떼어낼
종수는 가능하면 의미가 부여된 모든 날을 함께 축하하고 싶었다. 어릴 때부터 보아 온 부모님이 그러했듯이. 그러므로 둘이 마음을 확인하고 함께 살게 되면서 처음 맞게 된 발렌타인 데이란 놓칠 수 없는 중요한 날이었다. 문제라면 박병찬이 단 것을 별로 즐기지 않는다는 거였다. 아주 안 먹는 것은 아니다. 책상 서랍 안에 사탕 봉지를 넣어두고 며칠에 한 번
화려하고 분방한 차림에 두 귀를 온통 뒤덮은 피어스, 그리고 옅은 화장에 목덜미를 타고 내려와 어깨에까지 드리워진 긴 머리카락까지. 박병찬은 이제껏 최종수의 인생에 존재한 적 없는 타입의 남자였다. 각자의 분야에서 두각을 보이는 청년 인재를 소개한다는 특별 프로그램을 위해 대기실에 모인 출연자들 중에서도 그는 유독 튀었다. 수학 천재로 MIT에 입학했다는
BMW R18 바이크의 구동음이 고요한 평창동의 골목을 울렸다. 대지면적 100평이 훌쩍 넘는 마당 넓은 단독주택들을 둘러싼 길고 높은 담장들을 따라 달리던 바이크가 어느 집 앞에 멈춰 섰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처럼 대문이 활짝 열려 있는 집이었다. 바이크 운전자는 빈티지 클래식 헬멧 위로 고글을 밀어 올렸다. 단아한 생김새에 서늘한 눈빛을 가진 젊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