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CL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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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이 보이지 않으니 손을 잡아주오. 발을 헛디디려 하니 몸을 붙여주오. 바라니 부디 당신을 내게 이어주오. 불씨에 나 내던질 두 날개를 고이 접어주오. 당신 품 벗어나 머무를 땅이 별달리 있겠소. 달구어진 철을 망치로 두드리던 중년은 이렇게 말했다. “분명 그 녀석이 뭐에 씐 거요. 우리 애는 이제 일도 못하고 누워만 있어. 평생 불가에서 키웠는데 열
길 잃은 조풍이 컨테이너 사이를 맴돌았다. 화물이 빽빽이 들어앉은 모야의 터미널. 그 틈새를 거니는 자는 미로를 헤매는 탐험가라도 될 수 있었으나, 옅은 바람은 금방 힘을 잃고 길 찾기를 포기했다. 대신 철재 겉면에 들러붙어 항만 내음을 이루는 무리에 합류하길 택했다. 그보다 한발 늦게 도착한 라파엘과 수하들은 자연스레 시원한 바닷바람이 아닌 텁텁하고 짭
어린 불씨가 오크 장작에 끈질기게 들러붙었다. 결코 사그라들지 않겠다는 듯 잘 깎인 나무를 집어삼키며 몸집을 키우는 모양이 그야말로 화마다. 무엇도 별나지 않은 광경을 지켜보던 로한 와이엇에게 느닷없는 이해가 찾아왔다. 인간의 영혼이 곧잘 불씨와 비교됨은 적실히 포식자란 성격을 공유하기 때문이겠지. 기어코 번개 신에게서 불을 갈취한 인류는 불확실한 종말의
고개가 옆으로 푹 꺾이는 느낌에 화들짝 놀란 유라이어가 눈을 끔뻑이며 단숨에 수마를 떨쳐냈다. 고개를 두리번대니 기대어 있던 창문이 내려가 창밖으로 머리가 빠진 거였다. “일어났나.” “아~ 거, 새끼. 깨우는 방법 하곤.” “말로 하니 안 듣길래.” 이 냉철한 운전자는 조수석에서 졸던 동행자를 손가락 하나만 놀려 깨웠다는 사실에 꽤나 만족했다. 그러
"감사합니다." 청년이 늙은 청과점 주인에게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 품 안에는 서비스로 한 개의 사과가 더해진 봉투가 들려 있었다. 거리 대부분의 점원은 인심이 좋았다. 정확히는 클리브에게 그랬다. 성격이 명랑하고 말재간이 좋아, 몇십 년째 가게를 지켜 잔뼈가 굵은 상인들조차 어김없이 정이 뚝뚝 묻어나는 웃음으로 그를 맞이하고 또 배웅하곤 했다. 그리
눈을 뜨기도 전에 속절없이 쏟아지는 우성이 귓전을 때렸다. 소리는 결코 작지 않았지만 짜증스레 느껴지진 않았다. 외출할 필요가 없는 날의 장대비는 마냥 감성적으로 다가오기 마련이다. 흐린 눈가를 부비며 거실로 나오자, 전등도 켜지 않아 컴컴한 가운데 그의 실루엣이 뚜렷이 보였다. 그나마 흰빛이 뿌옇게 스며드는 창가 테이블에 자릴 잡고 앉아 있었다. 한
“항법의 원칙을 잊지 마, 요한.” 선상은 결코 고요할 수 없다. 뱃머리에 부딪혀 흩어지는 파도 소리, 물길과 기후의 변화에 관하여 나누는 항해사들의 회담, 바다 한가운데서 헤매는 이들의 고독을 달래기 위한 노랫말. 시끌벅적한 소란은 곧 그들 삶의 증명이다. 그러나 지금 요한의 머릿속을 엉망진창으로 헤집어 놓는 건 소리가 아닌 냄새였다. 결코 바다 위
거리의 암야. 줄 선 가로등이 희끗희끗 두 사람을 내려다보지만 관리가 신통치 않아 어느 것은 깜빡거리고, 어느 것은 아예 눈꺼풀을 닫고 있다. 세나는 드물게 기분이 좋아 갈지자로 휘청대며 콧노래를 흥얼댄다. 특별히 길한 일이 있었던 건 아니고, 단순히 알코올의 화학 작용이다. 도파민은 현대인의 가장 가깝고도 익숙한 친구니까. 마츠노스케는 한 손을 주머니에
아래에서 성벽 위를 올려다보려면 구름의 모양을 헤아리듯 고개를 한참 들어야 했다. 마침 모래바람이 몰려와 손차양을 하니 그제야 그 위에 서 있는 사람이 보였다. 그는 삭막한 황무지를 굽어봄에도 붉은 강변에 섰을 때와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멀거니 그 얼굴을 바라보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지금 서 있는 이 황야도 언젠가는 피보라가 흩날리는 전장이었
“옳지. 이제 손목을 가볍게 돌리면 된다.” “우와, 이렇게 높이 던져보는 건 처음이야!” “종사님, 저도 알려주세요.” 시장으로 통하는 넓은 거리 한쪽에서 어른 하나와 아이 여럿이 도란대었다. 뛰어난 유리 공예를 취급하는 상인이 어제 막 들어왔다기에 구경할까 싶어 거닐던 협객은 익숙한 음성에 돌연 걸음을 멈추었다. 그 사람이 있었다. 아이들의 손에는
깊은 밤에는 새도 울지 않았다. 하릴없이 원래 조류가 서식하지 않는 행성인지, 지금만 그런 건지 따위를 생각해 본다. 기온은 내내 엄동설한이었고 눈이 소복이 쌓인 땅은 모순적이게도 고향과 흡사했다. 건물 뒤편에 서니 숲이 보였다. 사란은 나무와 나무의 틈새, 어둠으로 메워진 검은 공백들을 주시하며 서 있었다. 조명이 없어 사물의 구분조차 힘들었지만, 근처
“변했네요.” “보면 알 수 있습니까?” “물론이죠. 고향인걸요.” 명백히 전쟁을 목적으로 조선된 함선이 허무를 헤엄치고 있다. 웅대하여 수십 미터 떨어지지 않는 이상 시야에도 못 담을 그 배는, 인공지능만이 적확하게 셀 다량의 무기와 그보다는 한참 모자란 인력을 실었다. 다수의 생명체를 손상 없이 광속으로 전이시킬 수 있는 대 우주 시대에, 개인의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어.” 우리는 따뜻한 레몬티를 한 잔씩 두고 테이블 맞은편에 앉아 있었다. 냉장고에 갖가지 자석으로 세 사람의 가족사진이나 사란의 기사 스크랩이 어지러이 붙어 있었다. 그때의 나는 제정신이 아니었나 보다. 태연자약하게 바람을 피우고 있다고 선언한 것이나 다름없다. 그러나 그만큼 간절했다. 나는 그에게 듣고 싶은 말이 있었다.
그즈음 나는 매일같이 꼭두새벽부터 물가에 앉아 지평선의 기울기를 눈어림했다. 하염없기도, 하릴없기도 한 일이었다. 이제는 묏자리여도 좋겠다 느껴지었던 그곳이 연안인가 해안인가 헤아리기만 하여도 하구의 하루가 다 갔다. 어느 날, 해와 함께 지평선에서 무언가 머리를 내밀었다. 사람이었다. 사람이 아니었다. 희고 푸르른 비늘을 단 것은 무릇 사람이 아닐 테다
입하. 슬슬 춘추복에 대한 불평이 터져 나오며, 봄부터 마음이 맞던 아이들이 재재대며 서로를 알아가고, 그중 몇은 친밀하게 이름을 부르며 이른 여름 방학을 꿈꾸는 때. “운도 지지리 없지. 하필 이토하라한테.” “문 잠갔다고 했잖아!” “잠갔어요! 잠갔다고요. 하~ 씨.” “옥상 못 쓰게 되면 네 탓이다.” ‘이토하라.’ 4월에 전학 온 이자요이 아게
건물도 서 있지 않은 등 뒤로 해가 떠올라 뙤약볕이 그대로 내리쬐는데도 싫지 않았다. 매미 우는소리가 유난히 길고 우렁차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뭇 학생들이 꺼려해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자리에서만 안취할 수 있었다. 종례 후엔 빈번히 교사 뒷편의 조그맣고 새카만 두 눈을 마주하며 다음 날 등교에 대한 다짐을 굳혔다. 담당 학생들은 구석진 사
뭇 인간들에게 이 세상의 끝자락이라 불리는 검은 늪. 저승, 나락, 죄 지은 자의 갈림길, 영혼의 교차로. 그곳은 산 자는 도달할 수 없으며 함부로 들여다볼 수도 없는 금기의 땅일지니. 빛 없는 대지에서 오직 주인 된 자만이 빛남이요 색 없는 대지에서 자식 된 자만이 극채색을 두를 수 있으매, 그 위대한 주인의 이름은…… “헤카테.” “미스틸테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