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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덕쟁이 황자님과 약혼했습니다

만자타입 HL 소설 커미션 작업물

- 약 8일 소요 / 19,467자 / 전문 공개 샘플

- 해리포터 드림: 여캐 C, 남캐 R

- 신청사항: 1만 자, 오마카세, [ 로판 AU 황가의 사생아 R & 적당한 포지션의 C ]

- C의 가문명이자 성씨는 편의상 W로 치환했습니다.


변덕쟁이 황자님과 약혼했습니다

: 황가의 사생아 R X 망해가는 백작가 영애 C

R은 청천벽력 같은 소리에 미간을 꿈틀했다. 평소 품행도 올바르고 표정 관리도 철두철미한 그가 이토록 황제 앞에서 포커페이스를 잃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는 부디 제 귀가 잘못되었길 바라며 황제에게 되물었다.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혹시 방금 무어라 말씀하셨습니까. 그러자 황제가 말했다.

“R, 넌 W 가문의 C 영애와 약혼할 것이다.”

약혼? 이렇게 갑자기 약혼이라니. 원래 같으면 되묻는 일이라면 아주 멍청한 짓이라며 질색했겠지만, R은 이번에도 황제에게 되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갑자기 약혼이라니요.

그 물음에 황제가 푸근하게 웃어 보였다. 너도 슬슬 결혼을 고려할 나이가 되지 않았느냐. 귀족 중엔 태어날 때부터 약혼하는 가문도 있으니, 사실 너도 좀 더 일찌감치 혼처를 맺어줬어야 한다, 하고.

“…….”

제 질문의 저의 따위는 하나도 숙고하지 않은, 완벽한 동문서답이었다. R은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런 아들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황제는 또 덧붙였다.

헌데 내 네가 살아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아는 바람에, 데뷔탕트 또한 늦게 치러주었으니. 이만하면 결혼 문제도 많이 늦게 거론한 것이니라, 하고. C 영애는 몸가짐도 바르고 정숙하기로 흠잡을 데가 없으니, 정도 쌓고 잘 지내보거라, 하고. 네가 영애에게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따라 다음 황제를 뽑는 황태자 시험, 내 그 시험의 점수를 더 줄 수도 있지 않겠느냐고 말이다….

‘허…….’

약혼만 해도 기가 차는데, 웬 듣지도 보지도 못한 가문의 여식과 약혼하라니. R은 당장에라도 따지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애써 본심을 억누르며 황제에게 예의를 갖추어 인사했다. 그리고 방을 나왔다.

그는 본궁 복도를 걸을 때까지도 시종들의 눈을 의식해 평온한 낯을 의식하다가, 궁을 완전히 빠져나와 아무도 없는 정원을 가로지를 때 이르러서야 기어코 분을 토해냈다. 어차피 난 사생아라 황제 자리는 넘겨주지도 않을 거면서, 걸핏하면 점수이니 황태자 시험이니 들먹이는 것 좀 보라고. 설령 내가 가장 높은 점수를 받아 정말 황태자 자리에 책봉된다 한들, 그 황후가 눈꼴 시려서 어디 가만히 있겠느냐고. 황궁엔 필시 피바람이 불 것이라고.

R의 시종은 그런 그의 눈치를 보며 꽁무니를 졸졸 따라갔다. 서자라 그런지 R은 늘 열등감으로 충만했고, 툭하면 화를 내고 가구를 뒤엎으며 행패를 부리고는 했다. 물론 황제가 없는 별궁에서지만 말이다. 그는 R의 노여움을 조금이라도 풀어보고자 조심스레 이야기했다.

“그, 그래도 황자님, 실로 C 영애만큼 몸가짐이 바른 여식은 없는 것이 사실입니다. C 영애로 말씀드릴 것 같으면 난초처럼 아름답고, 학문과 예술에도 뛰어난 재능을 보이며, 마음씨가 고와 영지에서 또한…”

그러나 시종이 제아무리 C을 칭찬한들 이미 기분이 팍 상해버린 R의 귀에 그것이 들어올 리가 있나. R은 되레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고작 그게 다니? 하잘것없다 못해 우스운 수준이잖아.”

그는 이어 이 약혼은 기만이나 다름없다고 중얼거렸다. 황제가 웬일로 저를 부르나 했더니, 대뜸 쓸모없는 약혼 얘기를 꺼낸 것만 해도 열받는데. 하필이면 다른 가문도 아니고 ‘그’ W 가문이라니. W라면 다 망해가는 허울뿐인 백작가가 아닌가. 감히 이 몸과 약혼하는데 고작 가난뱅이 백작가 하나가 혼처의 전부라니?

R은 이건 구색조차도 못 갖춘 최악의 약혼이라고 불평했다. 제가 친자였다면 황제께서 과연 저를 망한 백작가 여식 따위와 결혼을 시키겠느냐고.

R은 방에 다다라 짜증스레 소파에 몸을 기댔다. 그는 어떻게든 이 모욕적이고 조금도 성에 차지 않는 약혼을 뒤엎고 싶었다. 크고 마른 손이 거칠게 미간을 쓸어내렸다. 시종이 안절부절못하며 다시 한번 C의 좋은 면을 어필하고자 입을 열었다.

그러나 그의 아첨이 채 입 밖으로 나오기 전, 잔뜩 날이 선 R이 읊조렸다.

“이만 혼자 있고 싶으니까 나가.”

 

 

***

 

 

R은 억지로 의복을 갖춰 입고 황제와 함께 응접실에서 상대를 기다렸다. 감히 저를 기다리게 하는 상대라니, 생각만 해도 어이가 없었지만 굳이 그게 누구라고 말할 필요는 없었다. 그야 오늘은, 바로 C와의 약혼식을 진행하기로 한 날이었으니까.

‘이건 시간 낭비야. 대체 내가 왜 여기서 이러고 있어야 하는 거지?’

R은 이렇게 제 시간을 허비해야 하는 행위 자체가 매우 불쾌했지만, 황제 앞이라 차마 내색은 하지 못했다. 대신 앞으로 어떻게 약혼을 뒤엎을지 고민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러고 있으니 곧 시종의 목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W 백작과 C 영애 드십니다!”

환하게 쏟아지는 복도의 흰 빛을 등에 업고, 두 인영이 응접실에 들어섰다. R의 시선이 빠르게 C을 훑었다. 과연 듣던 대로 생긴 것은 나쁘지 않았으나, 황제 앞에 차려입고 왔다는 옷이 저게 최선인가 싶을 정도로 그녀의 차림새는 추레했다. 응당 귀족가 여식이라면 한 번 이상 같은 드레스를 입는 일 따윈 없어야 하거늘, 저 여자는 저 드레스를 이런 중요한 자리마다 몇 번씩은 입고 나온 듯했다.

‘다 닳은 치맛자락이며, 빛바랜 옷감이며… 아주 기가 막히는군.’

그래도 그녀의 첫인상이 썩 나쁘지만은 않다는 것은, 아마 그녀가 R이 보아 온 그 어떤 숙녀보다 더 깍듯하고 예의 있는 여자이기 때문일 터였다. 황제와 백작, 그리고 C 사이 형식적인 인사말이 오갔다.

이후로는 R에게 매우 달갑지 않은 시간이 지속되었다. 본론을 꺼내기까지 한참이나 주변부만 맴돌던 대화는 따분하기 짝이 없었고, 그렇게 긴 시간 뒤 밟은 약혼 절차도 R이 원하던 것은 전혀 아닌 까닭이었다.

다만 R의 신분이 사생아이고 C의 사정도 썩 넉넉지만은 않은 터라, 약혼은 다른 귀족들에게 알리지 않고 비밀리에 진행되었다. 오직 그것만이 오늘 만남에서 R이 맘에 들어 한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고 난 뒤에는 황제가 R에게 영애에게 황궁을 소개해 주는 것은 어떻겠느냐고 물었다. 솔직히 R은 C가 닥치고 그냥 빨리 돌아갔으면 했지만, 이번에도 그 빌어먹을 황태자 시험 점수에 발이 묶이는 바람에 억지웃음을 가장하고 황제의 말을 따라야만 했다. 그는 진지하게 반역을 일으키고 싶었으나, 아직은 때도 아닐뿐더러 그를 지지해 줄 세력도 부족했다.

결국, R은 C이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할 만큼, 또한 그녀가 제게 호감을 사기에 충분할 만큼 신사적이고 달콤한 태도로 그날 그녀를 에스코트했다.

그리고 비로소 ‘C의 입에서 먼저 파혼 이야기가 나오게 하겠다’라는 그의 계획을 실행에 옮기기 시작한 것은, 바야흐로 일주일이란 시간이 흐른 뒤였다.

 

 

***

 

 

R은 C 앞으로 익명의 선물을 보내기 시작했다. 그는 제 시종이 아닌 아무도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용병을 고용해 ‘반드시 그녀의 2층 창문에’ 선물을 배달하도록 지시했는데, 그 선물에는 번번이 쥐 사체나 벌레 떼, 저주 인형, 용도를 알 수 없는 괴기한 조각상들이 들어 있었다.

시기가 R과 약혼을 맺은 뒤였으므로, 그가 제아무리 C 앞에서는 착한 얼굴을 연기했다 한들 이쯤이면 그녀도 선물들의 발송인이 그임은 진작 눈치채고 있을 터였다. 비록 심증밖에는 없는 데다, 감히 백작 영애 신분으로 황족인 그에게 선물의 출처를 추궁할 수는 없겠지마는.

한마디로 R은 그런 C의 상황을 이용해 그녀가 먼저 제게서 질려 나가떨어지게 할 작정이었다. 자신은 황궁에 보는 눈도 많은 데다 황제를 거부할 힘도 명분도 없으니, 그녀 스스로 도저히 못 견뎌 먼저 파혼의 뜻을 내비치도록 말이다.

하지만 고작 선물 공세만으로는 그녀를 꺾기가 어려워 보였으므로, R은 그녀가 충분히 겁에 질렸겠다 싶어졌을 즈음 손수 움직이는 수고도 감내하기 시작했다. 그는 어느 날은 언질도 없이 불쑥 그녀를 방문해 불쾌하게 했고, 또 어느 날은 싸구려 차를 내오는 그녀의 시종에게 발을 걸어 넘어지게 해 놓곤 시치미를 떼며 나무라기도 했다.

그리고 C이 가문을 살려 보겠다는 의지 하나로 제게 반항하지 못함을 확신한 뒤에는, 대놓고 그녀를 괴롭히기도 했다. 실수를 가장해 그녀에게 상그리아를 쏟기도, 옷에 거미를 넣기도, 마차를 고장 나게 하거나 매일 밤 부엉이가 창문을 두드려 잠들지 못하게도 하면서 말이다.

한데 그랬더니, 의외로 정면 돌파가 들어왔다.

어김없이 그녀를 괴롭히고자 몰래 황자 궁에 초대한 날, 그녀가 누가 봐도 초췌한 몰골을 하고선 말했다.

“…송구하지만 저는 파혼해드릴 생각이 없습니다.”

R의 눈썹이 움직였다.

“C,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니?”

“계속 저를 괴롭히고 계시지 않는가요. 아무래도 제가 먼저 약혼을 무르길 원하시는 듯한데… 저로서도 약혼 문제만은 물러설 수 없답니다.”

…뭐? 물러설 수가 없어? R은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맹랑한 여자, 그럼 여태껏 제 의도를 충분히 간파하고 있었음에도 입 한 번 벙긋 안 하고 모른 체하고 있었단 소리가 아닌가.

“친애하는 C, 네가 왜 그리 생각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럼 이쪽에서도 끝까지 모르는 척해주마. R은 보란 듯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네 어머니가 지금 네 모습을 좋아하실지 모르겠구나.”

 

움찔.

순간, 그 말 한마디로 C의 표정이 바뀌었다. 무슨 말을 해도 침착하던 그녀의 얼굴에 보기 좋게 금이 갔다. 약간의 침묵 뒤, 그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뭐라고요……?”

하지만 R은 하등 대수롭지 않다는 듯, 부러 더 거만한 태도를 고수하며 제 단정한 손톱만 바라보았다. 그는 말했다.

“W 가도 백작 부인이 살아 있을 적엔 정정했다고 들었는데 말이야.”

“…….”

 

“고작 황실 콩고물이나 받아먹자고 네가 이러고 있는 꼴을 부인이 본다면, 많이 실망스러우시겠어.”

 

짝……!

 

그때, 갑자기 R의 시야가 옆으로 돌아갔다.

부지불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뺨이 얼얼했다. R의 눈이 당장 살인이라도 벌일 기세로 형형하게 빛났다.

“…….”

그 높은 황제도, 신도, 하다못해 황실 교사에게도 맞아본 적이 없는 그였다. 한데 감히 하찮은 계집 따위가 황족의 용안에 손을 대다니? R의 아름다운 얼굴이 사납게 일그러졌다. 그가 C을 천천히 돌아보았다.

“…미쳤구나, C. 네가 감히 황손의 용안에……!”

 

하지만 채 화를 쏟아내기도 전, R은 할 말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그 C가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파혼을 하든 처형을 하든, 마음대로 하십시오.”

 

반짝이는 눈물을 흩날리며, C이 응접실을 박차고 나갔다.

 

 

***

 

 

그 후 R과 C은 단 한 번도 만나지 않았다.

R은 더 이상 C에게 아무런 선물도 초대장도 보내지 않았고, 그렇다고 그녀에게 사서 방문하는 수고도 감수하지 않았다.

하면 C이 저를 폭행했으니 명분도 생겼겠다 당장 파혼을 요구했냐면, 그것도 아니었다. 그냥 뭔가, 뭔가 좀 더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C이 그렇게 떠난 뒤로 내내 마음 한편이 불편하고 화가 났는데, 그 감정을 정확히 정의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R은 감히 백작 영애 따위가 제게 손찌검을 한 것에도 화가 났고, 그런 그녀를 바보같이 그냥 보낸 저 자신에게도 화가 났다. 또, 그렇게 멋대로 돌아갔으면 알아서 설설 기어 돌아올 것이지 여태껏 연락 한 통 없는 C에게도, 이걸 어디다 말할 수 없는 제 처지에도, 짜증 나게 아른거리는 C의 우는 얼굴에도 모두 화가 났다.

R은 C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가 왜 갑자기 성질을 부렸는지도 모르겠고, 그게 설령 다른 시종이 일러준 대로 ‘가족을 건드려서’라고 한들 여전히 그게 뭐 어쨌다는 건가 싶기만 했다.

왜냐하면 가족 일로 따지자면, C보다는 그야말로 화를 내 마땅한 입장이었기 때문이다. 그야 그녀는 백작 부인 하나 잃은 게 전부였고, 아버지 W 백작도 정정했지만, 지금 그는 눈앞에서 부모를 잃은 걸로 모자라 제 편이라곤 하나 없는 황실에서 홀로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분투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쯧.”

R은 혀를 찼다. 마지막으로 본 그녀의 얼굴을 곱씹을 때마다 그의 가슴에는 뜨거운 분노가 치밀어올랐고, 심장 고동은 가쁘게 쿵쿵거렸다. C이 떨어뜨린 눈물이 제 머릿속에 희석되어 이성을 계속해서 혼탁하게 만들고 있는 느낌이었다.

‘이래서야 며칠째 같은 생각만 하고 있는 꼴이잖아. 이건 전혀 효율적이지 않아.’

황실에서는 언제, 누가, 어떤 이유로 황족을 시해할지 모른다. 그게 권력 암투 중이라면 더욱더 그렇다. 그러니 황실에서의 그는 언제나 평정심을 유지하며 냉철해야 하는데, 그녀 때문에 도대체가 이성이란 것을 유지할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한 번은 늘 제 곁을 보필하는 시종에게 이 심정에 대해 털어놓기도 했지만, 그는 주제넘게 ‘후후후, 청춘이군요.’하고 기분 나쁘게 웃기만 할 뿐 별다른 해결책을 제시하지 않았다. R은 그를 해고했다.

결국, 어리버리한 새 시종이 들어오면서 그의 완벽했던 황궁 생활은 더욱 완벽하게 개차반이 되어버렸다. 새 시종은 걸핏하면 물건을 쏟고 가구를 치고 문턱에 걸려 넘어지곤 했으므로, 안 그래도 C 때문에 예민한 R의 심기를 나날이 들쑤시기만 했다.

‘빌어먹을, 도대체가 쓸모 있는 녀석들이 없어!’

그렇게 며칠의 시간이 더 흘렀다.

C가 찾아왔다.

 

 

***

 

 

R은 자신과 약혼하던 날과 똑같은 드레스를 입고 제 앞에 앉아 있는 C을 바라보았다.

솔직히 처음 그녀가 방문하겠다는 의사를 내비쳤을 때는 ‘그럼 그렇지. 네가 사과하지 않고 배길 리가 없지.’ 싶었지만, 막상 그녀를 응접실에 들여놓고 보니 그 태도는 진솔한 사과와는 사뭇 거리가 먼 듯했다.

얌전히 홍차를 한 모금 들이마신 뒤에, C이 말했다.

 

“파혼해드릴게요.”

 

…….

파혼?

R은 동요를 감추기 위해 절묘한 타이밍에 눈을 한 번 깜빡였다. 그는 제 귀를 의심했다.

‘싹싹 빌러 온 줄 알았더니, 파혼이라고…?’

그는 잠시간 말이 없었다. 그녀의 입에서 먼저 파혼 이야기가 나오는 것이야말로 그가 바라 마지않던 것이긴 했지만, 막상 또 무슨 짓을 해도 버티던 그녀가 이토록 담담한 어조로 제게 혼약을 엎잔 이야기를 하니 불쑥 괘씸한 마음이 앞선 까닭이었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 여자는 나한테 무릎을 꿇고 빌어도 모자랄 판에, 이제 와서 먼저 파혼 장을 내밀겠다고? 진짜? 하찮은 백작 영애 따위가, 이 R에게…? 네깟 것 인생에 이만큼 과분한 혼처가 어디 있다고? 머리가 어떻게 돌아버린 거 아니야?

“…….”

R의 미간이 얕게 파였다가 원래대로 되돌아왔다. 잘했다고, 이대로 파혼을 수락하기만 하면 된다고 타이르는 이성과 반하게 그는 다른 말을 내뱉었다.

“……어이가 없구나, C. 말의 무게는 무거운 법이라고 배우지 않았니? 한 번 내뱉은 말은 주워 담을 수 없음을 알고 있을 텐데.”

“파혼이야말로 황자님께서 바라시던 것이었잖아요. 해드릴게요, 까짓것.”

그러나, 기다렸다는 듯 C이 바로 제 말을 받아쳐 왔다. 꿈틀. 기어코 R의 목에 힘줄이 섰다.

이런 그림은 그가 바랐던 것이 아니었다. C은 지금 저 스스로 황족과 파혼하여 결혼 시장에서 흠집이 있는 여자가 되겠다고 말하고 있었다. 다른 귀족들이 지금은 저와 C의 약혼 사실을 모른다 해도, 황궁의 누군가 입만 연다면 소문이 퍼지는 것은 시간문제인 법. 그것을 C이 모를 리는 없었다.

“하.”

R은 헛웃음을 뱉어냈다. 그저 그런 영애 주제에 감히 날 먼저 차겠다고….

“나와 파혼하면 네 시장 가치는 아예 없어질 텐데도? 넌 결혼 지참금도 받지 못할 거고, 황실에 미운털이 박히게 될 거야. 귀족들도 널 멀리할 테니 네 가문은 서서히 멸문할 수밖에 없겠지.”

R은 자신과 헤어진다면 C이 얼마나 많은 패널티를 떠안게 될지 늘어놓았다. 그 스스로도 왜 이러는지 이해되지 않으면서도, 그저 C이 이대로 저를 먼저 차 버리고 떠난다면 그때는 처음 계획이 실패했을 때보다 더 불쾌할 것만 같았다. R은 반은 제 감정을 모른 채, 또 반은 자존심을 세우느라 파혼은 안 된다는 말만은 죽어도 하지 못한 채 또 C의 입을 통해 일을 바로잡고자 했다.

“……멸문, 이라고요….”

그리고 그런 그의 가스라이팅은 실로 꽤 효력 있는 듯했다.

C은 그래도 자신이 작위를 물려받으면 어떻게든 가문만은 살려내겠다며 원하시는 대로 파혼해드리겠다고 강경한 태도를 유지했으나, R이 뒷조사로 알고 있는 W 가의 내밀한 재정 상태와 뒷사정, 하나 남은 아버지에 대한 것들까지 들먹이자 머뭇거리며 선뜻 더 주장을 펼치지 못했다.

더욱이 C의 파혼 이야기는 R의 ‘내가 황실의 적자였어도 감히 네가 내 안전에서 먼저 파혼 이야기를 꺼냈겠느냐’라는 한마디에 일축될 수밖에 없었다.

R이 적자가 아님은 사실이지만, 그리 말하는 그 또한 엄연한 황족이었기에 그녀로서는 이처럼 황족과의 약속을 먼저 저버리는 발언을 하는 것만으로도 죄인이 될 수 있는 까닭이었다.

결국, C은 R의 언변에 휘말려 감히 제가 그럴 리 없지 않냐며 그것은 신하의 불충이라고 변명하는 데 가진 기력을 모조리 소모해 버렸다. 그날 파혼 이야기는 무효로 되돌아갔고, R의 방에서 있었던 모든 대화도 황제와 W 백작조차 모르는 두 사람만의 비밀에 부쳐졌다.

그 누구도 얻은 것이 없는 하루였다.

 

 

***

 

 

C은 저도 모르게 입술을 잘근거렸다. R을 만난 뒤로 생긴 습관이었다. 그녀는 불안해하며 방안을 서성였다. 막연히 앞으로 어떡하면 좋지, 하는 걱정이 앞섰다. R은 참 알기 어려운 도련님이었다. 언제는 파혼을 바라는 듯 저를 죽일 듯이 괴롭히질 않나, 그래서 못내 파혼 얘기를 꺼냈더니 또 저를 위해주기라도 하는 것처럼 이상한 말들로 약혼 관계를 되돌려 놓지를 않나.

‘이해하기 어려운 사람이야.’

게다가 오늘은 그와 그렇게 헤어진 지 어느덧 닷새째였으니, 이상하리만큼 조용한 창가를 보며 그녀가 더 불안해할 만도 했다.

그야 닷새 동안 평소처럼 제 창문으로 배달됐어야 할 끔찍한 선물들은 하나도 오지 않았고, R의 초대장 또한 도착하지 않았으매, 마차 바퀴가 빠지거나 말들이 쥐 때문에 난동을 피우는 일도, 혹은 정원이 망가지는 일도, 밤에 동물이 창가에서 우는 일도 그 무엇도 그녀에게 벌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C은 불안한 평화 속에서 나날이 입술을 깨물며 시간을 보냈다.

괜스레 창가에 세 번은 더 시선을 주고, 여섯 번은 더 대문을 내다보고, 다섯 번은 더 풋맨의 걸음 소리에 귀를 쫑긋하면서 말이다.

그렇게 온 신경이 곤두선 채, 차라리 R의 익숙한 괴롭힘만을 기다리던 어느 날이었다.

 

가면무도회 초대장이 도착했다.

 

체르멘토 공작가의 풋맨에게서 초대장을 받는 순간, 그가 가문 브로치를 달고 있지 않았더라면 C은 이번에야말로 R이 어떤 꿍꿍이를 벌인 줄 알고 착각했을 것이었다.

아니면, 실로 그사이 체르멘토 공작과 어떤 친분을 쌓아 저를 골탕 먹이기 위해 수를 쓴 것일지도 모를 일이었고.

하지만 긴장하며 펼쳐 본 초대장에는 다분히 형식적인, 모두에게 똑같이 필사해 보낸 듯한 문구가 적혀 있었다. 오는 5월 24일, 유서 깊은 체르멘토 저택의 건설 140주년을 맞이해 저녁에 가면무도회를 개최할 예정이라고. 부디 귀빈 여러분께서 많이 참여해 자리를 빛내주시길 바란다고.

보통 때라면 다 망해가는 백작가에 잘 보일 귀족 집안은 없었으므로 C에게 초대장이 도착하는 일은 거의 없다시피 했지만, 이번에는 그 공작가의 규모가 규모인지라 웬만한 귀족은 모두 초대한 듯싶었다.

“이런, 어떡하면 좋지….”

그러나 C은 이런 초대장을 받아도 마냥 기뻐할 수가 없었다. 가진 드레스라곤 전부 반짝이는 보석이나 어여쁜 꽃 같은 건 없는 수수한 것뿐인지라, 화려한 자리에 입고 갈 옷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무도회에 어떻게 참석하면 좋을지, 혹은 어떻게 불참하면 좋을지 고민했다.

첫째는 이대로 낡은 옷을 입고 가자니 제 차림새가 입방아에 오르내려 W 가문과 아버지께 수치가 될 수 있기 때문이었고, 둘째는 가면을 쓰는 무도회의 의미가 무색하게 빈곤한 제 차림새에 모두가 저를 알아볼 것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또, 초대장을 거절하자니 마땅한 명분이 없어. 어떻게 일개 백작이 공작가의 140주년 파티를 거절하겠어.’

C은 한숨을 포옥 내쉬었다. 그렇다고 없는 살림에 새 드레스를 장만할 수도 없고, 여러모로 난관인 상황이었다. 그때였다.

“W 소백작님!”

하녀장이 돌연 문밖에서 노크하며 C을 불렀다. 깜짝이야. 응, 들어와. C이 대답하자 그녀가 벌컥 문을 열고 성큼성큼 걸어들어왔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뒤로, 시종 둘도 무언가 큼지막한 상자를 든 채 따라 들어왔다.

“그게 뭐야…?”

C이 그에 의문을 표하자, 하녀장이 크게 콧김을 내뿜으며 대답했다.

“황실에서 온 물건입니다. 제3 황자님께서 보내셨다더군요.”

황자? C의 눈이 동그래졌다. 3황자라면 제 약혼자, R이었다.

“이걸 정말… 황자님께서 보내신 게 맞아?”

C은 이해할 수 없었다.

“예.”

그도 그럴 것이, 지금까지 선물상자는 쭉 아버지와 다른 시종들 몰래, 익명으로 제 창문에 발송되지 않았던가.

그 어디에도 황실의 문장이나 R의 서명 같은 것은 찾아볼 수 없었지만, C은 그게 R의 계략임을 어렵지 않게 알아챘었다. 한데 그런 그가 이렇게 정문을 통해서, 그것도 백작가 시종들이 모두 보란 듯이 선물을 보내오다니? 약혼은 비밀사항이 아니었던가.

‘파혼하지 않기로 했으니 약혼 사실이 알려져도 괜찮은 건가…?’

응당 제 시종들이야 어디 함부로 말을 옮기지 않겠지만, 이건 뭔가 평소의 R답지 않았다. 불안한 예감이 들었다. C은 잠시 나가 달라는 말과 함께, 시종들을 모두 밖으로 내보냈다.

‘그래도 선물은 혼자 열어봐야 해.’

그들이 보는 앞에서 그들이 모시는 소백작이 황자에게 벌레나 쥐 사체로 가득한 선물을 받는다는 소문이 퍼진다면, 백작가의 권위는 지금보다 더 아래로 떨어지고 말 것이기 때문이었다. 마음씨 약한 일부 하인들은 주인을 향한 괴롭힘에 덩달아 상처를 받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R 황자님, 대체 무슨 생각이세요….”

꿀꺽. C은 마른침을 삼켰다. 평소보다 상자 크기가 큰 걸 보아하니, 이번에는 쥐가 아니라 고양이나 강아지의 사체라도 들어 있을지 몰랐다. 놀라지 마. 이번에도 몰래 영지 밖에 나가서 묻어주면 되는 거야. 괜찮아, C. 이 안에 무엇이 들어 있더라도 놀라 비명을 지르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그녀는 조심스레 리본을 풀었다.

옅은 향수 냄새가 번지고, 상자가 열렸다.

 

“헉……!”

 

하지만 C이 마주한 것은, 끔찍한 사체나 징그러운 벌레 떼가 아니었다. 안에 든 것은 눈이 부시게 화려한 드레스와 장신구, 반 가면, 구두 한 켤레였다. C은 눈을 깜빡였다. 그러고도 이 광경을 믿을 수 없어서, 제 볼도 꼬집어 보았다. 이어 문을 열고 밖에 서 있는 하녀에게까지 되물었다.

“저기, 정말 이걸 황자님께서 보내셨다고……?”

“엇, 네! 황자님의 시종이 마차를 타고 와서 주고 갔답니다.”

“……?”

C의 고개가 기울어졌다.

그녀를 따라 하녀의 고개도 쭈우욱 기울어졌다.

“저어, 소백작님, 무슨 문제라도…?”

아차. 그제야 C이 화들짝 놀라며 자세를 바로 했다. 그녀는 아무것도 아니라며 황급히 손사래를 친 뒤, 조심스레 방문을 닫았다.

‘그럼 정말 황자, 그 황자님이 드레스를 보냈다고…?’

C은 약간 멍해진 상태로 조심조심 상자 안을 살피기 시작했다. 설령 이걸 정말 R 황자가 보냈다고 해도, 순순히 받았다가는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몰랐다. 오히려 이 또한 하나의 함정일 수 있었다. C은 행여 옷감이 상하지 않게, 상자에 손톱이 스치지 않게 조심하며 내용물을 꺼내 보았다.

그때, 팔랑. 편지 한 장이 떨어졌다.

C은 곧바로 편지를 주워 들어 내용을 살폈다. 어쩌면 이 편지에 함정의 단서가 적혀 있을지도 몰랐다. 그녀는 황자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야만 했다.

“…….”

하지만 편지에는 생전 처음 보는 수려한 필체로, 더없이 평범한, 그러니까 약혼자 사이에 충분히 주고받을 만한 내용의 글들만이 적혀 있었다.

 

[친애하는 약혼자 C에게. 너도 체르멘토 공작부인의 가면무도회 초대장을 받았을 거라고 믿어. 아니라고 시치미 뗄 생각은 하지 말렴. 내가 다 미리 확인해 두었거든. 그러니 무도회에 올 때, 내가 보낸 드레스를 입고 와. 다른 마음은 없으니 염려라면 말고. 그저 네가 지금쯤 초대장으로 곤란해하고 있을 걸 알아서 선물했을 뿐이니 말이야. 약혼자로서 이 정도는 해야 하지 않겠니. 그럼, 무도회에서 보자. R이.]

 

편지를 다 읽자마자, C은 이번에야말로 눈을 비빌 수밖에 없었다.

파혼하러 간 날 보였던 언행만 해도 심히 의심스러운데, 그동안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었길래 그가 제게 이런 정상적인 편지를 보낸 건지 알 수 없었다. 어쩌면 정말로, 정말로 이 또한 함정인지도 몰랐다. 이걸 입고 무도회에 나간다면 그가 또 괴롭히거나, 황족의 이름으로 이상한 하명이라도 할지 모를 일이었다.

“…이상해.”

C은 편지에 얼굴을 파묻었다. 이 모든 게 의심스러운데도, 약혼 첫날 가식처럼 다정한 모습을 하는 그가 조금도 익숙지 않은데도.

“이건 진짜 이상해…….”

 

그런데도 조금, 왜인지 아주 조금 가슴이 울렁인 것도 같았다.

 

 

***

 

 

C은 R이 선물한 드레스를 입고 무도회에 참석했다. 제 처지 어디 못 간다고, 멀쩡히 예쁜 옷을 입고 와 줘도 일부 귀족들은 저를 알아보고 수군댔지만 그녀는 괘념치 않았다. 단 하나, 이 옷을 R에게 받았다는 것만 빼면 오늘 그녀가 남들에게 책잡힐 부분은 단 한 군데도 없기 때문이었다.

‘역시 기분이 이상해….’

그런데 이처럼 그가 사준 옷을 입고 오랜만에 호화로운 파티에 와 있자니, 왜인지 애처럼 가슴이 두근거렸다. 반은 지금 들고 있는 샴페인 탓인 것 같기도 했고, 반은 파티의 분위기 탓인 것 같기도 했다.

또 한편으로는, 갑자기 변한 R의 태도 탓인 듯싶기도 했다.

 

“자,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신사 숙녀 여러분!”

 

그때, 체르멘토 공작이 단장에 섰다.

꽤 나이 들었는데도 훤칠한 키와 외모를 가진 그가 번쩍이는 샹들리에 불빛을 한 몸에 받으며 무도회의 개막을 알렸다. 박수갈채가 터져 나오고, 차례대로 주최 소개와 이 무도회의 목적에 대한 언급, 소수 귀빈의 축하 인사가 흘러 지나갔다.

“그럼, 모두 140년 역사가 담긴 체르멘토 저택에서의 하룻밤을 즐겨 주십시오!”

이윽고 음악이 울려 퍼지고, 무도회가 본격적으로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많은 남녀가 서로 눈빛을 교환하고 춤 신청을 주고받는 가운데, C은 인파 속에서 가장 먼저 R을 찾아 나서기로 결심했다. 만일 이 뒤에 다른 시련이 기다리고 있다 할지라도, 모두 함정이었다 할지라도 자신을 위해준 데 대한 감사 인사만은 반드시 해야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C이 한참 동안 주변을 둘러보아도 R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제아무리 또래 여성들보다 키가 큰 그녀라지만 훌륭하게 성장한 영식들의 키는 그녀를 웃돌았으니, 더욱이 가면을 쓴 남성들 중에서 R을 찾기란 유독 어려운 과제여서인 듯했다.

이후로도 C은 R이 평소 입고 다녔던 옷 취향을 떠올리며 비슷한 차림의 영식을 찾기 위해 애썼으나, 딱히 소득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잠시 쉬었다가 아직 돌아보지 않은 바깥 정원을 살펴봐야겠다고 생각한 찰나였다.

 

“여기 있었군요, 영애!”

 

확…! 갑자기 어떤 남자가 C의 팔을 끌어당겼다. C은 졸지에 보랏빛 커튼 사이로 빨려 들어가 그의 품에 안기고 말았다. 누군가 테라스에서 지켜보고 있다가 저를 당긴 것이었다. 그녀는 크게 당황하며 남자의 품에서 벗어나려 했다.

“저, 영식, 누구신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장난은─”

“W 영애, 맞지요? 역시 내 눈은 못 속인다니까!”

하지만 남자가 말을 가로막고 외려 더 팔을 끌어당기면서, C은 다시금 그의 품에 파묻힐 수밖에 없었다. 콕 집어 ‘W 영애’라니, 가면을 쓰고도 자신을 잘도 알아봤다고 생각했다. 이 향수 냄새, 덩치, 머리 색까지. 어느 모로 보나 R 황자는 전혀 아닌데. 곤란했다. 그녀는 더듬더듬 말을 이어갔다.

“저어, 영식. 외람되오나 저는 파티에 잘 참석하지 않는지라… 영식께서 누구이신지 잘 알지 못합니다. 그러니 우선은, 이것 좀 놔, 놔 주시면….”

그러나 남자는 전혀 말을 듣지 않는 인물이었다. 그가 누가 들어도 흥분감 서린 어투로 C의 귓가에 속삭였다.

“하하… 이거 섭섭합니다, 영애. 저는 전부터 영애를 지켜봐 왔는걸요. 예, 안 그래도 집 밖으로 잘 나오지 않으셔서 만나기가 무척 힘들었답니다. 줄곧, 줄곧 지켜봐 왔는데….”

…하아. 그의 숨결이 C의 솜털을 훑었다.

“……!!”

그 노골적인 행위에, C은 소스라치며 남자를 뿌리쳤다. 이제 보니 술 냄새도 꽤 풍기는 것이, 무도회 시작 전부터 어디서 와인이라도 진탕 마시고 온 남자인 것만 같았다.

“아, 저, 그게…….”

C의 낯빛이 희게 질렸다. 감히 체르멘토 공작가의 무도회에서 이토록 무례하게 저를 잡아끌고, 또 술에 취한 채 들어온 남성이라니. 어디로 튈지 예상하기 힘든 타입 같았다. 이런 사람은 괜히 함부로 자극해서는 안 된다. 그녀는 뒤늦게 변명을 늘어놓았다.

“영식, 일부러 뿌리친 것은 아닙니다. 그저 조금 놀라서…….”

저를 빤히 내려다보는 녹빛 시선을 피하며, 그녀는 테라스 난간을 등진 채 천천히 회장의 커튼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남자의 시선이 꼭 어디까지 가나 보자는 듯 여유롭게 저를 따라왔다. 그 눈빛이 더욱 소름끼치고 불안해서, C은 서둘러 그에게 인사를 건넸다.

“여, 영식, 그럼 만남 즐거웠습니다. 저는 일행이 있어서 이만… 꺅……!”

하지만 남자가 곧바로 허리를 낚아채면서, C의 마른 몸은 완전히 그와 맞붙게 되었다.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그가 제 말은 모조리 무시한 채 속삭였다.

“영애, 나와 결혼합시다.”

“뭐, 뭐라고요…?”

“지금껏 이 제국의 모든 여인을 지켜봐 왔지만, 당신만큼 정숙한 여자는 없었어요. 당신은 완벽히 내 이상형입니다!”

“영, 저, 영식. 자, 잠시만, 이게 대체 무슨….”

“C 영애! 그대의 사정은 잘 알고 있습니다. 난 돈도 많으니 내가 주는 결혼 지참금이면 당신 가문도 안전할 거예요. 매달 저택에 생활비도 부치도록 하죠. 어떻습니까? 이만하면 남는 장사라고 생각하는데….”

“아니, 저기. 저기요 영식. 저기요! 이건 아니지 않습니까?”

무례해도 너무 무례해서 화도 안 나고 황당할 지경이었다. C은 그의 품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열심히 몸을 비틀며 두 손으로는 그를 밀어냈다. 세상에 무슨 이런 난폭한 사람이 다 있단 말인가.

저열하게 추근대는 것도 그렇다 치고, 멋대로 큰소리로 제 이름을 부른 것도 그렇다 치고. 그다음에는 면전에서 제 가정사에 대한 모욕이라니, 이건 지나쳐도 한참 지나쳤다. C은 저를 놓아주지 않는 남자의 어깨를 퍽퍽 치기 시작했다.

“이것 좀 놓으세요, 영식. 공작가에서 이런 모습은 좋지 않습니다…!”

그러나 남자는 조금도 타격이 없는지, 능글맞게 눈웃음만 지어 보일 따름이었다. 그가 도리어 자세를 틀어 C이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그녀를 난간에 기대었다. 그의 너른 등이 회장으로 향하는 퇴로를 막은 셈이었다. C은 이 남자가 어떤 귀족인지 몰라 함부로 더 손을 댈 수도, 그렇다고 힘으로 밀고 나갈 수도 없는 처지가 되었다. 혼란이 점점 더 빠르게 증식하고, 그녀의 가슴이 공포심으로 가득 차오르던 순간이었다.

 

“지금 뭐 하는 거지?”

 

확…!

 

돌연 회장의 불빛 속에서 뻗어 나온 손이 남자의 어깨를 틀어쥐고 뒤로 당겼다.

그와 동시에, 익숙한 인영이 테라스로 걸어 들어왔다. 검붉은 반 가면을 쓰고 있어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R 황자였다. 그가 평소의 나긋하고 장난스럽던 목소리는 온데간데없이 싸늘한 어투로 말했다.

“지금 뭐 하는 거냐고 물었어.”

그리 밉고 원망스럽기만 하던 R이 지금 이 순간만큼은 너무나 반가웠다. C은 당장에라도 R에게 달려가고자 몸을 움직였다. 하지만 남자가 제 손목을 꽉 붙들고 놔주지 않았다. C의 몸이 가로막혔다. 남자가 말했다.

“허, 이보시오! 내가 무얼 하든 무슨 상관이오? 그대가 누군진 몰라도, 이렇게 남의 시간을 멋대로 방해할 자격은 없는 법입니다. 매너가 신사를 만드는 법인데, 영식께선 아직 신사가 덜 되신 듯하군요.”

설마하니 그가 R에게까지 막나갈 줄은 몰랐다. C은 그의 무식함에 경악했다. 그는 지금 제 목숨이 두 개라도 되는 것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하하….”

아니나 다를까, R이 얼음장 같은 목소리로 쏘아붙였다.

“감히 내 앞에서 매너를 운운해?”

움찔.

그의 서느런 음성에 남자가 미세하게 움직였다. 아무래도 R 특유의 기세가 남자를 겁먹게 한 모양이었다. 남자는 행여 눈앞의 인물이 자신보다 높은 귀족이면 어떡하나 뒤늦은 고민이라도 하는 듯, 잠시간 말이 없었다.

“…매, 매, 매너 있는 신사라면 이렇게 사람을 불쑥 당기지는 않는 법이오!”

“그럼 네가 그 영애를 잡아당긴 것은 괜찮고?”

“그… 아, 아니, 대체 당신이 무슨 상관이랍니까? 당연히 괜찮고 말고요! 우린 결혼할 사이입니다!! 나, 남편이 아내 손 좀 잡는 것쯤이야, 무어 대수라고….”

“…하, 아내?”

R이 기가 찬다는 듯 코웃음을 치며 모로 고개를 털었다. 이어 그의 섬뜩한 안광이 바로 남자에게 되돌아와 꽂혔다.

 

“개소리 한번 참신하구나. 내 약혼자가 누구와 결혼을 해?”

 

“야, 약혼……?”

물론 R과 C의 약혼은 비밀리에 진행되었기에, 아직은 이에 대해 아는 귀족이 한 명도 없었다. 남자는 R의 무서울 만큼 차가운 눈빛에 움찔했지만, R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는지 되레 당신이야말로 무슨 말이냐고 큰소리를 쳤다.

“…하, 하하, 그쪽이야말로 우습군. 쭉 지켜봐 왔지만 내 피앙세에게 남자 같은 건 없었습니다. 질 나쁜 거짓말을 하는 것은 당신이 아닙니까? 보세요! 여기 약지도 비어 있는 그녀가 어찌 당신 같은 무뢰한과 약혼을……!!”

그러나 어디서 굴러먹다 왔는지도 모를 남자가, 또라이 중에서도 상또라이인 R 황자를 이길 수 있을 리가. R의 눈이 더욱 섬찟하게 빛났다.

“무뢰한? 영식, 방금 그 말 책임질 수 있나?”

그의 거미 같은 손이 가면 위로 올라갔다. 남자는 이번에도 주제넘게 반박부터 하려 했으나,

“하! 당연하지요. 이보세요, 당신이야말로 방금 그 말에─”

 

달칵.

 

“허억……!!”

R이 가면을 벗어버리자, 얼굴빛이 새파랗게 변해서는 C을 꽉 붙들고 있던 손을 놓아버릴 수밖에 없었다.

“……화, 화, 황자님.”

삽시간에 공기가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남자는 경련하는 입꼬리를 가까스로 말아 올렸다. 하, 하, 하하. 그가 어색하기 짝이 없게 웃었다.

R이 아무 말이 없었으므로, 남자는 땀이 나는 듯 연신 양손만 바지춤에 죽죽 문질렀다. 그러고도 한참이나 눈치를 보며 주춤주춤 게걸음을 하다가, 못내 꽁지가 빠지게 도망쳤다.

그는 R에게 자비를 구걸하거나 최소한의 변명을 해볼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예로부터 귀족들이 가장 무서워하는 것은 황족이라더니, 비열하게도 그는 제가 반항할 때는 들은 체도 하지 않다가 저보다 더 큰 권력자가 나타나자 그제야 뭔가 잘못됐다는 판단이 선 모양이었다.

“…….”

그래도 일단은 일이 해결됐으니 다행이었다. C은 아직도 잘게 떨리는 손을 꾸욱 말아 쥐곤 애써 미소 지었다. 그녀는 R에게 속삭였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황자님.”

“…….”

하지만 R은 이 상황이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일차로 그 원인은 멋대로 제 것에 손을 댄 사내새끼 때문이었고, 이차로는 C의 떨리는 손, 그리고 그녀의 가느다란 손목에 생긴 새빨간 자국 때문이었다.

나아가서는, 무서우면 무섭다고 솔직하게 이야기하든가, 제가 왔는데도 조금도 의지하지 않고 여전히 감정을 숨기기에만 급급한 그녀의 모습 때문에 더 짜증이 솟구치기도 했다. R은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혹시 영애는 어디가 좀 모자라나?”

그 신경질적인 어조에, 좀 전까지 욕을 본 C이 지레 놀라 반쯤 울 듯한 얼굴로 R을 올려다보았다. R은 한숨을 한 번 내쉬고는 목소리를 조금 누그러뜨려 이야기했다.

“C, 그럴 땐 소리를 질러서라도 주변에 도움을 요청해야지. 너 혼자 누굴 상대하겠다고 저 덩치랑 이러고 있었던 건데?”

“…….”

“내가 발견하지 못했다면 어쩔 뻔했어?”

안 그래도 창백한 C의 안색이 더 파리해졌다. 그녀는 가슴 앞에 쥐었던 두 손조차 공손히 아래로 내린 채, 파들파들 떨며 R에게 꺼져갈 듯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송구합니다. 앞으로 황자님꼐 누가 되는 일이 없도록 앞으로는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모습에 R은 외려 더 미칠 노릇이었다. 하, 이거 봐. 또 거리 두면서 격식체로 나오는 거. R은 여전히 화가 난 채 거칠게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는 제가 왜 이렇게 화를 내는지 저 스스로도 잘 모르겠다는 듯, 잠시 답답한 심정으로 C을 내려다보다 또 마른세수를 했다. 그가 피곤하다는 투로 읊조렸다.

 

“너 때문에 방금 약혼 사실을 까발린 건 알아?”

 

늘 안광이 없던 C의 그늘진 눈에 순간 빛이 반사됐다. 방금 말이 그녀로 하여금 퍼뜩 정신을 차리게 한 모양이었다. 흔들리는 잿빛 눈이 R을 올려다보았다. …그, 그럼 어떡하죠. 그녀의 말투가 한결 느슨해져 되돌아왔다.

R은 그런 그녀가 진짜 짜증 난다는 듯이, 또 반쯤은 가소롭다는 듯이 헛웃음을 뱉어냈다. 그걸 왜 나한테 물어. 진작 의지하랄 땐 하지도 않고선, 넌 왜 내가 뭐라고 할 때만…. 그의 시선이 생각보다 살갗이 훤히 드러나는 C의 차림새를 훑었다.

“…어떡하긴 뭘 어떡하니.”

하나하나 눈에 밟히는 거추장스러운 머리카락이며, 거슬리게 살랑거리는 몸짓이며. 누가 그런 눈으로 올려봐도 좋다고 했다고, 또 감히 황족을 그런 토끼 같은 눈으로 뚫어지게 쳐다보고…. 눈 안 깔지, 진짜.

“하.”

R은 체념 섞인 한숨을 토해냈다. 펄럭. 그는 재킷을 벗어 그녀의 어깨에 둘러 주었다. 그녀의 살갗에 손끝이 스치자 괜히 얼굴에 열이 올랐다.

원인을 알 수 없게 심장이 또 쿵쿵 뛰기 시작했다. 그는 아직껏 제 대답만 바라며 제 입술에 시선이 꽂혀 있는 C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시선도 자연스레 아래로 타고 내려가 C의 반짝이는 입술을 향했다.

“…….”

그는 난생처음 불쾌한 갈증을 느꼈다. 갈라진 목소리가 입술 새를 비집고 흘러내렸다.

 

“…내가 사준 드레스 입고, 내가 사준 구두 신고서 다른 새끼랑 바람피울 정신 있으면, 약혼자가 어떡할지도 예상했어야 하는 거 아닌가?”

 

“그게 무슨─”

일순, R의 팔이 C의 허리를 화악 끌어안았다. C의 눈이 더욱 커지고, R의 손이 이번에는 그녀의 가면을 부드럽게 벗겼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채 이해하기도 전에, 말캉한 입술이 그녀의 입술에 와 닿았다.

“흡……!”

가면이 바닥에 떨어졌다.

R의 뜨거운 혀가 곧장 C의 입술을 벌리고 들어왔다. 그의 숨결에서 번진 열기가 귓전에서부터 사르르 녹아내려 온 얼굴을 홧홧하게 달구었다. R이 C의 손을 깍지 껴 당기고 그에게 의지하도록 가슴팍 위로 인도했다. C의 손 아래서 그의 심장 고동이 뛰었다.

질컥거리는 소음이 머릿속을 녹진녹진하게 녹여 버렸다. C의 손에 차츰 힘이 들어가고, 그녀의 손안에서 R의 셔츠가 구겨질 즈음,

 

─뚜벅.

 

누군가의 발소리가 들려왔다.

 

발소리는 그대로 점점 두 사람이 있는 테라스로 가까워졌다. 소리가 선명해질수록 C의 심박수도 기하급수적으로 빨라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이번에도 어떡하냐는 듯 R의 셔츠를 쥔 손만 꼼지락거렸다. 황자님, 이러다 들켜요…!

하지만 R은 C의 소심한 움직임을 하나도 개의치 않았다. 꿈쩍도 하지 않고 C의 타액만 갈구하는 것을 보아, 아마 그녀를 놓아줄 생각이 전혀 없는 듯했다.

“읍, 흐읍…….”

R의 손이 C의 등허리를 더욱 단단히 받치고, 몸을 품 안에 바짝 밀착시켰다. C의 가슴이 그의 가슴팍에 짓눌려 부풀고, 풍성한 드레스가 움찔거리는 미동을 따라 작게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냈다. R의 손이 거미처럼 더듬더듬 아래로 타고 내려가 C의 등에 달린 드레스 매듭을 스쳤다.

C은 어쩔 줄 몰라 하면서도 R이 주는 타액을 모범생처럼 받아 마셨다. 꽉 쥔 그녀의 손마디가 발그스름하게 물들고, 열이 차오른 눈가에는 눈물이 맺혔다.

밖의 발소리가 테라스에 거의 근접했다.

 

C의 호흡이 불안과 흥분으로 빠르게 가팔라지던 그때,

 

화악.

커튼이 걷혔다.

 

회장의 찬란한 불빛이 가면을 쓰지 않은 두 남녀를 비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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