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미션 전문 샘플] 밤의 이야기
장르 미공개 드림 - NCP 일상
커미션 안내:
드림/드림컾 샘플:
인물: 2인(기본)
작업기간: 2주(기본)
글자 수: 4,735(4,500자 신청)
신청 타입: C. 키워드
밤의 이야기
w. 목화
흡혈귀가 된 R의 첫 기억은 맨손으로 제 부모를 찢어 죽이던 순간이었다. 빈 술병이 바닥을 굴러다니고, 먼지와 쓰레기가 널브러진 허름하고 좁은 집. 유리창이랄 것도 없어 뻥 뚫린 창문으로 들어오는 달빛은 그 날따라 눈부셨고, 피범벅이 된 제 손에 닿는 빛이 마치 태양빛이라도 된 것처럼 따스했다. 그토록 바래마지않았던 구원, 뭐 그런 걸 받은 것 같기도 했으니.
알코올에 절여질 대로 절여졌던 R의 부모는 비쩍 말라비틀어진 팔로 R의 앞을 가로막고 싸구려 안주로 부른 뚱뚱한 아랫배를 들이밀며 R를 위협하기도 해보았다. 물론 그래봤자, R의 인기척에 자다 깬 알코올 중독자들의 마지막 발악이었지만.
그들의 어린 딸은 다 낡아빠진 소파와 삐걱거리는 작은 간이침대에 누운 제 부모를 오도카니 서서 내려다볼 때까지만 해도 두려움과 긴장감으로 눈앞이 흐렸고, 사지를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벌벌 떨었다. 각인된 공포라는 것이 그랬다. 아무리 책과 상상 속 세계로 도피해보았자, 이제 막 10대 초반에 들어선 아이의 세계는 부모가 전부일 수밖에 없었으니까.
그러나 그들의 갈기갈기 찢어진 몸과 그곳으로부터 미친 듯이 허공으로 솟아오르는 붉은 분수를 보며, R는 한 가지 깨달음을 얻었다. 하루하루 내 숨통을 옥죄던 공포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구나. 지금 이 순간부터 나는 자유이고, 이 지긋지긋한 빈민가의 미친 부모와 살지 않아도 되는구나.
‘……그리고, 난 이제부터 혼자구나.’
어제의 제가 봤다면 기겁을 하고 경기를 일으킬만한 광경을 눈앞에 두고도 R는 무덤덤했다. 언제나 지긋지긋하게 콧속을 가득 채우던 알코올 냄새 대신 비릿한 혈향이 폐부를 가득 채웠다. 그 사실을 깨달았을 땐 기분이 썩 좋지도, 나쁘지도 않았다.
-
옛날 꿈은 꾼 것은 꽤 오랜만의 일이었다. R는 느리게 두 눈을 깜빡였다. 익숙한 천장이었고, 익숙한 공간의 냄새였다. 두 손에 닿는 이불의 감촉이 생생했다. 침대 옆의 커다란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달빛이 환했다. 꿈속에서 보았던 것과 같은 달일 테지만, 지금 제가 있는 곳은 빈민가의 낡아빠진 집도, 피투성이 시체와 술병으로 난장판이 된 방 안도 아니었다.
‘……몇 시지?’
R가 느리게 몸을 일으켰다. 고성에 버려져 있던 나무 침대는 움직일 때마다 삐걱거리는 소리를 냈으나 R의 기억 속 부모가 누워있던 침대보다는 훨씬 더 멀쩡했고, 깨끗한 편이었다. 침대에 앉아 멍하니 주변을 둘러보던 R가 천천히 침대에서 내려왔다. 분명 자기 전에 창문도, 커튼도 죄 닫아두었던 것 같은데. 커튼은 물론이고 창문마저 나 보라는 듯 활짝 열려 있었다. 건조하고 서늘한 카이로의 밤바람이 방 안으로 휑하니 들이닥쳤다.
남의 방을 이렇게 당당히 활보하다 흔적을 지울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인물은 이 고성에 딱 한 사람밖에 없었다. 물론, 이 고성에 살고 있는 사람이라 해봤자 저와 그, 단둘이 전부였지만.
R가 자박자박 창가로 걸어가 바깥을 내다보았다. 끝도 없이 펼쳐진 광활한 모래사막과 저 끝으로 드문드문 보이는 피라미드의 꼭대기, 날카로운 유리가 산산조각 난 듯 밤하늘에 촘촘하게 박힌 별들은 이미 잘 아는 야경이었다. 부모를 죽이고 도망치듯 빈민가에서 빠져나와 몇 날 며칠을 헤맨 끝에 발견했던 카이로 외곽의 고성. 나름 이 나라의 수도라고, 밤낮을 가리지 않고 북적이는 사람들과 꺼지지 않는 조명을 이곳에서 조금만 걸어가면 볼 수 있었지만, 길도, 빛도 드문 이곳까지 오는 이들은 손에 꼽았다.
쥐 죽은 듯 고요한 사막 한가운데 떡하니 자리 잡은 건물. 어렸던 R는 지금 보고 있는 이 풍경을 보고 이곳에 머물기로 마음먹었다. 조용한 것도, 커다란 방이 많다는 것도 마음에 들었지만, 올려다보는 밤하늘이 이렇게 평화로울 수 있다는 것을 처음 깨달은 곳이라.
“R.”
문득 뒤에서 저를 부르는 낮은 목소리에, R가 고개를 돌렸다. 금빛 옷을 입은 거구의 사내가 닫혀있던 방문을 열고 R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D. R가 살고 있던 고성에 찾아온 이후로 R와 기묘한 동거를 이어가고 있는 남자였다.
“창문 멋대로 열어놓은 거 너지?”
“음.”
부정할 생각도 없군. R가 얕게 한숨을 내쉬었다. 며칠 길게 자리를 비울 일이 있다길래, 간만에 글 쓰는 데 오롯이 집중할 수 있겠다 싶었는데. 일주일도 되지 않아 돌아와 놓고 오자마자 남의 방부터 헤집어놓는 남자와 여태 함께 살고 있다는 사실이 새삼 놀라웠다.
“생각보다 일이 빨리 끝나서.”
“그럼 휴가라도 즐기고 오지 그랬어?”
“누가 뭐래도 집이 최고지. 너도 아는 사실 아닌가?”
‘집’, 이라. R는 말없이 어깨를 으쓱였다. 이곳에 정착한 게 몇 년째더라. D와 함께 살기 시작한 건 얼마나 됐지? 햇수도, 날짜도 헤아리길 포기한 건 주인 없는 고성에 눌러앉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아무도 저를 지켜보고 있지 않았고, 누군가 저를 찾는 일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었고, 무엇보다 그렇게 좋아하는 독서와 글쓰기에 마음껏 매진할 수 있었으니까.
커다란 방 하나를 서재로 삼고 수많은 서적을 가져다 두었다. D의 도움으로 창문 앞엔 커다란 책장을 두어 햇빛이 들어오는 것을 막았고 텅 빈 책꽂이는 D가 가져다 나른 책들과 R가 직접 써 내려간 원고들로 순식간에 가득 찼다. R는 해도 들지 않는 서재에 한 번 틀어박히면 몇 시간은 물론이고, 며칠 내내 그곳에서 옴짝달싹하지 않은 채 글만 쓰곤 했다. R의 그런 생활을 지켜보는 일이 부지기수였던 D였으니, R가 이곳, ‘집’을 좋아한다고 단언할 수 있는 것이었다.
“이거 다음 편은 다 써 가나?”
D가 물었다. 그제야 D의 손에 들려 있던 원고지가 눈에 들어왔다. R는 물끄러미 D가 든 원고지를 바라보다, 나지막이 대꾸했다.
“오늘 쓰려고 했어.”
“언제쯤 완성되지?”
“……보고 싶다면 오늘 안에 완성하도록 해볼게.”
R의 대꾸에 D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겉보기와 다르게, 독서는 또 미치게 좋아한다. 특히, D는 R가 직접 쓰는 글들을 무척 마음에 들어 했으니 R는 자신의 단 하나뿐인 독자를 위해 펜을 드는 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처음엔 D의 고압적이고 자신을 깔보는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아 글을 쓰는 일에만 매달렸다. 겨우 손에 쥐게 된 조용한 삶에, D와의 충돌이라는 재해를 끼얹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으니까. 그러나 그가 자신의 글을 읽게 되고, 그가 자신의 글에 호기심과 관심을, 흥미를 갖기 시작하며 R 역시 펜을 움직이는 것에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괴로운 현실로부터 도피하기 위한 일이 아니었다. 제 글의 유일한 독자이자, 첫 번째 팬, 그리고 자신이 안정을 찾을 수 있는 ‘집’에서 언제나 얼굴을 보고 편안함을 느낄 수 있는 존재를 위한 행위였다.
‘……이런 관계에 내 멋대로 말을 붙여도 되나?’
밤바람을 타고 들어오는 모래 먼지가 따가웠다. R가 제 옆에 서 있던 D로부터 고개를 돌려 다시금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빛이라곤 하늘에서 금방이라도 쏟아질 것 같은 별들과 환한 손톱달뿐이었으나 새카만 야경은 그저 시원하고 만족스럽기만 했다.
“이번 글은 어떤 엔딩이야?”
“스포일러잖아.”
“내내 네 글 생각만 한다고. 언질이라도 해줘 봐.”
D의 투정 아닌 투정에 R가 눈을 데굴, 굴렸다. 엔딩이라. 사실, 생각해둔 글의 결말은 여러 가지였다. 사막을 정처 없이 떠돌며 기나긴 여행을 하는 나그네. 대단한 힘은커녕 제대로 가진 것도 하나 없는 그는 사막을 걷는 동안 거대한 독사 아포피스와 만나 목숨을 위협받기도, 하늘의 신 누트를 만나 낮의 항해에 합류하기도 한다.
그가 드넓은 사막을 건너는 이유가 무엇인지, 그는 어디를 향해 쉬지 않고 걷는 중인지. 그가 종내에 태양신 라를 만나 구원받을지, 죽음의 신 오시리스를 만나 어둡고 깊은 지하로 떨어질지.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부터 제가 만들어낸 세상 속 인물은 오롯이 그만의 자아를 가지게 되므로 R는 자신에게 그들을 통제하고 이끌 힘 따윈 없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이 서 있을 세계를 구축하고, 그들에게 삶과 죽음을 부여하는 것뿐.
“글쎼……, 나도 잘 모르겠어.”
깊은 고민 끝에 낸 답변이 잘 모르겠다는 말이라니. D가 미간을 좁혔다. 작가가 작품의 끝을 알지 못하면 대체 누가 그걸 알 수 있단 말이야? D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넌 어땠으면 좋겠는데?”
“뭘 말이지?”
“글의 엔딩.”
주인공이 행복하길 바라? 아니면 글이 시작할 무렵의 주인공처럼 그저 아무런 목적도, 꿈도 없이 영원히 명계를 떠돌길 원해? R가 시선을 돌려 D를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여전히 한 손에 R가 쓴 원고를 든 채 팔짱을 낀 D는 꽤 진지하게 고민하는 모양이었다. 그런 D의 모습 하나하나를, R는 눈으로 가만가만 뜯어보았다. 금빛 눈동자와 머리카락, 옷차림. D는 이 거대하고 고요한 고성 주위를 넓게 감싼 사막과 똑 닮아 있었다. 그에게로 자꾸만 시선이 가는 것은, 제가 볼 수 없는 태양 아래 사막을 그가 담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고. R는 그렇게 생각했다.
“글의 엔딩이라면 아무래도, 나그네가 만족하는 엔딩이면 좋겠군.”
“……만족?”
“살고 죽는 것에 있어 그의 의사가 우선이었으면 좋겠다는 말이다.”
네가 만든 이 나그네는, 그동안 많은 고생을 했으니까. D가 덧붙였다. 두 사람 사이에 짧은 정적이 찾아들었다.
“그렇게는 생각 안 해봤는데.”
“뭐, 그냥 독자의 의견이야. 쓰는 건 내가 아니라 R, 너잖아.”
가끔은 멍청하리만큼 행복해 죽겠다는 주인공의 결말도 괜찮다고 생각해. D가 창가에 몸을 기대며 옅게 웃었다. D가 웃는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던 R가 지그시 눈을 감았다.
‘끝에 닿을 수 있는 게 행복이라면, 괜찮을지도.’
사막 저 먼 곳에서 불어와, 제 곁을 스치는 밤바람의 감촉이 생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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