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미션 샘플 전문] - Fever
장르 미공개 2차 - HL 일상
커미션 안내:
2차 작업물 샘플:
인물: 2인(기본)
작업 기간: 2주(기본)
글자 수: 6,794자(6,500자 신청)
신청 타입: B. 키워드+짧은 씬
Fever
w. 목화
두 사람이 자리 잡은 런던 한복판의 플랫은 지극히 평범한 집이었다.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듯한 쥐색 하늘과 바람을 타고 굴러다니는 비쩍 마른 낙엽, 똑같은 디자인의 건물들이 다닥다닥 붙어 선 거리. 쭉 뻗은 도로에 꽉 찬 쓰레기통과 자동차가 드문드문 놓인 풍경은 꼭, 적막한 보드게임 판 위에 아무렇게나 올려둔 말 같았다.
겨울 초입의 쌀쌀한 날씨에 거실 한쪽의 벽난로는 쉴 틈이 없었다. C이 아침에 눈을 뜰 때마다 추워서 이불 밖에 나갈 수가 없다며 짜증을 내는 탓이기도 했고, 그녀의 성질을 못 이겨 밤새 벽난로를 들여다보며 불이 꺼지지 않도록 신경을 기울이는 H 덕이기도 했다. 덕분에 트렌치코트의 옷깃을 바짝 올려 입고 거리를 걷는 창밖의 사람들과 달리, C과 H는 훈기가 가득한 집 안에서 적당히 가벼운 소재로 된 옷을 입고 지낼 수 있었다.
“이거 봐, H. 여기가 요즘 잘 나가는 모델 에이전시래.”
“그래.”
식탁에 앉은 C이 제 쪽을 향해 휴대전화를 들이밀었지만, 부엌의 가스레인지 앞에서 꽤 거리가 있는 휴대전화 화면이 보일 리 만무했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오믈렛을 하얗고 예쁜 접시에 옮겨 담으며 H는 짧은 대꾸와 함께 대충 고개를 주억거렸다.
시내에 사무실을 둔, 작은 중소기업에서의 비서직을 홧김에 때려치운 이후로 C은 종종 지금과 같이 모델이나 할까, 하는 허황된 소리를 하곤 했다. 아마 진심으로 모델에 대한 열망이 있는 건 아니겠지만 그 연장선인지 요즘 잘 나가는 모델 에이전시나 관련 업계 종사자들의 인스타그램을 보여주는 일도 드물진 않았기에 H가 C이 평소와 별반 다르지 않게 에이전시의 로고 이미지나 사옥 사진, 에이전시 소속 모델들의 화보 등을 보여준 것이겠거니, 하고 짐작해 성의 없이 대꾸하게 된 것도 어쩌면 당연했다.
“H, 너도 이 사진 속 모델이 아름답다고 생각하니?”
그러나 불길하게 착 가라앉은 C의 목소리를 듣고서야 H는 뭔가 잘못되었음을 직감했다. 오믈렛이 정갈하게 담긴 접시 위로 샐러드를 덜던 H가 손에 들려 있던 샐러드용 집게를 내려놓고 몸을 완전히 돌렸다. 내내 상체를 반쯤 틀고 C과의 대화 아닌 대화를 이어가고 있었으니 C의 표정과 그의 손에 들린 휴대전화 속 이미지를 똑바로 보게 되는 것도 오늘 부엌에 들어온 후로는 처음인 것이었다.
“그래, 요즘 가장 잘 나가는 모델이라고 하지. 샤넬, 루이비통, 디올……, 갖은 명품 브랜드들이 러브콜을 보낸다고 하더라고. 그러니 말 다한 거 아니겠어.”
느리게 C을 향해 한 발짝 다가선 H의 눈에 휴대전화 속 화면이 들어왔다. 이번에도 C이 제게 들이민 게 평소에도 종종 보여주곤 하는 모델들의 화보 이미지라는 것까지는 제 예상대로였다. 다만, 그 화보 속 모델이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아름답고 매력적인 여성이었다는 것이 변수였을 뿐.
허리께까지 구불거리는 긴 금발에서는 윤기가 흘렀고, 카메라를 똑바로 바라보는 커다랗고 푸른 눈동자는 말로 다 할 수 없을 만큼 깊은 반짝임을 담고 있었다. 누구라도 첫눈에 보자마자 사랑에 빠질 수 있을 정도로, C이 보여준 화면 속 모델은 부정할 수 없는 미인이었다.
“너도 다른 사람들이랑 똑같아. 어쩜 남자들이란, 죄다 똑같은 사고나 하고 앉았으니!”
“C, 그게 무슨 말이야.”
C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대략 짐작은 갔다. H가 입 밖으로 튀어나오려는 작은 한숨을 되삼키며, 조리대 위에 내버려 두었던 오믈렛 두 접시를 손에 들었다. C의 취향이 한껏 묻은 예쁜 접시에 얹어진 오믈렛은 퍽 투박한 모양새를 하고 있었지만, 좋은 재료와 좋은 식기구로 조리했으니 배를 채울 수 있는 한 끼 식사로서는 부족함이 없었다. 적어도 H는 그렇게 생각했다.
“대체 나의 어떤 점이 다른 남자들이랑 똑같다는 말인데?”
H가 부엌 조리대 위에서 가져온 오믈렛 두 접시를 식탁 위에 내려놓으며 물었다. 깔끔하게 닦인 포크와 나이프가 C의 앞에 따끈한 오믈렛 접시와 함께 가지런히 놓였다.
“아름다움에 대한 욕심이 과하다는 말이야. 정확히는, 아름다운 여자에 대한! 한 사람으로는 만족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더 아름답고, 새로운 여자에게 눈을 돌리지. 예전의 넌 나를 세상 그 무엇보다 사랑하는 것처럼 굴었으면서. 요즘은 점점 날 매정하게 대하고 있잖아. 지금도 봐, 이런 모델의 사진 한 장에 할 말을 잃다니.”
H가 미간을 좁혔다. C의 말이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고 생각했다.
“내가 대답을 대충 한 게 그 모델의 사진을 보고 사랑에 빠져 말을 잃었다는 걸로 느껴진 거라면 미안해. 하지만 난 너에게 줄 오믈렛을 만들고 있었잖아, C. 우리의 오믈렛이라는 말은 그만둬, 아무 의미 없는 논쟁이 될 게 뻔하니까. 어쨌든 난 널 위해 음식을 만들고 있었어. 조리대 앞에선 네 휴대전화의 사진이 잘 보이지 않고, 네가 휴일 아침부터 오믈렛을 먹고 싶다고 날 졸랐으니 네 허기가 조금이라도 빨리 달래지길 바라며 오믈렛 만들기에 집중했던 것뿐이야. 그걸 보고 나를 저 밖의 멍청이들이랑 똑같이 취급하는 이유를, 난 도통 이해할 수가 없네.”
H가 C 앞으로 오믈렛 접시를 밀어주며 차분히 대꾸했다. 열이 올라 작은 두 뺨이 붉게 달아오른 C과는 정반대였다. 조곤조곤 반박하고 드는 말투는 감정적이지 않다 못해 싸늘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물론 C은 그런 H의 반응을 보고 식탁 위에 올린 두 주먹을 더욱 파들거렸지만, H는 그 이상 C을 달래줄 의향이 없는 모양이었다.
“오해가 풀렸다면 그만하고 밥이나 먹어, C. 휴일 아침에 막 만든 따뜻한 오믈렛을 앞에 두고 화를 낼 만큼 이 주제가 가치 있진 않으니까.”
C의 맞은편 의자를 빼 앉은 H는 그 말에 진심인 듯,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자마자 제가 만든 오믈렛을 잘라 입 안에 밀어 넣기 시작했다. 엄마의 관심을 끌기 위해 말도 안 되는 심술을 부리던 어린아이처럼, C은 H의 반응이 시원치 않자 곧 숨을 고르고 그를 따라 제 앞에 놓인 식기를 들었다. 정말 그녀가 H를 향한 억지 분노를 가라앉히고 이성을 되찾은 것인지, 아니면 H가 정말 자신을 매정하게 대하고 있다는 사실을 한 번 더 깨닫고 체념을 한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한동안 식탁 위로는 두 사람의 식기가 접시와 부딪히는 소리, 다물린 입술 너머에서 우물거리며 음식을 씹는 소리만이 고요하게 맴돌았다. 좁다란 부엌과 벽 하나를 사이에 둔 거실에서는 여전히 타닥거리는 소리와 함께 난롯불이 타오르고 있었고 집안 곳곳의 창문들은 바깥의 매서운 바람에 흔들려 덜컹거리는 비명을 질렀지만, H는 C이 입을 다문 그 잠깐의 순간이 아주 만족스러울 만큼 고요하고 평화롭다고 느꼈다. H는 자연스럽게 조금 전 C과 나누었던 대화를 곱씹게 되었다.
‘점점 널 매정하게 대하고 있다, 라…….’
H는 입 안에 가득 찬 달걀의 고소한 맛을 느끼며, C이 자신을 향해 쏘아붙이던 말을 되짚어보았다. 예전의 넌 나를 세상 그 무엇보다 사랑하는 것처럼 굴었으면서. 요즘은 점점 날 매정하게 대하고 있잖아.
맞다, H는 C를 사랑했다. 실로 자신의 마음이 그렇다는 것을 인정하는 데에 시간이 걸렸다 뿐이지, 주변 사람들과 각종 매체에서 말하는 ‘사랑’이란 자신이 C을 향해 가진 감정과 동일한 것이라고 끝도 없이 알려주고 있었으니까. 모를 수가 없었다. 다만 순순히 사랑을 인정하고 그 사랑을 C에게 다정하게 표현하기에 H는 무뚝뚝하고, 차갑고, 가끔은 무례하기까지 했으니 C과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는 데 어려움이 있었다.
‘그렇게 어렵사리 고백했으니 널 놓칠까 불안하면 불안했지, 그 마음이 먼저 식을까 걱정할 일은 없겠거니 했는데.’
H가 목 뒤로 달걀을 삼키며 생각에 잠겼다. 평일과 주말의 개념이 없는 직종에 종사하며 버는 돈은 꽤 넉넉한 살림의 밑천이 되었다. 일하러 나가는 날이 잦고, 근무 시간이 길고, 업무가 많다는 것이 단점이라면 단점이었으나 현재 자신의 직업에 H는 꽤 만족하는 상태였다.
그러나 H와 동거 중인 C는 자신의 직업을 늘 못마땅해하곤 했다. 나름 근무일과 휴일의 경계선도 분명하고, 월급과 보너스도 따박따박 나오고, 더울 땐 시원하고 추울 땐 따뜻한 실내에서 일하는 비서직을 C이 뻥 차버렸다는 소식을 H가 들은 건 오직 C의 통보를 통해서였다. 하기야, 그녀의 까탈스럽고 변덕 심한 성격으로 미루어본다면 애초에 누군가의 밑에서 단정하고 얌전한 사람을 연기하며 상사의 온갖 심부름과 명령에도 고분고분 답해야 하는 직업이 썩 어울릴 거라고 확신을 가져본 적도 없긴 했다.
그래도, 당장 함께 돈을 벌며 생활을 이어나가는 동거인에게, 그 정도 의논은 할 수 있는 것 아닌가. H가 C에게 사랑보다 다른 감정을 더 크게 느꼈던 것은 아마 그때가 처음인 게 분명했다. 아름다운 모델의 얼굴이 어쩌고저쩌고할 게 아니라, C의 속 편하고 천진한 충동적 판단에야말로 H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당연하게 제가 C 본인을 부양할 것이라는, 뻔뻔하다면 뻔뻔한 사고와 계획이라곤 없는 퇴사를 H로서는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사실 돈이야 제가 벌면 되고, C이 힘들다고 한다면 어려움을 감수하면서까지 직장 생활을 이어가라는 말을 할 생각은 없었다. 다만, 그저 내내 집에서 뒹굴거리다 모델이나 될까 봐, 하는 헛된 소리를 하며 제게 온갖 짜증을 부리고, 이것저것 시키는 태도에 환멸이 나는 것뿐이었다.
“오늘도 일하러 나가야 해?”
두 사람의 접시가 반쯤 비워질 무렵, C이 슬그머니 말문을 열었다. 기다랗고 풍성한 속눈썹 아래, 커다란 갈색 눈동자가 H를 올려다보았고, H는 어느덧 분노로 인한 홍조가 가라앉은 C의 새하얗고 말간 얼굴을 마주 보고 답했다.
“오늘은……, 아니, 대신 내일 아침 일찍부터 사무실에 들러야 할 것 같아.”
잠깐의 텀이 생기자 H의 목소리에서도 냉기가 가셨다. 아니, 주체할 수 없는 분노를 가라앉힌 C의 얼굴을 마주하고 어처구니없는 오해로 자신을 몰아세우던 그녀에게 마음이 조금 풀렸다는 말이 더 정확하겠다.
C를 앞에 둔 남자에게, 인스타그램 사진 속 모델이 아름다워 한눈을 파느냐고 묻다니. 그렇게 어이없는 질문을 할 수 있는 것은 C 본인이 아니고서야 정말이지, 상상도 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어려서부터 그녀를 본 주변 이웃들과 친척들은 하나같이 입을 모아 명화 속 인물이 현실에 존재하기라도 하는 것 같다며, 아이의 외모를 입이 마르도록 칭찬하곤 했단다. 그 이야기를 C의 부친으로부터 우연히 듣게 되었을 때 역시 H는 한 치의 의심도 없이 그 말을 믿고, 깊게 공감했다. 그만큼 C는 아름다운 여성이었다. 커다랗고 아름다운 고동색 눈과 풍성하고 긴 갈색 머리카락, 선명한 이목구비와 사람을 홀리는 매력을 가진. 비교 대상이 세계를 뒤흔들고 각종 명품 브랜드들의 러브콜을 받는 톱모델이라고 한들, 감히 C에게 비빌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 몇 개월 전 H는 그렇게, 순수하게 생각했겠지.
“그럼 오랜만에 집에서 영화나 볼까? 넷플릭스에 미뤄둔 영화들이 많아. 편의점 팝콘을 사서 캐러멜 시럽을 뿌리자. 거실 소파에 이불을 가져와 덮으면 안락해서 딱 좋을 거야!”
그래봤자 오늘 하루 종일 틀게 되는 건 오롯이 C 취향의 로맨스 영화일 게 안 봐도 비디오였다. 그녀는 자신이 필히 참여해야 하는 일에, 한 번도 H의 취향과 의사 따위를 물은 적 없었으니까.
예전에야 C이 하자고 하면 그게 아무리 바보 같은 짓이라 한들 선뜻 함께했고, 그저 C이 즐겁고 행복해 죽겠다는 얼굴을 한다면 그것만으로도 만족했다. 덧붙여 정작 제 의견을 물어도 딱히 명확한 의견이 없으니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하자는 답변을 내놓을 것도 맞았다. 그러나 이젠 더이상 속 편히 웃으며 그녀의 일상에 동조할 수 없다는 게 전과 달라졌다면 달라진 부분이겠지.
“……그래, 그렇게 하자.”
속마음을 C에게 곧이곧대로 솔직하게 드러내보았자 C은 보나마나 길길이 날뛰며 네가 어떻게 나에게 그럴 수 있냐고 바락바락 소리를 칠 게 뻔했다. 집도, 가족도 옆 도시에 멀쩡히 두고 왔으면서 모든 것을 버려놓고 너만 보고 이곳에 왔는데 어쩜 그렇게 책임감이 없느냐부터, 사람 마음을 가지고 장난질이나 해대는 질 나쁜 남자라고 옆집에서 무슨 일이냐며 걱정되어 초인종을 누르지나 않으면 다행일 정도로 온갖 소란을 피우겠지. 끝에 가선 너에게 버림받은 난 이제 어찌 되든 상관없다며 런던 브릿지에서 템즈 강을 향해 몸을 던지겠다 으름장을 놓고 집에서 뛰쳐나갈지도 몰랐다. 그래봤자, 엉엉 우는 C의 전화를 받고 놀란 가슴으로 뛰어온 N의 부축을 받으며 그녀의 집으로 가겠지만.
“좋아, 그럼 어서 이 못생긴 오믈렛을 다 먹어 치우는 거야. 그리고 H 넌 설거지를 하고 거실에 청소기를 돌려, 난 편의점에 가서 팝콘과 콜라를 사 올게. 음, 술과 안줏거리도 필요할까?”
“술은 안 돼, C. 내일모레 E의 생일 파티에 간다며. 거기서 또 양껏 먹고 마실 거 아니야.”
“파티가 원래 다 그런 거지, H. 초대받지 못해서 심통 난 티 내지 마.”
말이 통하지 않네. H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번엔 애써 삼키지 않았다. 반쯤 남아 식어버린 오믈렛 위로 떨어진 한숨에 짜증이 섞여 있다는 것을 알아챈 듯, C의 얼굴이 단번에 굳었다. 하지만 이내 별말 없이 식사를 계속하는 H에 C 역시 군말하지 않고 식사를 이어가기 시작했다.
‘… …다 식었군.’
H가 접시 위에 어지러이 흩어진 오믈렛 조각들을 내려다보다, 맞은편에 앉은 C을 흘끔 쳐다보았다. 끝없을 것 같던 열기가 과연 언제쯤 식어 차가워질지, 저로서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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