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많이 부는 날이었다. 이러다 나무에 달려있는 모든 잎사귀들이 떨어져 다시 겨울이 될 것만 같았다. 블랙캣은 어깨를 감싸안으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눈이 시큰거리는 푸른 하늘이었다. 햇볕이 부드러웠지만 바람이 너무 차서 도저히 봄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저 멀리서 빌런이 된 마리네뜨가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녀의 손이 닿는 곳마다 그녀가 입은 정장과 똑
그 날은 레이디버그가 나타나지 않은 날이었다. 간만에 얼굴 보나 싶었는데. 블랙캣은 속으로 혀를 찼다. 물론 레이디버그가 아무 말 없이 잠적한 건 아니었다. 브레이크 고장난 버스가 대로를 질주하고 있단 소리에 황급히 변신을 했는데 레이디버그에게 음성메세지가 와 있는 걸 발견했다. "블랙캣, 내가 오늘은 급한 일이 생겨서 아무래도 도시에 나갈 수 없을 것 같
빌런에게 의식이 끊기는 순간은 여태 많았으나, 몇 번이나 겪어도 기분 나쁘기는 매한가지였다. 「젠장.」 빌런이 흔드는 추를 본 순간 블랙캣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의 품 안에서 레이디버그의 심장소리가 전해졌다. 작은 새처럼 파닥거리는 심장이었다. 빌런의 추를 보면 안돼. 레이디버그의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통통 튀어올랐다. 그는 여차 싶던 순간에서 레이디버그가
좋아하는 마음을 혀와 성대로 표현하자면, 그건 필시 말이 아니라 음색이 될 터였다. 그녀의 머리카락은 우주였고, 그녀의 눈동자는 바다였다. 그는 우주와 바다가 원래는 이 색이 아니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녀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세상이 그녀의 색으로 변했다고 생각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초여름의 분수대처럼 청량했고, 그녀의 몸짓은 산들바람처럼 우아했다. 어
호크모스의 미라큘러스를 빼앗았다.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시작된 긴 싸움의 종지부를 찍는 순간이었다. 방을 메운 수 많은 흰 나비들이 차례차례 창 밖으로 날아올랐다. 햇빛에 따라 금빛으로, 때론 붉은 빛으로 빛나는 자그마한 날개들이 날아올라 창공으로 사라져갔다. 패배해 쓰러진 호크모스의 목덜미에서 미라큘러스를 빼낸 것은 레이디버그였다. 미라큘러스를 빼냄과
마리네뜨는 벨을 누르기 전 잠시 심호흡을 했다. 디자인 노트를 쥐고 있는 손에서 땀이 배여나왔다. 머리 끝까지 긴장에서 뿜어나온 열기로 가득 차 있었다. 프랑스 파리 21구 고틀릭 가 7번지. 그 성벽과 같은 담장 밑에서 마리네뜨는 자신의 손가락 끝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침을 한 번 삼키곤 담벼락으로 한 걸음 걸어가 초인종을 눌렀다. 곧이어 머리
아드리앙은 사탕을 좋아했다. 먹다가 지칠만큼 커다란 막대사탕에서 손바닥에 여러개 들어오는 자그마한 사탕까지. 그는 모든 사탕을 좋아했다. 달콤한게 입안에서 사르르 녹으며 혀를 감싸는 것이 좋았다. 그리고 잠시라도 흠집 하나 없이 행복해질 수 있는 점이 좋았다. 엄격한 그의 아버지는 그에게 사탕을 많이 주는 것을 싫어했으나, 온화한 그의 어머니는 늘 사탕을
꽃다발을 샀다. 원래 꽃다발을 사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다. 애초에 꽃가게에 들릴 계획도 없었다. 오늘도 평소처럼 고릴라를 닮은 경호원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집에 들린 후 화보촬영을 위해 밖에 나갈 계획이었다. 조수석에 앉은 나탈리가 여느때와 똑같은 일정을 읊는 것을 들으면서 그는 멍하니 차의 창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가벼운 옷차림의 사람들이 경쾌한 걸음
01 "아, 아드리앙." 마리네뜨는 고개를 숙였다. 말 마디마디가 입에서 토막나서 도저히 이어지지 않았다. 심장 박동이 빠르게 달려가는 증기기관차처럼 시끄럽게 울렸다. 그 앞에선 짧은 몇 마디의 말 마저 제대로 내뱉지 못하는 자신을 원망하며 마리네뜨는 다시 외쳤다. "아드리앙, 조…좋아해!" 좋아해 라는 말 만큼은 깔끔하게 내뱉고 싶었는데. 마리네뜨는
무당벌레와 고양이를 제외한 모든 미라큘러스를 손에 넣은 호크모스는 모나크가 됐다. 그가 강해진 만큼 싸움은 더 힘겨워졌고, 파리 시민들의 불안도 높아져 갔다. 순찰 하는 횟수나 시간을 늘리는 데도 한계가 있었다. “저희 안전한 거 맞죠?” 거리에 돌아다니는 사람들의 수가 반은 줄었다. 길에 나온 사람들도 불안한 표정으로 그렇게 질문하고는 했다. 단순히
보낸 이의 이름이 적히지 않은 편지가 도착했다. 이름을 일부러 쓰지 않은 것인지, 아니면 잊어버린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태양 같은 금발, 행운을 부르는 녹색 눈. 항상 궁금해, 네 생각, 네 꿈. 하지만 절묘하게도 자신이 보내지 못했던 연서에 대한 답신이었다. 레이디버그의 색이라고 하면 모두가 붉은 색을 연상했다. 무당벌레의 날개를 닮은 색. 삼색기의
간혹 그런 생각을 한다. 자신을 바라보는 수 많은 파리 시민들 가운데 아드리앙도 끼어 있었으면 좋겠다고. 아드리앙은 엄청 빛나는 존재니까 누군가를 동경하거나 사랑해본 적도 없을 것 같지만··· 그래도 자신을 구해준 적도 있는 레이디버그에게는 조금이나마 관심을 가질 수도 있지 않을까? 지나가다 아드리앙과 만나게 된 건 우연이었다. 사실은 운명이라고 부르고 싶
에밀리에게서는 빨강을 찾아볼 수 없었다. 빛을 모조리 반사해버릴 듯 찬란한 금발과 빨강과는 상극인 짙은 녹색 눈동자, 핏줄이 비칠 만큼 하얀 피부는 얼핏 창백해 보일 수 있었지만 머리카락이 반사하는 빛과 눈에서 타오르는 생기가 그런 느낌을 없애 줬다. 타고난 차갑고 고고한 인상과 달리 긍정적인 성격과 태양 같은 미소를 머금고 있어 아무도 에밀리를 차갑다고
그날 파리의 시간은 멈췄다. 침잠한 달은 더 이상 밤을 데려오지 않았다. 파리의 하늘이 달을 독점하게 됐음에도 밤을 맞이하지 못한 이유였다. 부서진 달은 그날부터 쭉, 파리의 하늘에 위태롭게 매달려 있었다. 때문에 그날부터 몇 주야가 지났는지 정확히 헤아릴 수는 없었다. 확실한 것은 홀로 남은 이에게 가혹할 만큼 긴 시간이 흘렀다는 사실이었다. 별 대신 하
가브리엘 아그레스트는 아주 불쾌한 기분으로 눈을 떴다. 그의 꿈에 에밀리가 나왔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이가 꿈에 나온 게 불쾌한 이유는 두 가지였다. 첫 번째로 가브리엘은 꿈 따위의 환상에 관심이 없었다. 떠나가는 에밀리를 붙잡으려고 애썼던 것이 꿈이라는 것은, 자신의 노력도 미소 짓던 에밀리도 환상이었다. 두 번째 이유는 그날이 시월의 마지막 날이었기
"아, 시간 다 됐다. 그럼 난 먼저 가볼게." 에펠탑에서 집으로 가는 건 이제 눈 감고도 할 수 있었다. 레이디버그에게는 던지는 곳에 정확히 감기는 요요와 원하는 만큼 멀리 뛸 수 있는 다리가 있었으니까. 레이디버그는 지붕 몇 개를 밟고 뛰어넘어, 파리에서 가장 맛있는 빵집의 3층에 발을 딛음과 동시에 사라졌다. 던지는 곳에 정확히 감기는 요요도, 원
하늘이 너무 파래서 꼭 네 머리카락과 눈동자가 투명하게 느껴질 정도로 맑은 날인데, 왜 갑자기 그날이 생각났던 걸까? 그날은 비가 바닥을 때리는 소리가 너무 커서 서로의 소리를 모두 잡아먹을 만큼 컸잖아. 혹시 기억나? 학교에 오게 된 날부터 행운으로 향하는 길이 트인 기분이었어. 자유를 얻고, 학교에 가게 되고, 새 친구를 사귀는 게 너무 좋았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