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수했어?" "어. 좀, 덥지 않아?" 다연은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뭔가 숨기는 것처럼. 왜인지 모르겠지만 오래전부터 다연은 본인이 아프면 숨기기에 바빴다. 최근 무리하더니 오늘도 아픈 데 숨기는 게 아닐까 추측을 했다. 수업을 시작했는데도 다연은 수업에 집중하지 못하고 잡다한 생각을 하는 듯했다. 열이 나는 건 아닌가 생각만
체육 도구를 다 옮긴 후 창고에서 나온 너는 정돈되지 않은 긴 머리를 날리며 달려왔다. 얼마나 빨리 뛴 건지 건물 안으로 들어온 지 얼마 안 됐는데도 벌써 복도에서 뛰는 소리가 들리더니 네가 반으로 들어왔다. "많이 기다렸어?" 4층이나 되는 높이를 뛰어와서 힘들었는지 숨을 거칠게 몰아 쉬었다. "아니야 별로 안 기다렸어." 너는
간이 체육대회 당일 아침에 들어보니 총경기는 3가지였다. 축구, 농구, 티볼. 전부 다 남녀가 함께할 수 있었다. 참가인원이 반 대항전으로 알맞아 반 대항전이 채택되었다고 한다. 그렇기에 다연과 송규현은 같은 팀이 되었다. 둘이 다른 팀이었다면 재밌는 모습이 나왔을지도. 모든 경기는 점심을 먹고 난 오후에 진행된다. 오전 수업 시간 내내 대회에 참
*** 내가 어렸을 때 갑작스럽게 생긴 엄마의 병은 당시로서는 치료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고 의사가 말했다. 집보다도 병원을 더 들락거리게 되었을 때 너는 나와 함께 엄마의 딸처럼 자주 병문안을 가주었다. 엄마가 투병하다 결국 엄마의 얼굴을 마지막으로 보는 날이 되었을 때도 너는 수술실 밖에서 날 기다려주었다. 엄마와 마지막 만남을 가졌던 병원
** 다연은 종례를 마치고 평소와 같이 반납했던 너와 나의 휴대폰 두 개를 들고 나의 자리로 해맑게 웃으며 왔다. "서하야! 집 가자." 어렸을 때부터 집이 가까워 학교가 달랐어도 등하교는 꼭 같이했던 우리는 고등학생이 된 지금도 그걸 매일 반복하고 있다. 난 웃으며 다연이 건네는 휴대폰을 받으며 흔쾌히 대답했다. "응!"
맥스는 피곤한 몸을 이끌고 눈을 떴다. 습관적으로 일찍 일어나던 기억이 몸으로 돌아왔다. 널찍하고 따스한 침대의 3분의 1은 차지하려나 싶은 작은 제 몸뚱이가 익숙하다. 저 아래에서 코 고는 소리가 나는 것 같아 쳐다보면 좁은 바닥에 이불을 하나 깔고 몸을 구겨 자는 잉게르가 보인다. 이 넓은 침대에서 나를 자라고 올려두고는 자기는 저렇게 좁고 불편하게 잔
따뜻한 만년설, 행복한 외로움, 소중한 환자. 잉게르의 세상에 새로운 단어들이 늘어났다. 자기 자신과 스스로의 마법을 향한 자만심만 있던 그 거만한 마법사의 세상이 넓어졌다. 심지어 오늘은 아침 일찍 부터 일어나 식사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다른 것도 아닌 아침 식사라니! 아직 깨어날지 아닐지도 확실치 않은 환자를 위해, '혹시나' 를 대비 해서 식사를 준비
축축한 어둠 속에서 피어오르는 눅눅한 먼지 냄새는 언제나 뭔가가 떠오를 것 같은 기분이 들게 했지만, 그 사람은 가벼운 먼지 만큼이나 아련하게 피어오르는 따뜻한 추억을 가질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잉게르는 마법으로 작은 빛 덩어리를 만들어 두 사람 주변을 둥둥 떠다니게 했다. 맥스는 마법으로 만들어진 구체를 보며 순진한 목소리로 감탄사를 시원하게 날렸다. 마
완전히 사라져버린 당신에게 속 시원해 하다가도 그리워하고. 타인과의 관계 라는 건 왜 이리 행복한데 공허하게 만드는 거지. -맥스! 일어나요~ 밥 먹어야죠~ -ㅎ ㅓ..! -잘 잤어요? -응.. 어..? 어... 응..! 맥스는 차가운 공기를 얼굴로 맞으며 따스한 담요 속에서 상체를 일으켰다. 온몸이 찌뿌둥하다. 아니 이건 찌부둥하다의 수준이 아니라
잉게르는. “야. 일어나.” “... ....” “일어나라고!” 맥스는 일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잉게르는 이게 무슨 현상인지 알고 있었다. 이미 여러 겹의 치료 마법이 녀석에게 작용하고 있었고, 홧김에 걸어버린 기억 삭제 마법이 서로 충돌을 일으켰다. 복원하는 성질이 있는 치료 마법과, 삭제하는 성질의 기억 마법은 상극이니 늘 조심해야 하는데.
** "우리 오랜만에 같이 바다 가자." "지금 많이 추울 텐데, 괜찮겠어?" 벌써 공기가 차가워 공기에 볼이 얼 것만 같은 겨울. 12월이다. 가만히 서 있는 것만으로도 추운데, 바닷바람이 불어오는 바다는 더 차가울 날씨.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너와 같이 바다를 보러 가고 싶다. "응. 바다 보고 싶어." "그래, 얼른 따뜻한 옷
맥스는 찬찬히 뒷걸음질 쳤다. 아주 느릿하게 일어나고 있는 저 코볼트가 금방 이라도 저를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잉게르라고 했던가? 그래, 아주 귀족처럼 귀티가 묻어나는 얼굴이다. -... ... ....너... 너 지금 무슨 짓을... -...야, 여기..돌려줄게. 난..오늘 아무것도 못 본 거니까... -당연히 아무것도 못 본 거겠지..! 잉
칡뿌리와 등나무가 서로를 의지해서 휘감아오를때, 자립할 수 없었던 나무들이 곧게 서서 자랐다. 이하는 칡나무와 등나무가 마주쳐 성장하기 시작한 이야기다. 침엽수가 아득히 자라난 거칠고 험한 산기슭. 잉게르는 다가오는 사냥감을 조용히, 침착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이번엔 어떤 녀석이 걸릴까. 이왕이면 지명수배자가 좋겠다. 만약 그렇다면 귀찮
-그 애 있잖아.. 그 부잣집 애.. -아, 나도 알아. 그 털 긴 집안 애? -응! 그 애~! 그 녀석 말이야.. 마법을 공부한대~! -그러니까 내 말이~! 아니. 코볼트가 무슨 마법이야 마법은~! -숫자나 하나 더 배울 것 이지.. 그 녀석 놀이터에 나와서 노는 꼴을 한번도 못 봤어! -그 집안이 그렇지 뭐~.. 애를 밖에서 햇빛도 보게 하고 좀 뛰어다
3초 후면 자신의 손에 갈비뼈가 으스러질 그 도전자의 주먹에 얼굴을 맞으며, 맥스는 생각했다. '이젠 못 해먹겠다.' 어느 불법-격투-도박장의 최강자. 스폰서들의 조커 카드. 그런 수식어들을 뒤로 하고, 맥스는 조용히 은퇴했다. 어머니도 이곳에서 잃었다. 제 손으로 죽였다. 평생 배운것 이라곤 주먹질밖에 없는 투견은 사회화에도 시간이 오래 걸렸다. 그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