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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방학

셩디/교재 ... 짧음

화분 by 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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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형은 나를 좋아한다. 다 같이 있을 때 항상 내 옆에 찾아와 앉고, 모두를 대상으로 말을 할 때 내 눈만 바라보며 말한다. 내 말에 누구보다 크게 웃고, 내 앞에서만 말투가 부드러워진다. 나한테만 기준이 한없이 낮아져 뭐든 유하게 넘어가고, 나한테 뭐 하나 사 주지 못해 안달이다. 그러니까 저 형이 나를 좋아하는 건 확실하다. 나는? 뭐 나는... 당연히 별 마음 없다. 나는 귀여운 여자친구를 만나 지지고 볶으며 살고 싶다. 형한테는 미안하지만 우리는 이루어질 수 없는 사이다. 부디 형이 나에게 고백하지 않기를 바란다. 나는 형을 거절할 수밖에 없고, 형이 상처받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으니까. 형이 나에 대한 마음을 고이 접기만을 바랄 뿐이다.

...라고 기만을 떨었던 것이 불과 이 주 전이다. 계절학기가 끝난 기념으로 술을 사 주겠다기에 룰루랄라 나갔는데 불판 앞에 앉아 있는 사람은 형 혼자가 아니었다. 이선호라는 어린 자식이 형 옆에 나란히 앉아 사근사근 웃고 있었다. 말과 행동은 착하고 상냥했지만 오히려 속에 다른 마음을 품고 있을 것 같다는 동물적 직감이 들었다. 나는 형에게 종종 강아지 소리를 들을 만큼 육감이 발달한 인간이었다. 딱 봐도 술 잘 마실 것 같은데 소주 한 잔에 어지러운 척을 하지를 않나, 형 옆에 딱 붙어 앉아 어깨를 기대지를 않나. 나보다 1살 어리면서 빠른이라는 이유로 맞먹으려고 하는 것도 마음에 안 들었다.

그렇지만 가장 마음에 안 드는 건, 형이 이 야비한 새끼를 귀여워한다는 것. 나는 안중에도 없고 형은 고기를 구워다 족족 이선호의 앞접시에 갖다 바쳤다. 사실 나한테도 주기는 했다. 아니, 나랑 이선호 둘 모두에게 공평하게 주었다. 그게 싫은 거였다. 형은 언제나 나만 챙겨 줬었는데. 형은 나만 귀여워했었는데. 형한테는 나뿐이었는데! 분하고 억울해 미칠 것 같았다. 부글부글 끓는 속을 삼켜내며 이선호에게 친절하게 말을 걸었다. 얘기 많이 들었어요. 계절학기 들으면서 형이랑 많이 친해지셨나 봐요. 그러자 이선호 이 새끼가 이렇게 말했다. 네. 근데 왜요?

그렇지만 듣고 보니 또 한 번 더 곱씹게 되는 말이었다. 근데 왜요? 나는 왜 이러고 있을까? 왜 형이 다른 놈 접시에 고기 좀 덜어 준다고 이렇게 분노하고 있는 것일까? 왜 형이 다른 놈한테 웃어 준다고 이렇게 원통해하고 있는 것일까? 왜 형에게 이토록 배신감을 느끼고 있는 것일까? 바짝 익은 돼지갈비를 턱 아프게 씹다가 문득 깨달았다. 형은 나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형이 나를 좋아하는 게 아니었다. 좋아하는 건, 형이 아니고 내가, 형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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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것도 사주 팔자에 나와 있는 건가. 옛날부터 나에게 잘 해 주지 못해 안달인 사람이 많았다. 어딜 가든 예쁨받고 손 하나 까딱하지 않아도 모든 일이 술술 풀렸다. 그런 삶을 살아 왔다. 그렇기에 당연히 신혜성도 나에게 꼬인 그저 그런 사람들 중 한 명인 줄로만 알았다.

계절학기 첫 날 우연히 신혜성의 옆에 앉은 것이 시작이었다. 수업이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신혜성은 노트북 충전기를 실수로 놓고 왔다며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빌려줄 수 없겠냐고 물어 왔다. 부탁이 적힌 종이 쪽지를 보고 한참 눈살을 찌푸렸다. 생전 처음 보는 엄청난 악필이었다. 무더운 날이었다. 늦잠을 자서 계단을 두 칸씩 성큼성큼 밟으며 올라 오느라 아직 땀이 식지 않은 채였다. 종강의 자유를 제대로 누리지도 못하고 계절학기 따위를 들어야 하는 신세가 짜증났지만, 복수전공을 하면서도 8학기 내에 졸업하려면 어쩔 수 없었다. 나는 인상을 펴고 신혜성에게 충전기를 건넸다. 신혜성은 감사하다며 밝게 웃었다. 그런 것치고는 나의 눈치를 많이 살피는 것 같았다. 이런 사소한 것들까지 자세히 기억하고 있는 것은 내 기억력이 좋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충전기를 빌려 주어 고맙다며 신혜성은 커피를 사겠다고 했다. 공짜 커피는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그렇게 말을 나누게 되고, 매일 수업을 옆자리에서 듣게 되고, 수업이 끝난 뒤 점심을 함께 해결하게 되었다. 신혜성은 고작 한 살 차이면서 자신이 형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나이를 과시하며 찍어 누르는 형태가 아니었기에 들어 줄 만 했다. 일주일에 다섯 번 함께 점심을 먹는다고 치면 신혜성은 그 중 세 번 값을 지불했고, 나머지 두 번은 후식 커피 값을 지불했다. 돈이 남아나는 도련님인가보다 싶으면서도, 이것 역시 나의 사주 때문이라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계절학기의 빠듯한 일정으로 인해 숨가쁘게 진행되는 과제와 시험을 신혜성은 모두 도와 주었다. 본인도 같은 강의를 듣고 있으면서 나를 돕는 것을 최우선으로 치는 것 같았다. 이것 역시도 나에게는 익숙한 일이었다.

그런데 문득 위화감이 느껴졌다. 신혜성은 나에게 잘 해 주었다. 다른 사람들처럼 나를 귀여워했다. 그러면서도 나를 나로 보지 않았다. 신혜성은 내 나이를 듣자마자 이렇게 말했다. 우리 충재랑 동갑이네. 그 이후로 그 놈의 충재는 언제나 우리 사이에 있었다. 밥을 먹으면서도 이거 우리 충재가 좋아하는 건데. 과제를 하면서도 우리 충재가 이런 거 잘 하는데. 집에 놀러 가면 아 이거 우리 충재가 사 준 건데. 그 놈의 충재가 신경 쓰였다.

계절학기가 끝난 날 드디어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은 박충재를 만날 수 있게 되었다. 신혜성의 묘사 속에서 박충재는 작고, 여리고, 귀여운 강아지 같은 느낌이었다. 그러나 실제로 마주한 박충재는 키가 크고 이목구비가 뚜렷한 근육질의 남성이었다. 눈이 마주칠 때마다 박충재는 신혜성처럼 웃었다. 박충재를 만나고 보니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그는 나를 예뻐하지 않는다. 더 이상 신혜성은 나에게 그저 그런 지나가는 사람들 중 하나가 아니었다. 그렇기에 나도 그저 그런 사람으로 남지 않기를 바랐다. 역전은 시간 문제였다. 나는 그런 사주 팔자를 타고 난 남자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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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계절학기가 끝이 났다. 지긋지긋한 강의와 과제에서 벗어난 기념으로 아끼는 동생들에게 술을 사 주기로 했다. 겸사겸사 서로 소개도 시켜 주고. 전부터 쭉 소개를 시키고 싶었는데 이제야 기회가 왔다는 것이 아쉬우면서도 기뻤다. 충재도 선호도 나랑 잘 맞고 좋은 동생들이니까, 이 동생들끼리도 절친한 사이가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 확신이 들었다. 내가 고기를 굽는 데 열중하는 동안 두 사람은 즐거운 듯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역시 내 촉은 잘 들어맞는다니까. 둘이 잘 맞을 줄 알았지. 단번에 알았지!

그러고 보면, 소개 하니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얼마 전에 소개팅이 들어 왔다. 공기업 입사다 공무원 시험 준비다 뭐다 하며 시간을 낭비하다가 최근에 와서야 취업 준비를 시작한 민식이 형이 스터디에서 만난 여자를 소개해 준다고 했다. 스터디에서 하는 걸 보니 말도 잘 하고 공부도 잘 하는, 대기업 입사는 따 놓은 당상인 여자라고 했다. 얼떨결에 이름에 나이에 사진까지 받았건만 어쩐지 구미가 당기지 않았다. 이제 와 퇴짜를 놓기도 미안하고, 어떻게 거절해야 하나 고민중이었는데... 불판에서 뒹굴고 있는 고기를 뒤집다 말고 나는 문득 고개를 들었다.

너네 혹시 소개팅 안 할래? 아는 형이 소개해 준다는데...

두 녀석의 깜찍한 시선들이 나에게 쏟아졌다. 입가에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귀여운 것들. 그래, 역시 나라니까. 나라면 어떤 어려운 상황이든 잘 헤쳐나갈 수 있을 줄 알았다니까! 계절학기도 무사히 끝내고, 충재와 선호의 만남도 주선하고, 소개팅 고민까지 해결한 정말 완벽한 하루였다. 나는 여유롭게 내 접시 위에 놓아 두었던 고기를 한 점 집어 먹었다. 과하게 익어 퍽퍽해진 돼지 목살이 유달리 맛나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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