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07. 23
가비지타임 박병찬 드림 | 뱅선
고개를 움직일 때마다 땀에 젖은 뒷머리가 축축했다. 뉴스에서는 매일 이른 더위가 찾아왔다며 떠들었지만 한낮의 온도가 20도를 넘지 않는 날이었다. 쌀쌀한 밤바람을 생각하며 후드 집업을 걸친 게 패착이었다. 한 시간을 넘게 걸었더니 두터운 옷감의 안쪽에 열이 쌓인다. 마지막으로 딱 한 곳, 마지막으로 여기만. 몇 번이고 마지막을 번복하지 않았다면 4월에 한여름을 체감하는 일은 드물었을 것이다. 얼굴의 테두리를 타고 흐르는 땀을 팔로 닦아낸다. 본연의 밝기를 내지 못하는 가로등 아래로 공원과 이어지는 계단이 보인다. 가뜩이나 흐린 빛이 제대로 닿지도 못하는 계단 구석에 병찬이 앉아 있었다.
저 시기의 고등학생은 입시와 사춘기가 겹쳐 야생동물 같다지만, 선오는 병찬이 ‘시기’의 범주에 들어 있을지 가늠하지 못했다. 쉽사리 제 성질을 드러내기 어려운 환경이며 성정의 얘기는 아니었다. 다만 교차점의 문제였다. 야생동물 같은 성질머리는 나이가 기준인지, 환경이 기준인지. 또래의 동생을 곁에 두었음에도 선오는 그런 문제를 오래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스스로의 템포도 보편과 어긋나는 마당에 자신과 정반대 위치에 놓여있는 타인의 상황까지 오래 생각할 만큼 너그럽지도, 인간적이지도 못했다. 그러니 코앞으로 닥친 상황에 그나마 할 수 있는 것은 병찬을 그 나이대의 소년으로, 입시와 사춘기에 시달려 털을 바짝 곤두세우고 이빨을 내비치는 덜 자란 존재로 생각하는 정도였다. 문짝만 한 그림자에 가려져 뒤늦게 마주한 맥주캔이 눈에 거슬리더라도.
공원 입구로 꺾이는 골목에서 몸 가릴 것 없는 대로 한복판까지 두어 걸음. 사람 하나 없는 적막함 속에서 신발 밑창이 흙먼지를 밟는 소리가 분명했음에도 병찬은 아래로 숙인 고개를 들지 않았다. 아스팔트 사이에서 무언가를 발견한 사람처럼 하염없이 시선을 땅에 박고 있다. 사람 대신 병찬의 옆자리를 채워주는 맥주캔은 단수였으니, 술에 취해 몇 번이고 마른세수를 반복하던 자신과 모습을 겹쳐볼 생각은 하지 않는다. 한 걸음, 잠시 여백을 두었다가 다시 한 걸음. 병찬의 시선에 선오의 신발이 들어차고 이내 쪼그려 앉은 몸뚱어리를 내려다볼 때까지 병찬은 한결같은 자세를 유지했다. 안광 없이 까맣게 죽은 눈에 미동도 없이 입가만 움찔거린다.
“서로 얼굴 볼 시간은 아닌 것 같은데.”
“엉, 근데 애 가출 신고를 받아서.”
“잘못 오셨네, 여기 애가 어디 있어.”
“나도 알지, 근데 감독님은 니가 애처럼 보이시나 봐.”
“……감독님이 누나를 어떻게 알아?”
“감독님한테 직접 연락을 받은 건 아니고……. 됐다, 얘기하면 길어. 아무튼 너 데리러 온 건데, 그냥 갈까?”
‘누나, 박병찬한테 연락 온 거 없어?’ 평소 자신을 잘 찾지도 않는 혈육에게 온 카톡 내용이 퍽 진지했다. 계산하려던 맥주를 내려두고, 냉장고에 집어넣고, 사장님께 죄송하다며 편의점을 나섰던 게 생생하다. 말 한마디가 타고, 타고, 기어코 제게까지 도달한 데에는 이유가 있었겠지. 취기 없이 멀끔한 낯이 답하지 않고 시선만 마주한다. 선오가 팔을 뻗어 계단 위 맥주캔을 집었다. 새것과 다름없는 무게감이 손끝에 또렷했다.
“아니면, 누나랑 한 잔 더 할래? 사줄게.”
병찬이 느슨하게 웃었던가, 아니다. 핀잔을 주었던가…….
선오가 묵직한 눈꺼풀을 가까스로 벌렸다. 회백색의 천장이 눈에 들어온다. 날조에 가까운 기분 나쁜 꿈이다. 당사자는 개의치 않으나 제게는 끝없는 부채감의 기원이 되는 시절이 꾸역꾸역 꿈까지 밀고 들어온다. 이렇게라도 위안을 바랐던 건지, 스스로의 자기방어에 속이 울렁거린다. 자신의 존재가 결코 희망적으로 작용할 것이라 확언할 수 없으나 의도적인 부재가 주는 죄책감에서 달아날 수가 없다. 출렁이는 흰 그물, 터져 나오는 환호성, 순간의 정적과 무릎을 움켜쥐던 ……. 선오는 급하게 시트를 걷어낸다. 슬리퍼에 발을 꿰어맞출 정신도 없이 변기 커버를 부여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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