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G3] 꿈속에 만약에

* 발더스게이트3 아스타리온xOC 글연성입니다. 

* OC(타브) 이름은 '엘(Elle)'입니다. 이 글에서는 엘이라고 지칭합니다.

* 시점은 2막과 3막 사이 부근입니다. 아스타리온과 연애 루트 돌입 후.

* 가내타브 엘의 개인적 서사가 많이 등장합니다.
   (가내타브 엘의 설정 정리는 이쪽 링크 참조:

)

* 딜루트 님(@CrowDilute)의 연성 <De Diepte>를 보고 영감과 소재를 받았습니다. 

일시적으로 과거로 돌아간 엘과, 거기서 우연히 마주친 아스타리온의 이야기

* 썸네일 출처: 

엘이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보인 풍경에 그는 아직 꿈속이라고 생각했다. 딱딱하고 축축한 바닥에 아무렇게나 깐 짚깔개의 까끌까끌한 촉감과 어두침침하고 퀘퀘한 공간은 삶에서 가장 익숙한 종류의 것이었으나, 이미 오래 전에 멀어진 향수였다. 아니, 그래야 할 터였다. 그러나 엘은 눈앞에 펼쳐진 아주 친근한 광경을 목도한다.

“엘, 언니! 얼른 안 일어나?”

“그만 좀 해라, 진짜. 누나 화내도 모른다.”

항상 아침에 가장 먼저 일어나 호들갑을 떨며 바지런을 떠는 태비. 투덜대면서도 태비와 같이 아침 준비를 하는 벤. 시끄러운 또래들 사이에서 조용히 자기 이부자리(그래봤자 짚깔개 한 장이 전부지만)를 개는 말없는 티나.

“웬일이야? 늦잠을 다 자고.”

뿌듯해 마지 않는 미소를 숨기지도 않은 채 엘의 발치에서 훤칠한 키의 청년이 내려다보며 말했다.

“가토.”

엘이 중얼거리듯 이름을 불렀다.

아침잠이 많아 제일 늦게 일어나곤 해서 매일 아침마다 아이들에게 엉덩이를 걷어차이는 게 일상인 그는, 이 좁아터진 은신처 바닥에서 다른 이들이 하루를 시작하기 위해 주변을 돌아다니고 몸을 타넘고 다녀도 꿈쩍 않고 결국 참지 못한 누군가가 두들겨 깨울 때까지 늘어지게 수면 시간을 꼭 채웠다. 그런 그보다 늦게 일어나는 이가 있다면 보통 몸이 안 좋거나, 전날 밤 사정이 있어 늦게 잠들었거나 할 때뿐이었다.

가토는 제일 오래 연을 이어온 친구다. 집을 뛰쳐나와 거리에서 혼자 떠돌아다니다 길드에 갓 들어가게 되었을 무렵, 엘은 거기에서 처음 가토를 만났다. 가토는 길드원 중 최연소자이면서 동시에 가장 관록 있는 아이였다. 기껏해야 제 또래로밖에 안 보이는 꼬마가 나름 뒷골목의 연륜을 뽐내며 다니는 것이 이상해보이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었지만, 가토는 그러한 시선을 비웃듯 늘 길드 내에서 두각을 드러냈다.

그리고 가토는, 뒷골목의 시정잡배들이 온갖 패악과 횡포를 부리는 중에도 한 번도 다른 사람에게 함부로 한 적이 없었다. 적어도 자신을 공격하지 않는 사람에게만은. 가토가 아무리 뛰어난 실력과 노하우를 가졌다 한들 그래봤자 꼬마였다. 범죄자나 떠돌이들, 한낮의 거리에 당당하게 돌아다니기를 꺼리는 이들이 모인 집단에서 튀어보이는 어린애를 어떻게 대했을지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좋겠다. 그럼에도 가토는, 다른 이들이 그러하듯 상관없는 타인에게 화풀이를 하는 짓은 않았다. 길드에 갓 들어온 꼬마 아이였던 엘에겐 그 정도면 충분했다.

가토와 엘은 비슷한 나이대에 거친 환경에서 함께 생활한다는 공통점만으로 빠르게 친해졌다. 언제나 화기애애하지는 않았으나 그 시절 친구라고 말할 수 있는 사이는 서로가 유일했다.

그리고 좀 더 나이를 먹고, 길드가 아니어도 살아남을 수 있는 연력이 되었을 때, 그리고 더 이상 참고 견딜 만한 한도를 넘었다 싶었을 때, 엘은 마음 맞는 이들 몇몇과 저보다 어린 아이들, 그리고 가토와 함께 길드를 탈출했다. 생활은 길드에 속해 있을 때보다 궁핍해졌으나 마음만큼은 편해졌다. 그리고 또 몇 년이 지나, 뿔뿔이 흩어질 이는 흩어지고, 남아있는 이는 남아, 지금의 은신처에 살게 된 것이다. 아랫도시 빈민가 구석, 지하도와 지상을 연결짓는 통로 근처에 몸 뉘일 자리만 겨우 있는 좁은 곳이었다. 판자 몇 개를 세워 벽을 만들고 천과 짚더미로 지붕을 세운, 집이라 말하기도 어려울 만큼 초라하기 그지없는 장소. 그러나, 그럼에도, 여기가 우리의 은신처, 집이었다.

엘은 몇 번 눈을 꿈뻑대다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뭔가 평소와 상태가 다름을 제일 먼저 깨달은 것은 역시 예민한 티나였다. 반듯하게 개킨 짚깔개를 구석으로 밀어 치우고 나서 머뭇머뭇 엘에게 다가와 조심스런 얼굴로 올려다본다. 엘은 조금 멍한 눈빛으로 아이를 보다가 손을 뻗어 머리에 가져다 댄다. 티나는 살짝 움찔하였으나 피하지 않았고, 엘은 자연스럽게 머리를 쓰다듬는다.

“뭔가 좀 이상한데. 너 혹시 어디 안 좋냐?”

가토가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동시에 다른 아이들도 엘의 안색을 살피고 있다. 평소 모습과 뭔가 다르다는 것을 다들 조금씩 눈치채기 시작한 모양이었다.

“⋯⋯꿈.”

엘이 한참 후 겨우 입을 열었다. 가토가 눈썹을 치켜올렸다.

“꿈? 꿈자리가 뒤숭숭하기라도 한 거야?”

“아니, 어⋯⋯.”

엘이 말을 이어가기가 어렵다는 듯 우물거렸다.

“꿈⋯⋯이었다고.”

엘은 그렇게 말하면서 머리를 흔들었다. 혼란스러운 기분이 세차게 소용돌이쳤다. ‘기억’들은 엘의 머릿속에서 선명하게 남아있었다. 소름끼치는 노틸로이드 함선에서의 불쾌한 냄새와 촉감들, 평생 겪었던 일들을 다 합쳐도 모자랄 만큼 숱하게 넘겼던 생사의 기로들, 온갖 괴짜들과의 만남과 생각지도 못했던 유대감 같은 것들.

그러나 눈앞에서 분명히 존재하는 이미지와 손끝에 느껴지는 감각은 그 기억들이 모조리 허상이고, 지금이 바로 현실이라고 일러주고 있었다.

엘은 지금 ‘노틸로이드 함선 납치’가 일어나지 않았던 순간에 있는 것이다.

친근하고 그리운 얼굴들을 보아 하니 그 사건으로부터 몇 개월 전이었다. 아니, ‘납치 사건’ 자체가 그저 꿈이고 상상에 불과하다면 지금이 바로 현재이고, 그 ‘기억’들은 전부 일어나지 않은 허상인 것이다.

엘은 자리를 박차듯이 일어나 바깥으로 나갔다. 하늘은 더할 나위 없이 화창했고 맑았다. 지나다니는 사람들은 좋은 날씨를 만끽하며 밝아 보이거나 피곤에 찌들어 시무룩해 보이는 등, 늘 보았던 일상적인 모습이었다. 세상을 위협하는 거악의 존재나 혼란스러운 정세는 눈에 띄지 않았다. 엘은 그대로 조금 더 번화가로 나갔다. 조만간 펼쳐질 서커스 공연을 예고하는 홍보지나 쥐 떼를 주의하자는 일반적인 벽보 따위만 보일 뿐, 제 기억에서 크게 달라지지 않은 발더스 게이트의 풍경이었다. 얼더 레이븐가드 대공은 여전히 건재했고 어떤 소란이나 위기도 이 도시와는 관련 없는 것처럼 보였다. 언제나 그랬듯이.

‘잘 된 건가?’

엘은 속으로 생각했다. 언제 죽을지, 아니 죽음보다 더한 꼴로 만들지 모르는 올챙이를 머릿속에 심고 다니면서 늘 전전긍긍하며, 자기 목숨 챙기기도 바쁜데 세상의 존망이 걸린 위협에 내몰려 그것을 해결해야 하는 상황에 맞닥뜨리기보다는 어느 모로 보나 평범하게 하루 끼니만 걱정하면 되었던 지금이 훨 나은 게 분명했다. 일생 발더스 게이트 바깥으로 멀리 나간 적 없던 자신이 낯선 지방을 여행하고 언더다크에도 내려가서 하루에도 수십 번 죽을 뻔하고, 평생 본 적도 없는 종족과 만나 생사고락을 같이 하며, 집채만한 괴물과 마주치거나 저주 받은 땅에서 신의 대리인과 혈투를 벌이는, 지금까지도 앞으로도 겪을 이유도 필요도 없는 경험 따위는 안 해도 되는 것이다.

생각에 잠겨 한참을 정처없이 걷던 엘은 점차 발 옮기는 속도를 떨어뜨리더니 이윽고 멈추어 섰다. 발길 닿는 대로 걷다 보니 꽤 멀리까지 나오게 된 것 같았다.

고개를 들자 눈에 익은 건물이 보였다.

<달아오른 인어>

그 간판을 보자마자 엘은 묘한 충동에 휩싸여 안으로 들어갔다.

엘과 식구들의 일상은 별다를 것 없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이들이니만큼 가장 큰 걱정은 끼니에 대한 것이다. 가장 나이가 많은 엘과 가토가 대부분의 벌이를 전담했고, 아이들은 저마다 할 수 있는 만큼의 일을 했다. 저마다의 방식으로 일을 하여 식량과 생필품을 구해 오면 모두와 함께 나누며 하루를 마무리한다. 하찮고 보잘것없는 삶이지만 나름대로 치열하고 바쁜 생활이었고, 여유란 사치로 여기며 열심히 살아왔다. 가난하고 배 곯는 밑바닥 인생이지만 그들조차도 한심하게 여기는 부류가 있다면 주정뱅이가 그러했다. 하루 동안 벌어들인 몫을 모조리 술값에 탕진해 버리고 다음날을 생각하지 않는 족속들. 술에 취한 이들이 모두 똑같은 것은 아닐 테고 각자 나름의 사정이 있을 테지만 그런 것은 별로 고려 사항이 아니었다. 고려해줄 이유도 없었고. 따라서 엘과 식구들은 길드에서 배운 기술들을 유감없이 발휘해 그런 밑바닥 중의 밑바닥 인생들의 주머니를 털어대곤 했다. 아주 손쉬운 사냥감. 한심한 바보들. 엘네들에게 있어 술집과 뒷골목의 취객들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러므로 엘이 주점에 들어가 술을 주문하여 하루 벌어들인 삯을 써버린다는 아깝기 그지없는 짓을 저지른다는 사실은 전혀 평소답지 않으며 모순투성이의 일이었다. 대낮부터 술집에 들어와 하루 대부분의 시간을 낭비하며 보낸다는, 가장 한심하다 여겼던 족속과 똑같은 행동 패턴을 그대로 따라가면서도 엘은 스스로 무엇을 하고 싶은 것인지 확신하지 못했다. 지저분한 행색일지언정 돈만 제대로 지불한다면 일언반구 없이 손님으로 맞아 떫고 쓴 맥주를 제공하는 바텐더는 엘에게도 예외가 아니었고, 엘은 1층 제일 구석에 자리를 잡고 앉아 해가 질 때까지 계속 그 자리에 있었다.

하루 동안 정말 많은 사람들이 주점을 들락날락했다. 종족도 연령대도 계층도 제각각이었다. 엘은 새삼 이렇게 다양한 사람들이 도시를 나다닌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사람들이 오고 가는 모습을 이토록 오랫동안 가만히 앉아 바라본 것은 갓 거리에 나왔을 때 잠깐 구걸하던 때 이후로 처음이었다. 하루종일 사람들을 관찰하는 것 말고는 할 일이 없던 시절이었다. 그때 엘은 사람들의 표정을 읽는 법을 익혔다. 숨죽이고 가만히 앉아 존재감을 지우고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하는 대화를 엿듣는 법도. 입밖으로 내뱉는 말과 다른 몸의 미묘한 움직임을 눈치채는 것도. 그 모든 것들이 엘의 생존 기술이 되었다.

이윽고 해가 완전히 지고 슬슬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 무렵, 엘은 막 정문으로 들어온 손님 두 명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키가 큰 남자 둘이었는데, 짧고 어두운 색의 머리를 가진 탄탄한 체격의 인간과 큰 모자를 쓰고 있어 얼굴은 잘 보이지 않지만 머리 사이로 튀어나온 뾰족한 귀로 보아 엘프인 것으로 추정되는 호리호리한 체형의 남자였다. 인간 쪽이 성큼성큼 거만한 걸음으로 바텐더에게 다가가더니 큰 목소리로 말했다.

“방 하나.”

바텐더는 눈썹을 까닥거리며 인간 남자를 쳐다보았다.

“우리는 숙박을 받지 않는데.”

인간 남자는 허튼소리 말라는 투로 콧방귀를 뀌었다.

“이거 왜 이래. 곤드레만드레 된 주정뱅이 단골을 위한 방 하나는 항상 마련해두고 있잖아. 지금은 비었을 텐데?”

바텐더는 눈살을 찌푸리며 남자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짧게 한숨을 쉬고는 손을 쑥 내밀었다.

“침대는 하나뿐이고, 다른 설비는 없소. 애초에 여관이 아니니. 내일 동트기 전까지는 방을 비워야 하고. 선불이요.”

“알았어, 알았어. 충분해.”

남자는 노골적으로 귀찮다는 듯 손을 붕붕 내저으며 동전을 내밀고 바텐더에게서 열쇠를 받아냈다. 그 일련의 과정 동안 동행인 엘프는 말없이 옆에 서서 지켜볼 뿐이었다. 인간 남자는 열쇠를 받자마자 서둘러 할 일이라도 있는 듯 쿵쿵대며 계단을 올랐고, 엘프는 뒤를 따랐다.

딱히 기이한 조합은 아니었다. 수많은 유형의 군상을 보아온 엘에게 인간과 엘프의 짝은 흔해 빠진 유형에 속했다. 술집에서 몸을 부비적대는 놈들이야 발에 채이도록 지천에 깔렸고, 어떤 사정이 있건 무슨 사이건 제 알 바가 아니었다.

그러나 엘은 이번에도 평소와 다른 유형의 행동을 취했다. 구석 자리에서 두 사람이 술집에 들어오자마자 쭉 지켜보던 그는 계단 위로 사라진 둘을 뒤따라 올라갔다. 그리고 2층 구석에 창고 방처럼 작은 문을 열쇠로 열고 들어가 다시 닫으려는 순간, 엘이 몸을 문에 부딪히듯이 닫히는 것을 막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뭐야?!”

느닷없이 들이닥친 침입자에 놀란 남자가 소리쳤다.

“어멋, 손님이 있었잖아? 세상에, 죄송해요!”

엘이 호들갑스럽게 손을 입 근처에서 팔락대며 높은 목소리로 말했다.

“너 뭐야?”

“죄송해요, 죄송해요. 여기 종업원인 유나라고 해요. 이상하다, 오늘은 마스터가 방 쓰는 손님 없다면서 청소 빡빡 해두라고 했는데?”

어안이 벙벙해진 두 명의 표정을 무시한 채로 엘은 뻔뻔하게 되도 않는 연기를 이어나갔다. 연기는 엘이 자신하는 특기였다. 빠르게 돈을 버는 방법 중 하나로 엘은 이러한 연기를 십분 활용하곤 했다. 사람들의 시선을 끌고 뒤로는 주머니를 턴다든가, 기부금을 받으러 다니는 사제인 척 위장하여 돈 좀 있는 치들의 동전을 받아먹는다든가, 일일이 열거하자면 끝도 없을 정도다. 엘은 자신의 연기 실력을 이용하여 사람들을 설득할 줄 알았다. 표정과 태도, 자연스러운 대사 처리가 상황을 그럴듯하게 만들고 믿을 수밖에 없게 만드는 것이다. 연기는 곧 설득이었다.

잠시 멍해졌던 둘 중 인간 쪽이 먼저 퍼뜩 정신을 차린 듯 입을 열었다.

“야, 똑바로 일 안 해? 방금 방 빌렸어. 청소는 됐으니까 나가.”

인간은 엘의 어깨를 손으로 퍽퍽 치며 밀쳤다. 엘은 정말로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연신 고개를 숙였다.

“죄송해요, 죄송해요. 전 손님이 하도 지저분하게 방을 써서 꼭 청소를 하라고 마스터가 신신당부를— 어라?”

엘은 인간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며 표정을 과장되게 변화시켰다. 처음에는 의아, 다음에는 놀람, 그 뒤에는 당황스러움으로. 그 표정을 보는 상대가 오히려 의문을 가질 정도로. 결정타는 뒤이어 덧붙인 한 마디였다.

“세상에, 어떻게 부부가 연속으로…….”

인간 남자의 눈이 우스꽝스럽게 커졌다. 남자는 그 말을 듣자마자 우악스레 엘의 양팔을 커다란 손으로 붙잡고는 무식하게 흔들어댔다.

“뭐? 방금 뭐랬어? 그게 무슨 뜻이야? 어?!”

“꺄악! 손님, 이러지 마세요…….”

“방금 뭐랬냐니까? 무슨 뜻으로 한 말이냐고, 어? 부부라니? 너 우리 마누라 알아?”

엘은 겁에 질린 듯이 파르르 몸을 떨다가 하는 수 없다는 듯이 훌쩍거리는 소리까지 내며 말을 이었다. 여기서 오래 일했던 자신은 손님들의 얼굴을 거의 기억하고 있는데, 예전에 여기 손님 부부가 왔던 것도 기억한다. 그러다 바로 어젯밤 손님의 아내라고 생각했던 여자가 다른 남자와 함께 방을 쓰는 걸 보고 의아하다 생각했었다. 게다가 하도 난잡하게 일을 치렀는지 마스터의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니어서 더욱 인상에 깊게 남았었다고. 그런데 오늘 또 이렇게 손님을 보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으며, 말실수를 하여 무척 죄송하다는 말까지 덧붙였다. 물론 전부 거짓말이었다. 엘은 이런 인간 따위 생판 처음 보지만, 자연스럽게 바텐더에게 방을 요구하는 태도를 보고 처음 이곳에 방문한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고 남자의 말투나 생각없이 내뱉은 소리로 대충 앞뒤가 맞게끔 이야기를 지어냈을 뿐이다. 침착하게 하나하나 따져보면 이상하다 생각할 만한 여지는 충분했지만 다행이라 해야 할지 이자는 성질머리만 급한 인간이었던 모양으로 엘의 이야기를 듣는 내내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다가 결국 씩씩거리며 방을 뛰쳐나갔다.

“안녕히 가세요~”

엘은 그자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진 것을 확인하고는 생긋 웃으며 방문을 향해 손인사를 했다.

“야, 너 뭔데?”

그 때, 뒤에서 차분하면서도 짜증스러운 투의 목소리가 들렸다.

“너 여기 종업원 아니잖아. 내가 여길 몇 번을 다녔는데 너 같은 녀석은 한 번도 못 봤어. 누구야? 무슨 수작인데?”

엘은 천천히 뒤돌아보았다. 창백한 피부와 붉은 색 눈동자, 은백색의 머리칼이라는 특징적인 외모보다도, 상처와 멍투성이인 얼굴이 더 눈에 띄는 엘프 남자가 침대 끝에 걸터앉은 채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엘은 두 사람이 술집에 들어오자마자 알아차렸다. 모자를 눌러써서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눈에 익은 인영을. 귀를 덮듯이 내려온 새하얀 빛깔의 머리칼과 가볍게 움직이는 발걸음. 그것을 깨닫는 순간 엘은 벼락이라도 맞은 기분이었다.

아스타리온.

엘은 저도 모르게 큰 소리로 이름을 부르려던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그리고 빨라지는 호흡을 진정시키며 상황을 이해하려고 애썼다.

아스타리온. 아스타리온이다.

그가 여기 있다는 것은 즉, 모든 건 꿈이 아니었다는 뜻이다. 노틸로이드 납치 사건도, 괴짜나 다름없는 특이한 친구들의 만남도, 몇 번이고 죽을 뻔한 고비를 넘기며 헤쳐온 모험도 모두. 그리고 꿈에서 깨어난 것이라 생각하며 잊으려고 몸부림쳤던 연인의 존재까지도.

모든 것을 깨달은 엘은 냅다 그리운 연인에게 달려들기보다 현재 취해야 할 가장 적절한 행동이 무엇인지 따지기로 했다. 지금까지 갈고 닦은 기술로 두 사람의 행색과 말투를 엿보고 엿듣고 관찰한 뒤, 엘은 한 가지 결론에 이르렀다. 예전에(아니 어쩌면 미래에) 아스타리온이 설명해주었던 과거 이야기대로 그는 지금 카사도어의 지배 하에 있는 뱀파이어 스폰이며, 항상 해왔던 ‘밤 사냥’을 실행하는 중이라고. 자세한 부분은 말을 아꼈지만 아스타리온의 ‘밤 사냥’은 아주 오래되었고 그만큼 천차만별의 상황이 있었을 것이다. 손쉬웠던 적도, 뜻대로 되지 않았던 적도 있었을 테고 가끔은 끔찍할 만큼 일이 안 풀렸던 적도 있었으리라. 그리고 조금 거리를 좁혀 가까이서 아스타리온의 행색을 관찰하던 엘은 이번이 그 ‘끔찍한’ 상황 중 하나이지 않을까 생각했다. 모자로 감추려 했지만 아스타리온의 얼굴에는 방금 생긴 것 같은 상처와 멍들이 눈에 띄었다. 꼭 동행한 인간의 짓이라는 보장은 없었으나 아스타리온의 상처를 신경 쓰기보다 모자로 대충 감추기만 한 행태로 미루어보건대 크게 다를 바 없어 보였다. 엘은 저 천박한 인간이 문을 완전히 걸어 잠그기 전에 빨리 상황을 정리하기로 마음먹었다.

“내 말 안 들려? 너 누구냐니까?”

그러나 상대가 누구인들, 어떤 괴팍한 성질을 가졌든 종국에는 한낱 ‘사냥감’에 불과할 뿐이며, 또한 ‘사냥의 의무’를 완수해야 하는 그에게 엘의 참견은 영 마뜩잖은 짓이었던 것 같다. 아스타리온은 점차 목소리를 높였다.

“……내 이름은 엘이야. 네 말대로 여기 종업원은 아니고, 그냥 손님.”

“아, 그러셔. 손님 엘 씨. 그럼 한 가지 물어볼까요? 갑자기 뛰쳐들어와선 되도 않는 거짓말까지 해 가며 남의 즐거운 한때를 방해한 이유는 뭘까요?”

“딱히 즐거운 한때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엘이 아스타리온의 얼굴을 가리키며 말했다.

“뭐? 네가 뭔 상관이야? 남의 낯짝이 어떻게 생겨먹었건, 변태 같은 취향이 있건 말건 왜 참견이시냐고? 씨이발, 다 잡아놓은 걸 웬 거지 같은 게!”

아스타리온은 밀려오는 짜증을 참지 못한 듯 벌떡 일어나서 쓰고 있던 모자를 냅다 던졌다. 이 방이 다른 평범한 여관처럼 꽃병이라도 하나 놓여있었다면 그걸 집어던졌겠지만 바텐더의 말마따나 침대 이외의 집기라곤 아무것도 없는 휑뎅그렁한 방에서 손에 집힐 만한 게 저가 갖고 있는 옷가지 정도밖에 없었던 탓이다.

엘이 딱히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해 가만히 있자, 아스타리온은 그가 당황하여 말문이 막혔다 생각했는지 계속 분에 못 이긴 말들을 쏟아냈다.

“왜? 예상과 달랐나? 뭐, 곤경에 처한 사람을 구해주기라도 한 줄 알았어? 고맙다는 말이라도 듣고 싶었나봐? 어쩌냐, 가련한 피해자가 아니라서 미안하게 됐네! 내가 알아서 할 일이었어. 다 계획대로였다고! 쓸데없는 참견만 안 했어도 다 된 밥이었는데. 이걸 어떻게 책임질 거야?”

원래의 엘이었다면, 즉 아스타리온을 모르고 그를 겪지 않았던 엘이었다면, 이런 폭언을 듣고 얌전히 있을 리 만무했다. 똑같이 받아치거나 들이받거나 것도 아니면 뒤를 후려치고 보복하거나. 아니 애초에 이 사태에 엮이지 않았을 터였다. 하지만 다른 누구도 아닌 아스타리온이다. 엘은 누구보다도 그를 안다. 어쩌면 지금 본인이 모르는 그의 모습까지도.

그렇다 해도 지금 엘이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다. 솔직하게 털어놓자니 지금의 그가 믿어줄 것 같지 않았다. 자신은 아무래도 미래에서 온 것 같고, 미래에 너와 동료이자 친구, 동시에 연인이 된다고 말한들 정신이상자 취급을 받지나 않으면 다행이겠다. 적당히 거짓말을 하거나 그럴듯한 변명을 늘어놓는 것도 방법이겠지만, 엘은 왠지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우리 집에 올래?”

그래서 엘은 이런 말밖에 할 수가 없었다. 아스타리온의 얼굴에 노기가 사라지며 ‘진짜 또라인가…?’ 같은 표정이 떠오른 것은 결코 착각이 아닐 터였다.

“도대체가 이런 날도 다 있네? 신기하기도 해라.”

가토가 호들갑스럽게 바닥에 널부러진 지푸라기와 먼지들을 치우며 말했다. 치우나 안 치우나 그다지 다를 바 없는 장소긴 했지만.

엘이 밤 늦은 시간에 새로운 사람과 함께 은신처로 돌아오자, 식구들은 당혹스러움 반 신기함 반 섞인 얼굴로 엘과 갑작스러운 손님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엘은 타인을 함부로 믿는 타입이 아니다. 능청스러운 태도나 장난스러운 성격은 모두 그를 보는 시각에 경계심을 늦추게 하기 위한 모습일 뿐, 엘은 사교적인 사람이 아니었다. 길거리에서, 그리고 길드에서 지내면서 온갖 경험을 해본 그는 자신의 울타리에 함부로 타인을 들이지 않았다. 그는 믿어도 되는 사람, 자신의 사람이라고 확신할 때까지 아주 오래 걸리는 타입이었고 따라서 친구라고 부를 만한 이도 거의 없다시피 했다. 지금의 식구들 이외에는. 그러므로 엘이 식구들도 모르는 낯선 이를 은신처로 데려온 것은 대사건이었던 것이다.

그런 사정을 알 리 없는 아스타리온은 지금 내가 왜 여기에 있으며 어쩌다 이렇게 된 건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얼굴로 가토를 비롯한 엘네 식구들의 단출하지만 나름대로 신경 쓴 대접을 받고 있었다. 티나가 쭈뼛쭈뼛대며 저녁에 먹다 남은 감자 한 알을 아스타리온에게 가져다 주었고 벤이 이 빠진 물컵을 그 앞에 내려다 놓으며 대놓고 아스타리온의 얼굴을 흘끔댔다. 태비는 제일 뽈뽈대며 주위를 맴돌며 부산스럽게 입을 놀렸다.

“저기요, 저기요. 언니하고 무슨 사이예요?”

“그게 아니잖아, 태비. 이름부터 물어봐야지!”

“이름이 뭐예요? 왜 그렇게 얼굴이 하얘요?”

“와, 눈색 좀 봐. 새빨간 눈동자 처음 봤어. 예쁘다.”

“감자 좋아해요? 먹을 게 감자밖에 없어요. 엘 대장이 젤루 좋아하는 게 감자라서 감자는 좀 있어요.”

태비가 물꼬를 트자 아이들은 너도 나도 앞다투어 하고 싶은 말들을 쏟아냈다. 엘은 이 아이들이 원래 이렇게나 수다스러웠던가 의아했다가, 이제껏 은신처에 손님을 데려온 게 처음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스타리온은 쏟아지는 질문 폭격을 받다가 처량한 눈빛으로 엘을 쳐다보았다. 도와줘.

엘은 피식 웃으면서 아이들 사이를 가르며 다가와 아스타리온 옆에 섰다.

“자자. 이제 그만. 얘가 낯을 가리니까 그만 하자. 그리고 감자는 됐어, 티나. 내일 너 먹어. 저녁 먹었으니 괜찮아.”

엘이 그렇게 말하고 가토를 바라보자, 가토는 눈치 빠르게 끄덕이더니 아이들에게 말했다.

“자, 얘들아, 늦었다. 얼른 자. 내일 늦게 일어나면 아침밥 없다!”

아침밥으로 꼬드기는 게 가장 효과가 확실한 법이었으므로, 아이들은 금세 아스타리온에게서 멀어져 가토를 따라갔다. 겨우 이 좁은 공간에 엘과 아스타리온 둘만이 남았다.

“애들이 신기했나봐. 식구들 말고 다른 사람이 여기 온 게 처음이라. 저러다 흥미 떨어지면 금방 식겠지.”

엘은 조금 민망한 기분을 느끼며 아스타리온을 바라보았다. 언젠가 아스타리온에게 자신의 ‘집’을 소개해주겠다는 생각은 있었지만, 그건 정확히 말해서 ‘미래’의 일이다. 그림자땅을 지나서 발더스 게이트에 무사히 도착한 뒤의 이야기. 설마 이런 식으로 그를 데려오게 될 줄은 몰랐다.

“넌 대체, 뭐야?”

아스타리온이 느릿하게 말했다.

“……뭐냐니? 너무 광범위한 질문인데? 내 이름은 아까 말했으니 그건 아닐 거고.”

“말 돌리지 마. 넌…… 이상해.”

아스타리온이 눈동자를 데굴 굴렸다. 혼란스러운 일을 겪었을 때 시선을 딴 데 잠깐 두는 것은 그의 버릇이었다. 엘은 속으로 여전하네, 라고 생각했다.

“집으로 가자고 해서 딴 속셈이 있나 했더니만 그런 것도 아닌 것 같고, 묘하게 나에 대해 아는 것처럼 굴지를 않나…….”

엘은 살짝 아차 싶었다. 아스타리온은 식사를 하지 않으니 필요 없다는 뜻에서 저녁 이미 먹었다고 티나에게 거짓말을 했는데 그게 좀 이상해 보였을까. 이 시점에 적당히 그럴듯한 이유를 생각해내는 게 자연스러워 보이리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엘은 여전히 그에게 거짓말은 하고 싶지 않았다.

“뭐, 그냥 알아.”

그래서 이런 퍽 수상쩍은 답이 나와버리고 만다. 자신을 응시하는 아스타리온의 시선이 따가울 지경이었지만 엘은 애써 무시한다. 그 와중에 물컵은 아스타리온 앞에 밀어 놓아주며.

“왜 날 데려왔어? 내가 불쌍해서?”

아스타리온이 물었다. 아까보다는 훨씬 침착한 말투였다.

“까놓고 말해서 내가 딴 사람 불쌍해 할 처지는 아니지.”

엘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솔직한 심경이었다. 내 코가 석 자인데, 누가 누굴 딱하게 여길 여유가 있겠는가.

“나한테 원하는 게 뭐야?”

아스타리온이 무표정하게 물었다. 그 얼굴을 보며 엘은 이것이야말로 그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며, 가장 하고 싶었던 질문임을 알았다.

“……너랑 친해지는 거.”

그래서 엘은 자신이 할 수 있는 가장 솔직한 대답을 했다. 엘에게 있어 최선의 대답이었다. 적어도 그 순간에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 말을 듣자마자 바로 다음 아스타리온이 행동을 취하기 전까지는.

잠시 동안 엘은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몇 번이나 눈을 깜박거리고 난 뒤에야 엘은 아스타리온이 얼굴을 붙여왔으며 떨어진 거리를 0으로 만들었음을 알았다.

“읏, 아…?”

겹쳐진 입술 사이로 끈적거리는 마찰 소리와 함께 움직이면서 미묘하게 틀어진 틈으로 엘의 놀란 한숨이 새어나왔다. 아스타리온은 한쪽 팔로 엘의 목을 감싸안고 다른 손은 뺨에 얹은 채 무척이나 자연스럽고 세지도 약하지도 않은 적당한 힘을 가하면서 엘의 입술을 자신의 것으로 지분거렸다. 놀라 숨을 들이키며 입이 살짝 벌어지자 당연하다는 듯 혀가 밀어 들어왔고, 입안 곳곳 예민한 부분을 하나하나 골라 건드리듯이 부드럽고 능란하게 만져댔다. 입안에서부터 몰아치듯 덮쳐오는 쾌감에 날아갈 것 같은 정신을 겨우 붙들고, 엘은 그와 함께 춤추며 움직이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고서 아스타리온의 어깨를 붙잡고 밀어냈다.

단단히 얽혀 풀리지 않을 것 같던 입술이 엘의 저지로 떼어지자 타액이 둘 사이에 길게 흔적을 남기며 서로의 것을 연결시켰다. 아스타리온은 영문을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엘을 바라보았다.

“…왜?”

“하지 마.”

“뭐? 어째서? 별로였어? 그럴 리가 없는데.”

“그게 아니라……” 엘은 손등으로 입술을 닦았다. “아무튼, 하고 싶지 않아.”

아스타리온이 얼굴을 찌푸렸다.

“친해지고 싶다면서.”

엘은 그 말을 듣고 맥이 탁 풀리는 기분이었다. 그 말을 이런 식으로?

“이런 뜻이 아니었어.”

아스타리온은 허, 하고 어이가 없다는 듯 숨을 뱉는 소리를 냈다.

“이런 뜻이 아니면 뭐지? 이름도 모르는 사람을 처음 본 날에 자기 집에 들이면서 친해지고 싶다고 하면 내가 달리 뭐라고 해석하란 말이야?”

엘은 머리가 지끈거렸다.

초면인 사람을 난데없이 집으로 초대하길래 목적이 따로 있는 줄 알았다. 가봤더니 다 쓰러져 가는 거지촌에, 식구들도 복닥복닥 많이도 같이 살고 있어서, 생각했던 그런 게 아닌가 싶었다. 그런데 집에 데려온 이유가 친해지고 싶어서란다. 그럼 그렇지. 너라고 다르겠어. 그럼 원하는 대로 해주자. 별로 어려울 것도 없는걸.

—이런 흐름이었으려나. 엘은 아스타리온의 사고 흐름을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이는 그의 잘못이 아니었다.

‘그러고 보니 내가 이름도 안 물어봤군.’

아스타리온이 아스타리온이라는 사실은 너무나 자명해서 이름을 묻는다는 당연한 절차를 건너뛰었다는 사실을 이제야 깨달은 탓이다. 오해를 한 것도 어쩔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 이름이 뭐야?”

엘이 마지못해 묻자 아스타리온은 다시 한 번 하, 하고 한숨을 뱉었다.

“노이.”

“엉?”

엘이 눈썹을 치켜올렸다. 아스타리온의 표정은 조금도 변화가 없었다. 조금 치켜든 턱과 살짝 아래로 향하며 반쯤 감은 눈.

본명을 말해줄 생각은 없다 이건가.

“그래, 뭐, 그렇다 치고.”

“그렇다 치고?”

“좋아하는 게 뭐야?”

아스타리온은 대꾸할 말도 잃어버린 듯 입을 딱 벌렸다. 얼굴에는 ‘진짜 뭐하자는 거야?’라는 표정이 고스란히 떠올라 있었다. 엘은 조금 재미있어져서, 새어나오는 웃음을 지우려는 노력도 하지 않았다.

“난 감자가 좋아. 버터 바른 감자는 특히 사족을 못 쓰지. 버터가 워낙 비싸고 귀한 거라 구하기는 어렵지만. 그리고 새 동전. 돈이야 언제나 가치가 똑같고 다 좋지만, 이왕이면 깨끗하고 반짝반짝한 게 좋지. 새 동전은 냄새도 다르다니까.”

너는? 그렇게 묻는 듯이 엘이 고개를 까닥하자 아스타리온은 입을 뻐끔거리며 뭔가 말하려다 다시 다물었다.

“……갈래.”

아스타리온이 벌떡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엘이 놀라 따라 일어났다.

“뭐? 벌써?”

“나랑 하고 싶은 것도 없다면서. 시간만 버렸어.”

“하고 싶은 게 없다니, 기껏 대화 시도라는 사교성을 발휘하고 있는데.”

“나한테는 없는 거나 마찬가지야.”

“잠깐, 아스타리온—”

그가 정말로 떠나려고 문(이라는 구색을 갖춘 낡아빠진 천쪼가리)을 향해 망설임 없이 성큼성큼 걸어가자, 마음이 조급해진 엘은 그를 냅다 불러세웠다. 그리고 뒤돌아선 그의 표정을 보자마자 아차 하고 입에 손을 가져다 댔다.

그것은 분노였을까? 아니면 당혹? 혹은⋯⋯ 공포?

밤의 뱀파이어는, 스폰이어도, 강력한 포식자에 속한다. 강하고 민첩하며 흉포하다. 또한 목표로 삼은 사냥감을 놓치는 법이 없다.

아스타리온은 눈 깜빡할 사이에 엘을 땅에 쓰러뜨려 위에 올라탄 뒤 목을 한손으로 틀어쥐었다.

“윽!”

“언제부터지? 처음부터 알았나? 아니, 나에 대해 어디까지 아는 거야? 목적이 뭐지? 넌 사냥꾼인가?”

“아파, 이것 좀 놓고⋯….”

“똑바로 대답하지 않으면 더 아플 거야.”

아스타리온이 손에 준 힘을 풀지 않으며 말했다.

“숨을 쉬어야 대답을 하지…!”

붉은 눈동자가 형형히 빛난다 싶더니 엘은 목이 조금 편해진 것을 느꼈다.

기침 소리를 내며 숨을 몰아쉰 엘은 살기 어린 눈으로 저를 내려다보는 그를 보면서 단단히 실수했다는 생각을 했다. 무심코 이름을 불러버린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이야기하지 않았던 것이 실수였다. 어정쩡하게 굴다가 결국 들통날 바에야 애초에 숨기지 않는 게 나았다. 사실은 말하고 싶었으니까. 나는 지금도 그리고 이후의 미래에도 너를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라고. 그러니 알아봐 달라고.

엘은 모든 것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넌 미래의 나랑 만난 사람이라고.”

“응.”

“일리시드 함선이 갑자기 발더스 게이트에 쳐들어와서 사람들을 납치해선 머릿속에 올챙인지 뭔지를 심고 다니는데, 그 때문에 나는 일시적인 자유를 얻게 된다고.”

“응.”

“⋯⋯지금 그걸 믿으라는 거야?”

“나도 말하면서 놀라는 중이야. 새삼 상황이 너무 미쳐 돌아갔다 싶어서.”

아스타리온은 엘의 이야기가 하도 기상천외한 탓인지 목을 쥔 손에 힘을 점차 빼고 있었다. 그래도 완전히 놓아주기엔 경계심이 덜 풀려서 엘을 여전히 땅에 눕힌 채였다. 예전—아니 미래—에는 이런 자세라면 유혹적이네, 자기, 같은 대사를 쟤가 먼저 자연스럽게 내뱉었을 텐데 지금은 아무래도 그런 상황과는 거리가 멀겠지. 엘은 아스타리온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여러 가지 감정이 스쳐지나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내가 거짓말을 하고 싶었으면 이거보다는 좀 더 그럴듯한 이야기를 꾸며냈을 거야. 말하자마자 미친 녀석 취급 받을 만한 헛소리가 아니라. 게다가 넌 알잖아. 내가 말한 너에 대한 이야기가 전부 사실이라는 걸. 그리고 너에 대한 이야기를 말해줄 사람은 오직 너뿐이라는 걸.”

이윽고 아스타리온의 손이 완전히 떼어졌다. 그는 엘에게서 조금 거리를 벌리고 뒤로 물러났다. 엘은 후, 하고 길게 숨을 내쉬고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앉았다.

“내가 낮에도 돌아다녀?”

“가끔 일광욕도 해.”

“가고 싶은 데는 아무 데나 가도 되고, 하고 싶은 건 맘대로 하고?”

“너무 자제가 안 돼서 문제지. 네가 소매치기하다 중간에 들켜서 내가 수습한 게 몇 번인데. 들킬 때까지 주머니를 한도 없이 털면 당연히 걸리지.”

물론 안 들키면 문제는 안 되지만. 덧붙인 말을 듣고 피식 실소를 뱉은 것은 아스타리온 스스로도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내 주인…을, 네가… 죽여줄 거야?”

아스타리온이 입에 담기에도 어려운 듯이 힘겹게 말했다.

“응, 그리고 아니. 카사도어를 죽이는 건 네가 될 거야. 나는 옆에서 도울 뿐이고.”

엘이 단호하게 말했다. 아스타리온의 복수를 가로챌 생각은 없었다. 그의 복수는 그의 것이다. 자신은 쭉 곁에 있겠지만, 실행하는 것은 본인이 되어야 한다.

아스타리온의 얼굴에 온갖 감정들이 떠올랐다. 의심, 기대, 희망, 두려움. 그는 고개를 떨어뜨렸다.

“난…… 뭘 하면 돼?”

떨리는 목소리. 엘은 냅다 끌어안고 싶은 충동을 누르면서 그의 물음에 대한 대답을 고민했다. 기다려. 버텨줘. 날 믿어. 내가 좋아하는 만큼 너도 날 좋아해주면 좋겠어.

“……살아있기?”

그 중에서도 가장 필요한 것을 말했다. 단 한 가지, 필요불가결의 조건. 나머지는 네가 정해. 그렇게 덧붙이자 한숨인 듯 고뇌인 듯한 웃음이 그의 입에서 새어나왔다.

“너무 어렵네.”

“능력 좋잖아, 뭘.”

“그런 말은…… 처음 들어봤어.”

“그래? 그럼 익숙해지도록 해. 너는 유능하고 끈질기까지 한, 우수한 전사야. 나중에 다시 만나게 되면 내가 알뜰살뜰하게 써먹을 거거든?”

아스타리온은 동요한 듯 시선을 흔들다가 그대로 옆으로 내리며 빠르게 입술을 깨물었다 놓는다.

“나중에.” 아스타리온이 반복했다.

“응, 나중에.” 엘이 따라했다.

“그럴 거면, 그냥, 네 말이 사실이면…… 계속 있어주면 안돼? 나중에 말고. 그냥 지금.”

시선은 여전히 피한 채다. 엘은 잠시 그를 빤히 응시하며 제 손등을 문질렀다.

“……‘그럴게.’라고 단언할 수 있으면 좋았겠지만.”

엘은 손을 뻗어 아스타리온의 뺨에 대고 자신을 쳐다보게 했다.

“내가 미래를 잠깐 경험하고 온 건지, 아니면 지금이 특이한 거라서 다시 원래 시간대로 돌아가게 될 건지는 몰라. 나도 현재 상황에 대해서 확실하게 말할 수 없는 입장인데 함부로 약속 같은 걸 할 순 없어. 지켜지지 않는 약속이 얼마나 뼈아픈지 아니까.”

“세상엔 ‘빈말’이라는 이름의 처세술도 있어, 자기.”

“에이, 싫어하면서.”

“미래의 내가 그런 말도 했어?”

“아니, 티를 냈지. 아닌 척 하면서.”

둘은 동시에 낮게 낄낄거렸다.

“자기 이름이…… 엘, 이었지.”

이번엔 아스타리온이 먼저 입을 연다. 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한 가지 약속해줘, 엘. 이번만은 빈말이어도 좋고 거짓말이어도 좋아. 상관없어. 그냥 알겠다고 해. 그러겠다고 말해줘.”

“……뭔데?”

“나를 기억해.”

눈을 맞추고 있느라 엘은 미처 보지 못했지만, 아스타리온은 너무 주먹을 꽉 쥔 나머지 거의 피가 배어나올 지경이었다. 그는 초조한 듯이 말을 이었다.

“네가 앞으로 어떻게 되든, 여기 남든 미래로 돌아가든, 날 기억해. 설령 다시 찾아오지 못하더라도…… 나를, 잊어버리지 마.”

그러면 됐어. 그렇게 말하고 그는 다시 고개를 떨어뜨렸다.

엘은 지금, 그러니까 카사도어의 스폰이던 시절의 아스타리온의 입장을 새삼 생각하게 되었다. 그가 자신을 믿는 게 아니다. 믿을 수 있을 리가 없다. 아스타리온에게 있어 엘은 오늘 처음 만났을 뿐인, 믿지 못할 별소리를 하는 괴짜에 지나지 않을 터이다. 그런 사람에게 이렇게까지 말하며 매달릴 수밖에 없는 처지임을.

“응, 그래.”

그렇다면 기대에 부응할 수밖에 없잖아. 엘은 싱긋 웃어보이며 말했다. 최대한 밝고 환하게.

“무슨 일이 있어도 널 만나러 올 거야. 그럴 수 없게 되더라도, 내 모든 걸 걸고 발버둥칠 거야. 반드시 너를 만나서, 껴안을 거야.”

그 말을 듣고 아스타리온이 웃는다.

“누가 안겨 준대?”

“어라, 너무 자신만만해하지 않는 게 좋을걸.”

엘이 심술궂게 말하며 팔짱을 낀 채 거드름 피우는 자세를 취했다. 웃으면서 그를 보던 아스타리온은 스스로 경계심이 허물어지고 있음을 느끼지만, 혀끝에서 맴도는 말을 소리로 뱉지는 못했다.

다음 날 밤, 창백한 피부의 엘프는 홀로 거리를 걷는다. 망토를 써서 얼굴과 머리를 가리고, 발소리를 낮추어 기척을 숨기면서 눈에 띄지 않도록 한다. 그의 화려한 용모는 은밀한 상황에서 유용하지만 사람이 많이 다니는 대중적인 장소에서는 불필요한 이목을 집중시킬 때도 있기 때문이다.

일정한 보폭을 유지하며 걷던 창백한 엘프는 문득 발을 멈추고 하늘에 휘영청 떠오른 달을 올려다본다. 바로 어제, 같은 시간, 그는 이 조용한 골목길이 아닌 지저분하고 시끄러우며 온갖 역겨운 냄새가 뒤섞인 장소에 있었다. 옆에는 영 취향은 아니지만 속이 뻔하게 다 보여서 입맛대로 조종하는 건 별로 어렵지 않았을 사냥감이 하나. 그리고 일이 제대로 흘러갔더라면 지금쯤 전혀 기쁘지 않을 칭찬을 듣고, 운이 좋다면 덜 역한 쥐 한 마리를 먹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무슨 일일까? 엘프는 어젯밤의 일이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정확하게는 특정한 시간부터 기억이 잘려 나갔다는 표현이 맞겠다. 무식하게 힘만 세서 팔다리를 적당히 휘두를 줄도 모르는 멍청한 놈팽이와 함께 술집에 들어갔던 것까지는 기억나는데, 그 다음부터 눈을 떠서 하루를 새로 시작할 때까지의 시간이 머릿속에서 비어있었다. 술을 진탕 먹고 기억을 잃기라도 했단 말인가? 그런 건 불가능했다. 왜냐하면 자신은 살아있지 않으니까.

그는 사라진 기억의 일부라도 떠올리려 무진 노력했지만 헛수고였고, 더 이상은 시간 낭비라는 결론에 이른다.

엘프는 유난히도 밝은 달을 한참 동안 그 자리에서 바라본다. 그리고 망토의 두건을 벗고 머리를 드러낸다. 달빛이 닿자 그의 은백색 머리칼이 빛을 반사하듯이 반짝거린다. 그는 눈을 감고 마치 월광욕이라도 하듯 달빛을 가만히 받는다.

이윽고 엘프는 다시 걸음을 옮긴다. 전보다 조금 더 큰 보폭과 발소리로.

-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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