샘플 3
은영리안
회색 바탕에 빨간색과 갈색, 파란색의 선이 가로질러가는 테니스 스커트. 리안이 입고 있는 교복 끝이 나풀댔다. 리안의 시선 끝에는 은영이 아른거리고 있다. 언뜻 보기에 서늘한 느낌이 드는 얼굴이지만, 속내는 그렇지 않다는 걸 리안은 알고 있다. 일전에 잠시 마주친 기억을 더듬어보노라면, 은영과 보낸 시간은 퍽 재미있었다. 리안의 정체를 들켜서는 안 되기에 기억을 지우기는 했지만... 은영과 같은 시간을 보냈다면 누구나 그와 친해지고 싶으리라.
“은영아, 점심 맛있게 먹었어? 나는 다 먹자마자 너랑 놀고 싶어서 얼른 왔는데. 이거, 너 주려고 챙겨왔어. 마이쮸.”
슬슬 여름 날씨에 가까워져 가는 걸 증명하는 듯한 푸른 하늘과, 초여름의 향기가 물씬 풍기는 바람까지. 그리고 리안의 손바닥 위에 얹어진 포도맛 마이쮸 하나. 표정에는 변함이 없다지만, 리안의 다정함이 가슴 속에 파고드는 느낌이었다. 은영은 지난번의 만남을 곱씹었다.
*
견습 마녀인 리안은 젤리 괴물을 해치워야 하는 사명이 있다. 그것들은 밤이면 모습을 드러내곤 했다. 인가를 배회하며 전깃줄을 끊어내거나, 애꿎은 나무를 집어삼키며 사고를 쳐댔기에 반드시 없애야 했다. 앞으로 몇십 마리는 더 해치워야 정식 마녀로 승급할 수 있다.
그나마 그것들은 밤에만 나와서 천만다행이었다. 낮이었다면 마녀로서 활동하기 퍽 불편했을 테니까. 리안은 어김없이 등장한 곰돌이 모양의 젤리 괴물을 잡으러 지팡이를 챙겨 들고 나선 참이었다. 실컷 처치하고 그 뒤처리를 위해 주문을 외던 순간─.
“채리안?”
“응?”
어쩐담. 리안이 다니는 학교 교복과 같은 디자인의 옷을 입은 은영이, 리안을 목격했다. 수상쩍은 검은 로브를 뒤집어쓰고 지팡이를 휘두르는 모습과 부스러진 상태의 노란 젤리 괴물 흔적까지. 리안은 미처 주변을 살피지 못한 자신의 실수에 아차, 싶었다.
“안녕. 은영이구나.”
“이게 무슨 일이야...?”
“말하자면 나는 마녀야. 견습 마녀. 이것들은... 내가 무찔러야 할 대상이고.”
“마녀...? 혹시 꿈인가, 여기?”
“그런건 아냐. 음... 혹시, 하늘 날아봤어?”
리안은 지팡이 끝에 매달린 젤리 조각을 휘휘 흔들어 떨구어내며 대답했다. 어차피 일반인은 마녀의 정체를 알아서는 안된다. 그러니 은영의 기억은 지워야 했다. 하지만 리안은 썩 내키지 않았다. 자신의 부주의로 벌어진 일이니 멋대로 은영의 기억을 지우기 미안했다.
약간의 변덕이었을까? 당황하고 있는 은영을 끌어당긴 리안은, 빗자루 위에 올라 높이 날았다.
뺨과 머리카락을 스치는 시원한 밤바람. 허공에서 내려다보는 도심은 아름다웠다. 달이 손에 닿을 것만 같은 높이에서 리안은 신난 듯 목소리를 높였다.
“은영아, 어때? 재밌지 않아?”
“엄청. 조금 춥긴 한데... 재미있어. 리안이 너는 항상 하늘 나는 거야?”
“음... 날고 싶을 때 날지. 친구랑 나니까 더 재밌다.”
그래도 은영이가 봐서 차라리 다행이었다. 표정이 다채롭지 않은 리안이지만, 목소리에서는 제법 즐거움이 묻어났다. 은영은 리안의 허리춤을 붙잡은 채 옅은 웃음을 흘렸다.
그렇게 어두운 밤하늘을 누비다, 이름 모를 호수의 깊은 곳까지도 탐험했다. 어둠 속에 잠긴 도심의 밤을 자유롭게 다니는 건 환상 같은 일이었다. 만화 속 주인공이라도 된 기분. 은영은 이 밤의 기억을 영영 잊지 못하리라 생각했다.
“오늘 재미있었어?”
“응. 특히 하늘 날아본 게 재미있었는데.”
“다행이다. 그래도 좋은 경험이 된 거잖아. 음... 아쉽지만, 규칙은 규칙이라...”
리안은 지팡이를 들고 한번 휘둘렀다. 은영은 그 모습에, 어쩌면 정말 영국 어딘가에 호그와트가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
“안녕, 은영아. 나 리안이야.”
“어, 안녕.”
그리고 며칠 뒤. 은영은 당황했다. 기억을 지우는 과정이 아니었나? 사실 그 정도는 대충 예상했던 일이기도 했다. 대부분의 매체를 보면, 정체를 들킨 후에는 꼭 상대방의 기억을 지우니까. 미안해하는 말투나, 그전에 실컷 신기한 경험을 했으니 당연히 기억을 지우는 줄 알았다.
하지만...
웬걸, 지워지지 않았다. 여전히 은영에게는 리안이 마녀라는 사실이 각인되어 있다. 리안과의 즐거운 밤 나들이가 선명했다. 하지만 리안이 아무렇지 않게 다가오는 걸 보니, 리안은 마법이 실패했음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는 것 같았다. 은영은 애써 내색하지 않으며 리안을 대했다.
“조금 갑자기라 놀랐어? 은영이 너랑 친해지고 싶어서 인사해 봤어. 우리 친구 할까.”
“우리 원래도 친구잖아. 같은 학교면 다 친구지.”
“그런 거야? 그럼 더 잘됐다. 이미 친구니까 우리 거리는 이미 가까운 거잖아.”
표현에 거침이 없는─그렇다고 마구잡이로 들이대는 성향은 아닌 것 같지만─ 리안의 말에, 은영은 제 귀 끝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리안은 참 솔직한 친구였다. 친절한 말투와는 퍽 다른 무표정한 얼굴. 하지만 그 속내는 햇볕을 가득 받은 바스락대는 낙엽같이 포근했다. 이게 리안의 천성이겠지. 은영은 기꺼이 리안의 친구가 되었다.
그리고 한동안은 평화로웠다. 은영은 리안이 어떤 친구인지에 대해 더 잘 알게 되었다. 두 사람은 함께 도시락을 먹고, 매점을 가고, 하교를 하며 부쩍 가까워졌다.
은영은 땅거미 지는 시간에 바라보는 리안의 옆모습이 좋았다. 흰 피부에 노을이 비쳐 발갛게 보이는 모습까지도 좋았다. 나직한 시간, 함께 집으로 향하는 길에는 종종 그날 밤의 리안이 떠오르기도 했다. 제 몸보다 품이 큰 로브를 걸쳐 소매 끝으로 비죽 나온 희고 작은 손. 야무지게 지팡이를 틀어쥐고 주문을 읊조리며 흩어진 젤리 괴물의 조각들을 정리하는 모습까지.
은영은 기억을 곱씹다 그제야 깨달았다.
리안이를 좋아하게 되었구나.
따뜻한 말 한마디에 스며들었을까. 리안이 건네는 말은 그저 그런 응원과, 지나가듯 툭 던지는 말과는 달랐다. 진심을 꼭꼭 눌러 담아 솔직하게 건네는 단어들. 은영을 고려해 이루어진 문장들. 은영은 리안이 말하는 걸 들으면 귀가 화끈거리곤 했다. 정작 말하는 리안이는 전혀 부끄럼 한 점 없는 반응이었지만.
은영은 슬쩍 리안이의 손을 툭 건드렸다. 그리고는 저를 쳐다보는 리안에게 미소를 지으며 손을 잡았다. 손가락이 얽어들며 따뜻한 체온이 느껴졌다.
“체리. 그냥 친구 말고... 가끔 손 잡고, 데이트도 하는 친구는... 어때?”
은영이의 물음에 리안은 가만히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수줍어하고 있구나. 귀가 또 빨갛다.
“좋아해, 은영아.”
리안의 단정한 고백에 은영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 많은 미사어구를 붙인 고백보다는 진솔한 마음이 담긴 한 마디에 마음이 벅차올랐다.
“좋다, 우리는 가까워졌고, 노을이 지고 있고... 노을이 비추는 네 모습은 정말 예쁘고.”
“은영아, 너는 내 말이 쑥스러운지 곧잘 귀 끝이 빨개지잖아. 나는 그게 참 귀엽더라.”
은영의 귀가 다시금 붉어졌다. 노을 때문이라며 둘러댔지만.
*
평화는 길지 않았다. 어쩔 수 없는 노릇이기도 했다. 마녀로서의 사명이 이런 거라면. 그날 밤에도 리안은 벙벙한 핏의 검은 로브를 걸치고, 행여나 누가 알아보기라도 할까 봐 챙이 넓은 모자까지 챙겨 쓴 채 나섰다. 이번에는 토끼 모양의 젤리 괴물이 뒷발로 아스팔트 도로를 파내고 있었다. 저러다가 싱크홀이 생기지! 리안은 서둘러 지팡이를 꺼내 들었지만─
“아!”
토끼 젤리 괴물이 펄쩍 뛰어버렸다. 높이 도약한 젤리 괴물은 리안의 근처에 착지했고, 그 바람에 리안은 지팡이를 놓치고 말았다. 다급히 바닥을 살피며 어디로 떨어졌는지 두리번거리던 때였다.
“체리야! 맨홀 위에 떨어졌어!”
익숙한 목소리.
“은영아?”
“조심해! 뒤에서 또 뛰어온다!”
리안은 몸을 날려 재빠르게 지팡이를 붙잡았다. 은영이가 어떻게 알았지? 다소 혼란스러웠지만 지금은 저 토끼 젤리를 무찌르는 게 급선무였다. 그냥 곰 모양일 때는 걷기만 해서 괜찮았는데, 토끼는 뜀박질을 해대고 뒷발을 구르니 영 주문을 조준하는 게 쉽지 않았다. 리안이 지팡이를 겨눠 커다란 공기방울 속에 젤리 괴물을 가두었다. 호흡하지 못하게 된 젤리 괴물은 그 안에서 서서히 허물어져 갔다.
“체리야, 괜찮아?”
마무리를 하고 나니 제 곁에 후다닥 달려오는 은영의 모습이 보였다. 리안의 몸 여기저기를 살펴보고는 덥석, 끌어안기까지 했다.
“깜짝 놀랐어... 편의점 가는 길에 저 괴물이 보여서... 체리가 있을 거라 생각해서 급하게 뛰어왔어.”
“은영아. 내가 마녀인 거 기억하고 있었어?”
“응. 사실... 그때 기억이 지워지지 않은 것 같아. 선명하게 떠오르거든.”
분명히 기억을 지우는 마법을 썼던 것 같은데... 리안은 당황했지만, 이제는 지난 일이다. 게다가 은영이는 이제 명실상부한 남자친구인데. 꼭 기억을 지울 필요가 있을까.
“은영아, 그때 재밌었어?”
“너무 재미있고 신선한 경험이었지. 그 때의 일을 잊었다고 해도, 나는 너를 좋아했을 거야.”
“너한테 좋은 기억이라면, 굳이 또 지우지는 않을래. 그래도 괜찮아?”
“체리가 이런 괴물을 무찌를 때... 곁에서 돕고 싶어. 도움은 안 되겠지만. 하다못해 응원이라도 해주면 내가 좀 덜 불안할 것 같아서 그래.”
커다란 젤리 괴물을 무찌르는 위험한 자리에 은영이가 와주길 바라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리안도 그날의 추억을 혼자만 간직하기란 아쉬웠다. 영화 속 장면처럼 마냥 즐겁게 웃고 떠들던 추억.
“역시, 그날 누구도 아닌 은영이가 나를 봐줘서 다행이야.”
새하얀 리안의 얼굴이 반짝이고 있었다. 은영은 밤이면 나타나는 견습 마녀를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자신의 기억을 지운 줄 알고 서슴없이 다가오던 모습도, 가끔 하굣길 나누던 가벼운 키스도, 지금처럼 은영의 품에 안겨 허리를 끌어안고 있는 모습까지도.
“내가 대신해줄 수 있는 일이면 그렇게 해주고 싶기도 해.”
“이건 나만이 할 수 있는 일인걸. 그래도 은영이가 응원해 주면 힘이 되겠다. 기억은... 지우지 않을래. 우리가 같은 추억을 공유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기쁜걸.”
하룻밤의 실수와 그 실수로 이어진 인연. 리안에게는 모두 소중한 것들이다. 그중에 제일은 은영이지만. 둘은 오늘도 하늘을 떠오르며 밤의 도시를 구경한다. 차가운 밤공기를 가르며, 다디단 말을 서로에게 속삭이며. 은영은 리안의 허리를 끌어안은 채, 리안은 모자가 날아갈세라 한 손으로 모자를 붙든 채로.
커다란 달빛이 두 사람을 비추었다. 은은한 빛 아래 놓인 견습 마녀와, 마녀의 연인. 그날 밤, 유례없이 밝은 별똥별이 하늘을 수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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