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량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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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초여름, 여자는 초여름의 햇살에 볼을 물들이고 잡화점의 문을 열었다. 쏟아지듯 구불거리는 금빛 머리칼에 새파란 눈동자가 반짝였다. 대학에 다니는 젊은이들에게 유행하는 옷차림으로. 마치 홉킨스 씨의 가게처럼 오래된 가게는 처음 와본다는 듯 수줍게 고개를 들이밀었다. 그녀는 물건을 고르면서 맥스에게 몇 가지 질문을 던졌다. 그중에는 물건과는 전혀 관련
그해 겨울 어느 날은 날씨가 무척 추웠고, 전날 싸라기 같은 눈이 잔뜩 왔다가 한번 녹은 탓에 길이 심하게 얼어 있었다. 자연히 손님이 찾지도 않는 잡화점을 여는 둥 마는 둥 지키다가 해가 지고서야 그날의 첫 끼니를 때웠다. 그는 담배를 한 대 피우고 잠깐 거실을 서성이다가, 주택 뒤편에 얼마 안 되는 잡동사니를 쌓아 둔 창고로 들어가 오랜만에 기타를
그날 역에 도착하는 마지막 기차에서 내렸을 때 시간은 거의 새벽 한 시에 가까웠다. 밤하늘에 낀 구름 때문에 하늘은 회색에 가까웠고, 공기 중에서는 날카로운 풀 냄새가 났다. 맥스 홉킨스는 기차역을 지키던 역무원에게 가볍게 인사를 건넨 뒤 기차역의 불빛을 등지고 몇 걸음 걸어가다가 곧 무언가가 생각난 듯이 멈춰 서 돌아보았다. 하지만 밝은 빛 때문에 아무
아나히스는 마침내 어느 갈림길 앞에서 멈춰섰다. 소란스러운 밤손님처럼 한참을 달린 뒤의 일이었다.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눈 앞에 보이는 길을 따라 무작정 달렸다. 어디에서 떠나왔고, 지금은 어디에 있는지 알 길이 없었다. 풀무처럼 숨을 거칠게 몰아쉬는 말의 목을 도닥이다가, 덜컥 생각이 미끄러졌다. 죽지 마요. 목이 덜컥 무거워졌다. 아나히스는 길을 달
05 할스 마법사가 바다 냄새를 잊어버렸다고 생각할 즈음의 일이었다. 친우라 부르는 이들이 몇 있었다. 서로 명줄 걱정하는 사이라면 누구든 그렇게 부를 수 있었겠으나, 사랑이라는 버릇은 간사해서 늘 그보다 더 원하곤 했다. 마법사는 그들에게 곁을 내줘야겠다고 선택했고 그 대가로 30년을 지불했다. 가끔은 필요 이상의 치유 마법을, 그보다 자주 집요하
01 간밤 꿈에는 그리운 이의 젖은 발이 나왔다. 이곳에서 꾸는 꿈이 숲이 부리는 수작에 불과하다는 사실은 새파란 신입 감시자도 알고 있다. 그럼에도 거스르지 못하고 흘러든다. 숲을 바라보고 누워 그 안에 있을 늙은 흑마법사의 불결한 흔적을 생각하다 잠들 때. 숲에서 나서 숲에서 죽을 사람이 되기 전의 기억을 되새길 때마다 있었던 꿈. 물 아래 그림자
약관을 이미 넘겼다고는 믿기 어려운 그 레인저가 마을에 나타난 것은 어느 한가한 오전의 일이었다. 그는 녹색 망토의 모자를 머리에 뒤집어썼고, 잘생기고 어려 보이는 흰 말의 고삐를 느슨하게 쥐고 있었다. 안장의 앞머리에는 글라디우스가 가로로 놓였고, 등에는 시위를 메겨 놓은 장궁을 멨다. 까마귀 모양으로 세공된 망토 배지가 목 근처에서 둔탁하게 빛났다. 말
어떤 숲그림자에서도 여자를 찾지 못했다. 네펠레 숲을 떠나온 지 2주가 지났고 젊은 레인저는 여전히 여자의 손을 탄 안대를 쓰고 있었다. 생의 수치를 아는 눈을 가리는 물건이다. 그의 검은 안대는 바늘의 발걸음을 기억하고 있다. 여자의 손길을 기억하는 뺨과 얼굴을 기억하는 눈이 그에게 아직 있다. 트리스탄 오데어는 기억의 숲에 가장 아픈 기억을 두고 왔
에이라 그웬돌린 델라니는 짧은 순간, 유년의 조각을 돌이킨다. 사람의 마음을 흔들고 지나가는 숲의 봄바람, 터지는 꽃망울과 발목께를 스치는 젖은 풀, 소리로 가득한 그림자 속의 내달리는 작은 동물들. 맨발로 푹신한 흙 위를 걸었던 기억. 뒤에서 그를 소리 높여 부르는 목소리. 달리기 시작한다. 길게 늘어지며 에이라, 산들바람이 둥글려 살며시 깨뜨리고 마는
늦봄의 어느 밤은 서늘하고 이슬의 기색이 어려 있다. 트리스탄은 김이 오르는 찻물을 바라보았다. 언뜻 붉고, 그보다 조금 갈색에 가까운 듯하다. 향 나는 풀을 대충 냄비에 넣고 끓인 방랑자들의 차와는 차원이 다른, 값비싸다면 값비쌀 사치품. 근 몇 달 사이 그의 입은 이런 물건에 익숙해졌고 트리스탄은 그것이 달가웠다. 정성이 들어간 물건을 접할 수 있다는
1980년 여름, 까만 배냇머리의 남자아이가 포대기에 싸여 디트로이트 남부의 뒷골목에 도착했다. 그때 아이는 클리브 라몬테인이라고 불렸으며, 그마저도 자주 언급된 적 없었다. 모친은 그를 낳다 죽었으며, 손위의 형제 제이슨 라몬테인이 생계를 책임졌다. 배운 것 없고 할 줄 아는 것 없는 디트로이트 할렘가의 젊은이가 택한 일은 어쩌면 당연하게도, 깨끗하지
여기 이안 머레이라는 작자가 있다. 하루의 8할 정도는 카페인 중독성 두통을 앓으며 지내던 사람이다. 매일 아침 사무실 앞 카페에 출석 도장을 찍지 않으면 하루를 심하게 망치고 마는 부류였다는 뜻이다. 물론 다른 모든 교양 있는 회사원과는 다르게, 그 과정에서 그가 자신의 하루뿐 아니라 남의 하루도 같이 망친다는 것이 눈에 띄는 흠이기는 했다. 그런 그에게
선장 일지. 우주력 2260. 24. USS Starman. USS 스타맨의 선장 루 라몬테인이다. 현재 임무 사항, 중립 지대 성운 내부에서 감지되는 미확인 형태의 신호 추적, 미확인 유기 종족 존재 여부 확인. 현재 연방 순양선 USS 스타맨은 목표 성운에 도달 중이다. 대상 확인 후 보고 예정. 라몬테인 선장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 수신기에서 짧은
아티야 베르게르트는 어둡고 오래된 방 안에서 눈을 떴다. 그날이 어떤 날인지 가늠할 수 없었다. 단지 창밖이 썩 밝지 못했고, 안개 어린 공기밖에 없었다. 묵직하고, 축축하고, 질질 끌리는 공기. 맨살에 닿는 차가운 습기 때문에 몸을 조금 웅크리며 아티야는 생각했다. 정말 살기 거지같은 곳이라고. 침대 밖으로 한쪽 다리를 미끄러뜨리고, 이어 다른 다리까
모든 이야기는 본래 실제로 있었던 일이므로, 아주 오래전에 한 사건이 있었다고 시작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모두가 두려워하는 탐욕스러운 용이 있었고, 용을 죽인 한 영웅이 있었다. 그는 불살의 몸으로 사랑을 쟁취했으나 끝내 비극적인 죽음을 맞았다. 죽은 영웅의 이야기는 시간이 흐르며 차츰 흐려졌다. 실제로 있었던 일에서 이야기가, 이야기에서 전설이, 그리고
멸망은 팔다리를 던지고 시체들 사이에 누워 있다. 전쟁이 할퀴고 간 자리는 깊었다. 정의로운 살인자들이 피 웅덩이를 밟고 절뚝이며 걷고 있었다. 희끄무레한 희망의 숨소리. 이곳에서 사람이 죽었으므로 터지지 않는 함성이 있다. 그러나 그날, 선의가 승리했으므로 절규하지 않는 자들만이 걷는다. 황궁을 향해, 황좌를 향해, 악취 어린 부패와 탄압과 핍박과 혼란
화창한 목요일이었다. 아니, 어쩌면 금요일이었는지도 모른다. 그윈은 아침 느지막히 일어나 커튼을 젖혔다. 펠리컨 마을 사람들이 비밀의 숲이라고 부르는 그 공터는 햇빛이 부족하거나 습하지는 않았지만 음울한 나무 그늘이 짙었다. 집 뒤편의 나무가 바람에 흔들리며 나뭇잎을 몇 개 떨어뜨렸지만, 그런 것에 신경 쓸 만큼 예민했더라면 이런 시골 마을의 외딴 오두막에
간만입니다. 제 안부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계신 듯해 급히 전합니다. 저 객사는 고사하고 뻔뻔하게도 살아 있습니다. 그런데 솔직히 이걸 잘 살아있다고 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여기 사정을 보면 좋게 쳐줘도 살아남은 것에 가깝겠죠. 어쨌든 어딘가에 숨은 붙어 있다고만 알아두시면 될 것 같습니다. 지금 있는 곳은 북쪽 바다입니다. 설원을 건너는 것까지는
까마귀는 나무 위에 앉아 있었다. 가지 위에 웅크려 올린 발밑으로 정수리가 몇 개인가 지나갔다. 추격자들에게 숨소리도 들키지 않으려 애써야 했다. 숨도 닿을 법한 거리에 이르자 아예 호흡을 멈췄다. 길 위의 정수리는 다행히 얼굴이 되지 않고 지나갔고, 수풀 사이로 뒤통수들이 사라졌다. 그제야 까마귀는 숨을 조심히 뱉었다. 갔어. 한쪽 팔을 옆으로 늘어뜨린
그러니까 수중에 가진 거라고는 둘로 쪼개지는 이름자밖에 없는 그 레인저가 담배를 처음 입에 댄 것은 무려 열아홉 살의 일이다. 폭풍 숲과 그 근방의 또래 애들보다 훨씬 늦은 나이로, 그들은 대체로 어른들의 담배를 훔쳐다 피웠다. 하지만 소년에게는 담배를 순순히 도둑맞아 줄 어른도, 그런 어른들에게 꿀밤을 맞아가면서도 꿋꿋하게 금지된 일을 저지를 멍청함도 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