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nfido

2부 4화

첫 오순절(시도폰 귀환)

“잘 다녀와! 나중에 보자.”

제 방에서 손을 흔들어주는 시도폰에게 카리타스는 마주 웃어주고 나왔다. 카리타스의 침대 옆 마루엔 두꺼운 이불이 두 겹 깔려있었고 시도폰은 거기에 앉아서 책을 읽으며 닫히는 문 사이로 계속 손을 흔들었다.

“같이… 계셨군요.”

“네, 아무래도 오래 함께할 시간이 나질 않아서 이렇게라도 해야겠더라고요. 좋은 아침입니다.”

아페는 말없이 눈인사만 건네고 회의장으로 향하는 카리타스를 따라갔다. 시도폰이 카리타스와 친하게 지냈으면 좋겠다고 말했지만 그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때만 생각하면 아직도 난 소름이 돋는데, 저 사람은 아무렇지도 않은가?’

아페가 이곳에 오고 나서 얼마 되지 않아 첫 봉사활동을 갔을 때 카리타스는 잠깐 가게 시찰을 다녀오겠다며 홀로 이탈했다. ‘시종도 두고 갈 이유가 있는 건가?’라는 의문에, 아이들에게 물건을 나눠주던 아페는 몰래 카리타스가 가겠다고 말한 가게로 향했다. 가게 문 앞에 도착한 아페는 주변을 살펴보았지만, 사람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어디에 있는 거지?’

숨을 죽인 아페에게 작은 말소리가 들렸다. 누군가가 괴로워하는 소리에 당황한 아페는 소리를 따라갔고, 가게와 가게 사이의 좁은 틈에서 형형하게 빛나고 있는 자작나무들을 발견했다. 그리고 나무 사이에 꿇어앉은 누군가와 그 사람을 죽일 듯이 노려보며 무어라 말하고 있는 푸른 눈의 성녀를.

“저, 저기… 저 좀 도와주세요.”

꿇어앉은 이가 아페를 발견하고 빌었지만, 아페의 발은 땅에서 떨어질 생각을 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카리타스는 그이의 시선을 그대로 따라가 서늘한 하늘색 눈동자로 아페를 바라보았다. 고개를 전혀 돌리지 않고 눈동자만 굴려서 자신을 보는 모양에 더더욱 겁에 질린 아페는 겨우 용기를 내어 무슨 일을 하는 거냐고 물었다. 형편없이 떨리는 목소리를 수치스럽게 생각하지도 못할 정도로 겁먹은 아페는 대답이 없는 카리타스를 더 추궁하지도 못하고 뒤로 돌아서 도망쳤다. 이상한 울음소리가 그늘에서 새어 나왔지만 이내 무언가에 막혔는지 조용해졌고 아페는 그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궁금해하지 않기로 했다.

‘그걸 말해야 할까? 아냐, 말해도 아무도 믿지 않겠지.’

시도폰의 순진한 얼굴이 아른거렸다. 하지만 그 사실을 말하면 자신도 카리타스에게 무슨 짓을 당할지 모른다. 조용히 입을 다물고 웅크리고 있는 수밖에 없겠다고 생각한 아페는 회의가 끝날 때까지 카리타스의 눈을 피했다.

“1부는 여기서 파하겠습니다.”

교황의 말이 끝나자마자 회의실의 문이 열렸다. 뛰쳐나가고 싶은 마음을 꾹 참고 천천히 걸어나간 아페는 회의실에서 멀어질수록 속도를 올렸다. 먼저 찾은 곳은 도서관이었다. 직접 돌아다니면서 찾기는 불가능할 것 같아, 사서에게 시도폰이 여기에 들렸느냐고 물었고 사서는 고개를 저었다.

‘훈련장이 이쪽이었지, 훈련 중인가? 시끌시끌하네.’

조심스레 훈련장으로 향한 아페의 눈엔 커다란 하늘색 불꽃이 들어찼다. 불꽃의 중심엔 시도폰이 아페를 등진 채 서 있었고 그 맞은편엔 신전의 기사 한 명이 왼 무릎을 꿇고 주저앉아있었다. 하지만 그이의 얼굴엔 분해하거나 슬퍼하는 기색이 전혀 없었다. 그는 턱까지 흘러내린 땀을 닦고 일어서 검을 다잡았고, 의연한 그 태도에 주변 사람들의 환호성은 더욱 커졌다. 자세히 보니 관중들은 북부와 남부의 기사단들이었고 한구석엔 아이들도 앉아있었다. 도저히 끼어들 수 없겠다고 생각한 아페는 관중들 사이로 숨어들었다. 베론에게 들켜서 돌아가라는 말을 듣고 싶지는 않았기에 남부 기사단 쪽으로 자리를 잡았고 자신을 알아본 기사들에게 조용히 해달라고 부탁했다.

“혹시 저기 집행자와 대련 중인 기사의 이름을 알 수 있을까요?”

“오드샤라고 합니다. 올해 들어온 신임 기사인데 다짜고짜 집행자께 대련을 신청했다고 하는데 알고 보니 집행자와 함께 북부 수행을 했다고 하더군요.”

“그렇군요…. 신성력을 사용한 전투는 처음 봐요.”

오드샤는 근접 거리에서 검을 사용하고 거리가 벌어지면 화살을 만들어내어 쏘는 방식으로 전투에 임했는데 시도폰은 거리와 상관없이 상시로 불을 사용하였다. 화살은 불에 잡아먹혀 그대로 고꾸라졌고 검은 창에 막혀 무용지물이었으니 오드샤가 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대련이 끝나고 시도폰은 오드샤와 악수했다. 둘이서 뭐라 대화하는 것 같았지만 거리가 먼데다 주변이 시끄러워서 내용은 전혀 들리지 않았다. 대화를 끝낸 시도폰은 수건으로 얼굴을 닦으며 주위를 둘러보다가 아페와 눈이 마주쳤다.

“빨리 씻고 올게요.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시도폰의 외침에 사람들의 시선이 아페에게 쏠렸고 아페는 손을 흔들어주다가 베론에게 끌려가 제대로 혼이 났다. 억센 이들이 그득한 훈련장에서 이리저리 부딪히다가 다치면 어쩔 뻔하셨냐, 혹시라도 잘못 조준된 공격에 맞았으면 어떻게 되는지 아느냐 등등 베론이 잔소리를 하는 동안 다른 기사들은 철저히 두 사람을 외면한 채 훈련장을 치웠다.

“베론! 아페 님은 저 찾느라 여기까지 오신 거라고요. 따지자면 제 잘못이 커요.”

급하게 씻고 오느라 머리카락에서 물이 뚝뚝 떨어지는 시도폰이 베론에게 달려들었다. 물방울이 제게 튀는 것에 기겁하며 베론은 뒤로 물러났고 아페는 그제야 벗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머리카락은 제대로 말려야 하지 않을까요? 5월이라 따뜻하긴 하지만 잘못하면 감기에 걸리실 수도 있잖아요. 곧 북부로 돌아가야 한다고 하셨으니 몸조심하셔야죠.”

진심 어린 아페의 걱정에 폰은 괜찮다고 말하며 당당하게 가슴을 폈다. 도대체 왜 이러나 싶었던 아페는 살짝 거리를 둔 시도폰이 신성력으로 만들어낸 불로 머리카락을 말리는 기상천외한 광경을 보고 눈을 휘둥그레 뜨고 말았다.

“제발 바깥에서 그런 거 하지 마십시오.”

베론은 한숨을 푹푹 쉬었다. ‘뭐 어때요, 잘 말랐으니까 된 거 아녜요? 전 이제 아페 님이랑 놀러 가볼게요.’라며 시도폰은 아페와 함께 훈련장을 나섰다. 호기롭게 놀자고 제안하긴 했지만, 아페도 신전에서 두 사람이 할 만한 놀이라곤 딱히 생각나는 게 없어서 난감했다. 시도폰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게 가능하기만 하다면 어디라도 별로 상관이 없기도 했고.

“음…, 아페 님은 어디 가고 싶으세요? 저는 여기 자주 와보질 않아서, 아니 제대로 보는 건 이번이 처음이라 뭐가 있는지도 잘 모르거든요.”

“그럼 도서관부터 가볼까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신보다 더 신전을 모르는 시도폰에게 의지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아페가 생각해낸 제안에 시도폰은 미묘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지만, 아페는 이미 앞서 걸어가고 있었기에 시도폰이 느릿한 걸음으로 따라가고 있다는 것을 전혀 알 수 없었다. 속으로 ‘책은 별로 읽고 싶지 않은데, 다른 오락거리가 있을 것 같진 않네.’라고 생각하던 폰의 시야에 보호소 아이들이 스쳐 지나갔다. 개중엔 솔라도 끼어들어 있었는데 아이들 사이에 전혀 이질감 없이 잘 놀고 있었다. 같은 보호소 아이들이니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한편으로는 저를 향했던 솔라의 눈빛과 대조되는 느낌이라 그 광경이 매우 어색했다. 모른 체하고 지나가려던 폰의 발에 공이 굴러왔다.

“잠시만요 아페 님. 공을 돌려주고 오겠습니다.”

“죄, 죄송합니다. 어디 다치신 곳은 없으세요?”

“응, 세게 날아온 것도 아니니까 괜찮아. 그렇지만 신전 안에서 공놀이를 할 거라면 훈련장이 낫지 않을까? 여긴 정원이잖아, 아무것도 없는 것 같긴 하지만.”

“훈련장은 기사님들이 쓰고 계시니 훈련을 방해할 순 없죠. 집행자께서 아까 신전 신임 기사님과 대련하셨던 것처럼요.”

어느새 공을 가지러 온 아이 뒤에 솔라가 서 있었다. 소리도 없이 다가온 솔라가 익숙한지 아이는 놀라는 기색도 없었다. 솔라는 말을 하려다 폰의 뒤에서 기다리고 있는 아페를 발견했는지 공손하게 인사만 하고 뒤돌았다. 아페와 솔라 사이에서 고민하던 시도폰은 결국 아페를 선택했고 도서관에서 졸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집중하지 못하는 게 티가 나는 바람에 아페는 도서관은 역시 별로였냐며 미안해했다. 빈말로라도 괜찮다고 대답할 수 없었던 시도폰이 고개를 끄덕였고 두 사람은 도서관을 나와 하염없이 걸었다.

“그냥 이야기나 할까요? 시장에라도 가자고 하고 싶은데 아페 님은 못 나가실 것 같아서요.”

“죄송해요, 제가 아직 어려서 함부로 돌아다니면 안 된다고 하시더라고요. 어제 시장에 친구분들이랑 다녀오셨죠? 재밌으셨나요?”

“정말 좋았어요. 저는 이번에야 알게 됐는데 집행자는 따로 재산을 가질 수 없대요. 웬만하면 교회에서 사다 주니까 여태까진 불편함을 딱히 느끼지 못했는데 시장에서 아무것도 못 사면 재미없잖아요. 그래서 슈바헨 사제님께 억지로 돈을 얼마 받아올 수밖에 없었는데….”

사람들에게 들킬까 봐 얼굴을 적당히 가릴 수 있는 후드를 쓴 시도폰은 아이들의 호위를 받으며 시장을 돌아다녔다고 이야기했다. 두코가 이상한 도마뱀 구이를 프라이에에게 들이밀어 기겁하게 했다거나, 호위 임무라고 따라온 오드샤가 되려 시장의 잡스러운 물건에 정신이 팔려 일행에서 떨어졌다거나, 멀리서 돌을 구경하고 있던 코지와 프라이에를 부르던 폰이 제 옆에 있던 상인에게 정체를 들켜 쩔쩔맸던 일 같은 것들을 줄줄 풀어놓았다.

“그럼 그분은 어떻게 되신 건가요?”

반짝이는 눈빛으로 폰의 이야기를 경청하던 아페가 불쑥 끼어들었다.

“다행히 별일 없었어요, 조용히 해달라고 부탁하니까 그대로 입을 닫고 제게 인사만 하시더라고요. 옛날에 코지랑 함께 산 팔찌를 팔던 분이셔서 알아보셨나 봐요.”

아페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시장에 나가서 있었던 일을 다 이야기하고도 시간이 남아서 두 사람은 침묵 속에서 잔디를 밟으며 떠돌았다. 늦은 오후 특유의 차분한 공기가 두 사람을 스쳐 지나갔고 맑았던 하늘엔 구름이 꼈다. 문득 아페가 올려다본 시도폰은 그늘진 얼굴로 무작위의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시도폰은 아페에게 퍽 친절하고 다정하게 굴었지만, 그건 관심의 표현이 아니라 그저 그 사람이 선하기 때문에 일어난 일인 것 같았다. 질문에 세세한 답변을 주긴 하지만 되묻지 않고, 위험할까 걱정은 하지만 지켜줄 테니 함께하자고 제안하진 않는다.

‘친하게 지내자 하셨던 것도 카리타스 님 때문이셨던 걸까? 아냐, 그렇게까지 생각하고 싶지 않아.’

그때 복도에서 여러 명의 발걸음 소리가 울렸다. 묵직하지만 느리진 않은 걸음걸이가 고위 사제들의 옷자락 아래서 일렁였고 그들에게 가려진 작은 아이는 어느새 홀로 복도에 멈춰있었다. 아이는 이쪽을 똑바로 바라봤다. 먼저 그 시선을 느끼고 돌아본 것은 아페였지만 뒤늦게 돌아본 폰이 아이에게 더 일찍 닿았다. 제게 같이 가자고 손짓해준 것은 배려였을까 기만이었을까? 아페는 그들 사이에 끼어들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이대로 뒤돌아버리고 시도폰의 곁에 자신이 아닌 카리타스가 서 있는 상황을 상상하니 속이 메슥거렸다. 웃는 낯으로 카리타스에게 인사하자는 생각을 하면서도 아페는 시도폰과 단둘이 있을 적의 웃음을 보일 수 없었다. 카리타스는 그런 자신의 태도를 다 파악한 것 같은데도 일말의 흔들림 없이 착한 척, 태연한 척 잔잔하게 웃었다.

“재밌게 놀았어? 미안, 회의가 항상 늦게 끝나서 같이 놀 시간이 없네.”

“그게 네 잘못은 아니잖아. 피곤하진 않아? 못 본 사이에 마른 것 같은데.”

시도폰의 농담에 카리타스는 그럴 리 없다고 부정하면서도 제 얼굴을 괜히 만져보았다. 그 모양새를 바라보는 폰의 얼굴이 너무 행복해 보여서, 아페는 거짓말로 자리를 파했다.

“5월인데 추우시다니, 몸이 약한 편이셨구나.”

“…그러게. 그러고 보니 원체 약하게 태어나신 편이라고 하더라고. 감기에 걸린 것처럼 보이진 않았으니 내일 되면 괜찮아지시겠지. 근데 이번에 오드샤가 기사로 발탁된 거 알아? 북부에서 활약을 인정받아서 여자들도 기사가 될 수 있게 됐대.”

“맞아! 사실 오늘 만나서 오드샤랑 대련했는데 북부에 있을 때보다 더 실력이 늘어서 놀랐어. 당연히 내가 이기긴 했지만!”

위풍당당하게 가슴을 펴는 폰에게, 카리타스는 네 덕에 오드샤가 인정받을 수 있었으니 더 우쭐해져도 된다고 말했다. 또 막상 그런 말을 들으니 부끄러워진 시도폰이 그 정도는 아니라고 웅얼거렸다.

“내일 아침에 일찍 출발한다고 했지? 좀 더 오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카리타스는 아쉬운 듯 괜히 복도에 굴러다니는 작은 돌을 신코로 툭툭 건드렸다. 같은 마음이었던 시도폰도 뭐라 위로하지 못하고 조용히 그 옆을 지켰다. ‘편지 자주 할게.’는 두 사람 사이를 며칠 내내 맴돌았던 다짐이었다. 하지만 편지를 아무리 자주 한다고 한들 직접 만나는 것만 못했기에 그런 다짐이 이별의 슬픔을 덜어낼 수는 없는 법이었다.

“….”

침묵을 지키는 중에도 시간은 흐르고 잠을 밀어내도 결국 아침은 오기 마련이다. 밤새 이야기했던 두 사람은 반쯤 뜬 눈으로 방에서 나와 서로에게 손을 흔들었다. 시도폰과 몇몇이 성문을 빠져나갈 때쯤 카리타스는 제 방에서 치워지는 두꺼운 이불을 말없이 바라만 보고 있었다. 요 며칠 간은 카리타스가 책상에 앉아있으면 갈색 머리카락이 시야 한구석에서 삐쭉 튀어나왔다. 그러면 카리타스는 몇 쪽 읽지도 않은 책을 덮거나 서류 더미를 저 너머로 밀어버리고 뒤로 돌아봤다. ‘뭐해? 바빠?’라고 묻는 시도폰에게, 카리타스는 ‘잠시만 기다려줄래? 빨리 끝낼게.’라든가 ‘아냐, 지금 당장 안 해도 돼.’라고 대답하며 결국 의자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이불이 빠져나간 방엔 이제 카리타스뿐이었다.

‘이 방이 원래 이렇게 컸던가?’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더니 시도폰이 사라진 방은 전보다 광활하고 황량했다. 의식하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카리타스는 괜히 할 일 없이 의자에 앉아보거나 벽을 보고 누워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때때로는 시도폰이 자신을 부르는 듯한 소리를 듣기도 했지만, 당연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성녀님, 무례한 질문일 수 있지만 한 가지 여쭤볼 게 있습니다. 혹시 몸이 불편하시다거나 뭔가 신경 쓰이는 게 있으신 걸까요?”

시도폰이 떠난 지 2주째 되던 날, 보다 못한 시종이 그렇게 물어보았을 때 카리타스는 창문을 열고 멍하니 바깥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두운 밤하늘 아래에서 시도폰이 좋아하던 장미가 여전히 싱그럽게 피어나 있었다.

“아냐, 아무런 문제 없어. 오늘 일도 다 끝냈고 내일 일정도 다 알고 있으니까.”

실제로 카리타스의 일 처리에 문제가 생기진 않았다. 그렇기에 시종도 대놓고 이상하다고 말하지 못하고 에둘러 카리타스에게 질문을 던져본 것이다. 카리타스는 시선은 여전히 창밖에 고정한 채 손가락으로 빈 편지지만 툭툭 두드렸다. 분명 하고 싶은 말이 많았는데 제 이야기를 하려니 어째서인지 쓸 수 있는 말이 없었다. 시도폰이 사라진 일상은 언제나 같이 무료했고, 반복되었으며 변하지 않았다.

‘지금쯤이면 너는 이제 막 북부에 도착해서 정신이 없겠지? 아니 어쩌면 거기가 더 편해서 돌아오길 잘했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네.’

우선 첫 줄은 썼다. 시도폰을 두고 남부에 돌아왔을 때는 자괴감에 빠져서 오히려 시도폰을 그리워할 수 없었다. 하지만 무사히 새 삶에 적응하고 있는 시도폰을 알아버려서 안심되었는지, 고작 이 주를 보지 못했다고 시도폰이 그리워졌다. 시도폰이 이 편지를 읽을 때는 지금으로부터 이 주 뒤다. 창술을 가르쳐 줄 스승은 잘 만났는지, 기사단 밖의 마을 사람들과는 알고 지내는지, 북부의 여름은 어떤 느낌인지 궁금했다. 자신의 이야기는 전혀 하지 않으면서 시도폰에게 질문만 퍼붓는 편지는 물음표로 가득했고 그 기호 하나하나가 제 손톱 아래에 박히는 것 같았다. 고통스럽냐 물으면 그것도 맞는 말이었고 기쁘냐 물어보면 그것 또한 맞는 말이었다. 양심의 고통 때문에 처벌받고 있다고 생각하니, 이상하게도 그 고통이 달갑게 느껴지는 것이었다. 카리타스가 웃으며 편지를 쓰자 시종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방을 나갔다.

머뭇거리던 진도가 쭉쭉 나가 어느새 편지지 한 장이 다 채워졌다. 카리타스는 여기서 자신의 진실 된 감정이 얼마나 들어가 있는지 궁금했다. 기껏해야 한 줄이나 될까. 솔직하게 보고 싶다고 말하면 될 것을, 그 경험을 옆에서 함께하고 싶다고 하면 될 것을. 죄책감과 두려움으로 펜대를 휘두르니 그런 진실이 글자가 될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첫 편지부터 이렇게 쓰면 어떡하나 싶었다. 폰이 이 질문에 전부 답하다가 정작 본인의 이야기를 까먹어버리면 안 되는데.

“내일은 뭐라도 다른 걸 해볼까….”

있었던 일을 알려주기 위해 편지를 쓰는 게 아니라 그 반대를 한다는 발상이 아이러니하긴 했지만, 카리타스는 나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당장 내일은 오전 기도 외의 일정이 없었으니 오후 시간에 뭐라도 할 수 있을 것이었다. 책은 싫증이 날 테고, 슬슬 더워지는 날씨 탓에 야외활동은 영 당기지 않았다. 그때 프라이에가 노트에 글을 쓰면서 거기에 어울리는 작은 그림을 그렸던 것이 생각났다. 시도폰이 장미를 좋아했으니, 이 방에서 보이는 장미와 풍경을 그려주면 기뻐할 것 같았다. 카리타스는 시종에게 내일 화구와 캔버스를 가져다줄 수 있겠냐 물었고 시종은 이전에 카리타스가 쓰던 것을 들고 오겠다 답했다.

“새것보다는 이전에 쓰던 것이 더 익숙하니 편하시겠지요? 내일 기도시간 이후에 바로 쓰실 수 있도록 준비해두겠습니다.”

‘내가 왜 그림을 그만뒀더라?’

잘 기억이 나지 않았던 카리타스는 그저 고개를 끄덕거리기만 하였다. 께름칙한 마음을 뒤로하고 연필로 아무 종이에 그림을 그릴 구도를 잡아보았다. 내일 점심쯤부터 그리면 낮 동안에 완성할 수 있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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