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 악마도 반품이 되나요?

1화

1차 BL

Rose by 제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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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당 소설 속 등장하는 이야기는 전부 허구이며, 작 중 인물의 사상과 작가의 사상은 일치하지 않습니다.

https://youtu.be/rz1zBDdm56Q?feature=shared

입시가 끝난 12학년의 겨울방학은 지나치게 평온하고 지루했다. 특히 작은 영화관이나 공원, 4층짜리 쇼핑몰이 전부인 빌어먹을 지루하고 작디 작은 마을이라면 더더욱. 그마저도 여름엔 해를 보기 힘들 정도의 폭우가 내리고, 겨울엔 눈보라로 바깥에서 10분만 걸어다녀도 눈썹이 하얗게 얼어붙는 궃은 날씨 때문에 대부분은 그냥 집에 있었다. 그야말로 밀실 같은 곳이지. 우리가 10년 전에 이사왔는데 5년 전에 이사 온 리 가족을 제외하면 그 이후로 아무도 안왔다고- 지금은 UCLA에 합격해 캘리로 떠난 오스카의 누나 카밀라는 비가 올 때마다 카우치에 드러누워 투덜거리곤 했다. 돔이 씌워진 것은 아니지만 외부인이 굳이 접근하지 않는 곳. 이곳이 페레로 가족이 10년째 사는 동네였다.

그날은 간만에 눈이 내리지 않는 날이었다. 마치 마법이라도 부린 것처럼 맑은 날씨, 이 좋은 날 오스카는 묵직한 캐리어를 차 트렁크에 우겨넣고 있었다. 8박 9일 여행임에도 걱정이 많은 마리아는 상비약부터 집에서 자주 마시던 티백까지 전부 바리바리 싸버렸기에, 트렁크는 배낭과 20인치 캐리어 2개로 꽉 꽉 차서 오스카는 트렁크를 닫기까지 테트리스 하듯 가방들을 이리저리 옮겨야했다. 겨우 트렁크 문을 꽉 닫은 오스카는 우드득 소리와 함께 허리를 피며 마리아에게 말했다.

"엄마, 짐은 정말 이것 뿐이죠? 더 있으면 뒷자석에 넣어야해요."

"당연하지! 나를 뭘로 생각하는거니."

마리아는 헛소리를 들었다는 듯 유쾌하게 눈썹을 추겨올렸다. 오스카는 그게 영 못 믿더웠지만 어쨌거나 그것은 미래의 문제였기에 그냥 어깨를 한번 으쓱 하고 넘겼다. 편안한 원피스에 밀집모자를 쓴 마리아는 까치발을 들어 아들을 꽉 껴안고 볼에 붉은 립스틱 자국이 남을 때까지 찐하게 뽀뽀했다.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연락하고, 알겠지? 사랑한다."

"옙 당연하죠, 여행 잘 다녀오세요. 이모들한테도 안부 전해주시고요! "

마리아의 차가 부르릉 소리를 내며 멀리 떠났다. 오스카는 차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들며 엄마를 배웅하다가, 차가 멀어지자 곧바로 집 안으로 뛰쳐들어갔다. 계단을 쿵쾅거리며 오르는 오스카의 표정은 수상할 정도로 밝았다.

"으아....드디어!"

평소라면 오스카는 푹신한 담요를 부리또처럼 두르고 쇼파에 누워 OTT에 재밌는게 없는지 3시간동안 뒤적이다가 애착인형마냥 커다란 칩 봉투를 껴안고 잠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현재 담요는 쇼파 한구석에 버려져있고 오스카의 친구인 TV는 리모컨조차 찾을 수 없었다. 오스카는 긴 다리로 겅중겅중 뛰며 곧장 다락방으로 올라갔다.

먼지 가득한 다락방 바닥엔 악마의 눈이 그려진 은으로 된 칼과 표지가 너덜너덜한 초록색 가죽책, 분필, 초 5개, 성냥 그리고 이상한 잿가루가 놓여있었다. 오스카는 다락방에 도착하자마자 창문을 꼭 걸어잠그고 커튼을 쳤다. 커튼 사이로 들어오는 미세한 빛에 의존하며 오스카는 바닥에 앉아 책을 펼쳤다. 책엔 정체를 알 수 없는 문자들과 무언가 평범하지 않은 것들이 중세 영어로 적혀있었다.

때는 겨울 방학 전 날, 오스카는 조금 우울해서 바로 집에 가지 않고 산책을 했다. 대입, 외모, 불투명한 미래...지금 해결되지 않을 생각들을 하다가 그냥 전부 머리 구석에 밀어넣고 바닐라 시럽을 잔뜩 넣은 아이스 라떼나 마시자고 결정하며 자주가는 카페로 천천히 걸어갔다. 아이스 바닐라 (시럽추가 3펌프)라떼 한잔을 쪽쪽 빨려 나왔을 때 건너편에 처음 보는 서점이 있었다. 한번도 본 적 없는 가게였으나 그것은 새 서점이라기엔 꽤나 노포같은 느낌이 있는 기묘한 가게였다. 호기심이 생긴 오스카는 라떼를 넘어지지 않게 조심히 가방 안에 넣고 길을 건너 서점으로 향했다. 문을 열자 딸랑이는 종소리가 머리 위에서 들리고 오래된 책들의 포근한 냄새가 가득한 중고서점, 오스카는 어색하게 주인 아저씨께 인사하고 곳곳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운명처럼 발견한 것이다. 아주 낡고 너덜너덜한 초록색 가죽 책을. 오스카는 마치 무언가에 홀린듯 그 책을 집어들었다. 중세 영어와 고대 영어가 뒤섞인 책은 해석하는데 꽤나 귀찮았지만 고전 문학에서 A+을 받은 오스카는 끈기있게 그것을 읽어냈다. 그리고 잠시후, 오스카는 책을 덮고 목구멍 위로 올라올듯 뛰는 심장을 목젖 아래로 가까스레 밀어냈다. 그냥 일반 문학이나 에세이가 아니다. 이건...마도서다.

현대의 어중이떠중이 마법사들이 만들어 파는 주문들과 다르게 중세의 것들은 정교하게 제작된 진짜였다. 하지만 근세 유럽, 불만에 찬 평민들의 시선을 돌릴 희생양이 필요했고 결국 그때 만들어진 마도서들은 대부분 죄 없는 이들과 함께 불타서 사라졌다. 살아남은 극소수의 마도서들이 떠돌고있다는 얘기는 도시전설처럼 들리긴 했으나 오스카는 그것을 믿지 않았다. 이 책 '제 0의 서' 가 손에 들어오기 전까지는.

그 결과 지금 다락방엔 ETSY와 아마존을 뒤져 찾아낸 은으로 된 칼(아마존 중고, 13.99달러)과 영혼 소환 전용 인센스(5 oz, 39.99달러) '제 0의 서' 의 한 페이지가 펼쳐져있었다. 오스카는 다락방 나무 바닥에 분필로 약 140cm의 커다란 원과 그 안에 오각성을 그려넣었다. 그리고 세이지와 팔로산토, 사향 냄새가 뒤섞인 냄새가 나는 인센스 가루를 소환진 위로 솔솔 뿌렸다. 마지막으로 각 꼭지점마다 초를 켜두자 꽤나 그럴싸한 모습이 눈 앞에 펼쳐졌다. 오스카는 청록색 악마의 눈이 가운데 박힌 실버나이프를 손에 꼭 쥐고 작게 심호흡을 했다.

"Coniuro te nomine terreno. Foedissima anima, responde vocanti meo. (나는 세상의 이름으로 그대를 부르니. 가장 더러운 영혼이여, 응답하소서.)"

오스카는 라틴어 문장을 읊은 후 칼로 검지 손가락 끝을 찔렀다. 생각보다 생생한 고통에 오스카는 눈물이 찔끔 맺혔지만 소환술은 아주 사소한 것에도 영향을 받기 때문에 목구멍까지 올라온 비명을 가까스레 삼켰다. 피가 뚝뚝 떨어지는 검지손가락으로 오각성 가운데에 원과 그 안의 작은 원, 그 주변에 달과 숫자와 의미를 알 수 없는 기하학적인 기호들이 가득한 인장 (Sigil) 을 그리며 주문을 속삭이기 시작했다.

"Coniuro te nomine terreno. Foedissima anima, responde vocanti meo. Coniuro te nomine terreno. Foedissima anima, responde vocanti meo.…"

오스카가 계속해서 피로 인장을 그리며 주문을 읊던 중, 다락방 내에서 희미한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오스카의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 오스카는 아까 다락방에 도착하자마자 창문을 닫았었다. 그렇다면 이 바람은......오스카는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더 빠르게 인장을 그리며 주문을 속삭였다. 바람이 무시할 수 없을 만큼 거세지자 커튼이 뒤집히고 '제 0의 서' 의 페이지들은 촤르르륵 바람에 넘어갔다. 그리고 갑자기 바람이 멎었다. 아니, 정확히는 멈췄다. 바람에 날리던 물건들이 전부 그 상태로 굳었다. 모든 촛불의 불꽃은 산소를 차단 한 것처럼 자연스레 소멸되고 출처를 알 수 없는 검은 연기가 스멀스멀 다락방을 메웠다. 아까까지 들리던 경적소리와 새가 삐롱삐롱 우는 소리, 이웃집 개가 짖는 소리 그 무엇도 소리를 들리지 않았다. 마치 밀실이라도 된 것처럼. 오스카의 손 끝에서 핏방울이 똑- 똑- 떨어지는 소리를 제외하곤 모든 것이 멈췄다. 오스카는 멍하니 소환진 밖으로 천천히 뒷걸음질 쳤다. 검은 연기는 다락방을 가득 채웠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그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지만 오스카는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무언가가 왔다.

마침내 연기가 사라지자 재생 버튼을 누른 것마냥 다락방의 시간이 흐르기 시작했다. 공중에 멈춰있던 물건들이 바닥에 떨어지며 쿵쾅거리는 커다란 소음을 냈다. 하지만 그 소리에 신경 쓰지도 못할 만큼 존재감이 큰 한 남자가 소환진 가운데에 서있었다. 오스카보다 약간 작은 키에 칠흑같이 검은 머리카락, 안광 없이 지옥처럼 어두운 눈동자, 검은 커다란 니트와 살짝 달라붙는 검은 바지와 검은 거실 실내화를 신은 남자는 조각처럼 우아하다. 눈꼬리가 올라간 커다란 눈과 작고 작은 입, 긴 앞머리와 뒷목을 살짝 덮은 머리를 한 이 핏기 없는 남자는 아무 말 없이 소환진 가운데에서 오스카를 내려다보다가 마침내 불만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필멸자여, 네가 나를 부른 것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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