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덜 컸어
레오나 킹스카라 드림
* 23년도 레오나 생일 기념 글. 선배제가사랑하는거 아시죠?!
“삼촌, 얼른 일어나요!”
귓가로 파고드는 목소리가 익숙한 듯 낯설다. 레오나는 제 주변을 알짱거리는 인기척이 내는 소음에 눈을 떴고, 이내 믿기지 않는 광경을 보고 말았다.
“……뭐야?”
예상했듯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소음의 근원은 얄궂은 조카였다.
다만 특이한 점이 있다면, 그 조카의 모습이 제가 알던 것과는 조금 다르다는 거겠지. 아니, 사실 그건 ‘조금’이 아니었다.
“일어났다! 삼촌, 생신 축하드립니다!”
분명 제 조카는 존댓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핏덩이였는데, 왜 갑자기 죽순 자라듯 쑥 자라있는 것인가.
겉보기만으로 나이를 정확하게 유추할 수는 없지만, 얼핏 보아도 족히 8살은 되어 보인다. 아무리 성장기의 아이라도 몇 달 사이에 이렇게 크는 건 불가능할 텐데, 이게 어떻게 된 걸까.
넋이 나간 레오나가 상체를 일으키자, 저 멀리서 또 다른 이가 다가왔다.
“체카야, 삼촌 일어났니?”
“네, 숙모!”
제 조카를 부르며 가까이 온 이는 고물 기숙사의 감독생이었다. 하지만, 그 또한 제가 알던 모습과는 조금 달랐다.
늘 입던 교복 대신 제 고국의 전통 옷을 입은 채 머리를 단정하게 틀어 올린 아이렌은 평소보다 퍽 어른스러워 보였다.
물론 아이렌은 제 나이에 비해 아주 많이 어른스럽긴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성격이나 가치관의 이야기였다. 얼굴은 딱 16살처럼 보인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얼굴까지 어른처럼 보이질 않나.
한결 성숙해진 얼굴로 제 조카를 귀여워하던 아이렌은 눈을 가늘게 뜨고 종알종알 재촉해왔다.
“정말이지, 아무리 국가행사는 참여하기 싫다고 해도 오늘은 당신 생일이잖아요? 그만 일어나요. 학교 다닐 때도 늦잠은 안 잔 사람이 왜 이러는지 몰라.”
‘당신’, ‘학교 다닐 때도’ 그 두 단어가 거슬려 주변을 살펴본 레오나는 제가 눈을 뜬 곳이 사바나클로 기숙사에 있는 자신의 방이 아닌, 고향의 궁전에 있는 제 방임을 깨달았다.
그러고 보니 애초에 체카와 아이렌이 같이 있다는 것 자체가 좀 이상하긴 했지. 한 명은 효광의 도시도 벗어나기 힘들고, 다른 한 명도 학교 외에는 있을 곳이 없는 이 아니던가?
인물도 장소도 시간도 엉망진창으로 뒤섞인 상황. 무언가 감을 잡은 레오나는 살짝 제 볼 안쪽을 씹어 보았다. 예상대로, 고통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럼 그렇지. 역시 꿈인가.’ 이 모든 게 무의식의 일부인 걸 깨닫고 나자 저도 모르게 한숨이 탁 터져 나온 레오나는 사이좋게 대화하는 허상들을 바라보았다.
“숙모, 나 나중에 삼촌이랑 같이 케이크 잘라도 돼요?”
“물론이지. 그럼 숙모는 체카가 잘라 준 케이크를 1등으로 받아 가도록 할까?”
“응! 아버지랑 어머니, 삼촌 말고 숙모에게 제일 먼저 줄게!”
“와아, 영광이네. 대신, 삼촌에게 먼저 허락을 받도록 해요. 알겠지?”
“네!”
꿈에서도 저리 사이가 좋다니, 이래서야 정말 가족 같지 않은가.
가족이라는 개념에 그리 큰 가치를 두지 않는 레오나였지만, 막상 제 조카와 아이렌이 진짜 가족같이 구는 꼴을 보고 있자니 기분이 묘해졌다. 이 모든 게 의식이 깨어나면 사라질 촌극임을 알면서도 두 사람에게서 눈을 뗄 수 없는 그는 문 너머에서 고개를 내미는 키파지를 발견한 후에는 실소를 참지 못했다. 이런 꿈에서 마저 잔소리하러 나타나다니, 참으로 그 영감답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아이렌 님, 레오나 님께서는?”
“일어나셨어요. 금방 준비시켜서 나갈게요.”
“감사합니다. 역시 남자에게 가장 효과가 좋은 건, 아내의 잔소리인 법이죠.”
잠깐, 아내라고?
키파지의 말에 뒤통수를 맞은 듯 정신이 번쩍 든 레오나는 저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그러니까, 이 꿈속에서 자신과 아이렌은……. ‘그런’ 설정이라는 건가? 체카와 가족처럼 보이는 것도, 정말 호적상으로는 가족이라서 그런 것이고?
언젠가 한 번쯤 상상해보았던 일이 꿈이라는 형태로나마 눈 앞에 펼쳐지다니. 무의식의 과한 친절에 정신이 아찔하다.
까딱하면 꿈에서 깨어날 것 같은 위태로운 상황 속. 체카를 내보낸 아이렌이 옷을 챙겨 든 채 제 옆에 바짝 붙어 앉았다.
“당신, 얼른 옷 입어요. 에휴, 내가 시녀인지 왕자비인지 모르겠어.”
입으로는 불평하고 있지만 아이렌은 꽤 즐거워 보였다. 게다가 제 옷을 갈아입히는 손길도 이미 여러 번 이런 일을 해봤다는 듯, 정말로 빠르고도 익숙했다.
레오나는 너무나도 당연하게 아내 노릇을 하는 상대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문득 묻고 싶은 것이 있어 입을 열었다.
“너…….”
“레오나 선배, 주무세요?”
정신을 차리자 자신은 기숙사의 개인실에 누워있었다.
아, 꿈에서 깨어난 것인가. 학교에서 준비해 준 생일 의상을 입고 있는 제 모습을 확인한 레오나는 제가 잘 아는 모습으로 곁을 지키고 있는 아이렌을 발견했다.
앳된 얼굴과 어른스러운 표정. 화장기 없는 얼굴과 단정한 교복. 평소 늘 쓰는 섬유 향수의 향기와 희미한 피 냄새. 그리고, 품속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도시락 가방까지.
그래. 이게 맞는 거지. 레오나는 너무 달아서 이가 썩어버릴 것 같은 꿈보다, 이 쪽이 더 마음이 놓였다.
“선배? 왜 그러세요?”
잠에서 깨자마자 아무 말도 없이 자신을 훑어보는 레오나의 행동에 아이렌은 어깨를 움츠리며 고개를 뒤로 뺀다. 제 시선이 지금 얼마나 날카로운지 알지 못하는 그는 상대가 괜히 겁을 먹는다 생각하곤, 상체를 일으켜 벗어 둔 모자를 눌러썼다.
“넌 왜 여기에 있지?”
“왜냐니, 생일 축하해 드리러 왔죠.”
그러고보니 꿈속에서는 잔소리만 들었지, 생일 축하한다는 소리는 못 들은 것 같은데. 이렇게 보면 마누라보다는 후배일 때가 나은 것 같기도 하다.
시답잖은 생각을 하느라 입꼬리가 쑥 올라간 레오나는 상대가 내민 커다란 도시락 가방을 건네받았다.
그 미소 속 숨은 의미를 알 리 없는 아이렌은 태평하게 준비한 선물에 관해 설명했다.
“이거, 별거 아니지만 직접 만든 요리예요. 선배라면 필요한 물건은 얼마든 돈으로 사실 수 있을 테니 역시 먹을 게 낫겠다 싶더라고요. 제 고향의 전통 요리 중 하나인데 입에 맞으셨으면 좋겠네요. 저는 좋아하는데, 선배도 고기 좋아하시니 좋아하지 않을까 해서 만들어 봤어요.”
구구절절 설명하는 노력은 가상하지만, 레오나는 그 말의 절반도 제대로 듣지 못했다. 아직 꿈속의 아이렌의 모습이 눈에 선명히 남아있는 그는 실제로 존재하는 후배와 꿈속의 아내를 비교하기 바빠, 도무지 귀에 들어오는 목소리에 집중하지 못했다.
제 아내가 된 아이렌은 대체 몇 살쯤 된 상태였을까. 체카가 그만큼 자란 설정이라면, 아이렌도 지금 제 나이쯤은 되었으려나. 겨우 몇 년 차이고, 꿈속 모습도 어린 티가 나긴 했지만, 그래도 역시 지금보다는 다 큰 여자 느낌이 나서 좋았는데.
허상과 실체를 저울질하던 그는, 도시락을 제 옆구리 쪽에 잠시 치워두었다.
“이봐.”
“그래서, 아침부터 일어나서 이걸 만드느라……. 예?”
“당신, 이라고 불러봐.”
선물 준비 과정을 무슨 대서사시 들려주듯 늘어놓던 아이렌은 상당히 뜬금없는 요구에 말문이 막혀버렸다.
‘당신’이라니. 상황에 따라 무례한 호칭도 정중한 호칭도 될 수 있는 이인칭이라지만, 레오나라면 후배가 그렇게 말하는 걸 좋아할 것 같지는 않은데. 하필 자신에게 이런 요구를 한다고?
자세한 설명 따윈 해줄 리 없는 레오나 덕에 당황한 그는 이 돌발상황의 원인을 제게서 찾으려 했다.
“갑자기 왜 그러세요? 먹을 건 별로인가요? 아니면 잘 자는 거 깨워서 그래요?”
“아무 일도 없으니까, 그냥 불러 봐.”
“……어, 으음.”
수상하긴 하지만, 고작 말 한마디 못 해줄 건 없겠지. 원체 조심성 많은 성격이지만 부탁을 거절하는 건 더 불편해하는 아이렌은 결국 입을 열었다.
“당신.”
“좀 더 자연스럽게. 그렇게 호칭만 딱 부르지 말고.”
“아니, 뭘 더 자연스럽게 하라고요?”
“선배 대신 넣어서 말하면 되잖아. 아주 간단한 요청 아닌가?”
그건 당신이 웬만한 사람은 다 내려다보는 처지니 하는 말이다. 모든 걸 올려다봐야 하는 처지에선, 말 한마디 내뱉는 것도 얼마나 조심하게 되는데.
아이렌은 목구멍까지 차오른 그 말을 애써 삼키고,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심호흡했다.
그래. 상대가 먼저 해보라고 했으니, 자신은 그냥 따르기만 하면 된다. 만약 뭔가 잘못되더라도 레오나가 먼저 요청했다고 하면 괜찮겠지.
끝없이 자신을 안심시킨 아이렌은 눈을 느리게 감았다 뜨더니, 진심을 담아 외쳤다.
“당신이 이럴 때마다 저 정말 당황스럽다고요, 아세요?”
“……하!”
요청을 들어주는 동시에 할 말까지 하는 영리함에, 레오나는 결국 웃음이 터져버렸다.
이렇게 나무라는 걸 보고 있자니, 정말 꿈속의 잔소리꾼 마누라의 모습 그 자체이지 않나. 만족스러운 퍼포먼스에 기분이 한결 들뜬 그는 자신을 바라보는 얼굴의 턱을 덥석 잡았다.
부드럽고 말랑한 뺨. 살짝 벌어진 산호색 입술에 치기 어린 제비꽃색 눈동자까지. 어딜 봐도 애송이 티가 남은 얼굴이 앙증맞다.
말하는 꼴을 보면 지금 시집와도 될 것 같아도 역시 몸뚱이가 덜 자라서 무리겠다. 그리 판단한 레오나가 손을 거두었다.
“아직 더 커야겠군.”
“전 다 컸어요.”
“하, 새파랗게 어린 주제에.”
하지만 원래 애들은 자기가 다 큰 줄 알지. 체카도 가끔 자기는 다 컸다고 하지 않던가.
레오나는 상대의 항의를 귀담아듣지 않고 도시락 가방을 검지로 두드렸다.
“이건 잘 먹을 테니, 너도 저기 파티장에 가서 이것저것 잔뜩 먹어두고 가라고. 그래야 얼른 크지.”
“……이거, 완전 그거 아녜요?”
“그거?”
“잡아먹기 전에 밥을 더 많이 줘서 살찌우는, 그런……. 헨젤과 그레텔의 마녀같이…….”
‘그건 또 누구야.’ 처음 듣는 이름들에 눈썹을 까딱인 레오나는 그렇게 말하려다가, 지금이 바로 이 애늙은이를 놀릴 기회라는 걸 깨닫고 씩 웃었다.
잡아먹는다, 라. 그래, 잡아먹을 생각이긴 하지.
현명한 레오나 킹스카라는 이 좋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들켰군.”
“예?”
“알면 잘 먹어두라고.”
“아니, 예? ……뭐라고요? 네?!”
제 말을 어떻게 해석한 건지, 얼굴이 새빨개진 아이렌이 팔을 막 붙잡아 흔들며 소리친다. 레오나는 제 덫에 보기 좋게 걸린 건방진 후배의 발버둥을 구경하며, 이것이야말로 최고의 생일 선물이 아닐까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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