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유성
총 18개의 포스트
"준수야, 너 진짜 미쳤어?" "씨발, 제정신이거든?" 인적 없는 공터에 화를 움켜쥔 둘의 목소리가 흩어졌다. 전영중은 깊은 한숨을 쉬었다. 왜 항상 불길한 예감은 틀림이 없는지. 왜 이럴 때만 성준수를 알기 쉬운지. 준수야, 나는 여전히 너를 알다가도 모르겠다. 온갖 말들이 목구멍까지 치밀었다가 가라앉았다. 성준수의 말 하나에 하루의 기분이 오락가락했다
전영중은 성준수를 들처업고 달렸다. 마음이 덜컹 내려앉았다. 가라앉은 마음의 무게는 전영중의 능력으로도 가볍게 만들 수가 없었다. 준수야, 괜찮아? 야, 괜찮냐고. 아무리 불러도 대답이 없었다. 등에 닿는 온도가 더없이 차가웠다. 희미하게 몸이 떨리기에 그제야 목숨은 붙어있구나 싶었다. 정신을 잃은 뒤에도 이능력이 새어나가는지 바람이 거세게 일렁이며 서리가
성준수는 눈을 떴다. 정수리에서부터 끈적한 액체가 이마를 타고 흘러내린 것이 느껴졌다. 시야가 온통 까맸다. 피부 위로 까끌까끌한 감촉이 느껴졌다. 산등성이 위로 달려가던 중 머리를 맞았고, 그대로 정신을 잃은 것 같은데…. 아마도 정신을 잃기 전 누군가가 성준수에게 포대를 씌운 것 같았다. 죽을지도 모른다는 것과 죽음이 코앞까지 다가온 것은 큰 차이가 있
똑, 똑. 규칙적으로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가 들렸다. 성준수는 의식만 돌아온 채 여전히 눈을 뜨지 못했다. 어렴풋이 들리는 소리로 주변의 상황을 파악하려 애썼다. 약품 냄새, 바이털 기계음, 고요한 듯하지만 멀리서 들려오는 대화 소리, 익숙한 온도와 공기의 흐름까지.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느낄 수 없다는 뜻은 아니었다. 성준수는 시각 외의 감각 정보들로 자
삐이─삐이─ 갑작스러운 공습경보가 떨어졌다. 성준수와 기상호 사이에 빨간 점이 선연하게 빛났다. 야, 뛰어!!! 성준수가 곧바로 정신을 차리고 기상호의 등을 떠밀었다. 갑작스러운 밀침에 당황하기도 전에 일단 다리를 움직이는 게 먼저였다. 너나 할 것 없이 전속력을 다해 달렸다. 얼마 뒤, 둘이 서 있던 곳에 미사일 하나가 떨어졌다. 폭발로 인한 반동으로 땅
어느새 날씨는 상당히 추워졌다. 겨울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것은 동시에 전영중이 센터로 온 지 일 년이 다 되어간다는 것과 같았다. 얼마 뒤면 성인이 된다. 전영중은 별로 남지 않은 올해의 날짜를 세며 첫눈을 기다렸다. 첫눈을 생각하면 아직도 가슴이 두근거렸다. 준수야, 첫눈 오면 뭐 할 거야? 성준수는 무심하게 대꾸했다. 둘 중 하나겠지. 센터에서 눈 치
REPORT C2281224-31 성준수 만 11세 168cm 50kg 가족관계 여동생 레우논 이식 매우 적합 판정 특이사항 부모 사망 성준수에 대해서. 어느 2217년에 태어나 대차게 울었다. 날 때부터 별 탈 없이 건강했다는 소리다. 부모 모두 센티넬이라 아들 또한 센티넬일 것이라 생각했으나 그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ESPT 검사 결과 레우논
"준수야, 지쳤어? 대체 왜?" "씨발, 니는 S급이고." 또다시 전영중이 성준수의 속을 대차게 긁었다. 그 와중에도 훈련장에는 여기저기서 탄환이 발사되는 소리가 연신 들려왔다. 이능력 사용에 제한이 걸렸을 때를 대비한 모의 훈련이었다. 탕, 탕. 조준경을 바라보며 연달아 방아쇠를 당긴 전영중이 은폐물 뒤에 서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도심 한복판에 세워진
익숙한 호출음이 들렸다. 성준수는 표정의 변화 없이 센티넬용 군복을 입기 시작했다. 고작 며칠 쉬었다고 또다시 접전지로 끌려나가야하는 상황이 지겹도록 익숙했다. 방문이 열리자 거실 소파에 누워있던 전영중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전영중은 성준수의 기척에 몸을 일으켰다. 이틀 전 봤던 것과는 다르게 멀끔한 자태였다. 고작 그 이틀 만에. 비단 군복뿐만이
망해가는 세상에서 망하지 않는 세계를 상상한다. 그곳에서 너와 함께 살고 싶었다고. 이제는 너의 희망인지 나의 바람인지 알 수도 없는 빛바랜 생각을 몇 번이고 되새겨본다. 그냥, 그랬으면 어땠을까, 하고. 하등 의미 없는 행위라는 것을 너도, 그리고 나도 모르지는 않았다. 부럽네. 멀어져가는 아이의 뒷모습에 탄식처럼 말이 샜다. 너는 그저 어깨를 으쓱이는
나는 보기보다는 정이 깊었다. 표현하질 않아 무뚝뚝한 것과 정이 없는 건 달랐다. 그리고 정이 많은 것과 정이 깊은 것도 달랐다. 어릴 때부터 그랬다. 한 번 마음을 비집고 들어온 것은 언제까지고 붙잡고 있었다. 좋아하는 건 많이 없었지만, 한 번 마음에 든 것은 끝까지 소중했다. 그것 하나밖에 몰랐다. 좋아하는 마음에는 필연적으로 지치는 시간이 찾아오기
눈을 뜨니 낯선 천장이었다. 본가도, 숙소도, 성준수와 함께 살던 집도 아닌. 새하얀 천장. 삐─삐─삐─. 일정한 속도로 울리는 기계 소리가 들렸다. 온 몸이 뻐근했다. 위를 향해 고정된 시야를 겨우 돌렸다. 주렁주렁 늘어진 링거 줄, 정적을 채우고 있는 바이털 사인 장치, 불편한 병실 침대. 전영중은 이 상황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하기 위해 애썼다.
"다녀오자, 바다." "준수야, 갑자기?" 가보고 싶다며. 뭐가 문제야, 가자. 성준수는 의외로 덤덤하게 말했다. 이미 확정된 것을 전달하는 것 같은 어조에 당황한 건 전영중 하나였다. 오히려 문제 될 게 있냐는 뻔뻔하기까지 한 태도에 갑작스러운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전영중 자신이 이상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말마따나 걸림돌이 될 만한 건 아무것도 없
일상은 다시 제자리를 찾았다. 전영중의 평범하던 일상을 박살 내고 그 틈에 뻔뻔하게 자리를 차지한 성준수가 사라졌느냐 묻는다면 그건 아니었다. 원래 그 자리가 제 것인 양 들어앉은 성준수가 전영중의 새로운 일상이 되었다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이었다. 세상에 당연한 건 없다는데, 성준수는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 왔다. 흐르는 듯 찾아와 빠져나갈 생각을 하
"야, 전영중. 문 열어." 인터폰 화면 너머에는 제법 익숙한 얼굴이 서 있었다. 시간이 흘렀음에도 문 너머에 서 있는 것이 누구인지 전영중은 쉬이 알 수 있었다. 그 얼굴은 기억 속 마지막 모습과 그대로인 것 같다가도 자세히 뜯어보면 역시 조금 달랐다. 앳된 고등학생의 티를 벗고 이십 대의 중반을 내달리고 있는 듯한 얼굴. 잘생긴 건 여전해서 분명 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