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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끝에서의 약속

너는 '인간'을 믿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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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돼, 이번에도 실패야.”

 

지구로부터 몇 천만 킬로미터 떨어진 이곳, 우주선 안에서 괴로워하는 목소리가 들린다. 남극정부 과학부장관이자, 타임스테이션의 계약자 잠뜰이다.

그녀는 현재 태양폭발로 멸망해버릴 인류를 구하기 위해 몇 번이고 과거의 다른 사람들의 몸으로 이동하여 시간을 바꾸려고 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노력하여도, 인류가 살아남을 수 있는 미래가 보이지 않았다. 또다시 타임스테이션의 계산이 실패하자, 잠뜰은 홀로 스페이스 스테이션을 이용하여 이 우주선 안으로 왔다. 괴로워하는 모습을 기지 안 동료들에게 직접적으로 보여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 우주선 안에선 그들의 목숨을 옥죄어오는, 지독히도 밝은 저 붉은 태양을 아주 잘 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번이…몇 번째 가동이더라? 이걸로, 성공할 수 있는 거 맞나? 이번에도 실패하면, 도대체 어떻게 해야….”

 

잠뜰은 괴로워하며 작은 우주선 안의 벽을 쾅 내리쳤다. 타임스테이션을 가동하여 본 평행세계에서의 거대한 우주 발전소 셀베이션호가 아닌, 그저 태양을 관측하기 위한 작은 우주선일 뿐이라, 최대 출력을 내어 토마호크 혜성을 향해 돌진하여도 아무런 변화를 낼 수 없는 원망스러운 우주선을.

잠뜰은 자신이 처음 타임 스테이션을 가동한 날을 떠올렸다. 인류가 살아남을 방법을 찾기 위해 필사적으로 연구하던 날, 타임 스테이션이 잠뜰에게 나타났다. 자신이 ‘만든’ 것이라고 기억하고 있지만, 사실 기억을 자세히 더듬어보면 타임 스테이션이 자신을 ‘발견’한 것이 더 정확했다. 무엇 때문에 이 신기한 공간이 잠뜰 자신이 만들었다고 기억을 왜곡시키면서까지 잠뜰 앞에 나타난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당시 잠뜰은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그 당시엔 인류가 살아남을 방법이 생겼다는 것, 그 사실이 가장 중요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기뻐하며 타임 스테이션에 계약하였고, 자신의 의식을 복제한 크로노스와 여행자를 만들었다. 그렇게 희망이 보이는 듯하였는데, 이제 그 희망은 바람 앞 촛불과도 같아졌다.

이젠 정말 시간이 없었다. 타임스테이션이라고 영원히 시간을 되감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당연히 한계가 있었고, 그보다 명시적인 한계는 바로 계약자인 자신의 세상이 버티지 못하는 순간 타임스테이션과 자신의 연결이 끊어진다는 것이었다. 계약자 본체인 자신이 죽으면 크로노스가 ‘잠뜰’인 타임스테이션 역시 붕괴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인류를 구할 수 없게 된다. 그리고 그 명시적인 한계가 코앞까지 다가와 있다. 언제라도 터져버릴 것 같은 붉은 태양을 잠뜰은 괴롭게 바라보았다. 정말로, 이대로 모두 끝나버리는 걸까. 정말 이대로…

 

“만나서 반가워요, 이번 타임 스테이션의 계약자. 잠깐 이야기 좀 할까요?”

 

그렇게 절망 속에 빠져있을 때, 갈색 머리카락의 남자가 싱긋 웃으며 다가왔다. 자신 이외에 탑승 권한이 없는 이 우주선에, 공간 이동장치인 스페이스 스테이션의 가동 알림도 없이, 마치 본인만의 힘으로 텔레포트 할 수 있는 것 같은, 비과학적인 사람이.

 

 

 

세상 끝에서의 약속

 

레부

 

 

 

“당신이 저 태양 폭발을 막을 마법을 쓸 수 있다고요?”

 

자신을 공룡이라고 소개한 남자의 설명을 요약하자면 이랬다. 자신은 마왕으로부터 세계를 지키는 사명을 수행하며 수백 년을 살아온 용사이고, 이 우주선에 갑자기 나타난 것처럼 여러 마법을 쓸 수 있다. 비록 그 마법 중에 토마호크 혜성의 궤도를 바꿀 수 있을 만한 마법은 없지만, 자신을 중심으로 토마호크와 같은 온도의 에너지 덩어리를 생성할 수 있는 빙결계 마법은 쓸 수 있다고 한다. 과학의 정점에 서 있는 장관이 마법을 진지하게 믿는다면 이상하겠지만, 잠뜰 자신이야말로 지금 가장 마법 같은 타임 스테이션의 계약자이니 굳이 지적하지 않기로 하였다.

 

“타임스테이션에 접속해서 당신의 기록을 봤어요. 당신은 타임스테이션의 계약자로서 시간을 반복해서 되돌리면서, 푸른 혜성 토마호크를 태양으로 보낼 방법을 찾고 있는 거죠?”

“그걸 당신이 어떻게 들어갔어요? 지금은 내가 계약자라서, 나만 이용할 수 있다고 들었는데?”

“제가 좀 특이해서, 타임스테이션과 같은 계열이거든요. 그래서 장관님과 달리 제약에 안 걸려요.”

“…?”

“아, 그거로는 이해가 부족하다는 표정. 좋아요, 눈으로 보는 게 빠르겠죠. 타임스테이션 데이터베이스에 저에 대한 정보를 검색해보시겠어요? 이건 새로운 세계를 찾아내기 위해 계산하는 것과는 별도로 가동될 테니 리소스 소모는 걱정하지 마시고요.”

 

마법같이 판타지스러운 이야기를 하다가 리소스 소모와 같이 현실적인 이야기를 하니 조금 이상한 대화라고 생각하였지만, 그런 이야기를 지적하기엔 시간이 없었으니 잠뜰은 당장 타임 스테이션에 접속할 수 있는 홀로그램 창을 열었다. 여행자와 크로노스는 또다시 시간을 되감고 있는 것이 보였다. 공룡 말대로 데이터 베이스에서 인물 정보를 검색하는 것은 그들의 여행을 방해하지 않는 것 같아 보였다. 그에 안심하며 검색 결과 창으로 시선을 돌린 잠뜰은, 그 결과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말도 안 돼, 평행 세계에 동일인이 한 명도 없다고? 그럴 리가…? 타임스테이션은 과거 시간대로 돌아가 새로운 시간대의 평행세계를 찾아내요. 지금까지 내 능력으로 계산한 세계 수가 절대적으로 적은 수도 아니라고 자신할 수 있어요. 분기점이 되는 시간대가 몇 백 년도 안 되는 곳도 있는데, 하나도 없을 리가 없는데?”

“왜 안돼요? 하나만 존재하는 거 또 있잖아요. 이거, 타임스테이션.”

 

공룡의 말에 잠뜰은 흠칫 놀라 입을 다물었다. 그의 말대로였다. 아무리 여러 번 타임스테이션을 가동하여 새로운 평행세계를 만들어도, 또 다른 세상의 과학부 장관 ‘잠뜰’이 타임스테이션의 계약자인 경우는 단 하나도 발견되지 않았다. 아니, 어느 세계를 간다 하더라도 타임 스테이션이라는 장치도 그 계약자나 여행자도 찾을 수 없었다. 과거로 돌아가 세계를 구하자는 일념을 가지고 연구한 경우는 많았지만, 대부분 실패하거나 성공한들 과거를 그저 잠시 볼 수만 있는 소규모 타임머신 형태일 뿐, 그 수많은 세계에서 타임스테이션이 발견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아무렴 이런 대단한 물건이 순수 인간 기술력으로 만들어졌겠어요? 흔히 말하는 ‘세계의 신’이라는 존재와 연관된 물건이에요. 아무리 많은 평행세계가 있다 하더라도 타임스테이션은 하나, 그걸 만든 신도 하나, 그리고 그 신이 세계를 마왕으로부터 구하라고 직접 임명한 용사 역시, 하나. 그 용사가 바로 저라는 뜻이랍니다.”

“하지만…어라? 아무리 그래도… 공룡 씨의 조상님이라던가, 친인척이라던가 그런 분들은 평행세계에 있을 텐데…?”

“하하, 그렇죠? 정말 인간성이란 하나도 없는 잔인한 신이라서 말이에요. 타임스테이션을 써서 다른 세계의 저를 보고 싶어서 옛날에 들른 적 있었는데, 검색 결과가 하나도 없다니 저도 참, 많이 당황했었답니다. 평행세계가 아무리 생겨나도 용사의 운명을 짊어진 자는 한 명 뿐이라는 뜻이죠. 아마 지금 이 세계가 폭발에 통째로 휘말려도, 저는 다른 평행세계 아무거나로 자동으로 넘어가져서 그곳 역사에 덮어씌워져 그곳에서도 용사로 살게 될걸요? 뭐 사람이 살아남을 세계가 존재한다는 가정이긴 한데. 어쨌든 그런 애매하게 신비한 존재라 타임스테이션에 자유롭게 접속할 수 있었어요.”

 

잠뜰은 공룡의 말에 무언가 생각하는 듯 조용히 있었다. 공룡은 그것이 잠뜰이 많은 정보량을 정리하느라 시간이 필요한 줄 알고 잠시 기다렸다. 만약 공룡이 그때 잠뜰의 눈을 자세히 바라보았다면, 그것이 단순히 정보를 정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눈치챌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이런 몸이다 보니 타임스테이션이 갑작스레 여러 번 반복해서 가동되고 있다는 것도 느낄 수 있었죠. 어지간한 상황이 아니면 가동이 안 되니까 직접 살펴보러 왔어요. 그래서 장관님이 어떤 목적으로 계약자가 되었는지 알 수 있었고, 태양 폭발을 저지하기 위한 토마호크의 온도나 에너지 등도 알 수 있었어요. 그리고 전 정확히 그만큼의 빙결계 마법을 사용할 수 있답니다. 그러니 장관님은 이제,”

 

공룡은 마지막 말을 하기 전에, 짧은 호흡을 할 수 있을 시간 간격을 두었다. 그는 잠뜰을 향해 싱긋 웃어 보였다.

 

“타임스테이션과 계약을 끊으셔도 괜찮습니다.”

 

짧은 호흡을, 잠뜰은 순간 들이키었다. 타임 스테이션과 계약을 끊어도 괜찮다, 그 말을 귀에서 머리로, 귀에서 마음으로 천천히 옮겼다. 인류가 살아남을 수 있는 단 하나의 세상을 발견하기 위해, 몇 번이고 반복했고 지금도 반복하고 있는 타임스테이션의 크로노스와 여행자의 여행을, 이제는 그만하여도 좋다고 한다. 무의미한 반복으로 느껴질 만큼 힘들었던 그 과정을 그만하고, 세계를 구하는 건 이제 눈앞의 낯선 이에게 맡기면 된다고 한다.

잠뜰의 표정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공룡은 그런 잠뜰의 표정을 살폈다. 세상을 구할 수 있다는 기쁨도, 이제 그만해도 된다는 안도감도, 자신이 한 일이 무의미한 것이었나 하는 허망함도 아닌 표정이었다. 조금 전 자신의 설명을 듣고 생각하는 것과 크게 차이가 없는 표정이었다.

 

“아 혹시 지금까지 장관님이 하신 일이 아무 의미 없다고 생각해서 망설이는 거면, 전혀 그렇지 않으니 안심하세요. 장관님이 아니었다면 전 세계가 이렇게 멸망에 가까워진 줄도 몰랐을 거예요. 애초에 용사라는 명칭은 대(對)마왕용이라, 마왕이 세계를 멸망시킬 때만 제가 그 기운을 느낄 수 있거든요. 태양 폭발을 잠재우기 위해 필요한 토마호크의 온도나 에너지를 계산한 것도 장관님이었고요. 장관님 덕분에 세상이 구해지는 건 달라지지 않아요.”

“….”

“그럼 여기 있다간 제가 쓴 마법진에 휘말릴 수도 있으니, 이만 이 우주선에서 나가 지구로 돌아가 주시겠어요? 그 뭐더라, 스페이스 스테이션이었나, 그거로 이동할 수 있다고-”

“당신은요?”

 

조용하던 잠뜰이 드디어 입을 떼었다. 지구로 돌아가라는 공룡의 말을 굳이 끊는, 그런 우연인지 일부러인지 알 수 없는 애매한 타이밍에 대답하였다. 말이 끊겨서인지, 아니면 다른 무언가 때문이었는지, 공룡의 표정이 살짝 흐트러졌다.

 

“당신은 괜찮은 거예요?”

 

잠뜰의 곧은 눈이 공룡을 향한다. 올곧고, 다정한 눈. 공룡은 그런 눈을 잘 안다. 그 눈을 잠시 쳐다보다, 이내 공룡은 싱긋 웃으며 답했다.

 

“아까 제가 아무런 움직임도 없이 잠뜰 씨 앞에 바로 나타난 거 봤죠? 그만큼 순식간에 원하는 곳으로 자유자재로 이동할 능력이 있단 뜻이랍니다. 빙결계 마법 발동 후 저한테 보호막 치고 도망치는 건 일도 아니에요. 그러니 걱정 말고-”

“거짓말.”

 

이번에도 말이 끊겼다. 그러나 이번에는 공룡의 표정이 흐트러지지 않고 웃는 표정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었다. 알아차릴 건 알고 있었다. 공룡은 그런 눈을 잘 알고 있었으니까.

 

“거짓말이잖아요. 내가 이 자리까지 올라오면서, 이런 극한 환경에서 연구하면서, 아니 그 타임스테이션을 수십 번 가동하면서. 거짓말하는 사람 하나 정도 구분 못 할 것 같아요?”

“하하, 무슨 소리신지…?”

“잡아뗄 생각 말아요. 진실을 말해줄 때까지 우주선에서 안 내리고 여기서 버틸 거예요. 어차피 당신이 오기 전부터 타임스테이션 계산 못 했으면 폭발 휩쓸려 죽었을 텐데, 이제 와서 내가 마법진에 휘말려 죽는 걸 두려워하면서 찝찝함만 남기고 도망칠 것 같아요? 그러니 내가 정말 여길 떠나길 바란다면, 빨리 사실대로 말하는 게 좋을 거예요.”

그래, 공룡은 잠뜰과 같은 눈을 잘 알고 있었다. 올곧고, 다정해서, 속이기 쉽지 않은 그 눈을. 속을 훤히 들여다보는 것 같고, 그럼에도 불쾌하지 않은 그런 올곧은 눈을, 이미 여러 번 봐왔었으니까. 수백 년 전, 세계가 말하는 악에 맞서 싸운 동료들의 눈에서, 자신을 지지해준 이들의 눈에서. 이제는 다시는 볼 수 없는 그들의 눈을 닮아 있었으니까.

 

“그냥 적당히 거짓말에 속아 넘어가는 게 장관님도 저도 좋았을 텐데요.”

 

이런 사람들은 도무지 속일 수가 없다. 잠뜰은 여전히 답을 기다리는 듯 자신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공룡은 옅게 웃으며 한숨을 내쉬곤, 가벼운 말투로 입을 열었다. 괜히 무게 잡고 이야기해봤자 좋아질 이야기는 아니었으니 말이다.

 

“그래요, 솔직히 말하는 게 가장 빨리 납득시킬 방법 같으니 말할게요. 방금 말한 빙결계 마법으로 장관님이 계산하신 토마호크만큼의 온도를 만들려면 상당히 많은 마력이 필요하고, 제가 아무리 수백 년을 살아온 용사라 하더라도 그만큼의 마력을 아무런 페널티 없이 만들어낼 순 없어요. 그래서 제 모든 생명력을 마력으로 바꾸어서 마법을 시전할 거예요. 아 물론, 괜히 목숨 걸어서 객기 부리는 게 아니에요. 내 생명력으로 운용할 수 있는 마력량은 정확히 계산할 수 있거든요. 토마호크 혜성만큼의 영향력은 만들고도 남아요.”

“그 말은-”

“속된 말로 자폭마법이라고 표현하죠. 어차피 전 너무 오래 살아서 미련도 없고, 이런 세상 구하는 일은 당연히 오래 산 어른이 앞장서야 하는 거 아니겠어요? 괜히 아시면 찝찝하실 테니 거짓말하려 했는데, 이제 전부 말씀드렸습니다. 납득되셨을까요?”

공룡의 말을 끝까지 들은 잠뜰은, 공룡의 손목을 덥석 붙잡았다. 잠뜰은 듣자마자 그의 설명을 전부 이해하였다. 하지만 이해와 납득은 다른 단어였다.

 

“하지 마요.”

“왜죠? 세상을 구하고 싶은 거 아니었나요?”

“구하고 싶어요. 구하고 싶지만, 이런 방법으론 안돼요.”

“왜 안돼요? 당신의 방법과 비슷하잖아요. 내가 여기 도착하기 전까지 자기 목숨을 걸어서 세상을 구하려고 하던 사람은 당신 아닌가요?”

 

붙잡힌 손목을 통해, 공룡의 마지막 말에 잠뜰이 움찔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공룡은 그 말까지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싱긋 웃는 표정을 유지하며 공룡은 잠뜰이 손을 스스로 떼길 기다렸다. 그러나 잠뜰은 손을 놓지 않았다.

 

“…나는, 당신처럼 세상을 구한다는 것을 핑계로 내 목숨을 버리려 하지 않아요.”

 

그 말은 효과가 있었다. 이번엔 붙잡힌 공룡 쪽 손에 아주 약간의 떨림이 있었다. 붙잡고 있지 않았다면 분명 알아차리지 못했을 만큼 작고, 들키고 싶지 않아하는 동요의 증거였다.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네요.”

“알잖아요! 당신은, ‘세상을 구하기 위해서’ 죽으려는 게 아니잖아요. ‘죽을 수 있는 방법’이 세상을 구하는 것이니까 그러려는 거잖아!”

 

잠뜰은 소리쳤다. 공룡은 한마디도 죽고 싶다는 말을 하지 않았지만 알 수 있었다. 죽음을 접하기 쉬운 세상이었던 탓이다. 자신의 세상은 태양의 이상 현상 때문에, 나라의 국경도 무너지고 인류의 생존지가 지구의 가장 끝단인 남극으로 내몰린 곳이었다. 한 때 70억도 넘었다는 인류의 수가, 그 좁은 남극 땅에서만 인류가 살 수 있는데도 거주지 구역이 넉넉할 만큼 사람이 적어진 절망적인 세상에서 살고 있다. 세상을 떠난 이들에는 이상 현상에 잡아먹힌 이들뿐만 아니라 스스로의 절망에 잡아먹힌 이들도 많았다. 그런 세상이었기에, 그런 이들을 마주하는 것이 이상하지 않은 이상한 세계였기에. 이미 많이 봐왔기에 잠뜰은 공룡의 속뜻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래서 잠뜰은 공룡을 붙잡았다.

그러나 잠뜰의 손은, 공룡이 세게 팔을 휘두르는 것에 너무나도 쉽게 뿌리쳐져 버렸다.

“그게 뭐가 문제죠?”

 

잠뜰의 손을 뿌리친 공룡의 표정은, 바라보는 것만으로 순간 놀랄 정도로 차가웠다. 이제껏 생긋 웃던 표정은 전부 쉽게 사라져버리는 가면이었던 것처럼, 보는 이조차 무서워할 정도로 차가운 분노가 느껴졌다. 그 표정과 감정의 무게가 도무지 평범한 사람의 것으로는 느껴지지 않았다. 그에게서 느껴지는 중압감이, 조금 전까지 현실감이 없어서 잠시 잊어버렸던, ‘수백 년을 산’ 용사라는 설명을 피부로 와닿게 했다.

 

“잠뜰 씨, 저는 수백 년 동안 이 몸에 고정되었어요. 이 나이, 이 시간, 이 형태에 고정되었죠. 그리고 그 고정된 형태를 내 자의로 파괴할 수 없어요. 나는 마왕을 상대하기 위해 ‘만들어진’ 용사니까, 스스로 다치게 하거나 질병에 걸리거나, 죽을 수도 없죠. 본래라면 자폭 마법진이나 나 자신을 제물로 쓴 희생 주문진도 ‘마왕’이 상대가 아닌 이상 나는 실행할 수 없어요. 하지만 이번에 마법을 쓰려고 할 때는, 발동되더라고요. 왜 그럴 것 같아요? 정답은, 저걸 막지 못하는 이상 이 세계 통째로 사라져버리니까. 그렇게 되면 마왕으로부터 보호할 세계도 없어져 버리니까. 그래서 신이 이번엔 예외로 인정해주는 거예요.”

 

공룡은 잠뜰로부터 몸을 돌려 우주선 앞쪽으로 이동하였다. 그곳의 창을 통해 붉게 타오르는 태양이 보였다. 한때 지구에 생명이 살 수 있게 해주었던, 그러나 이제는 지구의 모든 것을 파괴할 태양, 그리고 세상에서 사라지고 싶은 자가 이용할 태양이, 붉은빛을 뿜으며 타오르고 있었다.

 

“알겠나요, 잠뜰씨? 지금 내가 하려는 건 신도 허락해준 죽음이라고요. 수백 년이나 시도해봐도 변형하지 못했던 고정된 내 몸을, 처음으로 내가 원하는 대로 변형시킬 수 있는 기회가 온 거에요. 나는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아요. 시간이 너무 많이 흘렀고, 홀로 느낀 절망이 너무 컸거든요. 처음으로 그 신에게 감사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예요.”

 

창 앞에서, 공룡은 몸을 돌려 잠뜰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생명과 죽음의 붉은 태양을 등 뒤로 한 채, 조금 전의 표정은 모두 잊어버리라는 듯 웃으며 말했다.

 

“그런 신도 허락해준 일을, 당신이 무슨 권리로 나에게 안된다는 거예요?”

검은 우주와, 수없이 빛나는 밝은 항성들과, 그 가운데 원망스러울 정도로 밝은 거대한 태양. 그 모든 것을 뒤에 둔 탓인지 표정에 그늘이 드리워진 그는, 그런데도 밝게 웃으며 잠뜰을 바라보았다.

잠뜰은 그저 그런 그를 바라보았다. 대답도 못하고, 표정으로 무언의 메세지를 보내지도 않았다. 그저, 그 지독히도 아름다운 별과, 그 별로부터 생명을 부여받은 이 세상과, 그 세상을 사랑하는 자신과, 그 사랑하는 세상을 자신이 사라지고 싶어 이용하고 구해주겠다는 자를 생각하였다. 생각하고, 생각하다가, 그 붉음을 바라보는 것이 버거워 눈을 잠시 감아버렸다가, 다시 눈을 떠서 그를 바라보았다. 여전히 그는 웃고 있었다.

 

“마음 편히 생각하세요. 어차피 잠뜰 씨의 방법이나 제 방법이나 크게 보면 별로 차이 없잖아요. 죽기 위해서 세상을 구하려는 나와, 세상을 구하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려는 당신. 이 둘, 비슷하지 않나요? 결과만 보면 어차피 목숨 하나가 버려져서 세상을 구하는 일이잖아요?”

“…그게 어떻게 같아요! 어떻게든 세상을 구하려고 방법을 찾아내서 겨우 타임 스테이션이라는 것을 손에 넣은 나와, 죽을 자리를 찾다가 이 우주선에 닿은 당신이 어떻게 같아요?”

“아아, 맞아요. 가장 결정적인 차이가 있죠. 잠뜰 씨가 애써 무시하려고 했던 것. 당신의 방법은 ‘사람이 살 수 있는 세계’를 구하는 거지만,”

 

공룡은 잠뜰의 말에 맞장구쳐주며 잠뜰에게 다가갔다. 걸음 소리가 가까워질수록, 잠뜰은 불안함에 심장 박동이 커지는 것이 느껴졌다. 자신이 애써 무시하려던 것,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그 가능성을 계산해볼 수밖에 없었던 것.

 

“내 방법이면, 잠뜰 씨가 지금 살고 있는 ‘당신의 세계’도 구할 수 있어요.”

 

무시하고 싶었던 진실이, 결국 코앞까지 다가와버렸다. 가까이 다가와 선 공룡 탓에 잠뜰은 공룡의 눈도, 공룡이 저 대신 입 밖으로 내뱉어준 진실도 더이상 외면하지 못했다.

잠뜰은 남극 과학기지의 과학부 장관이다. 인류가 멸망 직전까지 내몰린 상황에서 괜히 기지의 장으로 있는 게 아니었다. 잠뜰은 머리가 좋았고, 그렇기에 공룡이 우주선에 등장하여 타임 스테이션을 언급한 순간, 바로 이 가능성을 알아차렸다. 믿었던 타임 스테이션의 실패로 절망에 빠진 자신과, 인류가 살아남을 수 있는 세계와, 더 나아가 자신이 지금 살고 있는 이 세계조차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을. 그 실현 가능성과, 그것으로 잃을 대가를.

 

“당신은 자신이 죽어도 괜찮으니 사람이 살아남을 수 있는 세상을 찾기 위해 타임스테이션을 반복하고 있지만, 사실 타임스테이션에 처음 들어왔을 때의 마음은 살고 싶어서였잖아요. 살고 싶어서 시간을 되돌릴 방법을 찾고, 해보니 당신의 세계는 살릴 수 없다는 것을 알았던 거지. 물론, 진상을 알고 나서도 계속해서 사람이 살 수 있는 세상을 찾으려고 노력하는 것은 무척 고결하다고 생각해요. 앞선 계약자들은 보통 그 사실을 알고 나선 절망하며 계약을 파기했거든요.”

“….”

“말이 길어졌네요. 어쨌든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당신 살고 싶잖아요. 당신의 삶의 소중함을 잘 알고, 당신 주변 사람들을 소중히 여기며,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이잖아요. 선한 마음을 가지고 사람들이 살아남을 세상을 찾으려했던 당신에게 내려진 상이라고 생각하세요. 이것이 당신도, 세상도 모두 살 수 있는 방법이에요.”

“…하지만 옳지 않은 방법이잖아요.”

 

공룡이 눈앞에 나타난 순간부터 외면하고 싶었던 진실이지만, 그만큼 그때부터 고려했던 가능성이라 나름의 답도 이미 내린 일이었다. 공룡의 방법을 선택하면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 자신의 목숨과, 자신의 세상과, 인류가 살아남을 수 있는 세상, 그 모든 것을 얻을 수 있다.

잃는 것은 단 하나, 스스로 사지로 들어가는 자를 내버려두었다는 죄악감. 공룡과 타임스테이션을 동시에 아는 자는 자신밖에 없을 테니, 자신 하나만 감당하면 되는 자신의 양심과, 얄팍한 정의뿐이었다.

그러나 잠뜰은 그것을 포기하지 못하였다.

 

“당신이 제안한 방법이 가장 많은 사람을 살릴 수 있는 방법이죠. 쓸데없이 여러 세계를 만들고 다시 지우며 반복할 필요도 없고, 나도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이죠. 하지만, 하, ‘드디어 죽을 수 있다’라고요? 웃기지 마요! 누구도 그런 말을 하면서 죽으면 안 돼요! 그딴 식으로 사람을 죽게 내버려두고 살아남는 건, 내가 인정 못 한다고요!”

 

잠뜰은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자신 하나만 눈감고 감당하면 되는 일이라지만, 정의나 양심은 그런 것으로 사라질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자신이 눈감아버린다고 공룡이 홀로 사지로 가버린 일이 사라지지 않는다. 자신이 잊어버린다고, 그가 고통조차 잊어버린 깊은 절망에 빠져, 미약하게 웃으며 사라져버린 일이 사라지지 않고, 그것을 자신이 내버려두었다는 일이 사라지지 않고, 이 세상이 그런 이에게 구해졌다는 사실이 사라져버리지 않는다.

잠뜰은 인류가 살아남을 세상을 바란 만큼, 자신 역시 인간으로 남고 싶었다. 옳지 않은 일을 인류를 위해 라는 거창한 대의명분으로 속여가며 하고 싶지 않았다. 잠뜰의 눈은 올곧고, 다정했기 때문에. 이렇게 절망적인 세상에서도 장관으로서 사람들을 이끌어가는 이였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잠뜰은, 정말 생각하고 싶지 않고 무시하고 싶었지만, 이 힘겨운 결정을 내릴 수 있었다.

 

“당신 동료들은요?”

 

공룡의 그 한마디에, 심장이 내려앉는 것 같았다. 잠뜰은 괴로운 눈으로, 힘겹게 그를 바라보았다. 반면 그의 눈은 잔인하리마치 잠잠하고 평온했다.

정말 힘겹게 내린 결정이었다. 그러나 힘겹게 내렸기에, 더더욱 흔들리기 쉬운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자신을 사랑하고 세상을 사랑했기에, 주변인들도 그만큼 사랑했기에.

 

“당신은 내 방법에 납득 못할 수 있죠. 세상을 사랑하고 한 사람 한 사람의 소중함을 아는 사람이니까. 하지만 당신들의 동료도 그렇게 생각할까요?”

“…그,건….”

“그들에게 타임 스테이션은 제대로 설명했나요? 다른 세계의 당신은 살 수 있지만 당신은 살지 못한다고 설명했나요? 그들에게 당신은 다른 세계의 그들을 살리기 위해 노력하지만 이 세계는 이미 포기해버렸다고 말했나요? 인류가 살아남을 수 있는 세상에 그들은 없다고 설명해줬나요? 그리고 설령 그들이 그 설명에 일단 납득했다 하더라도,”

 

괴로움과 혼란으로 범벅된 잠뜰의 표정을, 웃음조차 사라진 무감정한 공룡의 표정이 바라본다.

 

“그들에게 이제 당신들이 죽지 않을 방법이 나타났지만, 그럼에도 그 방식은 옳지 않으니 포기하겠다고 말할 수 있어요?”

 

잠뜰의 동공이 심하게 흔들렸다. 손끝이 파리하게 떨리더니, 다리에 힘이 풀린 것인지 그녀는 몇 걸음 뒤로 움직였다. 공룡은 그런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인간과 인간이 아닌 자에게 차이점이 있다면, 서로를 소중히 여길 수 있는 사람의 존재일 것이다. 잠뜰과 공룡 모두 세계를 구하겠다는 목적이 있다 하더라도, 인간인 잠뜰은 소중한 이가 있어 그를 실현하지 못할 것이다. 반면 인간이라 부르기엔 지나치게 긴 삶을 살고 소중한 이를 모두 잃은 자신은, 그를 실현 할 수 있고, 실현 할 것이다.

 

“잠뜰, 당신은 숭고해요. 곧고, 옳고, 세상을 사랑하고, 자신보다 남을 위하는 멋진 사람이죠. 사람을 지키라고 신에게 임명받은 나와 달리 짧은 수명 안에서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하는지 알고, 신중하게 결정한 뒤에 망설임 없이 나아가죠. 당신의 그런 점을 존경해요.”

비틀거리며 뒷걸음질하던 잠뜰은, 워낙 작은 우주선이라 몇 걸음 가지도 못하고 어딘가에 부딪혔다. 그 충돌에 정신차려 바라보니, 공간을 이동할 수 있는 스페이스 스테이션 탑승장치 옆이었다. 이대로 계기판의 버튼을 누르기만 하면, 자신은 이 우주선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공룡을 돌아보니, 그 역시 이 사실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숭고한 결정은, 당신 하나의 목숨에 해당하는 일이잖아요. 당신의 동료들에게, 당신의 가족들에게, 이 세계의 모든 사람들에게 당신과 똑같은 결정을 하라고 말할 수 있나요? 당신이 무슨 권리로?”

 

애초에 일개 인간인 당신 혼자서 이런 중대한 일을 하게 내벼려둔 것이 문제였다. 이렇게까지 한 사람에게 올곧은 마음만 가지고 세상을 구하라고 하는 것이 잘못된 거였다. 그렇게 해서는 인간으로 남을 수 없다는 것을, ‘용사’인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으니. 당신을 잔인한 진실로 밀어붙여 떠나게 하여 미안하지만, 이로써 당신은 인간으로 남아, 남은 생을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이다.

공룡은 괴로워하는 잠뜰을 바라보았다. 그대로 떠나면 된다. 버튼 하나만 눌러버리고, 한 번만 눈을 돌려버리면 된다. 자신 대신 세상을 구할 자의 마지막 같은 것은 보지 않고, 자신이 어찌할 수 없던 일로부터 죄책감을 가지지 말고, 그대로 돌아가면 된다. 당신은 그래도 괜찮다.

 

“그래도…안 돼요.”

 

그 대답은, 정말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공룡은 놀란 눈으로, 잠뜰이 전송 위치에서 내려와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것을 바라보았다. 걸음이 빠르지 않았다. 무겁고, 약간의 망설임도 실려있었다. 고개를 숙이느라 정확히는 볼 수 없는 표정 역시 여전히 괴로움이 담겨 있는 것이 언뜻 보였다.

그러나 그럼에도 움직이고 있었다. 도망칠 수 있는 곳으로부터 멀어지고 있었고, 도망쳐서는 안 되는 자신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나는 당신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몰라요. 왜 당신이 혼자 이렇게 긴 시간을 버텨와야 했는지, 왜 당신이 인간이라고도 불리지 않게 되었는지, 왜 당신이 스스로 죽을 자리를 찾아다니다 여기까지 왔는지. 나는 당신보다 긴 시간을 살지도 않았고, 아직 뚜렷한 방법도 찾지 못했지만….”

 

마침내 잠뜰이 다시 공룡 앞에 서 고개를 들었다. 공룡은 잠뜰을 바라보았다. 괴로웠던 흔적은 남아있지만, 그 마음을 잊지 않지만, 그럼에도 결정을 내린 그녀를. 믿을 수 없는 일을 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래도 이게 옳지 않다는 것은 알아요. 이렇게 죽고 싶은 자를 내버려 두어선 안돼요.”

 

평범한 인간이 이럴 수 있나?

공룡은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어떻게 이럴 수 있지? 살고 싶어 발버둥치며 방법을 찾았다가, 그 방법으로 살아남을 수 없다는 걸 깨달았는데도, 계속해서 세상을 구할 방법을 찾는 것만으로도 영웅적인 면모를 보여주었다. 그런데 그런 상황에서 당신도 살 수 있는 방법이 있다고 알려주었는데도, 그럼에도 포기하고 ‘옳은 길’을 택하는 게 정말, 평범한 사람의 마음일 수 있는 건가?

 

“죽고 싶어서 죽는 건 안돼요. 삶의 의미가 없다고 생각해서 죽는 건 안돼요. 죽을 수 있는 건, 살고 싶은 사람뿐이에요.”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 타임 스테이션을 과하게 사용하느라 머리가 어떻게 됐어요? 당신이 하는 말이 앞뒤가 맞다고 생각해요? 죽어야 한다면 죽고 싶은 사람이 죽어야 하고 살아야 한다면 살고 싶은 사람이 살아야죠.”

“틀려요!”

 

잠뜰은 단호하게 외치며, 살짝 흔들리는 공룡의 목소리를 막았다. 그 호통과도 같은 답변에, 공룡은 자신이 동요하고 있다는 것을 그제야 눈치챘다.

그래, 동요하고 있다. 망설이고 괴로워하며 답을 내린 잠뜰은 조금씩 동요를 잠재우고 있었고, 단단하게 생각을 다져왔던 공룡은 점점 동요하고 있다. 이런 사람은 본 적이 없어서, 이런 가능성은 생각하지 못해서, 어쩌면 수백 년간 쌓아와 단단해졌다 자신한 나의 생각이 바뀔 것 같아서.

 

“죽음은 그 자체로 아픈 일이에요! 사람은 죽을 때 빛나는 가루로 부서져내리지도 않고, 예쁜 꽃잎이 되어 흩날리지도 않아요. 아무리 부정하고 싶어도, 어떤 방식으로 죽든 아름다운 죽음 같은 건 없어요! 스스로 끝을 낸 죽음이든 사고를 당한 죽음이든 단순히 슬프다며 눈물 조금 쏟고선 아름다운 사람이었다며 몇 마디 말 얹고선 마무리 지을 수 있는 게 아니란 말이에요! 죽음은, 삶의 끝은, 그 자체로 아프고, 추잡하고, 슬픈 거라고요. 그것을 눈 앞에 본사람도 남겨진 사람 모두에게 말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잠뜰의 목소리가 떨려 흐트러졌다. 그 떨림은 자신의 선택을 후회해서라던가 지금도 그 선택을 망설이고 있어서가 아니었다. 지금 잠뜰의 목소리를 흔드는 것은 그녀의 다정과, 눈앞의 사람이 겪은 서글픔에 공감하였기 때문이다.

 

“그 많은 감정 위에 죽는 당사자의 ‘죽고 싶어’까지 포함되어선 안 돼요.”

 

죽음을 접하기 쉬운 세상이었다. 떠나가버린 사람도 떠나고 싶은 사람도 많은 세상이었다. 그렇기에 남겨진 자들의 후회와, 따라가고 싶은 마음도 많이 접하고, 느꼈었다. 그래서 알았다. 수백 년을 산 그 긴 세월 분의 서글픔을 전부 이해하진 못하여도, 지금 붙잡아야 한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하, 그걸 지금 자기 세계 전체를 희생시켜서 다른 세상을 구하려는 사람이 할 말이라고 생각해요?”

“나는 그쪽과 달라요. 나는 내 삶의 가치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어요.”

공룡은 그 대답이 불쾌했다. 저렇게 손이 떨릴 만큼 세상에 정이 많은 사람이, 그 떨림을 숨기고 싶을 만큼 타인에게 다정한 사람이, 그 사람이 아니라 내가 사는 것이 옳다고 말하는 것이 불쾌했다.

 

“죽고 싶지 않아요. 가능하면 할 수 있는 데까지 오래오래 살고 싶어요. 완벽하진 않았더라도 내 삶은 소중했고, 많은 사람으로부터 사랑받았고, 나도 많은 사람을 사랑했으니까. 그래서 할 수 있다면 내가 지금 숨 쉬는 세계를 사랑하면서 이곳에서 오래오래 살고 싶어요. 하지만… 하지만 내 삶이 소중한 만큼, 타인의 삶도 소중하고 세상도 소중했기에, 난 선택해야 했어요. 그리고 내 삶이 얼마나 소중한지 정확히 알기 때문에, 자신 있게 나와 세상 중에 세상을 선택할 수 있는 거예요. 그만큼 행복한 삶이었기 때문에, 그만큼 이 선택의 가치와 귀중함을 아니까. 추잡하고 슬픈 감정들 사이에서, 살아있었다는 것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었다는 마음 하나를 포함시킬 수 있으니까.”

 

차라리 세상을 사랑하지 않았다면 진작 포기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자신을 조금밖에 사랑하지 않았다면 자신의 양심은 묻어둔 채 도망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잠뜰은 자신을 정말 많이 사랑했고, 자신의 신념과 옳은 일을 향한 움직임까지 전부 자신으로서 사랑하였다. 그래서 세상을 사랑할 수 있었고, 그래서 타임 스테이션에 오를 수 있었다.

 

“하지만 당신은 아니잖아요. 당신은 삶이 귀중해서 이 무거운 선택을 내린 게 아니라, 그저 당신이 죽을 수 있는 방법이 나타났으니까, 이 세상을 도구로 써서 죽으려는 것뿐이잖아요! 그건 같은 선택을 하려 했던 나에 대한 모욕이고, 당신의 삶을 받아 살 모든 사람한테 전부 모욕이에요. 이딴 건 목숨과 맞바꾼 선택이 아니라 그냥 포기에요!”

“하, 그래요. 선택이 아니에요. 소원이었죠!”

 

공룡은 이 불쾌함을 견딜 수 없었다. 누군가에게 소리 질러본 적이 몇 백 년만이더라? 그것조차 가늠 안 될 정도로 감정을 죽이고 살았었다. 그랬던 자신이 이렇게 동요하고 감정적이 되는 것이 불쾌했다.

 

“당신 눈앞에 있는 건 인간이 아니에요 잠뜰 씨. 나도 한때 인간이었던 적은 있지만, 긴 세월에 변해왔어요. 전쟁터에서 동료들만 두고 홀로 살아남았을 때, 늙어 죽어가는 가족들만 두고 홀로 젊음을 유지할 때, 애써 새로 사귄 친구들이 늙지 않는 나를 보며 이상한 눈으로 떠나갈 때, 찾아 없애야 하는 숙적이 몇백 년 간 아무런 징조도 없이 숨어있어 무작정 기다려야 할 때! 이 모든 시간 동안 내가 미치지 않고 제정신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내가 나의 인간성을 포기하였기 때문이에요. 그 벗어날 수 없는 빌어먹을 숙명 때문에, 이 사랑해야 한다는 세상을 사랑하고 지키기 위해서! 버티고, 버티고, 도망칠 곳 따위 없다는 것에 체념하고, 그럼에도 세상을 지키기 위해서 참고, 견디고, 인간이라 불릴 수 있는 여지를 조금씩 버려가면서 여기까지 왔어요! 그런데 드디어, 내 의무를 완수할 수 있으면서도, 지나치게 긴 이 삶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 나타났는데! 내가, 드디어….”

 

숨이, 가팔랐다. 목이 아팠다. 몇 백 년 만에 감정을 내보내는 것이 너무 아팠다. 생명과 시간을 묶어버려 벗어날 수 없는 의무, 그러나 그 의무를 완수하지도 못하게 몇백 년간 모습도 보이지 않는 적. 혼자 고립되어 남겨져 시들어가는데도, 스스로 사라질 수조차 없는데, 의무를 내려놓고 무작정 사람들 사이에 녹아 살아가기엔 지금껏 사명을 짊어져 온 조상과 가족들에게 미안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로 숨을 겨우 쉬던 나날들 끝에, 겨우.

 

“드디어, 인간의 특성 중에 ‘죽으면 죽는다’라는 것으로 인간으로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을 찾았다고요. 사랑해야만 하는 세상을 미워하는 것을 그만두고, 홀로 고정된 고독감에 잠겨죽지 않고, 그러면서도 많은 사람을 구함으로써 전대 용사들의 긍지도 더럽히지 않는 방법을 찾았어요. 이 방법은 나에게 구원이나 다름없다고요. 오랫동안 바란 소원을 그 신이라는 작자가 처음으로 들어줬어요. 그런데 이게 옳지 않다고요?”

겨우 찾아냈는데. 정말, 이제는 그만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그만해도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공룡은 잠뜰을 바라보았다. 그의 표정은 미소를 띠고 있었지만, 이전과는 달랐다. 가면 같은 미소가 아닌, 어쩌면 몇 백 년 만에 지어본 진짜 감정으로 이루어진 표정. 서글프고도 안타까운, 물기 어린 미소였다.

 

“그건 너무 나한테 잔인한 거 아니에요?”

 

그토록 슬픈 말을, 잠뜰은 들어본 적 없었다.

다음 말을 내뱉기까지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함부로 말할 수 없었다. 어떤 말을 해야 당신이 덜 상처받을지, 어떤 말을 해야 수백 년을 홀로 견디다 그러한 결론에 도달한, 아니 내몰린 당신을 설득할 수 있을지. 잠뜰은 필사적으로 생각하고, 생각하고, 눈물이 날 것만 같은 감정적 마음은 지금 당장 도움이 되지 않을 테니 억누르고, 또 생각하였다.

 

“…인간을 증명할 수 있는 게 죽음뿐이라니, 왜 그런 슬픈 말을 해요. 공룡 씨는 누구보다 책임감 있는 사람이에요. 세상을 사랑하니까 괴로워하면서도,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사명으로부터 도망치지 않을 책임감도 가지고 있는데-”

“오히려 그래서예요. 평범한 사람이라면 가족이 소중하다느니 하면서 전장에서 도망칠 수 있었겠죠. 하지만 소중한 것 따위 남기지 않고, 세상을 보호해야 한다는 개념만 남겨놓는 방식으로 살아남은 나는, 그런 인간 같은 감정은 없어요. 죽지도 못하는 내가, 날 생명체가 아니라 인류를 지키기 위한 도구나 하나의 개념이라고만 생각해야 그나마 버틸 수 있었으니까. 그러니 제발 나한테-”

 

힘겹게 말을 이어가던 공룡은, 자신의 손으로 그의 얼굴을 가렸다. 표정을 보여주고 싶지 않아서였는지, 무언가 떨어지지 않게 짓눌러야 했던 것인지.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고개 숙인 그로부터 잔뜩 잠겨버린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이제와서, 내가, 인간이라고 하지 말아줘요. 내가 인간임을 포기하고 버텨내온, 흘려내온 세월이, 아무 의미 없는 시간이었다고 하지 말아줘요. 이제 그만 죽어서 인간으로 돌아가도 된다고, 그렇게 말해줘요. 제발.”

잠뜰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수백 년간 홀로 세상을 지켜온 용사라는 자는, 이제 너무나도 작고, 위태로워 보였다. 다가가 위로를 건네는 것조차 상처일 것처럼 보이는, 위태로운 사람. 그랬기에 더 안타까운 사람.

몇 번이고 입술을 달싹이던 잠뜰은, 하려던 말을 전부 삼켜버렸다. 공룡은 설득할 수 없었다. 이것이 결론이었다. 시간이 더 있다면 가능할지도 모르나, 이젠 그들 모두에게 남은 시간이 없었다.

 

“공룡 씨는… 그래요, 공룡 씨 말대로 인간이 아닐지도 모르죠. 제 말대로 인간일지도 모르고요. 미안해요, 정말. 좋은 말을 해주고 싶었는데, 이젠 당신에게도 나에게도 시간이 없네요. 시간이 더 있었다면, 천천히 이야기할 수 있었을 텐데. 시간이 더 있었다면, 조금 더… 당신과 함께 내가 사랑해 마지않던 세계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을 텐데.”

“….”

“그러니…이렇게 이기적인 독단을 내려서, 정말 미안해요.”

“…뭐라고요?”

 

그 순간, 우주선 안이 밝은 빛으로 가득 찼다.

공룡은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 수 없었다. 태양이 벌써 폭발한 걸까 싶었으나 다행히 그것은 아니었다. 열기가 우주선을 뚫고서도 느껴지는 게 이제 정말 얼마 남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아직 폭발하진 않았다. 그러니 이 빛은 다른 것 때문이었다.

잠뜰이 미안하다고 한 의미를 깨달은 것은, 그 밝은 빛이 사라진 직후였다.

 

“…!”

 

빛이 옅어지니 확실히 보였다. 공룡의 몸 주위로, 푸른 색 빛의 고리들이 돌고 있었다. 무슨 컴퓨터 언어인 것처럼 알 수 없는 숫자와 문자가 계속해서 변하면서 나열된 고리들이, 공룡의 몸 주위에 생겨나느라 그처럼 밝은 빛이 났던 모양이다. 그리고 공룡은 이 푸른색을, 홀로그램 창과도 같은 이 선명한 푸른색을 어디서 보았는지, 기억해냈다.

 

‘아마 지금 이 세계가 폭발에 통째로 휘말려도, 저는 다른 평행세계 아무거나로 자동으로 넘어가져서 그곳 역사에 덮어씌워져-’

 

성공한 것이다. 타임스테이션이, 크로노스가, 여행자가. 잠뜰이 성공했기에, 그 모든 세계에서 유일한 자신의 역사를 그 ‘인류가 살아남은 세계’에 덮어씌우기 위해, 타임스테이션이 자신을 이송할 준비를 하는 것이다.

아마 자신의 말을 들었을 때부터 잠뜰은 그 가능성을 알았을 거다. 잠뜰은 무척 올곧고, 다정하며, 판단이 빨랐으니까. 그러니 자신을 설득시키는 대신, 크로노스와 여행자를 믿고, 그들이 발견한 세상으로 공룡 자신을 보내기로 한 것이었을 터였다.

“아, 다행이다.”

 

공룡은 그 목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눈을 돌렸다. 푸른 빛의 고리들 너머, 그 사람의 표정을 보았다.

말도 안 된다 생각하였다. 시간을 되돌린다 해봤자. 고작 평범한 사람 몇 명의 움직임. 한 시간도 채 되지 않는 짧은 인생의 변화였다. 고작 그것만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을 리 없었다. 세상을 구해야 하는 무거운 사명감은, 자신처럼 신에게 억지로 임명된 자가 감당하면 되는 일이었다. 평범한 인간이 아니라, 자신처럼 인간이 이젠 아니게 되어버린 자가 해야 하는 일이었다.

 

“내 세상에서 적어도 한 사람은, 더 살아갈 수 있겠구나….”

 

세상의 멸망에서 벗어날 사람이 한 명 있다는 것만으로도 저렇게, 울음이 넘칠 것 같으면서도 웃을 수 있는 사람이 감당해야 할 무게가 아니었단 말이다.

공룡도 알았다. 잠뜰이라고 이 길을 선택하고 싶었겠는가. 아무리 인류가 살아남을 수 있는 세상을 찾는 일이라고 하더라도, 수많은 평행세계에서도 그 가능성을 실현하지 못하고 또다시 멸망해가는 세계를 바라보는 것이, 잠뜰에게 편한 일이었겠는가. 그런 힘든 상황에서 구원자처럼 다가온 이가 잠뜰 자신도, 잠뜰의 소중한 이들도 모두 구해주겠다고 했을 때, 그걸 거절하는 것이 편했겠는가. 옳은 길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죽어가는 이들을 내버려두어야 한다는 것에, 슬퍼하지 않을 사람이 있겠는가.

그런 상황에서, 그 거대한 슬픔 안에서, 당신의 일을 가장 반대했던 내가, 당신이 사랑했던 세계에서 유일한 생존자로 새로운 세상에서도 살아갈 수 있으리라는 것을 알았을 때, 무슨 심정이었을까. 어떤 마음이었기에 그렇게 슬프면서도 행복하게, 세상 모든 것을 사랑할 수 있을 것처럼 아름다운 미소를 지을 수 있는 걸까.

 

“공룡 씨, 우리 이렇게 해요. 당신이 살아야 하는 이유를 다시 생각해보자고요.”

“…하아, 그래요. 당신이 발견한 새로운 세계를 수호하고, 또 위험해지면 구하는 그런 역할이면 될까요?”

 

어차피 이렇게 된 거, 저 대단한 사람이 원하는 대로 해주자고 생각하였다. 이렇게 또다시 나의 질긴 목숨이 이어지겠구나. 공룡은 속으로 어두운 한숨을 삼켰다. 세상을 구하고 스러져갈 영웅 앞에서 이런 생각을 티내면 안 된다. 나는 아무것도 해주지 못했으니, 이런 마음이라도 삼켜내야 했다.

 

“아니요, 그건 용사의 역할이잖아요. 당신은 이제 용사가 아니고요.”

“…네?”

 

공룡은 놀라 고개를 들었다. 표정에 드러날까 봐 애써 눈을 피하고 있었는데, 잠뜰을 보니 이미 그의 마음 같은 건 진작 들켰던 모양이다. 잠뜰은 생긋 웃었다. 자신의 가면 같은 웃음과는 다른, 포근하고 맑은 웃음이었다.

 

“그건 공룡 씨가 신에게 사명을 받아서 열심히 지켜왔던 세상 속에서 공룡 씨의 역할이었죠. 하지만 이제 그 세계는 곧, 저 별의 폭발에 휩쓸려 우주 속 별빛으로 사라질 거잖아요. 그러니 멸망한 세계의 용사는, 새로운 역할을 부여받아야 하지 않겠어요? 지금부터 당신은, 새로운 세계 탄생의 단 하나뿐인 목격자가 되는 거예요. 완벽하고 전지전능한 신이 아닌, 한낱 인간에 의해 다시 만들어지는 세계의 탄생을 지켜보고, 그렇게 만들어진 세계가 어떻게 되는지 지켜보는 거예요.”

 

용사가 아니다. 용사로 살아야 했던 세계는 멸망한다. 더 이상 자신은 용사가 아니게 된다.

공룡은 마른 침을 삼켰다. 아니, 동요하지 말자. 이건 말장난에 불과하다. 인과관계가 어긋나지 않는가. 자신이 타임 스테이션에 의해 선택되어 넘어갈 수 있던 이유도, 유일한 신에 의해 임명된 유일한 용사여서 아닌가. 그렇다면 넘어간 세상에서도 세계를 수호하는 용사로 남으라는 이유일 텐데, 용사가 아니라니.

하지만, 이제 그 세계는 처음 신이 지정한 세계가 맞나? 잠뜰이라는, 그저 세상을 너무 사랑한 인간이 찾아내고 만들어낸 세곈데.

 

“이것저것 모순은 남아있겠죠. 그리고 그 모순은 오직 공룡 씨 마음에 달려있어요. 공룡 씨가 인간인가 아닌가와 같은 문제이죠. 그러니 그 모순이 해결되기 전까지는, 용사라는 이름 말고 새로운 이름으로 먼저 살아봐요. 이제부터 당신의 역할은 그렇게 새롭게 만들어진 세상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지켜보는 거예요. 마왕으로부터 구하거나 세상의 멸망을 저지하는 게 아니라, 그저 지나가던 이상한 사람의 부탁으로 그 세상에서 살면서 지켜보는 거예요. 얼마나 많은 사람이 삶을 다시 이어갈 수 있는지, 얼마나 많은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는지. 그리고 그 모든 사람을 내려다보는 하늘은 얼마나 푸르고, 그 모든 사람 위의 밤하늘은 얼마나 많은 별빛을 담을 수 있는지. 새로운 세상에 갈 수 없었던 불완전한 창조자인 나 대신에, 당신이 목격자로 지켜보는 거예요. 그런 사소한 거라 부를 수 있다면 사소하고, 거창한 거라 부를 수 있다면 거창한 것들을 지켜봐 줘요. 그렇다면 언젠가 당신도,”

 

잠뜰은 미소 지었다. 그저 평범한 인간인 네가, 모든 사람을 구하지는 못한 네가, 새로운 세계를 창조해낸 네가, 그러나 함께 가진 못할 불완전한 창조자인 네가. 뭐라고 불러도 좋을 네가, 웃는다.

 

“이 푸른 별에서 살아가는 당신의 삶을, 조금은 사랑하게 될지도 모르죠.”

 

그 말을 온전히 믿고 싶다.

이제 평온을 찾고 싶은 나를 위해서도, 그런 나를 다른 세상으로 보내는 것에 위안을 얻는 너를 위해서라도. 공룡은 잠뜰의 말을 정말 믿고 싶었다. 그는 오랜 시간 홀로 고독을 버티느라 지쳤고, 잠뜰 역시 수많은 세계의 시간을 홀로 건너뛰며 멸망을 막을 방법을 찾느라 지쳤을 터였다. 그런 잠뜰은 이제 그 목적을 이루어 평안을 찾았고, 자신에게도 그 평안을 누릴 수 있는 방법을 보여주며 손을 내밀어 주었다. 이제 곧 태양 폭발에 휘말려 사라져버릴 네가 그렇게 말하니, 정말 믿고 싶고, 그러니 편안히 떠나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나는, 모르겠어요. 당신의 길이 틀렸다는 것이…아니에요. 당신은 옳고, 곧고, 숭고해요. 그래서, 더더욱….”

 

하지만 온전히 믿기엔 불행히도 공룡은 지나치게 오래 살았고, 지나치게 많은 것을 알았으며, 지나치게 다정한 사람이었다.

 

“나도 한때 세상을 사랑했었다 생각했어요. 내 가족과 동료들을 사랑했고, 그들을 돕고 싶은 마음에 내 모든 것을 이용해서 전장에 나가고 버텼었어요. 내 일족이 모두 죽고 나 홀로 남아 고독을 혼자 견뎌야 할 때도, 세상을 지키겠다는 마음으로 버텼어요. 나는 내가 세상을 사랑했었다 생각했는데, 이젠 그 마음을 내려놓은 지 오래예요. 더는 사랑한다 생각이 들지도 않고, 다시 사랑했다가 또 허무에 휩쓸릴 나날을 버틸 수 있을지도 모르겠어요. 이젠 내가 과거에 내 가족들과 세상을 어떻게 사랑했는지 기억도 안나요. 살아남기에 급급하느라, 버티는 게 전부인 삶을 보내느라, 인간의 감정을 덜어내고 인간이 갖췄어야 할 것을 잃어버리느라 이렇게 되어버린 걸지도 몰라요.”

 

그도 언젠가 세상을 잠뜰처럼 사랑한다 여겼던 나날들이 있었다. 그러나 이젠 그 기억이 희미하여 자신도 세상에 대해서도 알 수 없게 되어버렸다. 그 상실의 아픔에서 헤어나오느라 그는 많은 것을 내려놓아야 했다. 세계를 사랑하는 법도 자신을 사랑하는 법도 내려놓아야 했는데, 또다시 그 고통의 길로 가면 어떻게 될지, 자신이 없었다.

 

“그렇게 또다시, 다른 사람은 죽게 내버려 두고, 사라져버린 수천만 시간과 그 생명의 무게를 홀로 기억하고, 짊어진 채로 살아남아 버리면? 그렇다면 나는? 몇 십 년도 못산 인간이, 지나치게 오래 살아버린 나 대신 죽는 걸 보고 아무렇지 않게 살 수 있을 것 같아요? 결국엔 내가 감당해야 할 목숨 무게만 무거워지는 일인데. 또다시 나만 살아남았다는 그 생각에, 나는 이제 숨이 막힐 것 같은데-”

 

홀로 살아온 그 고독감에, 남기고 온 자들의 목숨의 무게에 질식해버릴 것 같으면서도, 이 상냥한 사람의 부탁을 외면해버릴 수도 없어서. 세상을 지킬 도구가 되어버리겠다고 생각했으나, 다정한 마음이 어설프게 남아있어 버려서.

 

“당신의 죽음으로 구한 세상에서 살아갈 내가, 당신이 구한 세상이 사랑스러워지는 순간을, 감당 못할 것 같다고요….”

 

괜찮을 거라고 생각하고 싶어도 그런 마음이 들지 않는다. 이렇게까지 되었으니 그저 믿고 가면 되는데 쉽게 발걸음이, 마음이 떨어지질 않는다. 이렇게 남아 사라질 네가 안타깝고, 그런 네 마지막 유지조차 제대로 실현시키지 못할 것 같아 미안하다. 그럼에도 우리에겐 시간이 없고, 너는 이곳에 남고 나는 다른 세계로 떠날 것이다. 너는 ‘세계’에서 사라지고 나는 ‘세계’에 남을 거라는 사실을 바꾸지도 못할 것을 알아서, 아무것도 할 수 없어서 괴롭다. 한 사람의 힘으로는 절대 해내지 못했을 대단한 일을 해낸 너에게 축하를 건네지도 않고, 뒷일은 맡겨두라며 안심시켜주지도 못하고, 이렇게 한탄만 내뱉어야 하는 것이 미안하다.

 

“괜찮아요. 괜찮을 거예요.”

 

하지만 잠뜰은 웃었다. 괜찮다, 괜찮을 거다. 그것은 공룡의 질문에 대한 대답이기도 하였고, 공룡이 차마 입 밖으로 내뱉지 못한 미안함에 대한 대답이기도 하였다. 그저 사람 마음을 안심시키기 위한 다정한 말이 아닌, 확신이기도 하였다.

 

“물론 당신은 나보다 아주 오래 살았으니 내가 멋모르고 하는 소리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때로는 몰라야만 해줄 수 있는 말이 있잖아요? 당신은 너무 긴 삶을 살아서, 저보다 많은 것을 보고 알기 때문에 더 망설이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 겨우 짧은 삶은 산 인간인 제가 대신 단언해 드릴게요. 당신은 괜찮을 거예요. 지금은 괜찮지 않고, 나중에 괜찮지 않은 순간이 찾아올 수도 있지만, 분명 괜찮아질 수 있어요.”

시계 초침이 째깍이는 소리가 들렸다. 타임스테이션이 공룡을 새로운 세계로 이송시키는 데 필요한 계산을 끝냈나 보다. 공룡 주위를 맴돌던 고리들이 밝게 빛나기 시작한 이유가,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 밝은 빛 때문에 공룡의 시야가 흐려졌다. 시야가 흐려진 이유가 빛 때문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았지만, 눈을 통해 흘러넘치는 감정을 막을 수 없어 공룡은 다른 원인을 없앨 수 없었다.

 

“내가 이렇게 말해도, 당신에게 전부 와 닿지 않겠죠. 결국 이 또한 당신에게 또다시 짊어질 사람 목숨 무게를 늘리는 일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요. 하지만 결국 저울은 매달아졌고, 무게추는 어디론가 기울 테니까. 나는 선택을 해야 했어요. 나와 이 세계를, 내 세상과 인류가 살 수 있는 세계를, 그리고 ‘사는 것’과 ‘옳은 방법으로 사는 것’을 말이에요. 그 가치를 정확히 알기에, 정확히 저울질했고, 그 결과가 당신이 사는 거예요. 당신에겐 힘든 일일 수도 있겠지만… 당신이 말했잖아요, 나 올곧다고. 그러니 내 눈으로 본 당신을 믿을래요.”

 

잠뜰은 싱긋 웃었다. 이 사람과 더 오래 이야기하지 못하는 건, 역시 조금 아쉽다. 하지만 정말 시간이 없었다. 타임스테이션이 공룡을 옮긴 후 세계의 계산을 끝내 자신과의 계약이 종료될 시간, 태양이 폭발할 시간, 그 짧은 시간 안에 공룡이 넘어간 세계의 ‘잠뜰’에게도 메세지를 남겨야 했으니까.

 

“당신은 아직 내가 선 저울에 올라갈 수 없어요. 당신의 삶의 가치가 얼마나 소중한지 알고, 세상만큼이나 당신을 사랑하게 되기 전까진 어림도 없어요. 내 삶을 무척 사랑하는 나도 겨우 올라간 저울대에, 자기 목숨의 가치도 제대로 모르는 사람이 멋대로 올라오면, 그건 내가 너무 억울하잖아요?”

 

마지막 잠뜰의 말에는 웃음이 실려있는 것 같았다. 공룡의 시야는 밝은 빛이 완전히 채워 더이상 잠뜰의 표정을 볼 수 없었기에 확신할 순 없었다. 세계를 구하고 아무에게도 기억되지 못한 채로 사라질 작은 영웅의 마지막 순간은, 이제 목소리로밖에 기억에 담아갈 수밖에 없었다.

 

“살아요, 공룡 씨. 살아서, 세상을 잔뜩 사랑하고, 무엇보다 당신을 소중히 여기고 사랑해주세요. 그렇게 잔뜩 사랑받고, 사랑하고, 그 사랑으로 가득한 당신의 삶이 다하는 날이 온다면.”

 

당신은 정말, 숭고하고.

누구보다 자신의 삶을 사랑하고.

그만큼이나 옳고, 세상을 사랑했기에-

 

“그때 우리, 다시 만나요. 만나서 내가 구하고, 당신이 보았던 세상에 대해. 같이 이야기해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인간인 당신을, 나는 말릴 수 없어.

 

 

 

-

눈을 떴을 땐, 이미 전부 끝났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날씨가 무척 좋았다. 청명한 하늘에, 하얀 구름이 캔버스 위 유화처럼 칠해져 있었다. 폭발하지 않은 태양은 한 손으로 가릴 수 있는 작은 크기로 하늘 높이 떠 세상을 밝게 비추고 있었다. 매섭지 않은 바람이 부드러이 머리카락을 스치고 지나갔다. 지나가는 사람들의 표정은 평화로웠고, 대화를 나누는 그들의 목소리는 여유롭고 나긋나긋하였다. 소란스럽지도 않고 고요하지도 않은, 정겨운 인기척이 느껴지는 평화로운 풍경이었다.

지나치게 평화로웠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만 같은 풍경이었다. 우주로부터, 아니 그 세계로부터 멀리 떨어진 이곳에선,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고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평화로워 보였다. 이곳의 사람들은 너를 모른다. 세계의 진실과 세계의 멸망을 당신 혼자만 끌어안게 하고 살아남은 이 세계가 잔인해 보였다.

“…아….”

하지만 야속하게도, 살아남은 그 세계가 너무나도 아름다워 보였다.

당신이 그토록 지키고 싶어했던 단 하나의 미래, 단 하나의 살아남은 세상은, 다 불타버린 잿빛 따위가 아니었다. 하늘, 땅, 사람들, 저마다 모두 다른 색을 가진 채로 기분 좋은 울림을 내었다. 한때 저버리고 싶었던 세계는 모순적이게도 아름다운 색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 모든 색채가, 이미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당신이 나에게, 역시 살아있길 잘했죠라고 말하는 것만 같았다.

“…잔인한 사람.”

답을 당장은 모르겠다. 그저, 나보다도 당신이 더 이 아름다운 세계를 보고 싶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모순적인 감정이라도 느낄 수 있는 것도 당신 대신 내가 살아남았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서 다양한 감정을 느끼며 살아갈 선택지조차 없었던 당신이 안타깝고, 그 선택지를 나에게 준 것이 고마우면서도 미웠다. 그 안타까운 마음과 모순적인 감정을 공룡은 전부 쏟아내었다. 이미 사라진 세상에서는 들리지 않을 흐느끼는 소리가, 평화롭고 아름다운 세상으로 퍼져 나갔다.

-

태양 폭발에 휘말려 인류가 멸망하기 직전, 남극 정부 과학부장관 잠뜰의 기지로 우주 발전소 셀베이션호를 혜성 토마호크와 충돌시켜 태양을 향하게 궤도를 틀었고, 덕분에 태양 폭발을 저지할 수 있었다. 살아남은 인류는 이후의 소빙하기를 대비하기 위해 남극에서 동아프리카로 이주하였다.

이 모든 일의 일등 공신인 잠뜰 장관은 수많은 곳에서 러브콜이 왔다. 잠뜰은 아직도 기능이 살아있는 신문사와 공식 자리가 이렇게나 많은 줄 그때 처음 알았다. 하지만 잠뜰은 그 어떤 연락에도 응하지 않았다. 이제 막 이주한 참에 변화된 요소도 너무 많고 또 언제 태양에서 이상 현상이 발견될지도 모르는 등 할 일이 너무 많았고, 또….

“진짜 영웅은 사실 따로 있는데.”

오늘도 받은 초대 메일에 거절 답신을 보내며, 잠뜰은 혼잣말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바쁜 것도 사실이었지만, 거절의 이유가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인터뷰에서 어떻게 그런 기지를 떠올렸냐고 묻는다면, 타임스테이션의 그 사람을 언급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한 번도 만나지 못했지만, 누구보다도 이 세상의 영웅이라는 이름에 어울리는 그 사람을.

세상 사람들이 쉽게 믿지 않을 그 이야기를 대중 앞에서 꺼내는 것이 망설여진다. 자신의 세상이 아닌 다른 이들이 살 세상을 위해 노력하다 사라져버린 그 사람의 이야기를 꺼냈을 때, 그것이 거짓 취급당하며 사람들의 입에서 오르락내리락 거리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았다. 세상을 지키고 사라진 그녀를 자신 혼자서만 기억하는 것을 바라진 않는다. 하지만 그녀보다 세상을 사랑하지도 않는 이들이, 이제 미래를 그려갈 기회도 빼앗긴 그녀를 가짜 취급하는 것을 듣고 싶지 않았다. 그러한 이유로 망설여졌기에, 잠뜰은 초대 편지든 이메일이든 모두 대충 훑기만 하고 거절하였다.

딱 하나를 제외하곤.

“당연한 말이지만, 정말 똑같이 생기셨네요.”

“…당신이, 연락한 그…!”

타임스테이션과 크로노스, 그 마지막에 대해 알고 있는 자가 있다는 편지가 한 통 왔다. 보낸 이 주소도 받는 이 주소도, 우편 기록을 조회해도 아무것도 없어 어떻게 왔는지조차 모르는 편지. 그러나 적혀있는 내용은 절대 무시할 수 없었다. 편지에는 만나서 이야기하고 싶다며 장소와 시간이 적혀있었고, 약속시간 직전 아슬아슬하게 그 편지를 발견한 잠뜰은 온 힘을 다해 약속장소로 뛰어갔다. 가쁜 숨을 몰아 내쉬며 도착한 곳에, 옅은 미소를 띤 남자가 서 있었다.

잠뜰은 그자와 오랫동안 대화를 나누었다. 공룡은 이 세계로 오자마자 잠뜰을 찾아오지 못해 미안하다고 하였다.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며, 그는 자신과 ‘잠뜰’에 대해 알려주었다. 가장 처음 타임스테이션을 만들고 발견한 ‘잠뜰’이 어떤 마음으로 시간을 끊임없이 되돌렸는지, 어떤 마음으로 수백 년을 산 용사였던 공룡에게 세계를 대신 짊어지게 하지 않고 살려서 자신의 세상으로 보냈는지.

“이기적인 사람이었어요. 내게서 죽을 수 있는 기회를 빼앗아 가버렸으니까요. 하지만… 그걸 원망하게 하지도 못할 만큼, 아름다운 사람이었죠.”

직접 눈으로 본 ‘잠뜰’은 어떤 사람이었냐는 말에, 공룡은 그렇게 대답하였다. 공룡이 전해준 이야기만 알고 있는 잠뜰이 전부 이해하긴 어려운 답변이었다. 아마 다른 세계의 잠뜰 자신이라고는 하나 당사자가 아니기에, 잠뜰은 이 말과 감정을 평생이 지나도 전부 이해하진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공룡과 ‘잠뜰’ 사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완벽히 이해하지도 못할 것이고, 공룡이 어떤 시간을 견뎌왔는지도 이 세상의 자신은 평생 이해 못 할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자신을 만나러 와주었고, 자신은 이 세상을 지켜내었다.

“떠나기 전, 그 사람과 한가지 약속했었어요. 이 세계를 끝까지 지켜보겠다고. 사실 그 사람이 직접 보고 싶었을 것이고, 저도 아직도 그게 더 맞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나보다도 세상을 사랑했던 그 사람을 믿어보려고요. 언젠가는, 정말로. 괜찮아질 수 있겠죠.”

쉽지 않은 일이었을 과거의 일을, 이제 공룡은 비교적 편안한 표정으로 이야기해줄 수 있었다. 잠뜰이 어떤 사람이었냐는 질문도 피하지 않고 답해줄 수 있을 만큼, 그날의 일을 잘 이겨내고 있었다.

괜찮아질 수 있을 거라는 말이, 기약 없는 소망의 말일 뿐인데도 어째선지 믿음이 갔다. 그 말을 들으니, 잠뜰은 이전에 자신이 계속하던 고민의 답을 내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젠 자신도 공룡도, 먼저 간 이가 만들어준 세상에서, 지나간 일에 너무 슬퍼하지 않고 살 수 있게 된 것 같다.

“공룡 씨, 저 인터뷰 하려고요. 타임 스테이션과, ‘잠뜰’의 이야기를 할 거예요.”

지금까지는 말하고 싶지 않아서 인터뷰를 전부 거절해왔다. 나와 그 사람이 그렇게 힘들게 구한 여정이 누군가의 가십거리로 소비되지 않길 바랐다. 그리고 그 사람의 선택이 거짓말 취급당하며 놀림당하는 걸 보면, 그런 사람들을 미워하지 않을 자신이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공룡과 이야기를 나누니, 이제 괜찮을 것 같았다.

“가십을 들을 걸 걱정하기보단, 이 사람의 이야기를 남기고 싶어요. 이렇게 멋진 사람이 있었다고, 이 세상은 그런 멋진 사람에 의해 구해졌다는 걸요. 그리고 공룡 씨처럼, 누군가에겐 이 이야기가 이정표가 되어서, 다음 방향을 결정할 수 있게 되겠죠.”

잠뜰은 맑게 웃었다. 이것이 그녀의 답이었다. 세상을 구해준 영웅의 이야기를, 혹은 그저 세상을 많이 사랑했을 뿐인 한 사람의 이야기를 할 것이다. 누군가가 대신 희생하여 살아남았다는 이 무거운 마음을 이제는 외면하지 않으려고 한다. 이제는 슬픈 일이 아니라 따스한 기억이라고 부를 수 있는 이 기억을 가지고 나아갈 것이다. 공룡이 변했다고 한 것처럼, 자신도 분명 괜찮아질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을 과소평가하지 마세요, 장관님. 당신 역시 영웅입니다.”

공룡이 잠뜰을 부르며 그녀 앞에 섰다. 그 우주선 안에서 맑게 웃던 사람과 정말 닮았다. 아마 ‘잠뜰’도 할 수 있다면 이 사람을 만나보고 싶었을 것이다. 자신에게 보여주었던 그 맑은 웃음을 지으며 이야기를 나누었을 것이다. 이젠 이런 생각을 해도 울지 않을 수 있을 정도로, 자신은 그날의 찬란하게 아름답고 슬펐던 기억을 이겨냈다.

“세상을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바라는 바를 이루고 떠날 수 있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공룡은 잠뜰을 향해 허리를 깊게 숙였다. 세계를 구한 영웅에 대한 존경의 표현이었다. 자신 눈앞의 장관도, 그 우주선 안의 잠뜰도, 그 누구도 없었다면 이 세계가 존재하지 못했을 것이다. 신도 해내지 못한 기적을 인간의 몸으로 해낸 영웅들에게, 공룡은 최대한의 경의를 담아 감사를 전했다.

“제가 장관님께서 구한 세상을 오랫동안 지켜볼게요.”

공룡은 밝게 웃어 보였다. 괜찮아질 거라는 그날 잠뜰의 말을, 공룡은 이제 믿었다. 그 밝은 웃음에, 잠뜰 역시 마주 웃으며 인사를 받았다.

공룡은 그렇게 떠났다. 어디로 향한다는 말도 없었고, 또 보자는 말도 하지 않았다. 잠뜰 역시 하지 않았다. 그런 것은 필요 없었다. 공룡은 어디에선가 세상을 지켜볼 것이고, 잠뜰은 타임스테이션이 만들어준 이 세상에서 최선을 다해 자신의 삶을 사랑하며 살아갈 것이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이제는 둘 모두 과거의 그날을 떠올리며 우는 대신, 앞으로 나아가며 세상을 있는 힘껏 살아가기로 하였으니까. 그 약속을 둘 모두 지킬 것이니까.

세상 끝에서의 약속,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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