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RR
시험기간은 끝난 것 같았다. 기억 속의 캠퍼스는 늘 활기가 있었고 학생들로 반짝이는 곳이었는데 지금은 꽤 조용하고 쓸쓸한 기운이 돈다. 태섭이 홀로 이곳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구경이라는 이유로 아무 건물이나 들어갈 수도 없다. 졸업생도 외부인으로 분류되는 마당에 정말 아무 인연도 없는 순도 100% 외부인에겐 그 문턱은 너무 높다. 명헌의 모교를
명헌이 들어오자 켜지는 센서등이 이 집안의 유일한 불빛이었다. 신발을 벗을 생각도 하지 않고 가만히 서서 눈으로 거실을 훑고, 인기척을 잡기 위해 숨을 멈췄다. 조용했다. 감지되는 움직임이 없어 센서등마저 꺼진 집은 적막 그 자체였다. 어제밤 부딪친 언성 이후로는 얼굴도 못 봤고 종일 연락도 안 했다. 아침에 작은 방을 살폈을 때 잘 개진 이불만이 있을
“태섭” “아, 왔어요?” 소파에 앉아 있는 태섭이 고개만 잠깐 돌려 명헌을 맞이한다. 코트만 대충 벗어 소파 팔걸이에 던지듯 두고 태섭의 옆에 앉는다. 다녀왔냐는 인사가 서운하다 옆구리 쿡쿡 찌르려는 건 아니고, 명헌도 태섭과같이 티비에 시선을 고정한다. 오늘 경기의 특정 장면을 계속 반복해서 돌려보는 연인은 잔뜩 가라앉아 있었다. 이럴 것 같아서 명헌
태섭은 거실의 통창 앞에 앉아 물방울이 유리면을 타고 내리는 걸 보거나 아니면 좀 더 먼 도시의 풍경을 본다. 손에 들린 머그잔에선 김이 오른다. 커튼을 쳐두고 그 속에 들어가 앉은 상태라 자신이 마실 걸 챙기고 간단한 뒷정리를 한 다음 이제야 주방을 벗어나는 명헌의 눈에는 밑부분이 수상하게 불룩한 커튼이 있을 뿐이었다. 자신의 연인은 맑은 날의 선명한
감기야 빨리 나으면 좋긴 하지만 이번엔 명헌이 심하게 유난이었다. 이유가 무엇인지 태섭도 알고 있다. 사흘 뒤 있을 명헌네 구단과의 친선경기는 선수평가에 큰 영향을 줄 경기가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컨디션 난조가 경기를 뛰는 데 방해를 하게 하고 싶지 않았겠지. 자기네 구단 선수들은 놔두고(아닌 거 안다) 남의 팀 선수 케어에 이렇게 열을 올리고 있는
태섭이 간밤에 잔기침을 좀 했다. 저녁부터 목 안이 조금 간질거린다 느끼긴 했지만 피곤해서 생기는 일시적인 현상이라 가볍게 넘긴 건 태섭의 잘못된 판단이었다. 아파용?하고 자신을 따뜻하게 안아주던 명헌의 음성에는 잠이 가득하면서도 애정이 어려있어 태섭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그 품을 실컷 누렸다. 혹시 모르니까 아침 러닝은 하지 말라는 말이 뒤에 붙어 따라왔
명헌이 술집 앞까지 배웅을 나온 태섭의 팀메이트 몇에게 꾸벅 인사를 한다. 등에 업힌 태섭은 그 흔들림에 목을 꽉 끌어안았다. 주차장까지는 조금 걸어야 했다. 목 졸려용. 힘이 좀 느슨해진다. 팀메이트 중 누군가의 생일 축하 파티였다는데 생일자 놔두고 왜 자신의 연인이 뻗어 있는 건지는 모를 일이다. 도착해서 인사를 나누다 감독님 왜 태섭이 팀으로 안 데
한기가 심해 태섭은 몸을 부들 떨며 눈을 떴다. 그런 움직임을 느꼈는지 크게 팔을 둘러 안아오는 명헌의 가슴에 콕 하고 시린 코를 찍어 잠시 녹였다. 한파 경보라도 있었던 게 아닐까 싶은 공기였다. 혀엉, 안 추워요?. 조금 이상하긴 해용, 보고올까?. 내가 다녀올게요. 몸을 반대쪽으로 빙글 돌려 다리를 침대 밖으로 내다 다시 이불 안으로 들여 잠시 마음
송태섭. 현재 상태는 빡침. 일어났는데 이명헌은 없었고, 일찍 나간다는 얘기도 들은 적 없다. 급한 일이 생겼을 수 있다. 깨우기가 뭐해서 조용히 나갔을 수도 있어. 그런데 남겨진 메세지도 없어, 그래 정신없다 치자. 그래서 먼저 메세지 남겨뒀다. 러닝을 다녀와서 준비를 하고 구단에 도착할 때까지도 무소식이다가 점심 즈음에 받은 답이 며칠간의 외박을
화면 상단에 떠 있던 제목이 사라졌다. 이 광고가 끝나면 영화가 시작할 터였다. “광고 끝나 가는데-” “거의 다 됐뿅” 명헌이 나무 소재의 샐러드 볼에 전자렌지에서 막 꺼낸 팝콘 봉지 내용물을 털어 담았다. 갓 튀겨져 하얗게 터진 옥수수 알갱이들의 향에 참을 수 없어 하나를 집어 입안에 넣었다. 어깨 한쪽을 붙이며 나란히 앉아 태섭에게 팝콘을 안겨줬다.
태섭은 얼마나 신나게 잤는가를 대변하는 듯 사정없이 뻗친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조용한 집 안을 걸었다. 명헌은 이른 시간에 당일치기 지방 출장을 떠났다. 잠결에 나눈 인사의 기억이 희미했다. 겨울이라 해가 늦게 뜬다. 아직 컴컴한 바깥은 곧 어두운 남빛에서 옅은 하늘색, 그리고 무색의 찰나를 거친 뒤 아침노을에 덮일 터였다. 이 계절은 건조하고 차가운 바
끌어안은 명헌의 몸에서 마른 나뭇가지를 떠올리게 하는 내음이 났다. 코트의 옷깃에 코를 대고 괜히 킁킁 냄새를 맡는다. 허리에 둘린 팔이 바짝 당겨 안는 힘에 태섭이 상체를 약간 젖혔다. 아직 바깥의 냉기가 머무르는 명헌의 코끝이 목덜미에 닿았다. 따끈하고 좋은 냄새 뿅. 귀가가 조금 늦은 명헌의 반겨주려 가벼운 포옹을 하고 있었던 것 같은데 지금은 목이
“송태섭” 호텔 로비 한 편의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있던 태섭이 어색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명헌이 자신을 향해 다가올수록 시선이 아래로 아래로 내려가 결국 고개를 푹 숙이고 부목 밖으로 삐져나온 발가락을 꼼시락댔다. 드리워진 그림자, 그리고 시야각으로 들어온 명헌의 두 발이 그가 바로 앞에 서 있음을 알려준다. “도대체 왜-” “혀엉. 혼내지 마요”
겨울로 들어서는 시기에 바꿔뒀던 두껍고 폭신한 이불이 주는 따뜻함을 잃고 싶지 않아, 끌어안듯 덮으며 뒤척였다. 옆으로 몸을 돌리는 작은 움직임에도 골이 울렸다. 견디기엔 좀 많이 힘들어 오만상을 쓴다. 이불을 당겨 모아 다시 한번 품을 가득 채운 태섭이 손을 뻗어 침대 위를 더듬었다. 손에 걸리는 게 없는 걸 보니 먼저 일어났나 싶다. 다시 잠들고 싶은
가만히 있다가 이유 없이 청소에 꽂히는 날, 그런 날도 있는 법이다. 그래서 태섭은 앞치마를 둘렀다. 거실의 열 수 있는 창문이란 창문은 다 열어 바깥 공기를 들였다. 여닫이가 아닌 고정된 통창으로 쏟아지는 빛에 공기를 타고 바깥으로 나가는 먼지들이 반짝이며 길을 남긴다. 마른 부직포 걸레를 들고 선반 위 티비의 윗모서리 손을 잘 대지 않는 오브제 등을
태섭이 수건 몇 개 담은 종이가방을 뒷좌석에 두고 동승석에 자리를 잡는 동안 명헌은 트렁크에 있는 도구들을 한 번 더 점검했다. 얼마 전 종일 굵은 눈이 내렸다. 비시즌이라 태섭은 개인 훈련 스케줄로 변경이 되었지만 명헌은 어쨌든 구단 사무실로 출근은 해야 했고, 습기 가득한 눈을 맞고 다닌 명헌의 차는 먼지 뒤엉긴 마른 물얼룩으로 꼬질이가 되어 주차장에
잘 씻은 야채를 채바구니에 담아 아일랜드 식탁에 선 태섭이 양팔을 걷어 올리고, 명헌은 세척한 볶음팬을 들고 불 앞에 선다. 둘에겐 흔치 않은 이벤트였다. 요리가 일상은 아니지만 계기가 있으면 제법 신나. 대형마트에서 시식 뿌시며 다니다 맛본 볶음 짬뽕이 꽤 마음에 들어 카트에 담았다. 면과 양념이 갖추어진 밀키트라도 양념 속에 섞인 고기와 야채는 그 양
거실의 테이블 위에 수북하게 쌓인 옷가지로 손을 뻗으며 벽을 크게 차지하고 있는 티비를 잠깐 봤다가 집어 든 옷을 개는 일에 집중하기. 둘 다 대화는 없이 이와 같은 행위를 반복하고 있었다. 틀어둔 건 그냥 흔한 영화채널이었다. 처음 보는 영화는 아니었다. 본 게 언제라고 한다면 꽤 오래전, 정확하게 기억도 나지 않지만 어렴풋하게 뒤에 이어질 스토리가 생
대충 칭칭 감아 두른 목도리를 살짝 당겨 올려 시린 코끝을 가렸다. 택시를 탔다 통화를 하고 특별한 일이 없다면 도착하고도 남을 시간이었다. 통화를 하던 목소리는 평소와 크게 다를 게 없었지만, 워낙 티가 안나는 사람이니 안심할 수가 있어야지. 태섭은 길게 숨을 내쉬며 자신의 호흡이 하늘로 올라가는 모양새를 눈으로 담았다. 그 시선의 바탕에 깔린 밤하늘
통창으로 들어오는 태양빛이 하얀 속커튼을 지나 태섭이 자리한 공간에 사선의 무늬를 그렸다. 등받이가 없는 간이의자에 앉아 등을 꼿꼿하게 세운 자세가 예뻤다. 품이 낙낙한 얇은 스웨터를 입고 있었지만 드러나지 않아도 태는 나기 마련이다. 문제라면, 예쁜 자세 그대로 굳어버린 것 같다는 것뿐. 송태섭 선수 괜찮나용?. 동영상 녹화가 돌고 있는 폰을 들고 다가
씻는 타이밍에 귀가를 했던 건지, 욕실 문을 열고 나오는 명헌을 반겨주는 건 다녀왔습니다-하는 연인의 음성이었다. 욕실 앞에 잘 개어두었던 바지를 꿰입고 머리칼의 물기를 두 어 번 대충 털어낸 명헌이 수건을 머리에 얹은 채 음성이 들려온 주방으로 갔다. 식탁에 자리를 잡고 무언가에 열중하고 있는 작은 등에 소리를 죽이고 다가가 태섭의 어깨너머로 고개를
세차게 쏟아지는 빗줄기가 거실 한 면을 차지하는 통유리 위에 길을 남기며 아래로 흘렀다. 한참 아래의 지상 불빛들은, 표면에 부딪쳐 깨어진 물방울이 만든 안개에 갇혀 원래의 빛보다 부피를 부풀려 경계가 불분명했다. 태섭은 발아래 풍경에 눈을 부릅뜨며 초점을 맞춰보려는 의미 없는 시도를 하다 금세 커튼을 당겨 바깥의 습한 풍경을 가렸다. 천장의 메인등은 끄
넓고 긴 사각의 형태의 광장과 건물들이 닿아있는 한쪽 라인을 따라 일정한 간격을 두고 심어진 나무들이 따뜻한 색의 전구로 겨울옷을 해 입었다. 짧아진 해는 도시의 반짝이는 밤을 재촉한다. 해가 비치는 동안은 집에서 하는 일없이 뒹굴거렸다. 쉬는 날은 그런 거라며 품에 안은 팔을 풀지 않는 이명헌과 한참을 별거 아닌 힘싸움으로 놀다 보니 시간은 금방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