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뱅]Shine and Bright(2-ing)
가비지타임 | 북부대공 최종수X아이돌 박병찬
※ 이번에 새 일러나온 거 보고 휘적휘적(농구없는 세상)
※ 완성아님 쓰는 중~~! 완성되면 제목의 ing 삭제하께요 / 퇴고못함 천천히 합니당ㅠ<ㅋㅋ
※ 쓰는 사람 로판/아이돌 둘 다 잘 모름 ㅈㅅ합니다!
0 짜잔~
병찬이 노래를 부르는 3분 10초 동안 남자-이 땅의 북부 대공이라는 귀하신 신분으로 이름을 듣지 못했다-는 의자에 앉아 눈썹만 꿈틀거렸다. 무반주의 생목 라이브, 동선과 안무까지 다 맞춰서 춤을 춘다. 입고 있는 옷이 너무 무겁다. 신발도 편하지 않았다. 연습생 시절부터 데뷔할 때까지 매주 금요일 마다 이루어진 연습생 주간평가 경험자에게는 이 정도는 쉬운 레벨인데도, 병찬이 몸에 걸친 것들이 영 도움이 안 된다. 그럼에도 잘하려고 했다. 병찬은 ‘아이돌’을 잘한다. 소질을 재능으로 빚어낸 케이스였다.
노래와 춤이 끝난 후 엔딩요정 세리머니도 잊지 않는다. 큰 손을 뺨 옆에 두고 브이. 양 손바닥을 턱 아래에 두고 꽃받침. 보는 사람의 등줄기를 짜릿하게 하는 윙크 한 번. 그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동안 귓속에는 팬들의 함성과 이어지는 셔터 소리가 환청으로 들려온다. 카메라와 스태프도 없는 빈 공간에 병찬을 보는 건 남자 한 명이지만. 의자에 앉은 남자는 순진할 만큼 커다란 눈을 끔벅인다. 병찬이 어떤 예쁜짓을 해도 남자는 감흥이 없다. 스스로 충분히 아름다운 외모여서 그런 걸지도 모르겠다. 남자는 눈을 둥그렇게 뜰 뿐이었다. 병찬은 머쓱하게 손을 내린다. 남자는 연예인 뺨치게 잘생기고 기품이 있다. 흔히 말하는 아이돌상이 아니라 모델상이나 배우상이었다.
무대가 끝난 병찬이 아예 허리를 숙여 깊게 인사했고 남자는 그제야 의자에서 허리를 바로 세워 앉으며 박수를 쳤다. 보일러 시설도 없고 난방도 되지 않는 이 성 안은 지독하게 추워서 병찬은 남자가 준 무겁고 따뜻한 옷을 입고 있었다. 3분 10초 동안 방방 뛰고 노래를 불러 살짝 겨드랑이에 땀이 고이고 명치가 따뜻해졌다. 몸이 더워진 병찬은 휴, 한숨을 쉰다. 어두운 색의 나무로 만들어진 탁자 위에 역시나 나무로 만들어진 잔에 입을 댄다. 깨끗한 찬물이 목구멍 안으로 발칵 밀려 들었다. 병찬의 등 뒤에서 남자의 질문이 선뜩하게 들려왔다.
- 그대가 살던 세계에서는 그런 걸 노래라고 부르는가.
병찬은 깜짝 놀라서 입안에 든 물을 푸, 뱉어낸다. 음료를 마실 때 멤버들이 웃길 때마다 삼키지 못하고 켁 뱉어내는 게 종종 카메라에 담겨서 포켓몬스터의 ‘꼬부기’라는 별명도 병찬에게 있었다. 병찬은 손등으로 입술을 닦아내고 남자를 본다. 남자는 정말로 병찬의 노래를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약이 오르는 병찬의 눈에는 ‘그런 걸 노래’라고 부르느냐고 묻는 비아냥이 섞인 듯한 표정으로 자신을 빤히 보고 있었다. 병찬은 심호흡 하며 다시 물을 삼킨다. 그래, 저런 말은 데뷔하기 직전까지 겁나 많이 들었다. 평소 병찬은 성격이 서글서글한 편이라 이렇게까지 말이 삐딱하게 나가는 편이 아닌데 버튼이 잘못 눌렸다.
- 아니, 나더러 지금 껏 뭘 하고 살았냐고 물으셨잖아?요?
- 전에도 말했을 텐데. 그대는 내게 말이 짧아. 버릇 없이. 감히.
- 아이돌을 1도 모르신다기에 제가 친히 노래도 부르고 춤도 췄지 않습니까요?
- 1도 모른다는 게…… 되었어. 하여간 그게 놀이패나 광대를 뜻하는 말인 줄은 몰랐는데.
- 야, 본질은 그게 그거라니까.
- 어허. 말이 짧대도.
- 그럼 여기서 뭔 말을 어떻게 길게 하는데요?
*
병찬은 중학생 때 키도 크고 잘생겼다는 이유로 길거리에서 당시 조형엔터의 프로듀서에게 명함을 받았다. 연예인 되는 게 좆같이 어려울 게 뻔했는데 당시에 해맑은 중딩 박병찬은 부모님을 졸랐다. 부모님이 중학생 시절에 오디션에 최종 합격한 병찬에게 아이돌 하지 말라고 한 번 뜯어 말렸는데, 그때 병찬은 부모님의 말씀을 안 들었다. 아 걱정 말라니까. 준비 중인 보이그룹이 있으니까 나 거기 끼워서 바로 데뷔 시켜준다고 하셨어. 전부 형들이야. 내가 아마 막내가 될 거래. 아 어떡하지 데뷔하면 학교 그만 둬야 할 수도 있겠는데? 엄마아빠 내가 호강 시켜줄게. 내가 엄마 가고 싶다고 했던 유럽여행도 딱 시켜주고 아빠도 회사 그만 두고 쉴 수 있게 해줄게. 나 오늘부터 싸인 연습할까? 큰소리를 떵떵 치고 나니 제법 든든한 느낌도 들었던 게 사실이다.
박병찬은 오디션을 합격한 그 해에 데뷔하지 못한다. 프로듀서가 병찬에게 미안하다고 말했다. 병찬은 전신을 비추는 거울을, 자신이 직접 촬영한 연습실 속 안무영상을 빤히 바라보았다. 아니 잘생겼다며? 존나 당장 데뷔 시켜준다며? 그러나 병찬은 조형엔터 연습생으로 긴 시간을 보냈다. 병찬을 데려 온 프로듀서는 병찬을 진짜 말도 안 되는 방식으로 굴려 먹었다. 열여덟 살이 되자 병찬은 프로듀서가 다니는 영업을 따라다니게 되었다. 대표는 그 사실을 모르고 어린 병찬은 뭐가 어떻게 된 건지도 모르고. 프로듀서가 손님을 모아둔 노래방에서 병찬은 마이크를 잡고 그들의 선곡대로 불러주었다. 노래 부르는 걸 좋아해서 조금은 덜 괴로웠는지도 모르겠다. 좆같은 중소 엔터. 처세술은 그 노래방에서 어른들이 잔에 말아 주는 쏘맥을 마시며 배웠다. 그들은 앞에 서서 머뭇거리지 않고 훌쩍이지도 않고 안주로 주는 새우깡을 낼름 받아먹는 열여덟 살 병찬을 좋아한다. 너는 참 이목구비도 목청도 시원시원하네. 데뷔하면 인기 많겠다. 근데 다 잘생겼는데 너 눈은 쌍수 해야 하지 않겠냐. 그걸 씨발 칭찬이랍시고 처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병찬은 빙긋 웃었다. 사장님 몰라도 너무 모르시네요. 요즘은 저처럼 쌍꺼풀 없는 두부상 남자가 대세라구요.
박병찬은 다 참았다. 목표가 있으니 참는 게 별로 어렵지 않았다. 집안 말아먹을 불효자가 되고 싶지 않았으므로 데뷔가 조금 간절해졌다. 어느 날 프로듀서가 술 먹는 자리에 데뷔한 여자 아이돌을 부르는, 여자 연습생들과 교제를 요청하는 등의 정신 나간 짓거리를 한다. 이렇게 선을 씨게 넘는 사건이 생기지 않았다면 정말 열아홉이 되기 전에는 데뷔를 했을까? 프로듀서는 여자 연습생을 건드린 일로 경찰서에 불려다닌 후 징역을 살게 된다. 사람 좋다던 대표도 그 인간을 감싸줄 수 없어 해고했다. 술 잘 마시는 프로듀서를 뒷배로 두고 연예부 기자와 스트리밍서비스 기업 대표님들의 안면을 튼 열아홉 살 병찬은 다시 아무 것도 없는 연습생이 된다. 심지어 데뷔가 결정되었다가 안무연습 도중에 오른쪽 무릎을 다친다. 모든 게 엎어진 적도, 그냥 다 그만두고 학교로 돌아갈까 생각하던 시기도 있었다. 남들 군대갈 나이가 다가오자 부모님도 병찬도 초조해졌다.
간신히 데뷔가 결정된 건 작년이었다. 병찬은 스물한 살이었다. 보컬쌤도, 댄스쌤도 거의 칭찬을 해주지 않는 사람이었고 병찬이 속한 회사의 이대표님만이 아주 가끔 어깨를 두드려주는 야박한 아이돌의 세계에서 살아남길 선택한다. 플라스틱 웨이라는 그룹명으로 데뷔를 한 것만으로도, 앨범이 팔리고 그들을 사랑해주는 팬이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팬 사인회에 모이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한 현실인데……
*
그런데 박병찬은 지금 무대가 아니라 이 춥디추운 성 안에서 3분 10초 동안 저 남자를 위해 재롱잔치를 떨었다. 남자는 나이를 쉽게 가늠하기 어려운 외모였다. 병찬의 나이를 묻고 올해로 스물둘 되옵니다, 하니까 고개를 갸웃하는 걸 봐서는 병찬보다 어린가 싶었다. 신분 어쩌고 하면서 나이도 이름도 안 밝힌다. 살려준 것만으로도 감사히 여기라고 으름장을 놓는다.
물이 목 안으로 타고 들어가는 감각이 너무 차가워서 뜨겁다는 착각까지 들었다. 병찬은 검은색 털 굵은 가죽옷을 입은 남자가 앉은 의자를 향해 걸음을 내딛었다. 아이돌로 데뷔한 병찬은 이제 대학교 축제부터 기업 행사도 많이 다니는 엄연한 아이돌이다. 몸값도 꽤 높다. 이곳에 오기 전까지만 해도 곡 쓰는 법을 배우고 있었기 때문에 슬슬 자작곡도 만들 수 있었다.
- 이제 됐지요?
- 그래. 그대가 업으로 삼을 만큼 노래를 잘 부르는 것인지는 모르겠다만.
- 아 그러세요. 저한테 쫌 짜게 구시네요.
- 그러니 내일은 다른 곡으로 준비를 해.
병찬은 잘못 들은 줄 알고 눈을 치켜 뜬다. 남자는 의자에서 일어난다. 잘 배운 사람처럼 몸짓이 우아했다. 경박스러운 것도 없고 바닥을 울리는 신발굽 소리만 아니면 걸음걸이도 조용하다. 체격도 키도 병찬보다 큰데 뭔 검은늑대의 거죽을 벗겨내서 털을 몸에 두르고 다니느라 시커먼 거인 같다. 병찬도 대한민국에서 절대 작은 키와 덩치가 아닌데도 따뜻하게 껴입고 늑대털까지 두른 남자는 인종이 다르게 느껴진다. 피부가 희고 눈썹 짙도 콧대 높고 쌍꺼풀 진하고 속눈썹 화려하고. 이목구비 뚜렷하게 생긴 것도 한몫한다. 대신 얼굴이 예쁜 만큼 승질머리가 까다롭고 예민한게 말투나 태도에서 뻔히 티가 났다.
- 내일은 성안의 사람들을 불러모아 주지. 올겨울이 사나워 즐길 거리가 도통 없었는데 오늘처럼 그대가 그런 해괴한 노래를 불러주면 성에서 일하는 이들이 즐거워하겠지.
- ……저, 다시 생각해보시면 안 될까……이읍쇼요?
- 뭐라는 거지.
- 그 결정을 후회 않도록 숙고하여 주시라는 말씀을.
- 광대가 어찌 놀이판을 물려달라고 해.
- 그건 제가 광대가 아니어서요.
- 아까는 본질이 그게 그거라며.
아니이, 제 말은 그게 아니라, 아이돌이라는 건 패기와 열정 있는 청소년들을 갈아서 만드는 산업의 한 종류인데…… 병찬은 남자를 붙들고 열심히 설명했지만 남자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지겨운 듯 병찬을 빤히 바라보았다.
1 사건의 발단
생방송 녹화 중에 일어난 사고였다. 보이그룹 <플라스틱 웨이>의 무대 위, 헐겁게 달린 특수조명장치가 툭 소리와 함께 위에서 떨어졌다. 가장 파트가 많아 대열 앞에 서서 노래를 부르고 있던 그룹의 연장자이자 리더인 박병찬의 머리 위로. 20미터의 높이에서 그대로 직선으로. 병찬의 빛나는 미소를 지으며 흩날리는 반짝이 종이가루를 뺨에서 털어내는 그 순간. 퍼억. 카메라 액정에 아주 소량의 피가 튀었다.
병찬은 쓰러졌고 특수조명은 박살이 났다. 새벽 같이 모인 플라스틱 웨이 팬들이 그들의 최애가 넘어지며 피를 흘리자 비명을 질렀다. 무대 위의 멤버들이 정신없이 모여들었다. 녹화는 중단 된다. 화면을 살펴보고 있던 카메라 감독이 사색이 되어 119에 신고했다.
멤버들에게 둘러싸인 병찬은 이렇게 죽는구나, 생각했다. 떨어지던 조명에 얻어맞은 머리가 욱신거리고 아팠다. 우스갯소리로 매번 할아버지가 될 때까지 무대에서 팬분들을 만나고 싶다고, 무대에서 죽고 싶다고 말했던 게 이렇게 이루어질 줄 몰랐다. 아아, 씨발. 존나 아프다. 병찬은 청각은 그때까지 기능의 최선을 다 하고 있었다. 아수라장이 된 무대에 쓰러져서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을 때 누군가 병찬의 귀에 속삭였다. 넌 죽지 않았어.
2 여긴 어디
추웠다. 병찬은 자신을 감싸는 싸늘한 냉기에 어렵게 눈을 떴다. 병원인가,
꼼짝없이 죽는다고 생각했는데 살아 있긴 한 건가. 그렇다면 이 추위는 뭐지. 병찬은 눈을 가물가물한 시선으로 주변을 어렵게 살폈다. 보이는 사물이 멀고 흐릿하다. 검은 신발이 병찬의 눈앞으로 이리저리 초조한 걸음으로 움직인다. 우리는 이번 앨범 컨셉이 ‘운동하는 소년’이라서 저렇게 까만 가죽 부츠 신는 멤버가 없는데. 그렇다면 다른 그룹 남돌인가. 춥다. 너무 추워. 아 너무 추운데 왜 계속 춥지. 피부가 찢어질 것 같다. 이건 뭐 그냥 눈 내리는 서울 한복판에서 반팔 입고 아스팔트에 누워 있는…… 아니 근데 진짜 여기가 어디야?
쓰러져 있던 병찬은 눈밭에서 목덜미를 붙잡혀 일으켜졌다. 머리카락과 얼굴에 흰 눈송이가 달라붙는다. 고구마 뿌리처럼 병찬의 팔다리가 훌러덩 흔들렸다. 드러난 피부가 추위에 얼어 새빨개졌다. 병찬은 눈을 깜빡거린다. 병원이 아니다. 구름 위를 둥둥 떠다니는 것도 아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새까만 옷을 입고 추위를 막기 위해 이마와 뺨도 검은 천으로 가린 장신의 사람과 1초 쯤 눈이 마주쳤다. 빼끔 내놓은 눈이 심각하게 병찬을 바라보았다. 아 시바. 저승사자였던 건가. 이른 나이에 죽는 사람을 몇 번 만나본 적 없는 초보 저승사자……. 박병찬은 다시 눈을 감았다. 너무 추우면 몸이 덜덜 떨리지도 않는다.
눈이 내리는 산속. 벌거벗은 검은 나뭇가지가 하늘에 금을 긋고 몸을 잔뜩 웅크렸다. 근처에서 푸르르르, 고인 숨을 내쉬는 짐승의 소리가 들려온다. 엄마아빠. 미안해요. 너무 춥네요. 여기가 이승과 저승의 경계인가 봐요. 박병찬이 몸을 축 늘어놓으려는데 갑자기 어딘가로 질질 끌려간다. 쌓인 눈이 옷 안으로 잔뜩 들어와 병찬의 등줄기가 찌릿거린다. 병찬은 감았던 눈을 뜬다. 맨살이 얼얼할 만큼 닿는 눈은 차가웠다. 눈 내리는 산속에서 병찬을 발견한 사람은 힘이 세다.
그 사람은 말의 안장을 치운 후 숨 참고 병찬을 끌어올려 그 위에 엎어둔다. 아무리 아이돌이라 몸이 말랐다고 해도 건장한 20대 남성이라 남자도 잠깐은 끙끙댔다. 병찬을 말의 등에 태워 테트리스를 하듯 움직임이 간결하고 공간의 활용을 고민한 듯한 움직임이다. 병찬이 기절한 게 아니라는 걸 확인했으므로, 병찬은 그 사람의 의도대로 털이 검고 윤기나는 말 갈기에 기운 없는 뺨을 댄다. 말에게는 오래 묵은 풀 냄새와 양치질을 못한 구강의 미세한 악취와 동물 특유의 비린내가 섞여서 풍겨왔다. 병찬은 말의 위에서 어색하게 몸의 균형을 유지했다. 병찬의 어깨 위로 온기가 느껴질 만큼 따뜻하고 묵직한 털코트가 푹 얹어진다. 그 위로 두꺼운 줄 하나가 감긴다. 짐짝을 실은 것처럼 병찬이 말에서 미끄러지지 않도록 한다. 병찬은 허벅지와 가슴이 가까워 자세가 불편하다.
그 사람은 말의 고삐를 끌고 검붉은 피가 묻은 주머니를 어깨에 걸쳤다. 병찬은 병원에 옮겨지던 중에 넷플릭스 제작의 로맨스 판타지 드라마 세트장에 떨어진 건 아닐까 생각했다. 그럴 수가 있나. 구급대원들이 무게가 줄어든 걸 분명히 알았을 텐데. 뭐 구급대원들이 너무 급해서 병찬을 떨어트린 건 그렇다고 치고, 그럼 지금 나를 도와준 저 반짝이는 눈을 가진 배우분은 누굴까. 한국 드라마 세트장이 이렇게 선명한 촉감의 눈을 구현하다니. 이 차가운 바람은 그럼 에어컨 바람인가. 너무 리얼한데. 반팔 입고 한겨울에 눈 오는 산을 돌아다닌 적 없긴 하지만 이건 진짜 찐겨울이라고. 저승도 아니고 드라마 세트장도 아니라면.
여긴 대체 어디냐고.
*
깜빡 잠들었나. 병찬이 다시 눈을 떴을 때는 낯선 천장이었다. 따뜻한 공간 속에서 두런두런 사람들의 목소리가 울렸다. 대공.
- 펼친 손을 보았을 때 검은커녕 곡괭이도 펜도 잡은 적 없는 듯 매끄러웁고, 손톱과 발톱은 귀족 여인처럼 다듬어져 빛이 납니다. 대공을 해하려고 파견된 자객은 아닌 듯 합니다.
- 몸이 볼품없이 마르고 사나흘은 굶은 듯 입안에서 옅은 구취가 느껴집니다.
- 오른쪽 무릎이 한 번 상한 듯 뼈가 휘어져 만져지고 왼쪽과 달리 부어있습니다.
- 타국에서 본 적 없는 의복과 재질이며, 내의 또한 그러합니다. 수數가 적힌 옷을 착복한 것을 보면 먼 곳에서 온 죄수가 아닐는지요.
- 몸의 털을 밀어낸 듯 머리카락을 제외하곤 모든 곳이 민둥하옵니다.
병찬은 머릿속에 전기가 들어온 듯 이불 안으로 손을 집어넣어 몸을 더듬었다. 속옷이 잡히지 않는다. 입고 있던 옷이 없다. 알몸. 병찬은 누워 있던 곳에서 허리를 일으켜 벌떡 일어났다. 막 늙은 여인이 입을 떼어 “이 성에서는 저 이의 얼굴을 아는 이가 없습니다.” 라는 말이 끝난 순간이었다. 병찬이 이불을 걷고 앉은 소리를 들었는지 사람들의 시선이 한쪽으로 쏠렸다.
병찬은 귀 안쪽에서부터 이명이 찡하게 울리고 머리가 조여오듯 아팠다. 조명이 떨어졌던 부위를 더듬었지만 피딱지가 만져지지도 않고 움푹 팬 느낌도 없었다. 몸을 일으켰던 병찬이 이불 위에 다시 고꾸라지자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커다란 그림자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 다들 이제 나가 보도록 해.
둥글게 앉은 다섯 명의 사람들은 불만도 없는 듯 그림자에게 공손히 인사를 했다. 병찬은 빙글빙글 도는 눈앞이 또렷해지길 기다렸다. 문을 나서기 전 늙은 여인이 그림자를 돌아보았다.
- 대공. 손님도 오셨는데 마른 장작을 더 가져다 놓을까요.
- 그래, 오늘만 부탁하지.
방안은 아주 넓고 훈훈하게 열이 올라 따뜻했다. 장작이 벽난로 안에서 일렁이며 타올랐다. 난로의 빛에 의지하고 있으나 방안은 전체적으로 어둑했다. 그림자처럼 넓은 일인용 소파에 앉아있던 존재가 부드럽게 일어난다. 병찬이 있는 침대를 향해 다가온다. 병찬은 고개를 들었다. 역사 교과서에서 슬쩍 봤던, 아니 솔직히 음악방송 무대 위에서 아이돌 의상으로 훨씬 더 많이 본 검은 제복을 목부터 단추를 꼼꼼히 잠가 가지런하게 입고 제 종아리에 맞춘 검은 부츠를 신은 키가 큰 남자가 옆에 서 있었다. 이마와 뺨을 가린 두건을 벗었지만 눈을 보니 알겠다. 눈 속에 파묻혀 춥다고 되뇌이던 병찬을 끄집어 올려 말에 태우고 돌아온 사람이었다. 병찬은 아직도 현실감각이 둔해서 무슨 일이 자신에게 일어났는지 모르겠다. 병찬은 괜히 진지하게 대꾸했다가 나중에 이 모든 게 유튜버 예능의 깜짝카메라로 밝혀져 창피를 당할까 무섭다. 여긴 유튜버들이 모여서 가오 잡는 세계관인 거고?
- 정신이 들었나.
- 누구……세요?
- 그대가 밟고 있는 제국 북부의 땅과 이 성의 주인이다.
제국 북부의 땅과 이 성의 주인. 박병찬은 이마를 다시 짚는다. 깜짝카메라가 아니라면 역시 드라마 촬영장이고 이 사람은 역할에 몰입하는 배우인 게 분명하다. 아아아, 그렇다면 어딘가에 소형 카메라가 있을 것이다. 문을 열면 촬영을 위해 대기하며 대본을 들고 있는 배우들과 드라마 제작 스태프들 있을 거고. 그래그래. 실제로 있다고 하잖아. 막 고립되어서 정신이 망가지는 연기를 해야 하면 일부러 방안에 틀어박혀 세 달 동안 자기 스스로를 가둬놓는 배우들이.
- ……상황이 상황인 만큼 그대가 지금 내 앞에서 예를 갖추지 못해도 이해하도록 하지.
남자가 덧붙이는 말에 병찬은 어처구니없다는 듯 미간을 찡그린다. 미치겠다. 뭔 소리인지 하나도 모르겠고 대사가 약간 부끄럽다. 병찬이 좋아하는 드라마 종류는 아니다. 유럽 왕실 배경이나 1차 세계대전 이전 배경의 영화 같은 거 좋아하는 애들이 이런 거 좋아하는 거 아닌지? 여주인공은 따로 존재할 것 같은데 왜 저에게 대사 연습을 하시는지?? 병찬이 손바닥으로 거친 뺨과 이마를 문지르며 헛웃었다.
- 아이고, 그렇게 말하면 제가 여기가 어딘지 뭐 어떻게 알아요? 드라마 제목 이름이나 배우님 성함을 말씀을 해주셔야. 그것보다 여긴 어디인지……? 저 떨어지는 무대 조명에 머리 맞아서 병원에 가던 중 아니었어요?
역시 구급대원들이 급해서 날 어디에 떨구고 가버렸나. 환자 대우가 구데기네. 머리에 상처가 없어서 이상하다고 생각이 들긴 했는데. 그래도 여기에 있으면 멤버들이 저를 걱정할 것 같거든요. 남자는 크고 아름다운 눈을 깜빡이며 병찬을 바라본다. 병찬은 앞으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손으로 쓸어넘기며 한숨을 내쉰다. 제 목소리가 카메라에 녹음이라도 될까 걱정되어 아주 작은 소리로 남자에게 말했다. 으휴. 내가 요즘 잘 나가는 아이돌이라서 이런 걸로 조회수 대박내고 싶은 거 이해하는데. 박병찬은 넉살 좋게 하하하 웃는다.
- 서로서로 부끄럽지 않게 적당히 놀립시다. 응?
- ……무엄하구나.
남자는 검은 장갑을 왼손부터 한 겹씩 벗는다. 흰 피부가 난로의 불빛에 비쳤다. 병찬은 남자에게서 시선을 돌려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벽에 박힌 카메라를 찾기만 한다면 장난 좀 그만 치라고 외칠 셈이었다. 벗긴 옷이나 달라고. 병원부터 가야 한다고. 멤버들이 다 같이 걱정하고 있을 거라고. 병찬이 고개를 이쪽저쪽 돌리는 동안 남자는 허리춤에 묶인 검집 소품을 맨손으로 꺼내 들었다.
남자의 허리에 매달린 검. 제국의 황제가 친히 내려준 황실의 검이 그 무게감을 여실히 드러낸다. 병찬은 아직도 분위기 파악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 뭐라고 혼잣말을 중얼대며 침대에서 일어나려고 이불을 걷어내는 박병찬의 관자놀이에 대고 남자는 검집으로 찍어누른다. 빠악.
박병찬은 무대 준비하느라 사흘 전부터는 물만 마셨다. 먹는 걸 안 좋아하는 편이라 평소에도 샵에서 나눠주는 쿠크다스와 사과 반쪽만이 하루의 식사 전부였다. 연약한 아이돌 박병찬은 옆으로 쓰러졌다. 악! 비명은 질렀어도 기절하지 못했다. 무예가 출중한 남자라면 병찬을 단번에 기절시킬 수 있었는데, 일부러. 병찬은 눈앞이 아찔해서 처맞은 부위를 양손으로 붙잡고 고개를 든다. 미친놈인가. 병찬은 눈으로 욕한다. 너무 아프거나 아무 생각도 들지 않을 만큼 당황하면 또 웃겼다. 눈물도 핑 돌았다. 난로의 빛을 등진 남자가 눈을 형형하게 뜨며 침대에 넘어진 병찬을 내려다보며 말한다.
- 쪼개지 마라.
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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