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1126 중꺾마 3천자
SC1
지금은 그 어디서 내 생각 잊었는가…몰라요?
가깝다. 너무 가까워. B는 생각했다. 기분 좋게 내리쬐는 태양을 맞으며 풍경 좋은 정원 벤치에 앉은 두 사람. 이름 모를 유니폼을 입고 소년은 웃는다. 그때도 느꼈던 좋은 향기, 물결지어 휘어진 눈매, 복슬복슬하게 덮은 머리, 서울 애들은 다 이런가? 싶을 정도로 곱상하고, 단정한…B가 언제까지나 어디까지나 ○○했던 네가 여기에 있다는 건…
“○○○, 이거 다 꿈이지?”
이상하다. 여기는 서울인데 창밖에 갈매기가 날아다니네. 눈을 뜨면 노랫소리가 들린다. 알람이다. 파도치는 부둣가에…뚝. 편의점 아르바이트 갈 시간이네. 지금부터 준비해야 안 늦어. B가 크게 기지개를 켰다.
B의 하루 일과는 이렇다.
기상 후 샤워, 그리고 조깅. 아침에는 자취방 30분 거리에서 편의점 주간 아르바이트. 여기까지는 매일 같지만, 퇴근한 뒤에는 좀 다르다. 그날 잡힌 단기가 있으면 거기로 나간다. 그날 잡힌 단기가 없으면 폐기를 챙겨와 벼룩시장, 교차로, 가로수를 뒤져본다. 그러다 공부하기도 하고, 저녁에 붙은 저녁 알바를 가거나 하는데…금요일 밤만은 예외다. 금요일 밤만은 절대 일하지 않는다. 그럼 무엇을 하느냐. 마트에서 장 보기. 이게 낫나, 저게 낫나. 한참을 재보다 결국 둘 다 바리바리 싸서 ‘대체 이걸 다 어디 쓸 건가’ 싶은 양의 식재료를 구매하는 B는 같은 시간 마트를 다니는 동네 어르신들의 은근한 구경거리였다.
“이렇게 자주 올 줄 알았으면 나갈 때 붙잡지 말걸.”
“맞아, 어? 오늘은 뭐 사 왔어? 누나도 참…”
자신이 오자 괜히 시끌벅적 쫑알대는 아이들의 너머로, B는 다른 사람을 보고 있다. 그는 늘 똑같다. 자신이 나가겠다고 선언했을 때, 처음으로 ‘이런 짓’을 했을 때만 빼면 거의 똑같았다. 여느 때와 같은 눈웃음을 지으며 그리움 듬뿍 담은 채, 눈으로 말한다.
‘언제라도 좋으니까, 돌아와.’
B는 말없이 등을 돌렸다. 알아서 정리해라. 그 시선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어서 문을 나온 뒤 한참을 달렸다. 쫓아오면 밀어낼 셈이었다. 붙잡으면 뿌리칠 셈이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 소년 – 아니, 청년은 오지 않는다. 미련이 남아 딱 한 번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고는 볼캡을 눌러 쓴 채 거리 속으로 사라져간다.
“그딴 게 어딨어!”
“큰 소리는 말고, 응? 누나…”
그것은 2004년의 1월 어느 날이었다. 세 벌의 유니폼, 사비로 굴러가는 경영, 끝없는 생활고…스물넷, 그 나이에 B는 뭘 했는가. 평범하게 대학 다니지 않았는가. 친구들과 웃고 떠들고, 게임하고 놀면서 청춘을 즐겼다. 헛웃음이 나온다. 지금, 이 순간에도 잠든 동료들 눈치나 보는 저 애, 저 표정이 얼마나 기가 막힌 지!
“너 저번에 받은 상금, 대체 얼마 남았어.”
“…말하는 거야 내 자유잖아. 개인 정보니까.”
“개인 정보라고? 내가 우리 팀 장부도 확인 못해?”
“…그건…”
잠깐 사이 많은 표정이 스쳐 지나간다. 당연히 저 애도 지쳤다.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다. 언제까지 해야 하지? 언젠가 보답받긴 하는 건가? 그 누구도 장담할 수 없는 결과, 가본 적 없는 곳…
“…그래, ‘내’ 자유라고?”
…나는 볼 수 없어. 가고 싶지 않아. 그딴 건 너나 가. 난 그렇게까지 못해. 난 여기에 발붙이고 살게. 너는, 너네는 멀리멀리 떠나.
“나 인제 그만둘래.”
넌 보답받아. 너네는 행복해.
“손목 아파서 못 해 먹겠네…”
B가 은퇴한 것은 2004년의, 싸락눈이 흩날리는 어느 날이었다.
누나! 내 번호 안 지웠지? 농담이야…그런 사람 아닌 거 알아. 이 소식 들으면 완전히 뒤집어질걸. 우리 이제 헤어지지 않아도 돼. SK야. 무려 SK라고…SK텔레콤이 인수해 준다고 했다니까! 이만한 대기업이면 누나도 다시 복귀할 수 있어. 하하, 누가 뭐래도 나잖아. 나 A잖아…어떻게든 누나 다시 프로 시켜줄게.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응?
…뭐라고?
아니야, 마음 바뀌면 다시 연락해. C 형 전화번호로 연락…
“A, 이거 다 꿈이지?”
이상하다. 여기는 서울인데 창밖에 갈매기가 날아다니네. B가 생각했다. ‘A’는 천진난만한 얼굴로 저를 바라보았다. 꿈속 세상은 참으로 기묘해서 한강 대신 끝없이 바다였다. 우주가 하늘만큼 가까워 손을 뻗으면 잡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멍한 얼굴로 별을 향해 손을 뻗는 B에게 ‘A’가 물었다.
“꿈인 거 어떻게 알았어요?”
“네가 그 유니폼을 입고 그런 얼굴을 하고 있는데 어떻게 속아주니. SK텔레콤 T1 유니폼이라며. 근데 얼굴은 처음 봤을 때랑 똑같아. 그리고 진짜 A는 나한테 이제 존댓말 안 해.”
와, 진짜 잘 아네. 그는 슬픈 듯이 웃었다. 그 웃음소리와 함께 하늘에서 우주선이 떨어진다. 이쪽으로, 이쪽으로…아무래도 그는 저걸 타고 떠날듯 싶다. 마지막으로, ‘A’는 B에게 ‘뺏어갔던’ 헤드폰을 휙 던진다. 벤치에 처음 앉았을 때, 부산 갈매기를 듣고 있었을 때, 그걸 휙 빼다가 지금은 그 어디서 내 생각 잊었는가…몰라요? 가까이 다가와 속삭이던 어느 때의 꿈이 떠오른다…
@NRS_COMM 님 커미션
“속았다면 좀 더 행복했을지도 몰라요! 어차피 꿈인데.”
“나는 꿈속에서 살지 않을 거야. 그거 너무-”
아프더라! 우주선의 계단을 성큼성큼 밟는 소리에 마지막 말은 묻혔다. B는 한때, 그 아이의 가장 소중한 사람이 되는 꿈을 꾼 적이 있었다. 그렇기에 깨어난 뒤에 너무나도 괴로웠다. 첫 번째 이후, 두 번째 여자친구를 사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니까. 그 사람들은 나와 닮은 점이라고는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니까! 떠나가는 우주선을 보며 울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노력했지만…
“너는, 너네는 멀리멀리 떠나…거기서는 꼭 보답받고, 행복해야 해…난, 나는…이제 끝이지만, 해줄 수 있는 게 이젠 하나도 없어서 미안해…”
눈을 뜨면 노랫소리가 들린다. 알람이다. 이제 아르바이트는 하지 않는다. 벼룩시장, 교차로, 가로수는 전부 분리수거 날에 가져다 버렸다. 지금까지 쌓인 양이 상당했다.
“지금 얼굴, 너무 웃기다.”
이미 멀리 간 달빛소년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그러게, 나도 그래.”
그것에 답하듯 B가 중얼거렸다. 복학계를 처음부터 다시 써야 할 것 같았다. 초안이 눈물에 젖어 엉망진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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