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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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일방주 테레시아 드림 야전의 들꽃 1098년, 빅토리아의 런디니움. 이제는 그 누구도 이름을 발음할 수 없을 문명의 영광이 결코 불멸할 수 없었던 것처럼 차갑게 반짝이던 은철과 증기 엔진의 화려함 역시 영원할 것이 못 되었다. 높은 첨탑은 빛을 잃었고 고풍스러운 종탑은 침묵했다. 한때 제지공과 제련공들로 북적거렸던 골목은 을씨년
소하의 용은 계곡에 잠들고 흙먼지 이는 군영에 사절이 찾아들었다. 모래구름이 두터웠다. 모래바람 지독한 서쪽에서는 야외에 반 시진 가량 나와 있는 것만으로도 품속으로 모래 알갱이가 알알이 스며들었다. 계절을 가리지 않고 혹독한 모래폭풍이 몰아쳤으니 병영과 여염 가릴 것 없이 옷의 여밈을 단단히 하고 행전과 손목띠를 졸라매는 풍습이
우중기담 1894년 10월의 어느 날 밤. 도쿄 센다가야에서 출발한 인력거는 빈터를 크게 돌아 요요기 근처를 향해 내달렸다. 늦은 오후부터 내리기 시작한 가을비가 점점 거세어기 시작한 참이었으므로 거리의 인적이라곤 이따금 지나치는 야경꾼 외에는 없었다. 한참을 달린 인력거가 어두운 골목을 돌아 거의 다 쓰러져 가는 반찬가게 옆, 낡은 서책방
명일방주 총웨 드림 술잔이 비었으니 채워야 마땅하지. 춘절을 앞둔 옥문은 평소와는 다르게 수선스럽고 활기가 넘쳤다. 거리마다 악운을 막고 길운을 불러들인다는 홍등이 내걸렸고, 대문마다 붉은 대련과 횡비가 나붙었다. 골목과 골목 사이를 장식하는 금귤나무와 거꾸로 매달린 복(福)자패 따위 역시 제법 색색으로 화려했으니 평소의 옥문에 비
명일방주 총웨 드림 사토 속에 잠들어 만 년의 꿈을. 숴는 도시에서 가장 높은 망루에서 요새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고각(高閣)이라는 별칭이 붙은 그 초소는 옥문의 사풍이 잠잠한 날이면 몇백 리 건너의 능선과 협곡까지도 내다보이는 준지였으나 그날은 유독 황사가 심해 중앙 출입소에서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에 있는 해자의 윤곽조차 보
유리 매병과 아교 간밤에 내린 싸리비로 숲은 흠뻑 젖어있었다. 된서리를 얻어맞아 볼품없이 뭉개진 낙엽길을 밟고 진천은 경사를 올랐다. 걸음을 딛는 내내 차고 습한 숨이 규칙적으로 오르내렸다. 계곡이 멀지 않아 사방에 물안개가 낀 탓이었다. 등에 진 땔감 짐에 덮어둔 방수포가 제대로 여며졌을지 염려하면서 걸음을 재촉하다 보면 어느새 눈에 익은 오
편련(片戀) 남쪽과 달리 북위의 삼월은 춥고 건조해 사냥에 적합치 않았다. 잘못 숲을 휘저었다가 괜한 산불이 일 것을 염려해 수렵회가 열리는 시기가 되면 숲지기들은 언제나 매 기슭과 계곡을 살피며 산세를 다듬었고, 덜 녹은 땅이 꺼지는 일 없도록 몇 번이고 땅디딤을 거듭했다. 예조와 공조의 협력이 가장 돈독히 이루어지는 시기 역시 이 때였다.
귀로 형부 조옥에서 백의와 난발 차림으로 벽에 기대어 앉아 있던 소위경은 이맛가에 떨어지는 물방울을 맞고 불현듯 눈을 떴다. 고개를 올려보니 간밤 새 내린 폭우로 인해 조옥의 허술한 토담이 갈라져 물이 새는 모양이었다. 그는 혀를 차면서 물이 떨어지는 자리에 놋쇠 그릇을 받쳐놓고 자리를 옮겨 앉았다. 장 전랑이 공부시랑으로 진급하면서 부직을 여직 뽑
왕경의 봄 왕경의 봄은 기슭을 따라왔다. 겨우내 얼어 붙어있던 남산의 지암곡 계곡물이 흐르기 시작하면 붓이끼가 푸르게 물들고 겨울 동백이 지는 자리에 산매화가 피어난다. 곧 덜 녹은 얼음결 아래로 숨죽였던 싹들이 일어나며 개나리 꽃가지를 건드리면 청명한 바람결이 풍령 소리와 함께 찾아들고, 산신의 화동이 새재의 굴곡마다 초롱불을 밝히는 듯이 사
絶弦 시위를 끊다 조호 원년. 쏜 살이 과녁의 한 가운데에 명중했다. 정월. 조궁의 젊은 후계자가 창상만궁을 물려받았다는 소식은 사흘이 채 되기도 전에 경내에 파다하게 퍼졌다. 음양료의 한가로운 이들은 술잔 위에 떨어지는 눈송이를 안주 삼아 그의 미래를 점쳤고, 청운과 백송 사이 닦여 놓인 도원로만을 골라 걷는 청년의 앞날을 정히 그린 듯
어떤 이는 모란꽃에 사자 무늬를 새기고 언뜻 이 세상에 태어났다가어느덧 사라져 돌아오지 않으니사라진 사람을 누가 기억하리 도연명 <형증영(形贈影)> 계문 3년. 봄 지나 강북에도 꽃이 지니 정오품 중산대부 동사후저의 구창(丸窓) 너머로 풍경이 야위었고 사치스러운 안주인이 종을 부려 성산의 백죽을 옮겨심게 하였다. 삼대가 넘도록 성산을 지켜온
쌍문동 호러 스토리 “이번엔 진짜라니까. 내 말 못 믿어, 여 선생?” 쌍문더힐 공인중개사 사무소 최 소장이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하자 여장선은 벽걸이 달력으로 권태로운 시선을 돌렸다. 아니나다를까 월요일이었다. 언제 또 주말이 갔대. 그렇게 생각하면서 그는 피곤이 채 가시지 않은 낯으로 가까스로 하품을 삼켰다. 상근직 회사원들과 달리 프리
제비와 난초 思燕蘭林 화살이 구름을 가르고 날아들때 까지. 그 군사, 한바탕 청운의 꿈을 꾸었다. “여장선 너 진짜 죽고싶냐! 썩 튀어나오지 못해!” 공주부 뒷뜰에 노성이 요란했다. 홍예교와 전각 사이 웃자란 꽃덤불 사이를 지나던 초명공주부 상복(尙服)* 홍조요는 그 벽력같은 고함소리를 듣고선 한숨을 쉬며 허리를 굽혔고, 머지않아 덤불
밀월 언젠가 배를 타고 좁은 해협을 건너 옛 왕국의 후계자가 남아있다는 소문이 돌았던 운석군 남쪽의 작은 섬에 찾아갔을 때 조각배를 태워주던 노인이 말했다. ‘모든 바다에는 얼굴이 있다’고. 당시에는 바닷사람들의 지혜에 대한 단순한 은유인 줄로만 알았으나 오래 떠돌다보니 모든 은유에는 곡절이 있고 모든 설화에는 까닭이 있으며 모든 이야기에는
안카 아잔켈의 잃어버린 명예 혹은 신앙은 어떻게 발생하고 어떤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가* 1578년 10월 16일. 공판 시작 320일째. 페사로의 칙사가 다녀간 지 이틀 만에 차림은 다시 빈한해졌다. 나무 접시 위에 말린 포도와 둥근 빵, 양념 되지 않은 카초카발로 한 조각이 놓이는 것을 보면서 수사들이 투덜거렸다. 칙사가 머무는 동안에
그러므로 이렇게 기도하여라 그러므로 이렇게 기도하여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성탄일이 가까웠으므로 회당의 어디에서나 육계나무 껍질을 부순 듯한 냄새가 났다. 낮게 타는 촛불이 겨우살이와 자작나무 사이에서 키를 줄였고 호두 기름이 담긴 기름등이 어슴푸레하게 타올랐으니, 적막한 중정을 건너 고해실로 가는 모서리를 도는 내내 계절을
사랑의 기원 BGM. The Black Keys - Weight of Love 키르잔. 너는 우리의 손금과 손마디가, 살갗과 뼈마디가 맞닿았던 최초의 순간을 기억하니. 서로의 말초가 속눈썹이 얽히는 것과 같은 속도, 그리고 경도로 다가와 존재를 맞대던 그 순간을 말이야. 우리가 하나였던 만큼 둘이고, 둘인 만큼이나 불완전하다는 사실이 돌이킬 수
쏜 살은 과녁을 빗나가고 Billie Eilish - No Time To Die 불은 삶을 씻어 납작하게 만들었다. 온갖 성가신 요철과 떠들썩한 가닥갈래들 조차 남김없이 태워 고요히 잠재웠으니 횡주(橫走) 하는 낱알들조차 어미 품에서 잠든 어린 포유 짐승처럼 온순했다. 소란스러운 삶을 일소하는 불의 무자비함은 일견 다정하기까지 했으므로, 그것이 쓸고
코러산트에서는 모든 것이 좋았다 BGM. Voice of No Return 이맛가에 떨어진 물방울이 여윈 뺨을 지나 귓바퀴에 고이는 것을 느끼면서, 에밀은 저도 모르게 스스로에게 거짓말을 했다. 코러산트에서는 모든 것이 좋았다고. 가난한 거짓말이었다. 금세 내부의 반론자가 거수했다. 모든 것이 좋지는 않았다. 다만 이보다는 나았을 뿐이지. 대부분
뼈와 물 테살로니키에 가자고 말한 것은 양양이었다. 언제나 먼저 말하는 것은 그녀의 몫이었다. 발언권은 획득된 것이라기보다 주어진 것에 가까웠다. 채릉은 그녀가 말하기 전에 말하지 않았고, 양양은 채릉의 다정한 무관심에 대해 불평하지 않았다. 그것이 채릉이 양양을 좋아하는, 더 정확히 말하자면 곁에 두는 이유 중 하나였다. 양양은 테이블 위에 세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