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더스게이트3

[게일타브] 게일 데카리오스는 연애가 하고 싶어!(下)

셀렌이 '타브'가 아닌 세계에서 게일과 만나는 이야기

연성창고 by 닐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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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스타리온 로맨스를 탄 2호 가내타브 세계 기반입니다.

※찬조 출연: 롬님(@orbit_fall)의 타브


끝났다. 죄다.

게일은 잔에 있는 와인을 벌컥벌컥 비웠다. 평소의 그라면 눈쌀을 찌푸릴 만한, 전혀 고상하지 못한 음미 방식이었지만 지금의 게일에게 필요한건 혀를 즐겁게 하는 맛이 아닌 알콜이었다.

셀렌이 화를 내며 떠났다. 그리고 그녀가 떠난 것은 전적으로 게일의 잘못이었다. 그는 울적한 기분으로 빈 잔에 와인을 더 따랐다. 잔에 흐릿하게 비친 제 얼굴이 몹시 흉해보였다.

“맙소사, 데카리오스씨, 안그래도 그 보기 흉한 수염이 한층 더 흉물스러워졌군요! 대체 무슨일이 있으셨던건가요?”

“지금 내가 흉해보이는건 맞지만 수염은 상관없잖아, 타라.”

익숙한 타박소리에 게일은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 대답했다. 그의 오랜 친구이자 고양, 아니 트래심인 타라는 폴짝 제 테이블 위로 뛰어 올라오고 서는 인상을 찌푸렸다.

“어휴, 술 냄새! 대체 무슨일이 있으셨길래 이렇게 답지 않게 술을 드시고 계신거에요? 아침까지만 해도 분명 서머필드 양과 만날거에 신나하셨잖아요.”

“……차였어.”

입 밖으로 대답하고 보니 더 서러워 게일은 입에 와인을 털어 넣었다. 그 대답에 타라는 깜짝 놀라 게일을 바라보았다.

“차이다뇨?! 뭘 어쩌셨길래요?”

게일은 한숨을 푹쉬고 잔을 소리나게 내려놓았다. 그는 울거 같은 얼굴로 타라를 바라보며 횡설수설 입을 열었다.

“내가, 내가 말을 잘못 꺼냈어……. 셀렌이, 지금 살고 있는 집의 월세가 비싸다고 하길래 무심코 내 탑에 들어와서 사는건 어떠냐고 물었더니……. 무슨 뜻이냐고 하길래……나도 모르게 친구로써 하는 제안이라고 했거든? 그랬더니 셀렌이 우리 사이에 친구 말고 더 단어가 있을법하지 않냐며……가버렸어…….”

시간을 역행할 수 있다면 게일은 그때 무심코 드러낸 속내를 입밖으로 내지 않을거다. 아니면 하다 못해 친구로써의 제안이라고 하지 않을 것이다. 게일은 한숨을 푹쉬고 빈잔에 다시 와인을 따르려고 했으나 앙증맞은 발이 그의 손길을 막았다.

“데카리오스 씨, 그만 드셔요. 이렇게 마신다고 엎질러진 물을 다시 담을 수 있는 건 아니잖아요.”

“나도 알아, 타라. 담을 수 없으니까 마시게 해줘. 마시고 흘러넘겨버리게.”

“안돼요. 그만 드시고 내일 당장 그 흉한 수염 미시고 서머필드 양에게 찾아가서 사과하세요.”

“이제 와서 뭘 어떻게 사과하라는 거야. 다 끝났어, 타라. 다 끝나버렸다고.”

아직도 온기를 띄던 눈동자가 한순간에 차갑게 식어가던 과정을 기억한다. 실망했다는 그 눈길이 게일의 뇌리에 깊숙히 박혀 떠나질 않았다. 애초에 잘잘못을 따지자면 전적으로 게일의 잘못이 맞긴 했다. 좀 더 그녀와 관계를 확실히 했던게 좋았을까? 진즉 키스를 하며 솔직하게 좋아한다고 고백했으면 이런 사태는 안 벌어졌을 것이다. 게일은 다시금 크게 한숨을 쉬고 쇼파 팔걸이에 기대 엎어졌다.

필멸자와의 연애는 셀렌이 처음은 아니나, 너무 오랜만이었다. 그는 그의 여신인 미스트라와 너무 오랫동안 함께했던 탓인지 보통의 사람들과 연애하는 법을 잊어버렸다. 옛날에는 어떻게 했더라? 미간을 구기며 떠올려보려고 해도 잘 기억나지 않는다. 기억나는 것은 아직 학생이던 시절 여자친구가 있었다는 사실과 그 여자친구로부터 “그렇게 마법이 좋으면 아예 미스트라랑 사귀지 그래?!”라는 말을 들으며 헤어졌던 일밖에 기억나지 않는다.

그리고 미스트라와의 연애는……당연하지만 이 관계에서 그리 도움이 되지 않았다. 지금 되짚어 생각해보면 미스트라와의 연애는 연애라고 정의하기에는 기이한 방식이었으니까. 게일이 사랑을 표하면 미스트라는 그에 알맞는 사랑을 상으로 하사해주었다. 그렇기 때문에 게일의 사랑은 항상 완벽해야만 했고, 그가 사고를 치게 된 원인이기도 했다.

하지만 셀렌은 미스트라가 아니었다. 그녀는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었고, 완벽한 사랑을 선물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냥 자신의 사랑을 내보이면 되는 것이었다. 셀렌은 그가 그러기를 인내심 있게 기다려주고 있었는데, 게일은 무심코 옛날처럼 완벽한 사랑을 선물해야 한다는 강박에 일을 그르쳤다. 한심하기 그지 없었다.

반대편 쇼파 팔걸이에 올라온 타라가 그의 곁에 기대어 앉아 다정히 말했다.

“데카리오스 씨, 저는 서머필드 양을 만나본적이 없지만 그녀가 좋은 사람인 건 당신의 이야기를 통해서 알 수 있어요. 내일 찾아가서 사과하고 솔직하게 좋아한다고 고백해요. 분명 그녀도 받아줄거에요.”

“……정말 그럴까?”

“오, 당신의 타라가 틀린 소리를 한적이 있나요?”

오랜 친구의 위로에 게일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미소 지었다. 그래 다시금 만나보자. 게일은 그리 다짐하고 뒤늦게 몰려온 수마에 저항없이 몸을 맡겼다.


‘말이 조금 심했나.’

늦은 오후, 셀렌은 학생들이 제출한 과제를 채점하며 생각했다. 아무리 연애사가 험난해도 세상은 돌아가고, 기간제 강사는 출근을 해야했다. 그녀는 한숨을 푹 쉬고는 기지개를 쭉 피었다. 곧 채점도 마무리 되고 퇴근시간에 가까워졌다. 집에 돌아가면 만들어 놓은 스프나 마저 먹고, 읽다만 책이나 마저 읽자. 그러면 이 심란한 기분도 어느정도 정리 되겠지.

‘그래, 친구로써. 다른 의미는 없어. 정말이야.’

어색한 웃음과 함께 애써 변명하던 그의 말이 떠오른다. 셀렌은 저도 모르게 채점을 하던 펜에 힘이 들어갔다. 친구말고의 의미가 없다니? 그럼 지금까지 자기랑 보냈던 시간은 뭔가. 싫은데 억지로 같이 보낸거라고?

물론 이성은 그렇지 않다는 걸 안다. 하지만 속상한 건 사실이다. 동시에 자신이 좀 더 적극적으로 다가가야 했던 거 아닐까 하는 후회도 들었다. 그녀는 게일과 보내는 시간이 좋았다. 좋아하는 문학의 좋았던 부분을 꼽는 모습이나, 셀렌은 잘 모르는 마법 이론의 훌륭함을 떠들때는 아이 같아서 귀여웠다. 그의 몸에서 나는 잉크와 책냄새가 좋았고, 저를 보며 수줍게 웃어보이는 모습을 볼때마다 키스하고픈 욕구를 참아내는게 얼마나 고역이었는지. 지금 생각하면 그냥 그 욕망을 참아내는게 아니라 솔직하게 발산해야 했던건데.

아무튼 셀렌은 게일이 좋았다. 그 덕분에 이 낯선 곳에서 정착 생활을 지속해나갈 수 있었고, 새로운 삶의 방식을 익혀나갈 수 있었다. 그의 존재가 얼마나 셀렌에게 위안이 되었는지 본인은 모르겠지.

“하아…….”

셀렌은 멈췄던 손을 움직이며 마지막 과제의 채점을 마무리 했다. 가는 길에 빵집에 들러 빵좀 사가고 만들어두었던 수프와 함께 먹어야지. 그런 다음 읽던 책이나 마저 읽어야겠다. 그리 계획하다가 셀렌은 문득 생각난 사실에 이마를 짚었다. 그 읽던 책은 하필이면 게일이 추천해줬던 책이었고 빵집도 게일이 알려준 데였다. 그 사실을 깨닫자 서러워졌다. 제 생활에 그가 없는 곳이 없다.

“셀렌.”

“……응?”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한박자 늦게 반응했다. 고개를 돌리니 같은 시기에 똑같은 기간제 강사로 고용된 옆자리의 타브가 잔을 꺾는 시늉을 하며 의견을 물어왔다. 셀렌은 잠시 그 뜻을 이해못하다가 어이가 없어 되물었다.

“맙소사, 타브. 한 주의 첫날이야.”

“그렇지. 근데?”

“우리 내일 수업있는거 알지?”

“당연하지.”

“근데 마시자고?”

“괜찮은데 하나를 알게 됐거든. 마침 너도 술이 필요해 보이는데 어때?”

“하아, 타브…….”

셀렌은 한숨을 한번 크게 내쉬고는 씨익 웃으며 대답했다.

“미친 제안이지만 마음에 들었어. 가보자고.”

그리하여 두 기간제 강사는 숙취가 오지 않을 만큼 술을 마신다는 덧없는 결의를 불태우며 퇴근했다. 저녁 노을이 지는 광장은 퇴근을 서두르는 사람들로 붐볐고 그 사이사이 바드와 음악가를 꿈꾸는 학생들의 연주 소리가 들려왔다.

“어디 있는 가게야?”

“트레이드 구에 있어. 마차는 밀리겠지?”

“이 시간에 트레이드 구 가는건 안밀리거 같은데 아무래도 캐슬 구에서 빠져나가는건 밀릴 것 같네.”

“그럼 걸어가야겠네.”

그런 시덥지 않은 대화를 나누며 두 사람이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던 중 누군가가 셀렌을 덥썩 붙잡았다. 무슨 일인가 싶어 몸을 돌렸다가 자신을 붙잡은 상대의 얼굴을 보고 셀렌이 굳었다. 지금은 보고 싶지 않은 상대였다.

“……게일.”

“안녕, 셀렌.”

저를 붙잡으려고 인파를 헤치며 뛰어오기라도 했는지 평소 잘 정돈된 모습이 조금 흐트러져 있었다. 그는 어색하게 웃어보이며 숨을 고르고는 입을 열었다.

“실은 어제 있던 일때문에 너랑 다시 얘기를 하고 싶어서…….”

게일의 시선이 문득 셀렌의 옆에 있는 타브를 향했다. 모자를 푹 눌러쓴 선이 날렵한 하프엘프 남성이었다. 게일의 표정이 미묘하게 구겨졌지만 그는 금방 표정을 바꾸고 입을 열었다.

“아, 미안합니다. 워터딥의 게일이라고 합니다. 잠시 셀렌과 할 이야기가 있어서 그런데 자리를 비켜주실 수 있나요?”

“아, 예, 그러도록 하죠.”

딱봐도 사랑싸움인게 틀림없는지라, 타브는 자연스럽게 자리를 비키려고 했다. 자고로 이런건 구경꾼인게 최고이지 말려드는 건 최악인 법이다. 하지만 셀렌은 무슨 생각인지 굳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아니, 타브. 여기 있어. 게일, 할 말있으면 여기서 말해줄래?”

강경한 셀렌의 태도에 타브는 물론이고 게일도 당황했다. 아무래도 그 말은 게일에게도 예상외였는지는 그는 버벅이며 간신히 말을 쥐어 짜냈다.

“어, 음, 셀렌, 나는 너랑 단 둘이서만 이야기 하고 싶어. 대화 주제도 우리와 관련된거고. 상관 없는 사람을 세워놓고 이 주제를 억지로 듣게 하는건 좀 실례가 아닐까?”

타브도 동의한다며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으나 그 말을 들은 셀렌은 오히려 굳은 입가를 풀고 싱긋 입꼬리만 올렸다. 그녀는 다정하게 옆에 있는 타브의 팔에 팔짱을 끼며 고개를 기대고는 입을 열었다.

“뭐 때문에 나랑 단 둘이 이야기 하고 싶다는 건지 모르겠고, 너와 나에 관계된 주제도 영 짐작이 안가네. 미안하지만 이 친구와 선약이 있어서, 먼저 가볼께. 아, 그리고 이번 주말은 내가 다른 친구와 볼일이 있어서 못 만날거 같네. 그럼 안녕.”

셀렌은 타브를 데리고 그대로 자리를 떴다. 갑작스러운 날벼락에 휘말려 끌려가던 타브는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거의 죽일듯이 저를 노려보는 남자와 눈이 마주쳐버렸고 이번에는 제가 앞장서서 셀렌을 끌고 갔다. 두 사람은 도망치듯이 본래 목적지인 트레이드 구의 술집으로 향했고 당연하지만 그날의 술값은 모두 셀렌이 냈다.


“할 일이 없어…….”

다시 돌아온 주말, 셀렌은 침대에 대자로 누우며 중얼거렸다. 집안일도 다했고,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도 다 읽었다. 간만에 리라를 좀 튕겼지만 금새 질려서 그만뒀다. 그렇다고 나가서 무얼 할 기분도 안났고 나가고 싶지도 않았다. 셀렌은 그저 멍하니 천장의 얼룩을 바라보며 생각에 빠져들었다. 게일은 지금쯤 뭘 하고 있을까. 문득 든 생각에 셀렌은 고개를 저었다. 내가 이런걸 왜 생각하고 있담. 그녀는 옆으로 돌아누웠다. 매주 주말을 그와 보내는게 익숙해지다보니 저도 모르게 그에 대한 생각을 한 모양이다.

그 날 이후로 게일은 제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야 당연하다. 더는 얘기를 나누고 싶지 않다고 했는데 계속 접근해오면 그건 스토커 아닌가. 그래도 그녀는 모순되게도 한번 더 그가 제 앞에 모습을 드러내줬으면 했다. 그 날 그렇게 화내고 가서 미안하고, 심술부려서 사과하고 싶었다. 이제 와서 생각한들 별 소용없는 일이지만. 셀렌은 다시 반대로 빙글 드러누웠다. 하지만 말이다, 애초에 애먼 사람과 이상한 오해를 한건 게일 아닌가? 셀렌은 주의 첫날의 일을 떠올렸다. 타브를 보며 미묘하게 구겨졌던 얼굴과 그를 내쫓으려던 행동……. 저와 제 직장동료를 보고 한 오해가 짐작이 갔고 그래서 더 화가 났다. 그럴 거면 친구라고 하지를 말던가! 셀렌의 꼬리가 탁탁 침대를 두드렸다. 셀렌은 다시 천장을 보며 드러누웠다. 그녀는 게일을 좋아한다. 그리고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화가났고 그래서 서글펐다. 그냥 키스나 할걸. 되지도 않는 후회나 하며 셀렌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콩콩콩-

무언가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셀렌은 몸을 일으켰다. 전서구라도 나한테 왔나? 그리 생각하며 창가에 가니 왠 날개달린 고양이가 앙증맞은 앞발로 창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트래심이라고 하는 생물이라고 했던가. 셀렌은 의아함을 감추지 못하고 창문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셀렌 서머필드 양이 맞으실까요?”

“어, 음, 맞는데……요?”

트래심의 존재를 알고는 있었지만 직접 만나 대화하는건 이번이 처음이었던지라 셀렌은 어색하게 대답했다. 고양이는 풍성한 가슴털을 뽐내며 제 목에 걸린 목걸이를 보여주며 말했다.

“타라라고 해요. 게일 데카리오스 씨의 친구죠. 갑작스럽지만 서머필드 양, 지금 데카리오스 씨가 많이 아파요. 가족분이신 데카리오스 부인도 자리를 비우셨고, 간호할 사람은 없는 상황이죠.”

“……게일이?”

트래심의 입에서 튀어나온 이름에 셀렌이 반응했다. 아프다니 무슨일인가.

“저라도 간호를 해드리고 싶지만, 보시다 시피 저는 엄지가 없고 마법으로 간호를 해드리는 것도 한계가 있으니까요. 그러니 서머필드 양에게 도움을 구해도 될까요?”

타라는 간절한 눈망울로 셀렌을 올려다보며 부탁했다. 그 눈망울과 사정에 셀렌은 넘어가지 않을 수 없었고 그녀는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하여 타라의 안내를 받아 도착한 게일의 탑은 생각보다 낮았고 넓었다. 높이로 따지자면 발더스 게이트의 라마지스의 탑이 더 높았지만, 너비는 이쪽이 더 넓은 것 같았다. 위풍당당하게 앞서서 걷는 트래심을 따라, 셀렌은 탑으로 들어섰다. 탑은 게일의 몸에서 나던 책냄새와 같은 냄새로 가득차있었다. 사방이 빽빽하게 책으로 둘러싸인 내부의 장서량을 채 헤아릴 수가 없어서 셀렌은 그저 멍하게 입을 벌리고 저도 모르게 내부를 구경했다.

“서머필드 양, 이쪽이에요. 이 포탈을 타셔야 해요.”

“응? 아, 응.”

서둘러 타라를 따라 눈 앞에 열린 포탈을 통하자 곧 커튼을 친 어두운 방이 나타났다. 방 안에서는 술냄새가 났고, 침대로 보이는 곳에 커다란 인영이 이불을 뒤집어쓰고 웅크리고 있었다.

“데카리오스 씨! 지금 시간이 몇시라고 생각하시나요? 일어나세요!”

“…말 이잖아…라……. 나…내버…둬…….”

“안돼요! 당신이 걱정되서 온 손님이 있단 말이에요!”

“……중에…오라…해.”

트래심과 오커처럼 꿈틀거리는 이불뭉치의 씨름을 보며, 셀렌의 머릿속에는 한가지 가설이 스쳐지나갔다. 방 한구석에 굴러다니는 술병과 술잔, 그리고 방 안에 퍼진 술 냄새, 게일이 많이 아프다는 타라의 말. 셀렌은 허탈하게 웃음을 터뜨리며 입을 열었다.

“응, 그러게. 숙취가 많이 심한거 같으니까 다음에 올게. 미안해, 게일.”

꿈틀거리던 이불의 움직임이 뚝 멈췄다. 곧 이불에서 머리 하나가 천천히 튀어나와 셀렌을 향했다.

“……셀……렌?”

“……안녕, 게일.”

셀렌은 멋쩍게 웃으며 시선을 피했다. 그의 얼굴은 점점 새빨게지며 경악으로 가득찼고 기어코 소리를 질러버리고 말았다.


“못 볼꼴을 보여줘서 미안해. 그리고 우리 타라가 실례했어.”

패닉에 빠진 와중에도 게일은 대마법사답게 주문을 외워 셀렌과 타라를 응접실로 내쫓았고, 약 20분 뒤, 여전히 숙취로 피곤한 얼굴이었지만 나름 멀끔한 상태로 차를 갖고와 셀렌을 대접했다. 그리고 이 모든 원흉인 트래심 타라는 게일이 나타나자마자 유유히 자리를 벗어나 어디론가 사라졌다.

응접실에는 간간히 차를 마시는 소리와 시계침이 똑딱 거리는 소리 외에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셀렌이 힘겹게 입을 열었다.

“미안해.”

“……응?”

“지난주에 그렇게 화낸거 말이야. 사실 그렇게까지 화낼 필요 없었는데. 주의 첫날에도 심술 부려서 미안해.”

셀렌은 쓸쓸하게 웃어보이며 고백했다.

“오늘 하루 집에서 아무것도 안하고 있다가 너랑 만나니까 알겠어. 나는 너랑 같이 시간을 보내는게 즐거워, 게일.”

그 고백에 게일은 저도 모르게 숨을 들이켰다. 셀렌은 눈을 꾸욱 감았다 뜬 후 다정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이어 말했다.

“그러니까, 우리 관계가 친구여도 괜찮을거 같아.”

“……뭐?”

게일은 믿기지 않는 다는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친구여도 괜찮다니. 그렇다는 건, 친구가 아닌 관계는 싫다는 건가? 게일의 머릿속은 마치 태풍이 휘몰아치듯 엉망진창으로 엉키기 시작했다. 셀렌과의 관계가 회복되는 것은 좋았다. 좋았지만, 친구 관계로 회복되는 것은 싫었다. 그는 한참을 어떻게 말을 해야할지 모르다가 결국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싫어.”

“게일?”

“나는……너와 친구이고 싶지 않아……. 좀 더, 깊은 관계가 되고 싶어. 너랑, 연인이 되고 싶어.”

그리 말하고 남자는 고개를 푹 숙였다. 마치 선고를 기다리는 죄수처럼 그는 차마 셀렌을 바라보지 못하고 손을 꼼지락 댈뿐이었다. 셀렌은 몸을 일으켜 게일의 뺨에 손을 올렸다. 그 손짓에 게일은 고개를 들어올렸고, 셀렌은 참지 못하고 그에게 키스했다. 입술과 입술이 맞닿았고 곧 셀렌의 혀가 들어가게 해달라는 듯 게일의 입술을 톡톡 쳤다. 머뭇머뭇 어색하게 입을 벌리자 혀가 엉키기 시작했고, 그녀는 게일의 입안을 마음껏 탐하고 떨어졌다. 셀렌은 빙긋 웃으며 물었다.

“이번에는 네가 나한테 해줄래?”

게일은 그 말에 기쁘게 웃으며 입을 맞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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