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클로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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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잘났던 주술사 자양화가 인생에서 가장 후회한 일은 그날 비연이 오염지대로 떠나겠다는 걸 말리지 못한 거였다. “도대체 그 저주받은 땅에 왜 자진해서 가겠다는 건데?” “몰라서 물으시는 거 아니잖아요.” 자양화는 제 앞에 반듯하게 무릎 꿇고 앉은 비연을 노려보았고, 비연은 웃는 낯을 유지한 채 사나운 보라색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자양화를 처음 찾아왔을
“끝까지 거절당했는데도 용케 제자로 들어갔네요.” 가람의 회상을 듣던 온유가 중얼거렸다. 가람이 피식 웃고 주먹 쥔 손으로 가슴을 두드렸다. “동생 많은 장녀로 살아남으려면 무엇에도 밀리지 않는 기개가 필요한 법이거든. 스승님도 결국 두 손 들고 부모님의 허락을 받아오라고 하셨고, 그 뒤로는 일사천리였지.” “아마 오래가지 않아 싫증 나서 스스로 돌아가리라
가람이 산에서 곰을 만난 건 열두 살 아이였을 때였다. 삼은고개를 이루는 산은 너무 깊숙이 들어가지만 않는다면 맹수를 마주칠 일이 없었으나, 멧돼지나 곰이 산 아래턱까지 출몰하는 경우는 드물게 있었다. 보통 약초꾼들이 그 흔적을 먼저 발견해 마을 전체에 경고령을 내렸고, 사냥꾼들이 지대 전체를 수색하고 안전하다는 판단을 내릴 때까지 마을 주민들은 산 출입을
일찍 잠자리에 든 온유를 깨운 건 갈증이었다. 어렸을 적부터 긴장하거나 마음이 편치 않을 때면 목이 타는 증상을 겪었기에, 온유는 익숙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며칠을 집이 아닌 타인으로 가득한 낯선 장소에 머물렀으니 놀랄 일은 아니었다. 가람네의 호의가 감사하지 않은 건 아니었으나, 온유는 혼자가 편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늘 그랬던 건 아니었다. 물 주전자
삼은고개는 작은 산 세 개가 가까이 붙어있다고 하여 이름이 지어진 마을이었다. 귀한 약초가 많이 자라는 산으로도 유명해서 종종 약초마을이라 대신 불리기도 했다. 그런 이유로 삼은고개 근방 마을에는 약초꾼으로서 생계를 이어가는 사람이 많았고, 자연스럽게 약방도 여느 마을보다 자주 볼 수 있었다. 가람네 가족이 운영하는 약방도 그중 하나였다. 도가약방이라는 간
붉은 산자락에 세워진 영웅비는 성인 남성의 키를 훌쩍 넘을 만큼 거대했다. 새카만 돌에 빼곡하게 새겨진 하얀 글씨는 영웅 비연의 일생과 업적을 치하하고 있었다. 아마도 그랬을 터다. 자양화는 왕실에서 파견한 문인들이 밤새워가며 고민한 내용을 한 글자도 읽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영웅비 앞 제단에 눕혀진 시신에 못 박혀있었다. 하얀 천 위에 눈 감고 있는 스
소세하가 남긴 집과 물건을 전부 정리하는 덴 이틀이 걸렸다. 시간을 지체하고 싶지 않았던 네 제자는 만장일치로 가람이 사는 삼은고개까지 마차를 하나 빌려서 가기로 동의했다. 제대로 된 이름도 없이 무명마을이라 불리는 이 외진 곳까지 마차가 오려나 우려하던 가람에게 소명은 이미 마차를 구해놓았다고 귀띔했다. 정오가 되기 전에는 도착할 거라며 소명이 자랑스럽게
“바보 같은 소리 하지 마요.” 대화가 시작된 후 온유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날카로운 목소리에 설아는 물론, 가람과 소명도 그를 돌아보았다. 온유의 얼굴엔 불만을 넘어선 분노가 서려 있었다. “저는 장례에 참석해 스승님께 예를 올리는 것으로 제 도리는 다했어요. 하물며 홍악산맥이요? 여기서 그곳까지 가는데 못해도 족히 열나흘은 걸려요. 그마저도 쉬지 않
어둑한 푸른빛이 남아있는 하늘 아래 불꽃이 춤을 추었다. 설아의 손끝이 우아하게 반원을 그리고, 무용을 선보이듯 허공에 복잡하게 술식을 그려나갔다. 글씨 같기도 하고 그림 같기도 한 선을 그리는 설아의 얼굴엔 극도의 집중이 서려 있었다. 오랜만에 바깥에서 너울을 벗어 길게 땋아 내린 연갈색 머리카락이 움직임을 따라 흔들리는 게 보였다. 돌무더기 위에 눕혀진
이 년 만에 돌아온 스승의 집은 온기 없이 싸늘하여 사람 사는 집 같지 않았다. 삭아가는 초가지붕을 보며 가람은 틀린 표현은 아니라고 자조했다. 이곳에 홀로 살던 스승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왔으나, 죽은 지 최소 사나흘은 지났을 터였다. 마을에서도 한참 떨어진 초가집이라 왕래가 달리 없어 시신이 완전히 부패하기 전에 발견된 것만으로도 천만다행이었다.
“네가 최초로 기억하는 꿈은 무엇이지?” 태양 신전의 성도가 되기 위한 마지막 면접시험. 시험관의 질문에 나는 눈을 감았다. 막막하게 느껴져서는 아니었다. 되려 성도 시험을 통틀어 받은 제일 쉬운 질문이었다. 정답이리라는 확신은 없었다. 하지만 어떤 충동이 깊이 생각하기도 전에 내 입술에서 말을 이끌었다. “전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컴컴한 어둠 속에 있어요
상공 10미터. 그곳에 그네가 흔들리고 있다. * 전구가 전부 꺼진 드넓은 야외 공연장에 드는 빛은 달의 광채가 전부였다. 그 희미한 빛 아래 거대한 철봉으로 세워진 구조물의 윤곽이 어둠에 익숙해진 눈에 선명히 들어왔다. 거미줄처럼 얽힌 와이어가 한 아이의 시선을 붙들었다. 리드가 침을 삼켰다. 곧이어 근처에 지켜보는 사람이 없나 확인하듯 고개가 휙휙
D-365 “넌 사랑을 믿어?” 케리스가 묻는다. 그 질문 앞에서 눈을 느리게 깜빡이자, 훅 불면 꺼질 케이크 위 촛불처럼 시야가 위태롭게 흐려진다. 장시간 답이 없자 케리스가 재촉하듯 이름을 부른다. 윌로우. 그러자 세상이 잠시나마 생생해진다. 굳어가는 얼굴에 미소가 지어진다. “그럼, 믿지.” 어찌 부정하겠나. 그 증거가 코앞에서 환히 웃고 있는데.
“여행을 계속하시겠습니까?” 차분하게 들려온 목소리는 구원 같았으나, 짧은 문장에 담긴 내용에 소스라치게 머리를 흔드는 여행자는 한두 명이 아니었다. 차원 여행 관리국에서 파견된 수습반의 팀장은 놀란 기색 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들고 있던 명단을 옆 팀원에게 넘겼다. 종이 명단에 빼곡하게 적힌 인적 사항을 확인하고 팀원이 질색했다. “팀장님, 이게 무슨 원시
새하얀 한기가 아직 가시지 않은 봄날, 렘브란 애터는 어느 외딴 마을의 입구에서 눈을 뜬다. * “렘브란 씨! 안에 계세요?” 나무로 만들어진 문을 통통 두드리는 소리가 들린다. 남자가 읽던 페이지의 귀퉁이를 접고 책을 식탁에 내려놓는다. 흘러내린 적갈색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고 일어서는 와중에도 나무를 가볍게 울리는 소음은 이어진다. 저러다 손을 다
오빠가 사라졌다. 아무런 연락도, 쪽지 하나 남기지 않고 홀연히 자취를 감췄다. 재산도 처분하지 않고 떠나 오빠가 살던 저택은 덩그러니 남겨졌다. 오빠가 고용한 요리사며, 청소부, 정원사, 심지어 오빠를 보필하던 집사님도 오빠가 어디로 갔는지 알지 못했다. 내게 연락을 준 건 집사님이었다. 믿기지 않는 소식에 저택으로 한달음에 달려간 나를 집사님은 십 년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