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귤차
총 23개의 포스트
예레미야는 어느 날 불쑥 사랑을 느꼈다. 그전까지는 사랑하지 않았다, 는 뜻이 아니다. 우리 결혼할 거잖아요. 네, 나도 사랑해요. ……이제 결혼하는 거죠? ……당장 부정하지 않았을 뿐, 정말 수락해도 된다고 생각할 수는 없었던 언약을 처음 들은 이후 꼬박 5년. 매일 아침 같은 공간, 한 침대에서 눈 뜬 후 가장 처음 마주 보는 상대의 바람을
예레미야는 드물게 진지하게 고민했다. 농담이 아닌 건가? “왜 멀쩡히 졸업하는 사람더러 졸업하지 말래?” 이라즈가 종일 읊던 말을 새삼스럽게 인용하는 동안에는 슬쩍 헛웃음이 섞이기도 했으나 이라즈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유급하시라고 했잖습니까. 교내에서 참지 마시라고 몇 번이나……” 평소 이라즈와는 길게 말을 주고받는 게 습관인 까닭에 도중에
1. 영속하지 못할 자, 그는 설원에서 죽었다. 아리엘 노르니르 크란츠벨룸 휘하 15인의 기사단장 중에서는 처음으로, 요란한 충정치고 조급하게도. 따라서 그는 서약을 지키지 못한 자였으되, 서약을 잊은 적은 없었다. 2. 예전에. 예레미야는 어린 시절, 숲 밖으로 벗어날 생각을 하지 못했다. 온갖 호사 흔하게 소식으로 들려오도록 높은 데서
예레미야는 알마게스트가 만들어낸 공간을 찬찬히 눈으로 익혔다. 본디 한 번 행차한 길은 까먹지 않고, 머릿속으로 대번에 지도를 만들어내는 까닭에 눈으로 훑은 시간 느긋한들 알아야 할 내용을 부족하게 이해하지는 않았다. 그러므로 천천히, 눈으로 광경을 새겨두려는 과정은 일종의 의식에 가까웠다. 전기 왕국 시기 건축되었으니 최소 400년 전, 혹은 그보
당위는 없다. 꾸며내어야 했다면 꾸며냈겠지만, 구태여 손 쓰지 않아도 될, 고작 작은 일. 이하는 모두 예레미야 카일루스의 뜻으로 저질러진 폭거다. 어느 날 예레미야 카일루스는 시빌라 에피그라프의 해방을 원했다. *** 허나 내 땅에서 일어나는 일이었으며 나의 용인으로 이루어진 처벌이니 이후 필히 보고해야 할 것이다. 유벤투스가 말한다. 예레
레마네오(remánĕo) 영속하다, 사라지지 않다. 당신에게 애칭을 지어 준다면 레마가 좋겠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어요. 턱없이 다정하고 헌신적인 수호자가 말한다. 그냥 당신의 이름을 줄인 것 중 가장 마음에 드는 울림이 레마였어요. 불타지 않을 이름 같아서. 예레미야가 웃었을 때, 내 뜻대로 되는 일 하나 없다며 후회할 테고. 레인
“유벤, 투스. ……” 예레미야는 유벤투스의 흰 팔이 천장으로 솟구치는 광경을 보며 이름을 부르다가 우뚝 멈춰 섰다. 굳은 몸은 악몽에서 좀처럼 헤매는 자 꺼내지 못하고 주저하다가, 예레미야가 생각한다. 말라비틀어진 형상은 왜 다 같은가? 심지어 풍요로 적신 지반 위에서조차. 왜 저토록 앙상히 처참한가. *** 사관학교 시절은 손쉽게 지나갔다
※ 5학년 1학기 망령이 주최한 무도회에는 치부를 들춰서 전시하는 칵테일이 나돌았다. 저마다 헤집어진 양상 대개 나란하게 적나라했을 것이되 신실한 자, 기적의 증거함으로써 이름난 예레미야 카일루스에게는 그 우스운 이름이 특히 난제가 되었다. 자기 안의 환부가 긁힌 이들끼리는 타인에게 명명된 이름을 우스갯소리로 취급하지 못하고, 그 스스로도 친밀감으로
어떤 애정을 이르기로 하자. *** 알레테이아 S. 헌팅턴에게. 이번 방학에는 동부에 갔어. 최근 1년 왕국 전역을 돌아다니며 깨닫기를, 나는 밤하늘을 어디든 좋아하는데, 그 모든 하늘을 다 아는 이들조차 유독 로뷔스테의 밤하늘만큼은 특별히 이르니 흥미가 깊었지. 일전에 라에간에게 묻자니 사막에서만큼은 별에 온전히 몰두할 수 있다고 하더군. 너 또
예레미야는 주변을 둘러보다가 자신의 호흡을 살폈다. 혹시 어긋나지 않았는가, 하여. 예레미야는 도대체 제멋대로에 마구잡이로 들쑤시며 헤집기 일쑤라 일관성이라고는 없었으나 한 가지, 드러내지 않는 표정은 있었다. 예레미야는 구역질이 치밀 것 같은 감각을 애써 누르며 눈을 감았다 떴다. 여전히 어둡고, 아니, 샹들리에 불빛이 환했다가 어느 지점 들어서는
“죽음은 평등하니까요~” 예레미야가 ‘마키나’의 문법을 듣는다. 엑스, 의 뿌리이자 엑스 자신이 장차 군집으로서 배제하지 않겠다던 이름 끝자락의 영락을. 강하며 대범하고 무위로써 앞장선 지반이라 선뜻 내는 말인가? 흔한 말이 ‘마키나’에 걸려 이채를 띤다. 저것은 엑스가 그 자신에게, 그리고 그들 일족에게 적용하는 세계의 규칙이었다. 그래, 네 세계
태양 : 행복한 결혼식 내 몫일 필요가 있나요. * 당신이었구나. 당신이었네요. 서로 사는 이야기나 조금 해볼까요. 마녀와의 잡담 바다 향기를 비늘처럼 달고, 다리를 끌고 다녔지. 물속에서. 호브는 아름다운 땅이야. 나는 이곳의 바다를 좋아해. 물론이야. 우리가 인간을 원망하지 않을 수 있겠어? 더구나 당신들은 우리의 바다를 앗아갔는데.
오알 언더그라운드 1. 당신이 나의 폐허를 예감한다면. 2. 오알은 맨발로 왔다. 간신히 신겼던 신발은 진작 널브러졌겠지. 나단은 오알의 인큐버스가 자신을 데리러 왔을 때부터 지금의 모습이 머릿속에 어른거리고 있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가장 먼저 신발부터 벗었으리라고 이해하고 있었겠지. 인간이 준 것 어느 것 하나 두려 하지 않았으니 맨발로 흙바닥
유실되어 찾고 있습니다 울면서 씁니다 뭐 남의 로그를 누가 저장하겠습니까 . . .
15.08.11 작성(추정) 1. 이안은 죽지 말아요. 2. 리암 마르테스는 다시, 입술을 다물었다. 무표정한 얼굴. 이안은 벌써 익숙해진 경멸을 짚어낸다. 열다섯의 이안 데코르는 리암을 빤히 올려다보다가 천진하게 웃었다. 이안은 입구에서 기다리고 서 있는 리암을 지나쳐 시신 앞으로 무릎을 굽혀 앉았다. 살피는 일이 정말 보는 일이 되지는 못해
15.08.01 작성(추정) 1. 발견되었을 때. 2. 데코르는 리안의 귀족 가문이었다. 카스토드 시대부터 내려온 이름이라고 하면, 그건 믿을 수 없었고 다만 오래된 흔적만은 분명하게 남겨져 있었다. 데코르는 리안이 영지의 이름으로써 불리기 전에도 지배하는 위치에 머물러 있었다. 그 낡은 기반이 어떻게 그토록 길게 이어질 수 있었는지는 알기
15.07.24 작성(추정) 이안 데코르의 최초의 좌절은 불이었다. 이안 데코르는 불을 사랑했다. 이안은 불을 다루는 데에 극성으로 굴었다. 이안은 불로 무엇이든 만들어낼 수 있었고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네가 천재가 아니라면 누가 천재일 수 있지? 아버지는 차남이 보이는 성취에 들떠서 넘치는 말을 붙이곤 했다. 아버지의 황홀은 곧 사람들에게 착각으
15.07.23 작성(추정) 메테오는 소대륙에도 보일 있을 만큼 환하지는 못했다. 성 안에서 일으켰으니 당연히 보이지 않을 수밖에, 라고는 해도, 이후 한 번 더 불러일으켰던 불의 경우에도 사정은 같았다. 나단은 펠릭스가 돌려준 대답에 그냥 조금 웃었다. 보였으면 좋았을 텐데. 가까이에서는 황량하기까지 했던 치열한 형상은, 한참 먼 데서는 흩뿌려진
15.07.18 작성(추정) 당신에게 주홍의 바다를 보여줄 수 없었으니. * 오알 언더, 오알 언더의 이름이 정말 오알 언더, 였는지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 그럼에도 오알은 그 시간 동안 오알로 불렸고, 그 이름은 온전히 오알에게 귀속되었다. 다음에 만났을 때에는 어떻게 불러야 할까. 나단의 고민은 오래 이어질 만한 것은 아니었다. 오알이거나
15.07.09 작성(추정) 1. 아무도 없는 곳. 2. 나단 던스트는 해변을 걷고 있었다. 잠을 설치는 편은 아니었지만 문득 눈이 반짝 뜨였고 망설이지도 않고 몸을 일으켰다. 갑작스러운 행위에는 어떠한 인과도 없었지만, 차라리 인과의 부재로 족했다. 나단은 배를 빠져나와 새벽을 본다. 대대륙의 밤하늘. 하늘은 너무 넓게 펼쳐져 있다. 어느 것
15.07.07 작성(추정) 1. 어떻게 하고 싶었어? 아니지. 어떻게 하고 싶어? 2. 피곤해? 나단은 어깨 위에 손이 얹어지는 감각에 깜짝 놀라 뒤를 돌아봤다. 도대체 기척도 없이 돌아다니는 사람이었다. 나단은 표정을 감출 생각도 않고 순순히 당황한 얼굴을 그대로 드러냈다. 이안은 나단의 건방지다고 할 만한 행동을 종종 즐거워했다.
15.07.04 작성(추정) 처음, 소리는 가파른 곳에서 들려왔다. 산짐승의 기척이려니 했으므로 본래는 뒤돌아보지 않고 지나쳤을 일이었다. 단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더라면. 아, 으. 누가, 좀. 나단은 비좁게 씩씩 새어나오는 짐승의 난폭 곁으로 작은 숨소리가 섞여 들어왔을 때, 망설이지 않고 아래로 향했다. 부유 마법은 허공에서 얼마간 계단
자캐 커뮤니티 <아마르스> 1기, 나단 던스트 15.06.26 작성 (추정) 잘, 기억이 나지는 않는다. 그 시절의 무엇도 잊지 않았는데 그 방만은, 그 방이 먼지로 가득 차 있었다는 사실이 머릿속에 남겨져 있듯, 그 방을 뿌옇게 메우고 있었던 먼지처럼 뜻밖으로 흐려져 있었다. 나단 던스트는 네 사람이 나란히 누울 수 있을 만큼으로만 넓었던 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