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계를/타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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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말 무도회는 잘 다녀왔어요?” 루이 엑토르는 고개를 끄덕이며 신발끈을 꼼꼼히 맨다. 매년 카테리나 이바노브나 공작부인의 주관으로 열리는 연말 무도회는 귀족이 되고자 꿈꾸는 모든 평민들의 꿈이었다. 루이 엑토르에게는 그저 평범한 연례행사였을 뿐이었지만. 펠릭스 아브라모비치는 작은 한숨을 쉰다. 하루 정도 영혼이 바뀌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나쁘지 않았어.
프란체스카는 어김없이 동시에 배달된 두 다발의 꽃을 가만히 내려다봤다. 발랑솔의 라벤더와 뚜레뜨의 제비꽃을 장식하는 안개꽃 세 종류가 섞인 꽃다발 하나와 르에이의 붉은 장미 한 종류로만 이루어진 꽃다발 하나. 라벤더향과 장미향이 동시에 코를 타고 뇌를 콕콕 찌르는 것 같았다. 누가 보냈는지 명백한 꽃들이었다. 줄기 아랫부분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장미 꽃다
규방이란 건 이런 느낌이군. 금혼령이 내려진 지 1개월, 펠릭스의 속성 신부수업, 아니 신랑수업이 시작된 지도 1개월이었다. 부정을 탈 수 있으니 외부 접촉 금지, 앉아서 수나 놓고 베나 짜시오. 몸가짐을 조심히 하고 말씨는 나긋나긋하게, 걸을 때는 그릇 하나도 떨어뜨리지 않을 정도로 조심스럽고 사뿐하게. 죄다 말도 안 되는 일이었는데 이걸 파니와 레베카는
“네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 펠릭스가 마지막으로 이렇게 소리를 높였던 게 언제였더라, 열네 살 때쯤이었나 누나가 몰래 자신의 일기에 손을 대서 낱낱이 훔쳐보고 있었다는 걸 알았던 때였던 것 같다. 심지어 아브라함 앞에서는 그 정도 소리를 낸 적도 없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펠릭스는 집이 떠나가라 경악의 소리를 내뱉고 말았다. “그게 무슨 미친 소리입니
“금혼령을요?” 펠릭스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브라함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왕비를 폐위하고 며칠이나 지났다고 금혼령을 내린다더구나.” 한숨이 나오지 않을 수가 없었다. 왕이라는 작자가 순회연주를 온 유랑악단에 푹 빠져서 말 한 마디도 할 줄 모르는 여자와 결혼해 왕비로 앉혀놓고, 국정은 사랑놀음하다가 신나게 말아먹는가 싶더
북방은 만만찮은 곳이었다. 너무 안일하게 생각하고 발령해달라 청한 걸까? 펠릭스는 두꺼운 털 코트에 몸을 숨기고 에엑취, 하며 세게 재채기한다. 사실 펠릭스 본인이 태어난 곳도 대륙 전체를 따지자면 북쪽에 가까운 곳이었지만 이런 설원은 아니었다. 이딴 땅을 아직도 가지고 있는 이유가 대체 뭐냐 묻고 싶었다. 미네랄이라도 묻혀 있는 건가? 그나마 국경지대가
“쇼팽 양이랑은 무슨 사이인 겁니까? 응? 말 좀 해봐요." 프란츠의 끈질긴 물음에 멘델스존은 멈춰서 한 발을 축으로 둔 채 홱 뒤로 돌았다. "제가 묻고 싶은 겁니다. 그분과 무슨 사이시길래 제게 그런 질문을 할 자격이 된다 생각하시는 거죠?" "쇼팽 양의 친구니까요!" 프란츠는 가슴에 손을 올리고 당당하게 미소지으며 말했다. 멘델스존은 눈을 굴리고 한
에투아르는 자신의 적에게서 장점을, 사랑하는 이들에게서는 결점을 발견하는 걸 인생 최고의 재미로 삼는 사람이었다. 처음에는 ‘정혼자’ 의 장점을, 그리고 지금은 정혼자의 단점을 찾아내는 것이 취미가 된 것은 조금도 이상하지 않은 일이었다. 아마 펠릭스 씨는 뚫어져라 자신의 뒤통수를 바라보는 에투아르의 따가운 시선을 몇 번은 느꼈을 것이다. 별로 신경은 쓰지
우리는 수도 없는 ‘빙의자’ ‘회귀자’ 또는 ‘환생’의 이야기를 들어 보았다. 그런데… 그 세계에서 선택받지 못하는 남자 주인공들은 어떻게 되는지, 궁금해해 본 적은 있는가? 아마 없겠지. 있다면 당신의 동정심에 감사드린다. 그러나 보통은 우리의 당찬 여주인공 심리를 따라가기만도 바쁘기 때문에 선택받지 못한 남자 주인공의 분량은 어딘가로 삭제당하고 외전에
배가 고프긴 고픈데, 그렇다고 제대로 한 끼를 먹자니까 귀찮고, 그렇다고 햄버거 같은 걸 사먹기는 싫고, 좋아하는 맛집은 회사랑 멀리 떨어져 있는데 당장 애매하게 배가 고픈 날, 그런 적이 다들 있는가? 뭐 없을지도 모르겠는데 일단 엑토르 베를리오즈에게는 그게 일상이다. 군래컴퍼니 구내식당은 나름 저렴한 가격에 맛있고 배부른 메뉴를 판다. 요컨대 가성비가
아델이 마차를 타고 떠나자 루이 엑토르가 스르르 차가운 눈밭에 눕는다. 누가 보면 진짜 허벅지 같이 중요한 데라도 맞은 듯한 모습이었다. “일어나요. 그 정도로 안 아프잖아.” “아파, 아파서 죽을 것 같다고.” 펠릭스 아브라모비치는 피식 웃으며 루이 엑토르 곁에 앉는다. 손가락에 벌레만 물려도 반차내고 싶다고 징징거리는 사람이었으니 예상 못할 일은 아니
파벌, 나이, 성별을 뛰어넘어 모두를 대통합하게 만들 수 있는 궁극의 아이돌이라 하면 누가 떠오르는가? 다양한 선남선녀 케이팝 아이돌이나 유명 팝가수들의 이미지가 머릿속에 스쳤을 것이다. 심지어는 이 글을 읽고 있는 사람이라면 이미 군래컴퍼니 직원들에게 익숙한 사람일 테니 금단발을 찰랑거리며 피아노를 연주하는 모 과장을 떠올렸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사실
"멘델스존 씨께서는 올해도 불참이시랍니까?" 브람스는 예복을 차려입은 파니를 바라본다. 파니는 무거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다. 보수파의 총사령관 멘델스존이 모든 직책을 내려놓고 칩거 생활에 들어간 지가 벌써 다섯 해였다. 그 사이 파니의 아들 제바스티안은 아홉 살에서 열네 살이 되었다. 삼촌이 장난감을 사 오면 좋아라 하고 어머니에게 뽀뽀도 서슴지 않던 아
마지막 처형이 행해진 지 열흘이 지났다. 몸에는 이상이 없었다. 평상시 엘리야 사용에 따라오는 극심한 피로감과 두통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다만 힘을 잘못 실은 어깨와 등만이 뻐근했다. 멘델스존은 물을 묻혀 턱의 거품을 닦아낸다. 거울에 은색 넥타이를 메고 조끼를 입은 본인의 모습이 비쳤다.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넘기자 정수리에서 자라나는, 뿌리가
엘리야를 세 번이나 쓴 여파가 쉽게 가시지 않았다. 누군가가 머릿속에 침입해서 뇌를 마구 휘젓고 다니는 느낌이었다. 멘델스존은 군비 지급에 관한 서류에 빠르게 서명을 마치고 탁자에 엎드린다. "사령관님." 정훈장교 클라라 슈만이었다. 멘델스존은 다시 자세를 고쳐 앉고 클라라에게로 몸을 돌린다. "네, 슈만 대령. 듣고 있습니다." 클라라는 경례를 하고 팔을
"나는 슈만이 보여준 몽환과, 쇼팽이 보여주었던 환상, 그리고 자네가 보여준 꿈을 부러워했어. 실로 아름다운 광경이었지. 그래서 내게 이런 능력이 있는지도 몰라. 자네의 엘리야를 처음 봤을 때도 나는 감탄했어. 꼭 하늘에서 별빛이 쏟아지는 것만 같았으니까. 하지만 자네가 불태운 뒤 남은 것들의 광경은 조금도 아름답지 않더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어. '그
[오늘 가게 쉽니다] 프란츠 카페의 조명은 켜진 채였다. 가게 안에는 직원 세 명이 머리를 맞대고 뭐라뭐라 쑥덕이고 있었지만 유리문에는 '오늘 가게 쉽니다' 가 붙었다. 하이든은 심각하게 깍지를 끼고 아이디어만 무성했다가 전부 검은 연필로 좍좍 줄이 그어진 종이를 바라본다. 갑자기 시베리아의 공기와 함께 확 닥쳐온 한파를 맞고 온몸이 쑤셔오자 크리스마스가
개판이었던 상인연합회였지만, 놀랍게도 오고간 이야기가 없던 것은 아니었다. 새벽 두 시 쯤 대충 파장인 대학교 축제이니, 새벽 두 시부터 네 시까지는 가게 영업을 마친 로시니가, 새벽 네 시부터 여섯 시까지는 (이유는 모르겠는데) 야행성인 라벨이, 그리고 여섯 시부터 여덟 시까지는 하이든이 사고 안 나게 골목 주변을 자체적으로 지키고 있기로 한 것이었다.
이 정도 이야기했으니 잠깐 쉬어갈 때가 된 것 같다. 그리고 프란츠 카페도 쉬어갈 때가 됐다. 음, 정확히 말하자면 프란츠 카페가 쉬고 있다고는 할 수 없겠다. 쉬고 있는 것은 하이든뿐이었고 슈베르트랑 리스트는 바쁘게 커피를 내리고 있었으니 말이다. 무려 한 테이블에 앉은 7명의 상인연합회 손님을 대접해야 한다는 것을 알아차린 순간 슈베르트의 얼굴에 스친
"아유, 누구랑 그렇게 톡을 열심히 해? 여자친구?" 하이든이 슥 슈베르트의 어깨 너머로 폰을 들여다 보자 슈베르트가 새된 비명을 지르며 휴대폰을 떨어뜨린다. 이미 금이 갈 대로 간 불쌍한 휴대폰은 아직 작동한다는 게 신기할 지경이었다. 저렇게 두꺼운 케이스를 끼고서도 화면에 거미줄처럼 금이 가게 하는 것도 재주였다. "아빠였어요... 아빠요. 아 진짜 깜
11월 매출을 정산한 하이든은 속으로 쾌재를 부른다. 개업한 지가 세네달이 되어가자 적자가 슬슬 흑자로 돌아서기 시작했다. 보통 카페가 입소문이 나는 데 6개월 정도가 걸린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이대로 잘 유지만 해도 꽤 오래 버틸 수 있을 것 같았다. 각각의 손님들은 서로 다른 점을 칭찬했는데, 모차르트는 넉넉한 사장님의 인심을, (외상을 벌써 몇 번
마른수건으로 접시를 박박 닦던 하이든이 고개를 들자, 진흙 잔뜩 묻은 신발을 바깥 매트에 벅벅 비비고 있는 베를리오즈가 보였다. 부스스한 벌건 머리에 연필만 꽂아주면 꼭 미친 과학자 같겠다 싶었다. 대충 신발 밑창을 확인한 베를리오즈는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하이든에게 꾸벅 인사한다. "어서오세요. 주문은?" "아이스 아메리카노요. 에휴, 오늘 밖에 진짜 덥
카페는 그럭저럭 운영되고 있었지만, 이렇게 운영을 하고 있으니 하이든의 마음속에도 스멀스멀 욕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이렇게나 좋은 품질로! 이렇게나 싼 값으로 커피를 제공하는데 더 손님이 와야 하지 않겠는가! 기껏 대학생들을 위해서 열었는데 아직도 오는 대학생들이라고는 프로코피예프 친구뿐이라니 말야. 하이든은 뺨을 부풀리며 얼굴을 구겼다. "프란츠야. 너는
프란츠 듀오는 평화로운 카페 영업을 이어가는 중이다. 하이든은 슈베르트를 프란츠라 부르면 슈베르트 쪽은 구분을 위해 점장님이나 사장님이라 부르는 게 보통. 이 가게 첫 직원으로 채용된 프란츠 페터 슈베르트는 올해 스물아홉, 존재론적 위기에 놓이기 딱 좋은 나이였다. 졸업하고 교원으로 일하다가 문득 교무실의 처참한 커피 맛을 더 이상 못 참겠다며 뛰쳐나와 바
아마 신장개업한 카페가 개업 초반 한 달 동안 가장 많은 매출을 올리는 날은 개업 첫 날일 것이다. 하이든 본인도 딱히 플러스 매출을 기대하고 연 카페는 아니기 때문에 상관없었지만. 어쨌든 개업 첫날은, 정상적인 카페라면 엄청나게 바쁠 것을 예상하게 된다. 그리고 예상 그대로 하이든의 손목이 슬슬 아파오기 시작했다. 카페를 흑자로 유지하려면 하루에 100잔
당신이 살고 있는 도시에는 카페가 몇 개나 있는가? 천 개? 이천 개? 참고로, 파리에는 5천여 곳의 카페가 있으며 빈에는 2,500여 곳, 뉴욕에는 3,500여 곳, 그리고 서울에는 무려 18,000여곳의 카페가 있다고 한다. 그 레드 오션에 또 한 사람이 발을 담굴 날이 밝아왔다. 이곳은 유럽의 어느 도시인데, 어디라고는 단언할 수 없는 동네로, 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