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네프릴

[스네이프 드림] 유포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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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여덟시 반. 저녁은 이미 먹었고, 책상 위엔 양피지와 깃펜 한 자루. 오늘따라 훈기가 감도는 방. 의자도 이상하게 더 푹신한 것 같고. 아무리 글을 써 보려고 해도 자꾸만 손에 힘은 빠지고, 눈은 반쯤 감기고, 머리도 책상과 하나가 되려고 하고....

"에이프릴 슈."

황급히 고개를 든다. 책상 반대편에 앉은 그와 눈이 마주친다.

"네, 교수님."

"반성문을 벌써 다 쓴 모양이지."

책상을 내려다본다. 양피지는 놀랍도록 깨끗하다.

"죄송합니다."

"마저 쓰도록."

고개를 끄덕이곤 펜에 잉크를 찍는다. 허공에서 손이 멈춘다.

'쓸 말이... 없는데...'

잘못이 없는데 뭘 쓰란 말인가? 마법약 실습 시간이었고, 아무 자리에나 앉았다. 우연히 왼쪽엔 네빌이 앉았고, 정말 우연히도 오른쪽엔 말포이가 앉았다. 고일이랑 크레이브는 말포이 뒤쪽에 앉았지만, 쟤네가 오늘 왜 저렇게 앉았는지 이해가 안 가긴 했어도 별로 신경은 안 썼고, 아무튼간에 프릴은 교과서에 적힌 제조법대로 착실히 유포리아 물약을 만들었다. 박하의 어린 가지도 제대로 집어넣었고. 분명 교수님이 가르치신 대로 만들고 있었는데 느닷없이 말포이가 훼방을 놓는 것 아니겠는가.

"슈. 너 지금 뭘 넣은거야?"

"뭐. 방금 넣은거?"

"그래, 그거. 왜 아무거나 집어넣어?"

"수업을 제대로 듣긴 했니? 방금 그건 어린 박하의 가지야. 부작용 없애려고 넣은거고. 나한테 참견하지 말고 네 솥에나 신경 좀 쓸래? 넘치기 일보 직전이거든."

"넘치다니 무슨... 뭐야 이거!"

말포이는 황급히 불을 줄인다. 한숨을 쉬는 걸 보니 저도 많이 놀란 모양이다. 프릴은 고개를 젓고는 다시 자신의 유포리아에 시선을 돌린다.

"이럴 줄 알았어. 역시 패배자 롱바텀 근처에서 하면 되는 게 없다니까."

뭐? 이게 무슨 소리야. 프릴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말포이를 쳐다본다.

"이젠 하다하다 남의 탓까지 하니? 대체 네빌이 너한테 뭘 했다고."

"너도 뱀이면서 왜 저 패배자 편을 드는거야?"

짜증내는 어조에 프릴이 눈썹을 가볍게 으쓱인다.

"뱀도 뱀 나름이지."

말포이가 프릴의 등 뒤쪽으로 네빌을 향해 조롱을 쏟아붓는다.

"좋겠네, 롱바텀. 벌써부터 약혼자가 정해진 모양이야. 하긴. 부모님께 손주는 보여드려야 하지 않겠어? 근데 의미가 있을까? 손주는 커녕 자기 자식도 못 알아본다던데."

프릴은 제 귀를 의심했다. 무슨 이런 되도않는 패드립이 다 있어. 프릴이 입을 열기도 전에 분노에 찬 네빌이 먼저 소리쳤다.

"우리 부모님을 모욕하지 마!"

"모욕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난 사실을 말한 것 뿐인데. 안 그래?"

"맞아. 틀린 말이라곤 하나도 안 했지. 전부 사실인걸. 덜 떨어지는 네빌 롱-바텀."

팬시가 맞장구를 치자 말포이의 등 뒤에서는 고일과 크레이브가 저들끼리 킬킬 웃는다. 같은 기숙사라는게 이렇게 치욕적이기는 처음이다. 정말 가관이야. 그 때 어디선가 날아온, 누구를 노렸는지 모를 주문이 프릴의 솥에 맞고 공중에서 터진다. 팔팔 끓는 내용물이 사방으로 튈 찰나, 프릴은 지팡이를 들고 주문을 외쳤다.

"에바네스코!"

텅그렁. 정적 속에 빈 솥만이 바닥에 떨어진다. 그 후에는, 뻔하지만 선타 친 말포이도 잘못없는 네빌도 둘 다 혼이 났고, 아니나 다를까 그리핀도르만 50점 감점을 받았다. 여기까지야 당연히 예상했던 대로였는데.

"그리고 슈. 왜 두 사람을 제대로 말리지 않았지? 징계다. 저녁식사 후에 내 사무실로 오도록."

프릴은 어안이 벙벙해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바라본다. 대답이 돌아오지 않자 그가 무표정한 얼굴로 되묻는다.

"대답은?"

"네, 교수님."

그제야 그가 수업을 끝낸다.

"수업은 여기까지다."

프릴은 멍하니 서 있다가 허겁지겁 솥을 챙겨 나온다.

'대체 이게 무슨 상황이지? 원인 제공자는 감점도 없이 몇 마디 듣고 끝나고, 잘못도 없는 애는 감점받았는데, 아무 짓도 안 한 나는 징계라고?'

온갖 생각에 정신이 없었지만, 프릴은 솥을 청소하고 책을 방에 갖다둔 뒤 저녁식사를 하러 연회장으로 향했다. 오늘도 정말 호화스럽기 짝이 없는 만찬이다. 호그와트가 최고의 학교인 이유지. 작게 노래를 흥얼거리며 빈 자리를 찾는다.

"하."

미간이 좁혀진다. 왜 하필 여기야?

"마음에 안 들어도 어차피 남은 자리는 여기 뿐이거든. 그냥 앉지 그래?"

"친절한 안내 감사합니다, 말포이 씨."

프릴은 무덤덤하게 대꾸하곤 커다란 베이컨을 집어 우물거리기 시작한다.

"그래서. 무슨 벌을 받을 것 같아?"

프릴의 손에 들린 포크가 탁 소리를 내며 탁자에 놓인다.

"누구 때문에 이렇게 된 건지 알긴 하는 거 맞지?"

"걱정해주는 거 거든, 지금?"

"그런 걱정은 안 해 줬으면 좋겠네."

쌀쌀맞은 대답에도 말포이는 끈덕지게 말을 건다.

"이번에도 찬장 정리 정도겠지."

"저번에 한 번 깨먹은 게 있는데 이번에도 시키시면 그게 더 이상할 걸. 내 징계에 신경쓸 시간에 남은 베이컨이나 마저 드시지."

그러자 말포이도 포크를 내려놓는다.

"그 놈의 베이컨. 맨날 베이컨이야! 일주일에 여섯 번은 나오는 것 같다니까. 대체 덤블도어는 무슨 생각으로 매번 같은 요리를 내놓는거야?"

"미안하지만 헬가 후플푸프의 은총으로 정해진 식단이니까 괜히 교장 선생님께 불평하진 않길 바라."

프릴이 베이컨을 마저 집어들자 말포이는 넌더리난다는 듯 남은 베이컨을 프릴의 접시로 옮겨버리곤 일어선다.

"가자. 이제 다 먹었잖아. 고일, 넌 좀 그만 먹고."

말포이가 프릴의 접시를 빤히 쳐다보는 고일에게 무안을 주고 연회장을 나선다. 크레이브와 고일은 재빨리 일어나서 뒤를 따른다. 프릴은 작게 중얼거린다.

"누가 보면 쟤가 마왕인 줄 알겠어."

고개를 젓고 헬가의 은총에 감사하며 식사를 마친다. 프릴은 한숨을 쉬며 복도를 걷는다.

"내가 어쩌다가..."

아무것도 한 게 없는데 대체 왜 불려가는건지 알 수가 없다. 교수님은 부조리한 분이 아니었다. 물론 슬리데린 학생에게는 말이다. 부조리는 커녕 편애의 대상이지. 피식 웃음이 흘러나왔다. 정신없이 걷다 보니 어느 새 사무실 앞이다. 지금쯤 식사를 마치셨을까. 일단 문을 두드린다.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들어와라."

마지막으로 크게 숨을 삼키고 문을 연다. 그는 책상에 앉아 서류작업을 하고 있다.

"안녕하세요, 스네이프 교수님."

"늦었구나."

그가 고개를 들지도 않고 대답한다.

"죄송해요. 솥을 닦다가 그만."

"우선 앉아라."

문가에 어색하게 선 프릴은 제 앞에 놓인 의자에 앉는다. 실험할때 앉았던 네모난 탁자 위에는 여전히 실험기구가 즐비하게 늘어서있다.

"거기 말고."

그가 자신이 앉은 책상을 톡톡 두드린다. 프릴은 어색한 걸음걸이로 그의 맞은편으로 옮겨앉는다. 가운데에 금이라도 긋듯 일렬로 세워진 시험관과 플라스크들을 보니 정말 누가 봐도 그의 사무실이다. 책상에 앉아 뒤편의 약재들을 멀뚱히 쳐다보는 프릴에게 그는 양피지와 깃펜을 내민다.

"반성문을 써라."

역시 찬장 정리는 안 시키시는군.

"몇 장이나요?"

"한 장이면 될 것 같구나."

하이고. 무슨 말을 쓴담. 프릴은 살짝 고개를 저으며 깃펜을 든다. 정말 뭘 써야하지?

'저는 오늘 아무 생각 없이 말포이와 롱바텀 사이에 앉았다가 말포이의 멍청한 질문에 대꾸해준 것 뿐이었는데 말포이의 되도않는 패드립을 들은 네빌이 화를 냈고 어디선가 주문이 날아와서 제 솥을 맞추었습니다. 완벽히 제조되고 있던 약 130•C 가량의 유포리아가 학우들 머리 위로 쏟아지는 사태를 방지하고자 에바네스코를 사용하여 전부 소멸시켰기에 반성문을 씁니다. 앞으로는 동급생들이 뜨거운 유포리아를 뒤집어 쓰고 화상을 입게 됨이 자명한 사실인 상황이라 하더라도 결코 소멸마법을 사용하지 않겠으며...'

생각이 정말 아무렇게나 흘러간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잘못한 게 없는데. 생각을 멈추고 멍하니 주위를 둘러본다. 빛 한 점 안 드는 지하실은 탁자에 놓인 가스등 불빛에 의지하고 있다. 어쩐지 책상 위가 은은하게 따뜻하더라니. 역시 빛 효율이 좋지 않은 조명기구야. 몇 퍼센트 정도나 빛으로 바뀐 걸까? 조명기구라기보단 차라리 온열기구에 가까울 지도 몰라. 그러고 보니 평소보다 더 따뜻한 것 같은데. 슬쩍 살펴보니 탁자 너머에서 난로가 타닥타닥 타오르고 있다. 나무를 직접 때면 공기오염에 일조하는 거라고 그랬는데. 마법사들이란. 지구 온난화의 원인을 하나 찾아낸 프릴은 의자에 몸을 맡긴다. 오늘따라 푹신해. 이건 의자가 아니라 거의 소파잖아. 생각해보니까 저번에 왔을때는 그냥 나무 의자였는데 오늘은 왜... 아, 모르겠다. 너무 졸려. 아무 생각도 안 하고 싶어...

문득 눈을 뜬다. 한참이나 엎드려서 잔 모양이다. 입가부터 황급히 매만진다. 다행이다. 침은 안 흘렸나봐.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뭐가 그리 다행이지?"

헉. 긴장해선 그를 흘긋 쳐다본다. 순간 눈이 마주치지만 그는 곧 다시 서류로 시선을 돌린다. 프릴은 고개를 푹 숙인다.

"죄송합니다, 교수님."

"내 앞에서 잠을 잘 정도라면 징계는 어렵겠구나. 그만 가 보도록."

"....네?"

얼떨떨하게 서 있는 프릴에게 그가 재차 말한다.

"그만 가 보도록, 슈."

"네. 감사합니다."

"잠깐."

프릴은 펜을 놓고 일어서려다 말고 멈춰선다.

"네?"

그는 서랍에서 뭔가를 꺼내들고 프릴에게 손짓한다. 약체가 든 작은 병을 건네받은 프릴은 두 손가락으로 병을 들고 유심히 살핀다.

"이건 무슨 약인가요?"

"피로 회복과 숙면에 도움이 될거다. 자기 전에 좀 마시는 게 좋겠구나."

프릴은 잠시 멈칫 하더니 병을 꼭 쥐고 고개숙여 인사한다.

"감사합니다, 교수님."

"다음번엔 그런 자리에 앉지 말거라. 괜히 다칠지도 모르니까. 그리고... 약을 소멸시킨건 꽤 훌륭했다."

그의 대답에 프릴은 환하게 웃으며 그를 바라본다.

"교수님께서 가르쳐주셨는걸요. 안녕히계세요."

그는 고개를 까딱이곤 프릴을 내보낸다. 사무실에서 나온 프릴은 병을 쥔 손을 모아 가슴에 갖다댄다. 심장이 미친듯이 두근거리고 있다.

'미쳤어 미쳤어! 교수님께 칭찬받았어! 약도 주셨어! 잤는데 혼도 안 내셨어! 교수님께! 칭찬을 받았다고!'

그러더니 이내 기숙사까지 신나게 달려간다. 오늘 밤에도 잠은 설칠 모양이다.


출처: https://miyeokayeah.tistory.com/36 [빛과 어둠 그 너머] 

-티스토리에 썼던 걸 옮겼습니다.

썸네일과 글 상단에 사용된 이미지 출처와 라이센스: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The_Making_of_Harry_Potter_29-05-2012_(7375634372).jpg, https://creativecommons.org/licenses/by/2.0/deed.k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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