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어딘가 우수에 잠긴 얼굴을 하고 있었다. 잠시 생각에 빠져있던 제노가 느릿느릿 입을 열었다. “제대로 인사도 하지 못하고 관동을 떠나왔어요. 아직도 박사님껜 죄송해요.” “박사님?” “오 박사님이라고, 저를 돌봐주신 분이세요.” 어디선가 들어본 이름. 기억을 헤집던 난천이 양손을 짝, 모았다. “혹시 오용호 박사님을 말하는 거니?” “네. 알고
“저 줄기가 문제란 말이지. 그렇다면 한카리아스, 줄기를 끊어버려!” 발톱에 기운을 모은 한카리아스가 호수를 향해 달려들었다. 날카로운 발톱이 줄기들을 하나둘 끊기 시작하자, 제노가 팔을 뻗으며 외쳤다. “지금이야!” 그때 호수의 물이 출렁이더니, 순식간에 솟아올랐다. 파도타기에 맞은 한카리아스의 몸이 위로 밀려났다. “내리꽂아!” 피카츄가 그 순
세계에서 가장 아름답다 일컬어지는 포켓몬, 밀로틱이 높고 청아한 소리로 울었다. 물론 난천의 밀로틱은 강한 포켓몬이지만 풀 타입인 이상해꽃을 상대로 물 타입 포켓몬이라니, 꿍꿍이를 알 수 없었다. 그렇다면 일단 난천씨가 어떻게 나오는지 볼까. “이상해꽃, 부탁해!” “피하면서 냉동빔!” 역시 얼음 타입 기술을 배우고 있었다. 이상해꽃의 맹독을 피한 밀
다음 날 오전, 제노는 어제와 같은 호수에 난천과 마주 보고 섰다. “사용할 수 있는 포켓몬은 세 마리! 어느 쪽의 포켓몬이 모두 행동 불능이 되면 끝이야!” 체육관 전과 다른 점이 있다면 교체는 양쪽 모두 자유롭다는 것. 룰을 받아들인 제노가 고개를 끄덕이고 몬스터볼 하나를 손에 쥐었다. 어젯밤, 제노는 잠들기 전까지 몇 번이고 난천에게 물었다. 유
“누가 먼저 그랬어. 빨리 솔직하게 말해.” “피.” 피카츄와 이브이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곧장 서로를 가리켰다. 하아…. 제노가 한숨을 내쉬었다. 옆에선 가디안과 샤미드가 쓰러진 메꾸리를 돌보고 있었다. 이성을 잃고 마구잡이로 달려오는 메꾸리를 막을 수 없다 생각한 제노는 가디안에게 방향을 비틀 것을 지시했다. 가디안의 사이코키네시스로 달리는 궤적
“미안해, 내 고집 때문에 이런 곳에 머물게 되어서.” 킁, 코를 한번 훌쩍인 제노가 고개를 저었다. 실컷 내부를 조사한 난천과 유적을 나왔을 때는 이미 캄캄해진 시간이었다. 하늘에서 주변을 빙글빙글 돌며 수색하던 토게키스가 두 사람의 모습에 서둘러 아래로 내려왔다. 지면에 착륙한 토게키스가 무척 걱정했다는 듯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난천은 토게키스에
그로부터 정확히 일주일 뒤. 공항에서 내린 두 사람은 미리 난천이 빌려뒀다는 토게키스를 이용해 설산으로 향했다. 사용할 수 있는 포켓몬 중 비행 타입이 없었기 때문에 제노는 그의 뒤에 탈 수밖에 없었다. 사실 난천의 한카리아스를 날게 할 수도 있었겠지만, 눈이 내린 공간이란 한카리아스에게 악조건. 미리부터 고생시킬 필요는 없었다. 누구의 포켓몬을 빌린 걸
오렌지 아카데미 학생들의 종업을 축하합니다. 올해 졸업하는 사람까지 포함하여 재학생 한정 샌드위치 30% 할인 이벤트가 진행 중인 테이블시티의 매일 de 샌드 광고지를 보고 나서야 모란은 자신이 얼마 안 가 2학년임을 실감했다. 그러니까, 내가 2학년이라고? 진짜로? 거짓말 같은데…. 사계절이 비교적 덜 뚜렷한 팔데아라지만 이맘때쯤 되면 거짓말같이 조금
눈을 뜬 제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해는 이미 중천에 떠 있었다. 그럼에도 편하게 잘 수 있었던 이유는 방안에 겹겹이 쳐진 커튼 덕분이었다. 제노가 황급히 제 몸을 더듬었다. 느껴지는 부드러운 천의 감촉. 잠옷으로 갈아입은 상태였다. 난천이 하이볼을 세 잔째 말아주던 것이 마지막 기억인 제노로서는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 일단 방 밖으로 나가자
학생회장은 원래 잘했잖아, 천재니까. 어느 날 이야기할 게 있어 어떤 학생과의 승부가 막 끝난 네모를 만나러 갔을 때, 모란은 그 말을 들은 네모의 표정을 기억한다. 네모가 그런 표정을 짓는 건 처음이라, 모란은 언제 그런 말을 들었냐는 듯 해맑게 왔어? 하고 웃는 네모에게 응. 이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학생회장이란 단어든 천재라는 단어든 수식어는
예정에 따라 목적지를 향해 달리는 차량. 길고 지루한 이동길에 난천은 울리는 알림을 확인했다. 화면에 뜬 것은 카드 사용 내역. 상세 내용에는 장막시티 내 한 마트의 이름이 적혀있었다. 이 가격이면 뭘 산 걸까, 식재료? 난천의 의문을 읽기라도 한 듯 뒤이어 문자가 전해졌다. ‘나무 열매가 할인을 해서 포핀을 잔뜩 만들었어요.’ 그런 내용과 함께 전해진 것
여전히 꼭대기 층에 위치한 태홍은 웬일로 갤럭시단의 복장이 아닌 멀끔한 정장 차림이었다. 제노가 빤히 바라보자 그가 말했다. “연구 시설 증축에 관한 회의를 하고 오는 길이다.” 아 맞다, 얘 대기업 회장이었지. 갤럭시단의 겉모습은 신오를 지탱하는 가장 큰 기업이었다. 도서관이며 연구소, 역사박물관 등 여러 시설이 태홍에 의해 세워진 것으로, 도시에
쿠르릉, 하늘에서 불길한 소리가 울렸다. 순식간에 구름이 모이고 사위가 어두워진다. 제노를 노리던 아그놈과 유크시가 범상치 않은 기운을 느끼고 하늘을 올려다본 순간, 어마어마한 크기의 광선이 호수를 향해 쏘아졌다. 꼭 신화 속에 나오는 얘기처럼 호수의 물이 갈라지고, 그대로 커다란 파도가 되어 호수 주변을 덮쳤다. 영향권에 있던 제노가 물살에 밀려나 다시
“—.” 아직 해가 뜨지 않은 시간. 제노는 기묘한 울음소리에 눈을 떴다. 포켓몬들도 마찬가지로 달라진 기운을 느꼈는지 이미 전투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아직 진화하지 않은 이브이만이 몬스터볼에 들어있었다. 나가자. 옷을 갖춰 입은 제노가 그렇게 말하며 나서자 포켓몬들이 그 뒤를 따랐다. 서늘한 새벽. 호수 주변은 물안개로 사위가 가려져 있었다. 허나 커
- 정말 혼자서도 괜찮나? “괜찮으니까 너희 조무래기들 보낼 생각은 꿈도 꾸지 마. 방해만 돼.” 정작 제노의 답을 들은 태홍은 아무렇지 않아 하는데 옆의 새턴이 길길이 화를 냈다. 제노는 그것을 자연스럽게 무시했다. 새턴에게 하도 욕을 듣다 보니 터득한 기술이었다. 태홍과의 통화를 마친 제노가 모자를 깊게 눌러썼다. 진실호수를 조사하기 위한 간이건물.
태홍이 제노를 연구실로 이끌었다. 뒤로는 마스와 주피터가 따라왔다. 그곳에서 제노를 맞이한 것은 새턴과 플루토, 그리고 붙잡힌 전설의 포켓몬- 유크시, 엠라이트, 아그놈이었다. 제노가 초록색 액체가 담긴 실험관에 죽은 듯이 갇혀있는 세 마리의 포켓몬을 바라보았다. 부글부글, 간간이 올라오는 거품 사이로 자신의 얼굴이 유리에 비쳐 보였다. 문득 갤럭시단과
난천과의 첫 만남으로부터 1년. 제노는 연구는 물론 챔피언의 일로 바쁜 난천을 대신해 장막시티에 머물며 플레이트의 수집에 열중했다. 모은 플레이트는 모두 19개. 각각의 플레이트에 이름을 붙인 난천은 제노가 가져온 레전드플레이트를 조사하며 이것이 마지막 플레이트일 것이라 결론을 내렸다. 제노는 그것에 동의했다. 딱히 난천만큼의 지식을 가져서가 아니라, 그
거세게 쏘아지는 물줄기를 맞고 허공에 붕 뜬 한카리아스의 몸이 바닥에 떨어졌다. 쿵, 묵직한 타격음과 함께 한카리아스가 난천의 발치까지 날아왔다. “… 수고했어, 한카리아스.” 잠시 침묵이 흐른 뒤, 전투 불능 상태를 확인한 난천이 한카리아스를 볼로 돌려보냈다. 한카리아스가 들어간 몬스터볼을 쥔 난천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이게 대체 얼마 만에 겪는 패
회상을 마친 대엽이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전진은 끝까지 제노를 귀찮은 일에 휘말리지 않게 도우려 했으나, 끈질기게 달라붙는 대엽에 어쩔 수 없이 그의 마지막 행적을 털어놓을 수밖에 없었다. 천관산이라니, 그런 데에 뭐 재밌는 게 있다고. “하아, 우리 아가씨, 어째서 안 오는 걸까. 내가 뭘 잘못한 걸까?” “당신이 싫어서입니다.” “내가 너무
“정말 강하구나, 너의 이상해꽃! 하지만 이걸로 교체야!” 제노가 다음 몬스터볼을 꺼냈다. 안에서 나온 루카리오가 발끝으로 가볍게 뛰며 몸을 풀었다. 그 모습을 본 제노가 웃으며 말했다. “설마 단지 빛의장막만을 위해 이상해꽃을 교체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죠?” 순간 에레키블이 몸을 휘청였다. 전진이 놀란 눈을 하고 에레키블의 상태를 살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