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하루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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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비가 잦네요." 바네사가 내민 손바닥에 빗방울이 담겼다. 손금 사이로 밀려나던 빗방울은 속절없이 밑으로 흘러갔다. 모든 게 아래로 흘러가는 날이다. 아침부터 심상치 않더라니 일이 끝난 이 시간에도 비가 내리고 있었다. 세상이 온통 비로 적셔져서 색이 더 짙어졌다. 파견을 나온 날부터 지금까지. 며칠 내내 비가 내렸다. 도착하자마자 우르르 쏟아지다
오늘은 로드가 주최하는 연회가 있는 날이었다. 동맹국들과 함께 하는 게 아니라 아발론에서 기사들끼리 즐기는 연회였다. 딱히 기념할 만한 이유가 있는 건 아니었다. 기사들과 시간을 보내고 싶단 이유로 연회를 벌이곤 했으니까. 그때마다 로드 뒤에서 루인이 예산 때문에 골치아파 했지만. 바네사는 준비를 마치고 거울 앞에 섰다. 파란색 실크 드레스가 결을 타고
"바이올린을 가르치기로 했어요." 느닷없는 선언이었다. 해가 점점 저물어 가고 있는 저녁. 바네사는 감자 칼과 감자를 쥔 채 말했다. 감자는 예쁘게 깎여 있었다.저녁 준비를 하다가 말할 거리는 아닌 거 같은데. 올가는 갑작스러운 선언에도 놀란 기색이 없었다. 도마 구석에는 양파와 당근이 채를 썬 채 올려져 있었다. 바네사가 깎은 감자를 받아서 도마에 올
말끔한 차림인 바네사가 벽 한쪽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벽에 걸려있는 칠판에 글씨가 쓰여 있었다. 요즘 두 사람 사이에서 유행하는 게 생겼다. 칠판을 이용한 필담이었다. 시작은 올가가 가져온 칠판이었다. 걸어보니 벽의 대부분을 차지할 정도로 큰 칠판이었다. 수직 수평이 잘 맞았는지 확인하는 올가에게 이유를 물어봤다. 일정을 정리할 필요가 있다는 대답이
올가는 미루는 성격이 아니었다. 해결해야 하는 문제가 있다면 반드시 해결했다. 해결하고 넘어가야 직성이 풀렸다.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정답을 다 알고 있는 시험이나 다름없었다. 문제에 맞춰서 미리 준비해둔 답을 답지에 적었다. 문제마저 간단했다. 좋다, 싫다. 맞다, 틀리다. 둘 중 하나를 고르는 객관식일 뿐이었다. 주관식도 마찬가지였다. 지켜야 하는
점심을 먹고 나서 연습실에 왔다. 연주회가 있는 건 아니었지만. 연습을 거르는 건 좋지 않으니까. 시간이 날 때면 연습실에 오는 게 일상이었다. 바이올린을 쇄골에 얹어놓았다. 활을 들었다. 활을 잡은 손이 유독 아파졌다. 좋은 느낌은 아니었다. 느낌보다 바이올린 소리는 경쾌했다. 아름다운 활주가 이어졌다. 완연한 봄기운처럼 가득했다. 연주는 아름답지만, 마
소란스러워서 깨버리고 말았다. 힘겹게 눈을 뜨고 일어나보니 위에 덮인 담요가 흘러내렸다. 담요는 떨어졌지만. 나른함이 떨어지지 않았다. 잡고 있던 담요를 무릎에 덮었다. 나른하게 숨을 내쉬며 시계를 봤다. 쉬는 시간은 안 끝났는데. 평소랑 다른 점이 있었다. 애들이 창밖을 보고 있었다. 시선을 따라가 보니 눈이 내리고 있었다. 오늘따라 아침부터 흐리다 했
겨울 향이 알싸해진 코끝을 파고들었다. 아침을 넘어 점심이 되어서도 햇살이 비춰주지 않았다. 지나가는 매장에 있던 라디오에서 오늘 밤에 눈이 내린다는 소식이 흘러나왔다. 사람들이 가득한 길 한복판에 올가가 서 있었다. 올가는 손목시계를 보며 시간을 확인했다. 조금 빨리 와버리고 말았다. 하늘이 회색빛으로 가득했다. 하늘을 올려다보는 올가의 입에서 입김이
용기를 내서 말을 꺼냈지만. 정작 표정은 좋지 않았나 보다. 올가는 대답 대신에 무슨 일이 있냐고 물어봤다. 당황해서 아무 일도 없다면서 격하게 부정하는 바람에. 오해가 깊어지고 말았다. 솔직하게 얘기해도 시간이 모자랄 판에. 오해를 만들면 어쩌자는 건지. 오해가 깊어지는 와중에 폭죽이 터지는 소리에 움찔거렸다. 이러다 불꽃놀이도 끝나게 생겼다. 다급함은
바네사는 오랜만에 꿈을 꿨다. 여름 방학 때 꿨던 꿈과 같은 꿈이었다. 책상에 앉아서 시험지를 풀고 있었다. 꼭 풀어야만 하는 문제가 하나 남아 있었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주관식은 아니었다. 친절하게 선택지가 주어져 있었다. 선택지는 세 가지가 있었다. 말도 못 꺼내고 어영부영 시간만 보낸다. 어떻게든 고백해서 사랑을 이뤄낸다. 알게 모르게 스며 들
언제부터였을까. 올가에게 새로운 버릇이 생겼다. 혼자 있는 교실에서 창문을 열었다. 가방을 자리에 올려뒀지만, 의자에 앉지 않았다. 그대로 팔을 창틀에 대었다. 새벽 공기를 맞으며 창밖을 바라봤다. 이른 시간이라 등교하는 애들이 보이지 않았다. 등굣길이 텅 비었기에. 올가가 기다리던 사람도 잘 보였다. 때로는 기분이 좋은 건지 얼굴에 미소가 걸려있었다.
속으로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오늘이 아니더라도 다시 찾아오게 될 테니까. 언젠가는 올가와 만날 거라 생각은 했지만. 엉망진창인 상태로 만날 줄은 몰랐다. 바네사는 당황한 나머지 눈물이 쏙 들어가고 말았다. 흔한 말조차 생각나질 않았다. 고장 난 거처럼 멀뚱멀뚱 올가만 바라보게 되었다. 올가는 바네사를 보고 흠칫 놀랐지만, 망설임도 없이 바네사에게
바네사를 미워하는 누군가가 일정을 짜놓은 게 아닐까. 어떤 날이 더 최악인지 경쟁이라도 하듯이. 가볍게 건드린 도미노가 와르르 무너지듯이. 어제와 오늘이 계속 바통을 주고받았다. 오늘이라는 날이 최악이란 이름표를 계속 붙이고 있었다. 시작점을 되짚어 보려면 주말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했다. 성적표를 받은 주말이었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부모님에게 성적표를
일곱 장 밖에 남지 않았던 여름의 끝자락부터 지금까지. 일기장은 네 이야기로 가득 찼다. 도서부 일이 보충 수업과 같은 날에 끝났다. 우연이었지만. 보충 수업보다 빨리 끝나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애들과 방학 잘 보내라는 인사를 나누고 헤어졌다.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얼른 교실로 가봤다. 계단을 오르면서 위를 올려다봤다. 빼꼼 내민 머리가 보였다. 바네사
감정을 구분하는 선을 그었다. 바이올린은 그만두기로 했다. 올가와 친구 사이로 지내기로 했다. 모든 게 정해진 대로 따라가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면 모든 사람이 다 행복해지겠지. 당연한 얘기겠지만. 정해둔 대로 따라가는 일은 없었다. 마음은 그어둔 선을 넘지 않았다. 대신 기억이 선 근처를 얼쩡거리기 시작했다. 불을 끄면 약속이라도 한 듯이. 머릿속에서
끝나지 않을 거 같았던 뜨거운 여름이었다. 두꺼운 책을 한 장씩 넘기다 보니 다 읽은 거처럼. 하루하루 지나가다 보니 마지막 장이 보였다. 여름의 시간이 모두 지나갔다. 보충 수업도 마지막이었다. 선생님은 더위에 지쳐서 늘어져 있는 애들을 보더니 웃었다. 학교에 수업 들으러 오느라 고생했으니. 오늘만큼은 일찍 끝내주겠다고 했다. 선생님도, 애들도 수업이
여름 방학이 왔다. 도서부 일 때문에 방학 내내 도서관에 가야 했다. 당번을 정할 때 미리 짜기라도 했나. 모두 오전 시간을 피했다. 보충 수업이니, 학원이니. 핑계는 많았지만, 일찍 일어나는 게 싫은 거 같았다. 덕분에 올가는 오전 시간을 독차지 할 수 있었다. 다른 애들은 이러면 피곤하지 않겠냐고 예의상 물어봤지만. 올가는 고개를 저었다. 오전이 더
내일이 오면 올가에게 바로 책을 돌려주자. 그렇게 다짐했건만. 바네사는 올가에게 빌린 책을 아직도 돌려주지 못했다. 이유는 그때그때 달랐다. 서랍 속에 넣어뒀던 수많은 이유를 꺼내서 골라봤다. 올가가 음료수를 들고 있었다. 더워 보이는 데 이거라도 마시라면서. 바네사에게 건네줬다. 음료수 표면에 이슬이 맺혀있었다. 차갑지 않고 미적지근했다. 한 모금 마셔
새로운 걸 맞이할 때는 질문이 따라오기 마련이었다. 호기심이든, 의심이든, 걱정이든. 돌이켜보면 별거 아닌 질문도 크게 다가오는 때가 있다. 바네사에게 따라온 질문들은 사소했다. 제시간에 일어날 수 있을까. 수업을 제대로 들을 수 있을까. 숙제도 많던데 언제 다 할 수 있을까. 고민을 가진 채 여름 방학을 맞이했다. 알림을 맞춰두니 어떻게든 일어났다. 늦
계기가 아무리 사소하더라도. 맞닿을 수 있는 게 중요한 걸까. 소나기가 내리던 날. 바네사는 올가에게 우산을 빌린 적이 있었다. 우산을 한 번 빌렸을 뿐인데. 올가와 더 많이 얘기할 수 있었다. 고맙다는 인사를 했을 뿐이었다. 마음을 두드리는 노크일지도 모르겠다. 올가는 조심스러운 노크를 받아줬다. 문을 열어줬다. 다음은 물 흘러가듯이 자연스레 이어졌다.
바네사는 일찍 등교하는 버릇이 있었다. 미리 가서 공부한다거나, 청소한다거나 하는 이유는 아니었다. 누가 오기 전에 창문을 다 열어놓는 걸 좋아했다. 아무도 없는 깜깜한 빈 교실에 앉아 있다가. 혼자서 축축하고 푸른 새벽 공기를 마시는 게 기분 좋았다. 공기를 들이마시면서 느끼는 적막함이 편안했다. 중학생 때까지는 혼자서 느끼는 적막함을 누릴 수 있었다.
새로운 교복을 입고 맞이하는 새 학기가 시작되었다. 반 친구들의 이름도 다 알지 못하는 시점. 반장 선거가 시작되었다. 당연한 얘기겠지만. 하겠다며 자발적으로 먼저 손을 드는 사람은 없었다. 선생님이 추천할 사람이 있냐고 물어봤다. 그제야 칠판에 차례대로 이름이 적히기 시작했다. 아는 사람도 없고, 반장을 할 생각도 없었기에. 별 감흥 없이 칠판을 바라보
눈을 떠보니. 아무것도 없는 텅 빈 공간에 서 있었다. 어디인지 모르겠지만. 햇빛은 들어오지 않았다. 그런데도 어둡지 않았다. 바네사 앞에는 여러 사람이 서 있었다. 얼굴 부분이 검게 칠해져서 누구인지 알아볼 수 없었다. 그 사람들을 봤을 뿐인데. 다리에 힘이 풀려서 주저앉았다. 저도 모르게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닦아내도 계속 흘러내렸다. 가슴이 타들어
여느 때와 다름없는 건조한 하루다. 일정 확인하고, 서류를 작성하고, 업무 메일을 보내고. 아무 문제 없이 무난하게 흘러갔다. 다섯 손가락이 처리한 서류를 툭툭 치고 있었다. 의자를 반쯤 돌리자 시원하게 뚫린 통창이 올가를 반겼다. 구름 없는 하늘이 화창했다. 파랗고도 파란 물속에 담아둔 하얀 캔버스처럼. 온통 검은색으로 뒤덮인 올가가 티도 안 날 정도로
마주칠 일이 있을까 싶었는데. 두 사람은 자주 마주쳤다.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치는 건 물론이고. 아파트 입구에서도 마주쳤다. 그때마다 바네사는 반갑게 인사했다. 올가도 나름대로 반가움을 표시하는 거 같았다. 대화는 두 마디 이상을 넘지 못했지만. 바네사는 아침을 대화로 시작하는 게 즐거웠다. 그도 그럴 것이. 올가는 이미 바네사 정체를 알고 있고, 비밀을
세상이 빙글빙글 도는 거 같았다. 지금 바쁘게 돌아가고 있는 세탁기처럼. 바네사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면서. 돌아가고 있는 세탁기 안을 바라봤다. 지금 서 있는 바닥 밑에도 뭔가 깔린 건지. 한없이 아래로 내려가는 착각이 들었다. 넘길 것도 없는데. 바짝 마른 입 때문에 계속 침을 삼켰다. 바네사가 계획했던 일정은 물거품으로 변해버렸다. 예매 시간이 훌
빛도, 소리도 들어오지 못하는 깊은 곳에서 있으면. 적막 때문에 숨이 턱턱 막히는 거 같았다. 눈을 감으면 시간이 멈춰버리는 것만 같았다. 아무도 없고, 아무 색도 없는 곳에는 관들이 놓여 있었다. 관에는 사람이 누워있었다. 사람들은 두 손을 모은 채 잠든 모습은 평온했다. 누워있는 사람들마저. 서 있는 곳처럼 색을 잃어가고 있었다. 투명한 관 뚜껑에 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