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보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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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 끝이 상대를 꿰뚫으면, 귀를 찢는 비명소리가 들려온다. 이엔은 무심코 손으로 귀를 막을 뻔했다. 그러지 않은 것은 두 손에 아직 검이 쥐어져 있기 때문이었다. 상대는 한 차례 빛을 발하더니, 곧 한 장의 페이지로 흩어지기 시작한다. 그의 이야기는 그 자리에 있는 사서들에게 낭독된다. 흔한 이야기. 고칠 수 없는 불치병으로 병원에 입원한 동생과, 그런 동
갑작스러운 소란과 함께 란은 눈을 떴다. 같은 반의 아이들은 삼삼오오 자기 가방을 챙기고 있었다. 아무래도 수업이 끝난 듯 했다. 구석진 자리에 엎드려 자고 있다가 겨우 잠에서 깬 그는 멍하니 눈을 깜빡인다. 아직 매달려있는 졸음을 쫓아내려는 듯 잠시 앉아있으면 순식간에 교실 안은 조용해졌다. 다들 부활동이니, 모임이니, 각자의 이유로 순식간에 교실을 빠져
햇살이 따사롭게 비치고, 이파리에 반짝이는 이슬이 엉겨붙어 있었다. 이엔은 꽃의 색과 모양을 꼼꼼히 살핀 뒤에, 내심 마음속으로 합격점을 내린 뒤에야 꺾어 바구니에 넣었다. 햇빛을 듬뿍 받고 자라난 이 꽃들이 마법 약의 재료가 되어줄 것이다. 그러니 무엇도 소홀히 여길 수 없었다. 란은 어떤 재료로도 최고의 약을 만들어내지만, 훌륭한 재료를 쓰면 더욱 멋진
ID카드를 제시하면, 단말기가 정보를 읽어내곤 문을 열어준다. 연구소는 넓지만 어딘지 황량하게 느껴진다. 이엔은 긴 복도를 따라 걷는다. 도시를 한참 벗어나 외곽에 위치한 이 연구소는 안드로이드를 연구하는 장소였다. 좀 더 실용적인 기술로서의 안드로이드가 아니라, 철저히 연구 목적의... 말하자면 '인공적인 인간'을 개발해 내는 것이 그들의 목적이었다. 닫
란은 천성적으로 여유로운 사람이었다. 시간의 문제가 아니라 성격의 문제였다. 매년 성실하게 책을 내는 만큼 마감은 주기적으로 있는데, 어쩐지 하루하루를 살펴보면 한량마냥 여유롭게 시간을 보내는 것처럼 보였다. 종종 마감 때가 되면 다급해보일 때도 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잠깐 뿐이고. 이엔이 퇴근하고 돌아오면 읽다 만 책이나 보고 있던 TV 프로그램이 틀어져
도서관은 언제나 낡은 종이 냄새로 가득하다. 책 높이를 맞춰 하나하나 진열하고 있으면 묘한 정돈감이 느껴진다. 산죠 란은 깨끗한 책등을 손으로 살짝 쓸어본다. 그 제목에서 누군가의 이야기를 엿볼 수 있다. 책은 하나의 세계며 삶이었다. 그는 언제나 타인의 삶-이야기와 책에서 무언가를 얻어내곤 했다. 어디선가 즐거운 목소리가 들려온다. 창문 너머로 모여 있는
이엔은 손에 든 책을 이리저리 뒤적거렸다. 그다지 읽을 마음이 없어보이는 게 명백했다. 한량처럼 소파에서 뒹굴고 있는 동생을 보며 후유코가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 평소엔 란에게서 절대 떨어지지 않고 들러붙어 있으면서, 전화까지 꺼놓는 모습을 보니 대충 있었던 일은 빤했다. 아까부터 제 전화가 계속 울려대는 것이 더욱 심증을 굳혀주었다. 후유코는 보란듯이 이
그 날은 기가 막히게 날씨가 좋았다. 새파랗게 펼쳐진 하늘과 덥지도 춥지도 않은 산뜻한 기온, 살짝 물기를 머금은 기분좋은 공기. 그야말로 결혼식에 딱 어울리는 날이었다. 란은 가만히 하늘을 올려다본다. 잠시 멍하니 있으면 어깨에 닿아오는 손길이 있었다. 형님, 하고 부르는 목소리가 달큼하다. 뒤를 돌아볼 때쯤에는 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이엔. 대답하듯 그
숨이 턱끝까지 차올랐다. 그럼에도 멈추지는 않았다. 그들은 계속해서 무언가에 쫓기고 있었다. 그것은 두려움이고, 섬뜩함이었으며, 떨림이었고, 동시에 죽음이었다. 소중한 사람들이 하나 둘 죽어갔다. 저택 곳곳에 붉은 피가 흘러 새카만 웅덩이를 만들어갔다. 비명은 점점 신음으로 변해갔고, 절규는 곧 절망으로 변해간다. 왜 이런 일이 생긴것인지 이해조차 못한 채
불쾌하지 않은 침묵이 방 안에 맴돌았다. 란과 이엔이 함께 있는 시간이란 대체로 이런 식이었다. 란은 읽던 책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있었고, 이엔도 최근 열올리던 게임에 몰입 중이었다. 뻔뻔하게 주인의 침대를 차지한 란은 대충 삐로롱 정도로 들리는 게임 BGM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문자에 집중했다. 듣노라, 운명이여. 나는 발버둥쳤으나 끝내 이
탐정 사무실 내부는 조용했다. 란은 의자에 푹 파묻히듯이 앉아 눈을 감고 있었다. 창문에서 책상까지 길게 햇빛이 이어진다. 한가로운 오후였다. 탐정이라는 일은 생각보다 그렇게 자주 의뢰가 들어오는 편은 아니었다. 란이 워낙 홍보에 적극적이지 않기 때문에 아는 사람들만 의뢰하러 오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란이 딱히 일을 가린 적은 없으나 거의 모든 사건을 완벽
알람소리가 시끄럽게 울리기 전에 이엔은 눈을 떠 휴대폰을 손에 쥐었다. 종료를 누를 때까지 란은 꼼짝도 않고 이엔을 끌어안은 채로 눈을 감고 있다. 형님, 일어나세요. 귓가에 다정하게 속삭이는 소리에 그는 낮게 칭얼거리는 소리를 낸다. 5분만 더... 그렇게 중얼거리면 이엔의 손이 란의 머리를 쓸어넘겨 주었다. 란은 그 손길에 잠이 깨기는 커녕 더 잠들 것
그는 낡은 원고지였다. 어느 저택 서랍 속에 잠들어있던, 영원히 비어있던 원고지. 그렇기에 그가 가장 바라는 것은 언제나 가득 채워지는 것이었다. 검은 글자와 붉은 글자가 제멋대로 뒤엉키며 하나의 이야기를 만들고 있었다. 눈물로 호소하는 캐스트의 이야기를 이리저리 엮어 새로운 진상을 만들고 나면 옅은 만족감이 느껴졌다. 전혀 새로운 이야기는 란의 손끝에서
손 끝에 와닿는 피부의 감촉이 부드러웠다. 미묘한 곡선을 따라 앞으로 미끄러져 내려가면 어깨가 흠칫 떨려오는 게 느껴졌다. 형님... 간지러워요. 옅은 웃음이 서린 목소리는 작았고, 선명하게 들려왔다. 란은 소리없이 웃어버린다. 타박이나 거절이 아니란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란은 전혀 멈추지 않고 오히려 이번엔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꼭 끌어안고 있으면
톡, 토독하고 경쾌한 소리가 창문을 두드린다. 종이 서류에 시선을 두고 있던 란은 무심코 고개를 들어 창 밖을 보았다. 한 방울, 두 방울 창문을 따라 또르륵 떨어져내리던 빗방울이 곧 굵어지더니 유리를 온통 적시고 만다. 시간을 확인해보니 곧 퇴근 시간이기는 했다. 이엔은 이미 집에 들어갔을 시간이긴 한데... 잠깐 고민해보던 란은 휴대폰을 꺼내 느릿느릿
아침 햇살이 비치는 복도는 조용했다. 아침부터 각자의 일에 여념이 없는 사용인들이 분주하게 다니고 있지만, 그들은 모두 잘 교육받은 태가 나 전혀 소란스럽지는 않았다. 란은 저에게 향하는 인사를 가벼운 목례로 받으며 긴 복도를 걸었다. 젊은 나이에 저택을 관리하는 일을 맡게된 그는 할 일이 많은 편이었지만 그 일들을 시작하기 전, 아침마다 꼭 하는 일이 있
문득 맛있는 냄새가 코 끝을 스치고 지나간다.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올리면 창 밖에서는 하얀 햇살이 쏟아지고 있다. 한 사람분의 체온이 빠져나간 이불 속은 서늘했다. 좀 더 잠들어있고 싶은 마음과 이엔을 찾으러 나가려는 마음이 한 차례 싸우는 듯 했지만 란은 미련없이 침대 밖으로 발을 뻗는다. 아직 잠이 덜 깬 탓에 조금 휘청거리기는 했지만 부엌까지 가는게
포말이 산산이 부서져 내리고 있었다. 저 멀리 수평선에서부터 달려오는 파도는 끝내 사라지고 만다. 거대한 물이 쏟아지는 소리가 들려오고, 또 가라앉는다. 호즈노미야 란은 하얀 모래 위에 선 채로 그 파괴의 반복을 내내 지켜보고 있었다. 만들어진 모든 것은 언젠가 부서져 버린다. 영원이라고 믿는 것들은 그저 반복이었다. 그가 생각하는 것처럼, 또 다시 하늘
호즈노미야 란은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잠시 시간을 확인했다. 하교 시간, 학생들은 삼삼오오 모여 교문을 통과할 시간.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교문 앞에 서 있는 란을 두어번 힐끔거렸지만, 이내 큰 관심을 갖지 않고 지나간다. 학부모가 데리러 오는 일도 종종 있었기 때문에 (학부모라기엔 젊어보이기는 했지만) 그다지 이상할 것 없는 풍경이었다. 그는 코트 주
와타누키 류우의 담당 편집자는 단조로운 목소리로 신작에 대한 이야기를 읊고 있었다. 지난 번 마감 이후로 간만에 갖는 미팅이었다. 사실 그는 작품에 고집이 있다는 사실을 빼면 그다지 대하기 어려운 작가는 아니었다. 마감 때 조금 예민하기는 하지만. 평소에는 뭐든 그러려니 하는 타입인데다가, 신간 미팅 때는 드물게도 적극적인 편이었다. 그러나 오늘은 왠지
그는 어두운 방 가운데에 서 있었다. 빛이 새어들어오는 유일한 창구는 작은 창문인데, 그나마도 커텐으로 가려진지 오래였다. 커텐을 걷어내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은 일이지만 어린 그는 그저 멍하니 그 어둠을 마주하고 있을 뿐이었다. 지나치게 익숙한 무력감이었다. 문은 잠겨있지 않다. 창문도 잠겨있지 않다. 커텐을 걷어내는 것은 그의 자유였다. 그러나 유일
지난 봄부터 이엔과 란은 같은 집에서 함께 살게 되었다. 표면적으로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동거를 시작한 건 아니었다. 이엔이 합격한 대학이 마침 고아원에서 꽤 먼 곳에 위치해 있었다. 그리고 타이밍 좋게도 란이 지내던 집의 계약이 그 맘때쯤 완료되었다. 다들 사이가 좋은 호즈노미야 내에서도 유달리 친했던 두 사람이 같이 살게 되는 건 꽤나 자연스러운 과정
반짝이는 금색 눈동자가 골똘히 생각에 잠긴 채로 빛나고 있었다. 호즈노미야 란은 그 눈동자가 좋았다. 빛에 따라 샛노랗게 빛나기도, 호박색으로 물들기도 하는 그 눈동자가 자신을 열렬하게 바라보는 그 순간을. 사실은 그것만이 좋은 것은 아니었다. 매끄러운 결의 갈색 머리카락이 좋았다. 머리카락 사이로 얼굴을 묻으면 옅게 풍겨나오는 샴푸향이 좋았다. 쉽게 붉어
너는 왜 빌런을 하냐? 란은 굽힌 한 쪽 무릎을 심드렁하게 끌어안는다. 저 멀리서는 한창 격렬한 싸움이 벌어지고 있는 중이었다. 빌런 대 히어로. 끝나지 않는 굴레의 전쟁. 무언가를 부숴야지만 직성이 풀리는 놈들과 그런 놈들을 꼭 막아야 하는 이들이 부딪히다 보면 너무나 당연한 결과였다. 그렇다고 그가 부수는 쪽이라고 한다면 글쎄. 히어로들은 본부가 있고,
이엔은 선반을 열어보며 으으음.. 하는 소리를 내었다. 약간 난처한 듯한 소리에 란이 빼꼼 부엌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무슨 일 있어?" "간장이 거의 다 떨어져서요." 꺼내 든 간장 통에는 까만 간장이 바닥에 얕게 깔려 있었다. 어찌 어찌 탈탈 털어 쓴다고 해도 다음에는 분명히 쓸 수가 없었다. 매번 아직 남았으니까 다음에 사야지, 라고 생각하며 미룬 이
호즈노미야 란은 길게 하품을 했다. 창 밖에는 추적추적 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아침부터 하늘이 어둑어둑했지. 일어날 시간인데도 어두운 바깥 때문에 일어나는데 한참이나 시간이 걸리고 말았다. 물론 평소에도 그렇게 잘 일어나는 편은 아니었지만. 비가 올 것 같은 날이면 괜히 더 일어나기 힘든 그런 게 있지 않은가. 게다가 설상가상으로 휴대폰 알람도
창 밖에서 어슴푸레한 빛이 넘어 들어온다. 은은하게 밝아지는 방 안에는 어쩐지 따뜻한 기운이 맴돌았다. 란은 눈꺼풀 안 쪽이 환해지는 느낌에 잠시 한 손으로 눈가를 가렸다. 그것도 잠시뿐, 그는 곧 눈을 떴다. 매번 이불 속에서 5분만, 5분만 더...를 외치다가 이불을 빼앗기고 마는 평소와는 다른 빠른 기상이었다. 그는 가끔 아무 이유 없이 이렇게 부지런
호즈노미야 란의 인생은 글과 함께했다. 그에게 있어 글이란 일종의 자기표현수단이었다. 누구에게도 차마 말할 수 없을 감정을 드러내는 유일한 방식인 것이었다. 실제가 아닌 것처럼, 자신이 아닌 것처럼 몇 겹씩 포장하여 가공한 결과물이 온전히 드러날 때는 희미한 기쁨마저 느껴지는 것이었다. 그는 글을 멈춘 적이 없고, 그것은 단순히 자기만족일 뿐 대중에 드러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