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끝에 평안 있으라》
커미션 신청본 | 주접, 감상-02
포기라는 것은 자신이 가진 것을 내려놓는다는 뜻이다.
스스로 낮은 곳에 임한 그들은, 안식을 가질 자격이 충분했다.
ⓒ아구
안녕하세요, 취미로 이런저런 서사나 글을 감상하고 있는 아구라고 합니다. 이번에는 이사야마 하지메 저 〈진격의 거인〉에 등장하는 캐릭터 ‘엘빈 스미스’와 그의 드림주 ‘진’의 서사와 관계성에 대한 감상문을 작성해보게 되었습니다.
사족을 조금 덧붙이자면, 저 역시 드림 문화를 즐기고 있고, 또한 한 캐릭터로 ‘다드림’을 하고 있기 때문에 개인적으로도 정말 즐겁게 감상한 설정과 서사가 될 수 있었다고 자부합니다. 촘촘하게 짜인 설정들을 보면서, 토끼굴 님께서는 ‘진’이라는 캐릭터 자체에도, 그가 속한 세계관에도, 또한 물론 드림캐들에게도 적지 않은 애정을 품고 있다는 것이 실감나게 전해져왔기 때문에 좋았습니다.
토끼굴 님께서는 원체 원전과 고증(세계관)에 기반을 둔 ‘개연성 있는’ 서사를 즐기시는 성향이라는 것이 쉽게 가늠되나, 그것을 감안하더라도 이렇게 탄탄한 세계관과 자작 설정에 기반하여 짜여진 드림 서사는 정말 오랜만에 보는 것 같아서 더욱 감탄을 마지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엘빈진’이라는 페어의 서사는 단순히 원작에 기반을 둔 타임라인과 서사적인 측면에서의 감상 뿐만 아니라, 서사 외적인 측면, 드림주의 장치적인 기능, 창작 세계관인 Lucid Dream 세계관에 대하여, 또한 토끼굴님께서 해당 캐릭터들에게 가진 애정적인 측면에 따라서도 정말로 떠들여지가 많았기 때문에, 차례대로 들었던 감상을 전부 전해보려고 합니다.
부디 즐겁게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서사적인 측면, 원작의 타임라인 안에서의 그들의 관계
우선 저는 이런저런 장르에 견문 자체는 많은 오타쿠지만 실제로 빠르게 실행하여 작품 감상을 마친 작품은 손에 꼽기에, 해당 글을 작성하는 시점에도 〈진격의 거인〉 원작에 대한 전체적인 스토리 라인에 대한 지식은 물론 각각의 캐릭터에 대한 정보에도 거진 무지하다고 봐도 틀리지 않은 정도의 배경지식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모르는 뇌’가, 서술해주신 성격과 묘사들을 보고 주관적으로 진행한 해석을 바탕으로 모든 감상이 이루어졌음을 고려해주셨으면 합니다.
두 사람이 있습니다. ‘거인’이라는 괴수가 인류의 존망을 끊임없이 위협하는 세계관에서 나고 자란 ‘엘빈 스미스’라는 조사병단의 단장과, 아마 시작으로는 깊지 않은 흥미와 변덕으로 이곳에 당도하게 되었을, ‘진’이라는 세계의 이방인입니다.
제가 보기엔 이 둘은 공통분모를 가졌음에도 완전히 다른 성질을 띠고 있는 두 사람입니다. 외적인 부분만 얼핏 보기엔 두 사람은 전혀 닮지 않았으나, “‘어떤 것’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일부분, 혹은 전부를 기꺼이 내려놓을 수 있다”는 점은 기가 막히게 닮았으며, 그러나 그런 행동 지침의 근간이 되는 가치관과 성격은 전혀 다른 일면에서 온, 닮은 듯 닮지 않은 두 사람입니다.
하지만 그런 ‘자신이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생활 환경을 기저에 둔 이해할 수 있었던 면모’가, 두 사람이 서로에게 매력을 느껴 꼭 맞는 부품처럼 맞물릴 수 있었던 결정적인 요소였다고 봅니다.
추상적인 얘기는 그만두고, 두 인물을 구체적으로 분석을 해보겠습니다.
엘빈 스미스는 선한 사람입니다. 강하고, 우직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평범한 인간입니다. 인간적이며, 기회주의자입니다. ‘자신의 꿈’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감내할 수 있으며, 때로는 그를 위해 잔혹하고 비정해질 수도 있습니다. 요컨대, 살아가는 방법을 압니다. 살아남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하는지 압니다. 어떻게 행동해야 이득을 취하며 우세를 쥘 수 있는지 압니다. 계산적이며 전략적입니다. ‘버릴 것’을 버릴 줄 압니다. 그가 한 조사병단의 단장이 될 수 있었던 건, 그런 융통성 있는 비상한 머리 덕분이었을 거라고 감히 추측해봅니다.
흔들리지 않는 곧고 강한 심지를 가진 사람이라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어요. 이변 상황에서도 침착함을 유지하는 것, 자신에게 부조리한 현실이라도 납득할 수 있는 것. 혹여 자신에게 손해가 된다고 해도 상대방에게 합리를 물을 수 있는 것, 더 큰 것을 위해 자신의 괴로움을 감내할 수 있는 것. 여러 면모에서 그는 이미 강인한 신념으로 쌓아 올려졌고, 감성보다도 이성을 앞세워 그 단단한 가치관 하에 행동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인상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모든 순간에서 비단 ‘자신’만을 위해 행동하지 않고, 타인 역시 응당 누려야 할 권리를 누려야 함을 알고 그것을 종용하기도 합니다. 네, 그래서 저는 결국 엘빈 스미스는 선한 사람이라 느꼈습니다. 그가 매사에 오직 자신의 이득만을 계산하는 사람이었다면, 그는 그저 진에게 있어선 많고 많은 평범한 인간 중 한 명이었겠죠. 그저 머리 굴러가는 소리가 좀 더 잘 들릴 뿐인.
그리고, 진 역시 선한 사람입니다. 원래부터 봉사할 의무를 갖고 자신과 다른 것들을 사랑할 수 있는 종족으로 태어났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그것을 감안하더라도 그는 선합니다. 진의 서사를 처음 읽어보면서 가장 놀랐던 부분은, 그는 인간의 기준에서 다분한 ‘전능함’을 가지고 있음에도 그것을 과시하거나 시혜적으로 굴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이유 삼아 더 낮은 곳에 설 줄 알며 남들이라면 하지 않았을 고생을 자처했다는 점입니다.
약간 이제… 신성함이라고 하죠, 네. 홀리함까지 느꼈어요. 범인(두 사람을 바라보는 저를 말하는 것이기도 합니다만, 전 우주적인 관점에서의 엘빈 스미스이기도 합니다.)의 입장에서 생각하기엔 그는 이런 부조리한 세계의 일원으로서 종속될 이유 하나 없고, 고생할 이유는 더더욱 없으며, 이 세계에 애정을 느낄 빌미도 (그의 내면을 깊게 들여다본 게 아닌 한) 없고, 그가 세계의 최전선에서 보통 인간들보다도 못한 삶을 살아야 할 이유를 도저히 가늠할 수 없기 때문에.
이득이 되는 것이 단 하나도 없어 보이는데도 그는 왜 자신의 권능을 접어두며 이 암울한 세계에 종속되어 있는가. 낮은 자를 자처하는가.
‘계산적’으로 살아왔기 때문에 살아남아 지금의 자리에 겨우 이를 수 있었던 엘빈의 입장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사고방식이었겠죠.
그러나, 진은 결정적으로 인류, 인간, 신의 피조물들에 대한 전긍정의 사랑이 있었습니다. 그 점이 평범한 인간들과는 결정적으로 다를 수 밖에 없는 부분이었겠죠.
이러나저러나 진은 인류애라는 것을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습니다. 그 사랑은 처음 진이 이 세계에 계속해서 머물기로 결정하는 데에도 한몫했을 것입니다. 결국, 자신을 창조한 신처럼 세상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그것을 위해 자신의 모든 감정을 포기할 수 있을 정도였으니까요) 성질을 가진 그는 기꺼이 세계에 종속됩니다. 인간을 사랑하며, 세계의 기울어진 천칭을 맞추기 위해 노력합니다.
한낱 인간인 엘빈의 입장에서는 작지 않은 충격을 주는 존재였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그런 ‘무조건적인 사랑’에 기반하여 움직이는 존재에게… 이전과는 다른 인력을 느끼게 된 것은 필연이라고 생각합니다. 그의 내면을 본 이상은요.
더군다나 이런 암울하고 자신의 밥그릇을 취하는 것에 몰두한 폐단만이 들끓는 세상에서, 근원적인 사랑을 기반으로 움직이는 존재는요. 그야말로 ‘빛’ 같아 보였을 겁니다. 저는 엘빈이 진과 계약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를 엄청나게 인상적이고 신뢰할 수 있는 동료로 보았을 것이라 확신해요.
그런데 이제 진이 엘빈을 보통 사람들과는 다르게 본 계기가 된 사건도 재밌죠. 진은 천사치고는 다분히 인간적입니다. 특히 슬픔, 동정, 죄책감 따위를 잘 느끼지요. 어떤 사고나 사건 앞에서 ‘원래 그런 것’이라고 일관하는 일이 잘 없습니다. 영겁의 시간 동안, 부조리함과 비극, 죽음 따위의 것들은 수도 없이 목도했을텐데도, 그 아픔 만큼에는 줄곧 무뎌지질 못한 모양입니다.
그렇기에 진은 엘빈에게 제안합니다. 네 팔을 진작 붙여주지 못한 것에 미안함까지 전해오면서. 내게 네 팔을 다시 돋아나게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으니, 팔을 되찾지 않겠느냐고.
그리고 여기에서 엘빈이 웃으면서 거절하죠. 진에게 대가를 치르게 할 수 없고, 또한 네가 과거에 나를 탓할 수 있었음에도, 계산적으로 행동하며 자신을 지킬 수 있었음에도 그러지 않고 온전히 자신을 감당했듯이, 나도 기꺼이 나의 인생을 온전히 감당하겠다고 말입니다.
엘빈이 그렇게 말한 까닭은 분명 엘빈 자체의 성격이 한몫했으리라고 봅니다. 다만, 이 이야기에서 ‘진 또한 그런 면모를 보여주었기에’ 엘빈 역시 네 앞에서 온전히 자신의 인생을 감당하는 모습을 보이고 싶다고 말한 건 지당한 사실이죠. 저는 이 부분에서 두 사람의 서사가 잘 맞물린 퍼즐, 내지는 탑 같다고 느꼈어요. 조각이 견고하게 맞춰져 있기에 무너지지 않는. 또한, 어느 한 조각을 빼내려 해도 다른 조각들이 붙잡고 있어서 빼낼 수 없는. 한 조각을 빼내려면 결국 탑 전체를 무너뜨려야 할 만큼의 견고함이요. 그만큼, 엘빈과 진 두 사람이 각자의 신념에 맞게 당연하게 행동했던 면모들이 결국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 그 영향을 바탕으로 보이는 면모들이 또 서로와 상호작용해서 이내 지금의 관계를 이루게 되었다는 사실에 약간의 경이로움을 느꼈습니다. 서로가 ‘자신다웠기 때문에’ 성립하는 이야기, 좋아하는 편이에요.
결국 엘빈은 진이 이 어두운 세상에서 타인과는 다른 행보를 보였기 때문에 호감을 느끼게 되고, 진 역시 엘빈이 수없이 많은 죄악을 저지르는 인간임에도 결국 타인을 위하고 스스로의 짐을 굳건히 감당하려는 모습을 보고 인류애라는 것을 상기하게 되죠
그런 점에서 역시, 두 사람은 닮았네요. 그러나 두 사람이 ‘자신다울 수 있었던’ 환경만큼은 너무도 달라서,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는 과정에서 이런저런 즐거운 해프닝이 있었을 것을 생각하니 또 즐겁네요. 다르지만 닮았고, 닮았지만 다른 두 사람입니다.
제가 이 작품의 원작을 온전히 알지 못하기에 작품적인 측면에서 이 친구들을 연관 지어 떠들 수 없는 건 제법 아쉽네요… 그러나, 아직 할 수 있는 얘기는 많습니다.
서로가 서로의 ‘인간적인’ 측면에 끌려서 호감을 느끼게 되었다는 부분도 좋은 부분이네요. 결국 이런 암울한 배경에서 빛을 발하는 건 인간의 선한 면모지요. 인간이 궁지에 몰려 냉혹하고 잔인해지는 이야기는 뻔하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직할 수 있는 사람들, 자신의 마음을 지킬 수 있는 사람들, 타인을 위할 수 있는 사람들 덕에 세계는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원작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종족을 그 세계관에 편입시킨다는 것, 직설적으로 말해 ‘천사’라는 이질적이면서도 큰 능력을 갖고 있는 캐릭터를 세계관과 병합시키면서 여러 고충이 있었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이런 얘기도 정말 재밌다, 있을 법하다’ 고 느낄 정도로 매끄럽고 위화감 없게 서사를 짜신 부분도 좋았어요. 예를 들어 엘빈이 진의 날개 한 짝을 가지고 증거 삼아 상부에 보고해 비행하는 기행종 거인이 있을지 모른다는 가능성에 대해 언급하는 부분이라든지.
루시드 드림 세계관도, 또한 진격의 거인 세계관에도 애정이 깊고 빠삭하게 알고 계셨기에 이런 디테일을 살리면서 두 세계관을 융합할 수 있었던 거라고 생각해서, 역시 칭찬하게 됩니다.
각각의 인물들의 성격에 따라 ‘진이라는 이 이방인을 어떻게 모두가 받아들이고 납득하게 되었는지’ 설정을 해두신 부분도 그렇고요.
사족이지만 저도 이세계 트립 드림을 하고 있어서 더욱 공감하게 되었던 부분입니다만, ‘원래부터 이 세계에 존재했고, 그렇기에 당연하다.’ 정도가 아닌 어떻게 이 캐릭터가 이 세계 안으로 편입할 수 있었는지, 그 개연성을 찾아주는 과정이 아주 탄탄하게 설계되어 있어서 역시 좋았네요… 재밌죠, 이런 서사….
제 기준으로 특히 좋았던 부분은 6. 벽 외 조사(2) 단락입니다.
진이 자다가 일어나선 투정을 부리다가도 상황 파악을 끝내자마자 본능에 가깝게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튀어 나간 부분이 좋았어요. 자신의 능력까지 써가면서. 정말, 유전자라는 것이 있다면 그것에서부터 ‘선의’가 각인된 친구구나, 하고 느낄 수 있었던 부분입니다. 사람이 위험하면, 죽어나간다면, 당연히 구해야죠. 이 단락 덕분에 진이 어떤 성격을 가진 인물인지 단번에 알 수 있었어요.
그러면서 사태 끝나면 다시 능청스럽게 굴기 시작하는 것까지 가산점…. 원래 평소 언행의 가벼운 캐들의 진지한 모습이 좋은 것이죠. 갭모에라는 말이 왜 있겠어요. 동시에 이 사건의 전투 장면은 통째로 진의 인외미를 부각하는 장면이라 또 좋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적인 측면은 극대화하면서 동시에 인간이 아니라는 것도 이렇게 인상 깊게 보여줄 수 있다니… 역시 좋네요.
8번의 회유 장면도 진이라는 인물을 이해하기에 도움이 크게 됐다고 생각해요. 애초부터 세계에 진정으로 귀속되지 않은, 현세에 해탈하다시피 한 종족이 인간의 물적 회유에 동하지 않는 것은 당연하죠. 오히려 그런 인간들의 흑심이 거북할 뿐.
그럼에도 진은 인간을 사랑하는군요. 새로운 인간들을 만날 수 있다는 부분에서 즐거움을 느끼고 있으니까요. 의외로 맛있는 간식 따위의 것에서 행복을 느끼는 것도 그렇고. 확실하게 소소한 행복을 추구하고 있군요.
최종적으로, ‘진은 언제나 더 많은 인간을 섬기길 원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부분까지. 8번 장면은 진이 세계를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 통째로 보여주는 장면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진은 인간과 같은 고통을 느낀다는 부분도 좋았습니다….
그는 엄청난 권능을 가졌지만 사실 그 권능으로 누군가의 머리 위에 서는 것에도 관심이 없다는 부분에서부터, 그냥 조금 더 많은 시간을 살아가는 인간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느꼈어요. 성품적 측면에서요. 오히려 그 성질 때문에 고생을 더 많이 했으면 했지….
결코 그 능력을 악용하거나 남용하지 않는다는 점 때문에 더욱 부조리한 일을 당하는 사건도 많았던 것 같네요. ‘보통 인간’ 처럼요. 그런 점이 좋았습니다. 마음만 먹으면 이 상황을 타파할 수 있는 힘이 충분함에도, 그러지 않은 것.
낮은 곳에 서는 사람다워요. 세계에 너무 큰 개입을 하면 안 된다는 메타적인 이유도 있었겠지만, 그럼에도 자신을 더 위했다면 전부 겪지 않아도 될 사건들이었으니까.
결혼 장면은 다시 봐도 좋군요….
이거 결혼이라고 불러도 되나요? 그치만 서로가 서로를 반려로 맞았는데… 라고 주장하고 싶은 오타쿠의 마음입니다.
엘빈은 평생을 ‘목표’를 위해서 살아왔던 사람입니다. 저는 그 목표가 정확히 무엇인지 알지 못하지만, 아마 그래도 그 목표는 적어도 엘빈이 살던 세계의 단위에 종속되는 목표였을 거라고 생각해요.
엘빈이 죽고, 원래 세계에서 되살아날 수도 없는 지금. 아마 그 목표는 희석되어버렸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엘빈은 앞으로의 삶에서 새로운 목표를 찾아야겠죠. 목표가 한평생의 원동력이었던 사람이니만큼 아무런 목표 없이 그저 평화롭게 살아가는 것은 어려울 거고, 평생의 목표를 잃어버린 직후에는 내적으로 조금 방황할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그런 것은, 영겁과도 같은 시간이 주어진 지금 이제 조금 느긋해도 좋으니까, 당장은 앞으로의 행복만 좇으며 살았으면 하는 두 사람이네요. 그간 고생 정말 많이 했으니까, 일단은 나 자신이 행복해지는 것만을 추구해도 좋으니까, 당장은.
“무엇이 하고 싶어?”
그 물음에 대한 답을, 엘빈 뿐만이 아니라 진 역시도 수없이 많이 답할 수 있기를.
앞으로 넘치는 행복을 느꼈으면 하는 두 사람입니다. 무엇보다도, 평안했으면 해요.
감상문의 최종 제목으로 결정지은 〈그 끝에 평안 있으라.〉는 두 사람의 캐치프레이즈를 성서의 구절처럼 말한 것이기도 하지만, 엘빈의 첫 번째 세계의 끝, 고통과 포기로 연명해야 했던 나날을 끝맺고 이내 평안을 얻었으면 하는 바람을 담아서 지은 제목이기도 합니다. 두 사람이 자신을 포기하고, 내버려야 했던 나날은 이제 접어두고 진정한 평안을 얻기를 바랍니다.
서사 외적인 측면, 드림주의 장치적인 기능
보통 제가 봐왔던 드림들은 이런 단락을 만들 필요성을 잘 못 느꼈었는데, 아무래도 엘빈진의 서사에서는 이 얘기도 빼놓을 수 없고 하게 되네요.
이 드림이 단순히 ‘이 세계관에 이런 캐릭터가 존재했다면’으로 그치지 않고, 너무 명백하게 이세계 트립물의 형태를 띠고 있어서, ‘이 캐릭터가 어떻게 이 세계관 안으로 편입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그 이질적임이 서사 내에서 어떻게 작용했고, 말미에는 어떻게 다시 세계를 떠나게 되는지까지 너무 훌륭하게 설정이 되어 있었으니까요.
사실 편의성을 위해서라면 ‘본 모습은 천사가 맞지만 다른 세계관을 살아갈 때에는 그 세계관의 평균적인 종족 특성을 따른다.’, 같은 식으로 또 다른 세계를 살게 된 진. 같이 설정을 풀어나갈 수도 있었을 텐데, 그렇지 않고 진의 세계관 설정까지 완벽하게 밀어붙이면서 타인에게 납득할 수 있는 교집합을 찾아 멋진 드림 서사를 짜내신 것에 대해 박수를 보냅니다…. 재밌었어요.
원래는 엘빈진의 드림 서사에 대한 감상만 요청 주셨기에 이 부분까지 언급하는 것은 조금 실례가 되지 않을까, 라는 우려도 있지만… 각각의 세계에서 겪은 일들은 if나 AU 같은 것이 아니고 전부 합해서 진이라는 인물의 한 서사인 거잖아요? 그렇게 생각하니 역시 언급을 안 할 수가 없네요.
드림주 캐릭터를 ‘일반적인 차원들의 상위 존재’로 설정을 하면서 동시에 메타픽션 속성은 주지 않아, 자연스럽게 평행세계를 넘나들듯 차원을 넘나들며 여러 캐릭터와 상호작용하는 것이 공식 설정으로도 이질감이 없다는 설정 자체가 무지 제게 매력적으로 다가왔네요. TMI고 양이 방대해서 읽어보지 않으셔도 된다고 해주셨지만, 캐릭터에 대해 감상을 하려면 제공해주시는 정보는 전부 알고 가고 싶어하는 편이라 아무래도 진과 루시드 드림 세계관 자체에 대한 설명이 담겨 있는 문서도 읽어보았거든요….
하나의 드림주로 여러 캐릭터를 만나도 이질감이 없고, 오히려 다음에는 어떤 캐릭터를 만나게 될지 기대도 된다는 점은 역시 좋은 것 같아요. 물론 당장은 진도 토끼굴 님도 엘빈이랑 오래오래 행복하실 것 같지만요.
저는 개연성 있는 드림 서사를 굉장히 좋아하는 편이라, 역시 다드림을 하면서 설정적으로 이렇게 어색한 점이 없게끔 조형을 해두셨다는 점은 몇 번을 말해도 부족함이 없는 매력 포인트네요.
또한 드림주가 공공연히 원작 밖에서 온 존재이기에, 엘빈 스미스의 ‘죽음’ 이라는 닫힌 서사를 극복할 수 있게끔 장치된 점도 좋았네요.
사실 드림이라는 게, 결국은 드림캐에게 내가 보고 싶은 서사나 관계성을 부여하는 것이고, 그렇기에 개연성이 조금 떨어지는 드림을 한다고 해도 타인이 왈가왈부할 것은 못 된다고 생각하지만….
이미 토끼굴 님에게서부터 ‘이쪽에서도 저쪽에서도 말이 되는 서사를 짜자.’ 라는 신념이 내비치는 것 같아서 좋았습니다.
진의 이전 이야기도 그렇지만, 앞으로의 이야기도 꽤 궁금해지네요. 엘빈과의 만남으로 진은 인류에 대해, 세상을 사랑하는 것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죠. 앞으로의 세상은 영겁과도 같은 세상을 살아온 진의 시야를 더 변화시킬 수 있을까요? 이를 상상하는 것도 쏠쏠한 즐거움이 됩니다.
Lucid Dream 세계관에 대하여
그런 ‘진’이라는 캐릭터가 조형될 수 있었던 건, 그런 캐릭터가 살아 숨 쉴 수 있는 탄탄한 세계관이 구축되어 있었기 때문이겠죠.
세계관을 서술해둔 단락을 보며 감탄을 많이 했습니다. 우선 대전제는 성서에 철저하게 기반을 둔 세계관으로 기본적으로 어느 정도 배경지식이 형성되어 있다면 읽는 사람의 쉬운 이해와 공감을 끌어낼 수 있다는 점이 그랬고요, 고증적인 측면에서도 재밌었어요. 처음 읽는 세계관임에도 설득력과 호소력이 짙어 이해가 잘 된다고 느낄 수 있었던 건, 아마 그런 이유가 크게 작용했을 것 같습니다.
또한 촘촘한 타임라인을 보면서도 크게 감탄했고요. 아, 이 분은 정말로 서사 오타쿠시구나….
방대한 분량의 개인 세계관을 갖고 있으시다는 것에서부터 이미 쉬운 일은 아닌데, 철저한 정리까지…. 간만에 범상치 않은 분을 만났구나 싶었습니다. 덕분에 세계관에 대한 이해도 더욱 쉽게 할 수 있었고요. 물론 진이라는 인물에 대한 이해도요.
또한 이제 날짜와 시간, 그것들의 표기, 언어 설정과 루시드 문자까지 설정해둔 것을 보고는 적지 않은 경외심을…
이… 이게 진짠가…
엄청나게 방대하고 촘촘한 세계관이네요. 여기까지 알고 보니 엘빈진의 관계 정리 표에도 루시드어가 쓰여 있더라고요. 정말 큰 애정을 느낄 수 있었답니다.
…가볍게 넘기셔도 되는 말이지만 솔직히 장르처럼 연성하고 계시면 좀 구경하고 싶어요. 많이 재밌고 취향이었어요.
또한 단순히 ‘베리타엘’이라는 핵심 인물뿐만 아니라 그의 탄생부터 비롯한 세계관, 그가 삶을 살면서 새로 생긴 지명, 그곳과 연관된 주변인물들까지 섬세하게 설정되어 있었다는 부분도 흥미로웠습니다. 이미 세계 하나를 구축해 두셨군요. 그런 세계를 엿볼 수 있는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애정적인 측면, 어떻게 이런 서사가 나올 수 있었나
그렇다면, 사실 제 생각에는 토끼굴 님이 ‘엘빈 스미스’ 라는 캐릭터를 만나기 전부터 진이라는 캐릭터와 루시드 드림이라는 세계관은 존재하지 않았을까, 조심스럽게 추측해보는데요. 왜냐하면 이만한 분량과 설정의 방대한 세계관은 도저히 한 캐릭터를 위해 생성된 것이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만일 그렇다고 한다면, 그것도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사실, 이 드림은 ‘진격의 거인 세계관의 드림주를 편입하는 과정’이기도 하지만, 반대로 ‘루시드 드림 세계관에 드림캐를 편입하는 과정’이기도 하지요. 어느 쪽이든 토끼굴 님께서 진이라는 캐릭터에 대해 상당한 애정을 갖고 계실 건 자명한 사실일텐데, 그만큼 엘빈 스미스라는 캐릭터도 사랑하게 되었기에 선뜻 두 세계를 연결할 마음을 먹으실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네, 결국은… 엘빈이라는 캐릭터를 사랑해서 모든 서사가 만들어질 수 있었던 게 너무나도 잘 느껴졌어요. 행복해졌으면 하니까, 평안해졌으면 하니까. 기왕이면, 둘이, 함께.
그래서 끝내 ‘두 사람이 행복할 수 있는 세계’를 만드신 거겠죠? 그런데 이제 진이라는 캐릭터가 비단 엘빈 스미스의 행복과 평안만을 위해 조형된 캐릭터처럼 느껴지지 않았다는 점에서, (원래부터도 존재하는 캐릭터가 우연히, 그렇지만 자연스럽게 만나게 되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네요.) 토끼굴 님이 이 관계에 얼마나 많은 공을 들이셨을지 조금이나마 상상이 갑니다.
그만큼 큰 애정이 느껴졌어요. 진이라는 캐릭터에게도, 이 세계관에도, 엘빈 스미스라는 캐릭터에게도. 사랑이 있지 않았다면 이런 대서사시 만들지 못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역시 두 사람은 함께 평안해졌으면 좋겠네요.
마치며
여담인데 제가 덮은 앞머리 캐릭터를 정말 좋아해요. 눈이 안 보이는 캐릭터. 그리고 외강내유 비슷한 캐릭터도 정말 좋아하고요… 진이든 엘빈이든 얘네들은 외강내강 아니냐? 싶을 만큼 견고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지만, 두 캐릭터 모두 사실은 ‘위태로운’ 면모를 안고 있다는 게 정말 좋았습니다…. 또한 두 캐릭터 모두 세계관적으로 부조리함을 좀 많이 겪어서, 몸으로 구르는 편이기도 하고요. 좋네요…. 그런데 둘 다 엄청나게 침착하고 강인해서 너덜너덜한 상황에서도 농담 따먹기를 할 수 있는 관계라는 것도 좋았습니다. 동요도 잘 안 하고. 9번 밀고라든지, 11번 침묵이라든지. 강하네요. 그렇지만 서로의 앞에선 이따금 약한 면모도 보여 주곤 할까요. 그런다고 하더라도 보듬어줄 서로가 있어서 크게 걱정이 되는 친구들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두 사람이 함께라면 무슨 일이든 극복해낼 수 있을 것 같아요.
개인적으로는 또 ‘시작은 이렇게 될 것이라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지만 끝내 궁극적인 상호 긍정 관계를 이룩한 인물들’을 보는 것도 좋아해서, 서사의 전개 자체가 흥미로웠던 것 같습니다.
진은 약간의 흥미가 일어서, 인간치고는 자신 앞에서 솔직하게 구는 엘빈이 가볍게 마음에 들어서 이 세계관에 남기로 하고, 엘빈은 진을 철저히 계산적으로 대한 끝에 조사병단에 분명한 득이 되리라는 것을 확신하고 그를 병단 안에 들이죠.
그러나 결국 두 사람이 보여준 천성적인 태도가, 또 신뢰 관계가 차츰차츰 쌓여서 지금의 두 사람을 만들었다고 생각하니 웃음이 지어집니다. 절대로 당사자들도 서로가 서로에게 이렇게 소중해질 줄 몰랐을 테니까.
두 사람이 행복하고 평안해지길 바란다고 했는데, 보아하니 여행도 곧잘 다니고 데이트도 하고 이세계도 가고 천계도 가고 잘 지내는 것 같아 다행입니다. 앞으로도 평안하기를.
결국은 따뜻한 안식을 쟁취해낸 두 사람의 이야기를 볼 수 있어서 기뻤습니다.
엘빈진의 서사 감상, 〈그 끝에 평안 있으라.〉 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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