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로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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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껏 예민해진 청각이 받아들이는 모든 소리는 끔찍한 소음이 되어 그의 고막을 때려댔다. 실전에서 다루기 위해 무던히도 훈련을 거듭해 적응하고 제어해야만 했던 고통이 엄습한다. 뇌가 욱신거려 터져버릴 듯한 감각. 죽음이 가장 다정한 결말이라 할 수 있을 위험 속. 장비를 받고 나서도 함부로 사용하지 말라 귀가 따갑게 권고받았던 혜성은 반박하듯 말했다. “
언제 정신을 잃었는지도 모르게, 눈을 뜬 혜성은 천장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어쩐지 익숙한 모양새다. 건물의 천장이 다 그게 그거라 하면 반박할 수는 없다마는. 몇 달 전. 혹은 얼마 전. 이미 큰 신세를 진 곳이었기에 그는 확실히 기억했다. 그렇다면 다음 일은 자연스러웠다. 혜성은 옆으로 손을 뻗어 너스콜을 눌렀다. 그러자 오래 기다릴 필요도 없이 낯익은
'화염의 대장간'은 제법 아늑한 공간이었다. 담금질과 망치질이 필요치 않은 그의 특성을 고스란히 반영한 장소는 대장간의 이름과 다르게 불도 망치도 모루도 없다. 있는 것은 침대만큼이나 널찍한 소파와 전기를 쓰지 않는 냉장고, 예의상 놓여있는 것 같은 탁자와 의자정도다. 마치 무도회장 하나를 통째로 옮겨놓은 것처럼 거대한 공동은 바닥에 넓게 깔린 색색의
후줄근한 차림새에 제대로 된 것은 위에 걸친 하얀 루바토의 코드 한 벌. 한 손에는 만개한 붉은 장미 꽃다발이 들렸다. 그나마 대충이라도 묶어내렸던 머리칼은 머리끈 한줄 온데간데 없이 풀려 바람결에, 발걸음에 한들한들 흔들린다. 아무리 잘 닦인 길이라지만 거무죽죽한 낡은 슬리퍼를 신고도 잘만 걷는다. 터덜터덜 걷는 모양새는 양반이 저리가라 느긋하게 평
배희신은 균열 근처에서 간신히 회수해 온 장갑을 둘러보았다. 재즈가 팔을 잃으며 함께 잃어버렸던 장비다. 본판이 배희신의 특별한 혈액으로 이루어진 터라 수복은 그의 능력만 있으면 충분히 가능했지만, 문제는 이제 더는 장갑을 쓸 만한 요건이 안된다는 것이다. "하여간." 괜히 혀를 쯧 차고는 장갑 '붉은 가시'의 형태를 허물어뜨려 뭉글뭉글한 액체로
메시지를 보낼 수 없습니다. 선택한 대상을 찾을 수 없습니다. 반투명한 가이드 창이 무심하게 문장을 띄웠다. 목소리가 있다면, 온기 한 점 없으리라. 괜찮아? 상황은 어때. 다시 한 번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울렸다. 어깨 위에 내려앉은 나비는 느릿느릿 날개를 접었다 펴며 새로운 명령을 기다릴 뿐이었다. 언제부터 눈을 감고 있
과장 하나 보태지 않고 매일같이 피를 보는데 또 피를 보면 질리지 않느냐? 그렇게 질문하는 사람에게 배희신은 질리는 게 아니라 익숙해지는 것이라고 대답한 적이 있다. 배희신은 천성이 그런지, 아니면 이 또한 능력의 일부인지 피의 비린내나 붉은색에 불쾌함을 전혀 느끼지 않았다. 게다가 능력을 사용하여 정화한 피는 비린내가 나지도 않았다. 그런데 선짓국은
배희신이 사는 오피스텔에 방문하는 디안드레의 두 손은 먹거리로 가득했다. 중요한 점은 그것들 중 재료라고는 한 톨도 없이 모두 완제품이라는 사실이다. 배희신과 디안드레 모두 어디선가 부정이라도 탄 양 요리를 못 했기 때문에, 두 사람은 처음 만난 순간부터 지금까지 수제 요리를 먹어본 적이 없었다. 디안드레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 문 앞에 섰다.
"다급하게 부른 것치고는 얌전한 상황이잖아요." "아까는 진짜 위험했습니다만. 다 같이 독물을 뒤집어쓰고 죽을 뻔했다고요." 투덜대는 제갈쯔완과 이야기를 나누며 차연우의 창으로 만들어낸 수조 안을 들여다보는 사람이 아마 '춘복'일까. 그럼 그 옆이 윤서영이겠군. 언젠가 본 적이 있던가... 아니면 처음 보던가. 지난 언커먼 활동들을 멍하니 돌이키던
배희신이 편의상 '발찌'라 부르는 A등급 장비는 20대 시절에 만들었던- 소위 말하는 '필수 아이템'이었는데, 그것의 진짜 아이템명은 '높이높이' 다. 하지만 그 발찌의 진짜 이름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배희신이 그 이름을 부끄러워하여 입 밖으로 뱉은 것이 손에 꼽기 때문이다. '높이높이' 라는 이름을 붙인 것은 1년 전 사별한 동반자이자 파트너
배희신은 문화생활을 좋아하지 않았다. 자신의 재능과 놀랄 만큼 비교되어서, 아름다운 것을 보면 부끄러웠다. 추할 만큼 질투가 났다. 세상의 불공평함이 피부 위를 징그럽게 기었다. 종이 위에 선하나 예쁘게 긋는 것이, 둥그런 찰흙에 눈구멍 하나 뚫는 것이, 물에 부어야 하는 간장의 양을 가늠하는 게 얼마나 힘든지 다른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했다. 배희신에
"어이, 비비. 있는감?" 여자는 빠끔히 열린 문 틈새로 눈을 흘끔 들이밀었다가 문을 똑똑 두드렸다. 안에서는 빨간 무드등이라도 켜놓은 양 불길한 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내 잠잠해지며 본래의 부드러운 빛을 되찾은 방 안에서 목소리가 들려온다. "들어와." 반가움도, 퉁명스러움도 어느 것 하나 들어있지 않은 단조로운 목소리
"이미 차고 넘치는 죄목에 무단침입죄까지 추가하려니 종이가 모자랄 지경이란 거 알아요?" 침대에 기대어앉은 메이블이 가볍게 빈정거렸다. 언뜻 웃음기가 비친다. 열린 창문으로 몸을 접어넣은 밀런은 틀에 걸터 앉아 창문에 달린 잠금장치를 툭툭 두드렸다. "누가봐도 나 들어오라고 열어둔 거구만." "전형적인 도둑의 변명이네요." "그럼 아니야?" "바람
정수리를 뜨겁게 달구며 이글이글 타오르던 태양은 여전할지언정 순리에 따라 멀어진 행성에는 그 온기가 닿지 않는다. 영생을 부여받은 몸으로는 얼어 죽을 리 없대도 추위는 긍정적인 기분을 들게 하는 감각은 아닌지라 시간이 조금 더 지나면 두꺼운 옷을 껴입어야 할 것이다. 움직임이 둔해지겠지만 어쩔 수 없지. 밀런은 좁은 계단을 일일이 오르는 대신 탄력 있
1. 고풍스러운 저택 곳곳이 그 모양새와 어울리게 향기로웠으나 오로지 이 방 하나만큼은 죽음의 냄새로 가득 차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 밀런은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운 노인의 얼굴을 바라본다. 벌써 몇 분째 꼼꼼히 살펴보았지만 자신과 닮았단 생각은 눈꼽만치도 들지 않았다. 백 번 양보하여 그가 자신의 '진짜 혈육'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더라도. 푹신한
죽음이란 인간에게 동등하게 찾아오는 가장 큰 사건 중 하나- 였어야 했다. 어느 특이점에 갇혀 생을 반복하기 시작하지 않았더라면 밀런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밀런에게도 죽음은 무섭고도 특별한 일이었고, 그럼에도 명예롭고 화려하게 끝마칠 수 있다면 만족스러울 것이라는 생각에 황제에게 바치리라 마음먹어 기사가 되었던 것도 다 옛날 일. 어느 죽음은 그랬
"큭... 크큭... 킥..." 식탁 앞에 앉아 고스란히 엎어진 밀런이 음침한 웃음을 흘려댔다. 그 반대편에 앉아 멍하니 턱을 괴고 있던 메리는 근육으로 부푼 등이 들썩거리는 모습을 보며 눈을 가늘게 접었다. "지금까지 나온 증상에 뭐뭐가 있었죠?" 메리의 목소리는 고열과 갈증에 시달리는 통에 쩍 갈라져 있었다. 그 목소리를 들은 밀런은 여전히
황성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레지스탕스의 습격이 시작된 후였다. 혼란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연기가 피어오르고, 지하수로에서 막 빠져나온 듯한 사람들이 연기 속으로 젖은 몸을 던졌다. 몸에 달라붙는 새카만 옷을 걸치고 단검을 꽂힌 홀스터를 허벅지에 찬 밀런은 나무 위에 몸을 숨긴 채 상황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빠르게 굴러가던 그의 시선이 낮게 침잠한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에 비해 몸집이 작았고 웅크린 채 서로에게 의지하고 있었다. 자신을 풀어달라며 고래고래 고함치는 사람 옆에서 유독 조용히,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흐느끼고 있는 듯 어깨가 가늘게 떨리는 것이 보였다. 사람들은 모두 얼굴을 가리고 있었고 그들을 무릎 꿇린 자리는 밀런이 선 곳과 멀었으며 목소리도 제대로 들리지 않았기 때문에, 누군가가
메이블을 다시 만난다면 내일이나 되어야 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럼 그때가 되어서나 맛있게 먹었느냐며 거들먹거리려고 했던 밀런은 뒤에서부터 빠르게 가까워지는 발소리에 켁, 혀를 빼내물었다. 화풀이하는 메이블을 보던 기사들이 용감하게도 그를 불러세운 모양이다. "크 레 이 스 경!!!" 달려드는 작은 폭탄을 피해 도망칠까? 메이블이 크게 소리치며 달려오
사방으로 흩어지는 차가운 공기가 뒷목이 서늘하게 쓸어올렸다. 최근에 장난을 쳤던 사람 중 누군가가 자신의 목숨을 노리기라도 하는 걸까? 그런 의문이 들 만큼 죄 많은 인생을 사는 밀런은 오늘따라 기분이 안 좋아 보이는 메이블의 과격한 훈련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쟤 오늘 왜 저러냐." 터덜터덜 걸어온 밀런이 질색하며 묻자, 그 자리에 서
“뭐든 물어봐도 돼~ 어제 먹은 점심이라든가, 지금 입은 속…” “그건 됐습니다.” 놀림조로 이어지는 말을 단박에 끊은 궁정사관은 실수로 적은 문장 위로 선을 직직 그었다. 아쉽다는 둥 진심인지 빈말인지 모를 한탄을 내뱉은 밀런이 느긋하게 자세를 고쳐 앉았다. 이제 장난을 칠 마음은 조금 가신 모양이다. 궁정사관은 큼큼거리며 목을 가다듬었다. “준
“아가씨. 시간 좀 있어요?” 혹시 어느 시대에 살다 오셨냐고 조심스럽게 물어보고 싶어지는, 로맨틱과는 거리가 먼. 센스라고는 찾아보려야 찾아볼 수 없는 멘트에 돌아볼 ‘아가씨’가 얼마나 될는지. 누군가는 잘못 걸렸다 속 졸이며 도망갈 테고, 누군가는 별꼴이야 흘겨볼 텐데. “어머, 좀이라면 얼마나?” 자못 도도한 눈을 들어 올렸지만, 입가에
"자." 밀런은 손에 들고 있던 종이가방을 건넸다. 앞면과 뒷면을 확인해봐도 별다른 로고는 인쇄되어 있지 않다. 혹시나 깜빡해서 영수증을 빼지 않았나 찾아봐도 흔적조차 없다. 하긴, 사기를 치려고 했다면 그 정도로 어설플 리 없긴 하지만.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종이가방 겉면을 세 번 훑어보고, 안을 빤히 들여다본 후에야 고개를 든 메이블이 새삼스럽다는 듯한
둥글납작한 초콜릿을 녹여 다른 모양으로 다시 굳혀내는 행위를 두고 '초콜릿을 만든다'라고 말하는 것에 대해 이상하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마는 그것도 다 옛날 이야기다. 카카오를 따는 것부터 시작해야 하는게 아니냐며 유치하게 따지고 들 나이도 아니고. 어떤 모양으로 굳혀서 어떤 재료를 입히고 어떻게 포장할지 고민하고 실행하는 과정까지 포함하면 여간 귀찮고
대기실은 땀이 나지 않을 정도로 적당히 서늘한 공기가 맴돌았다. 커다란 도구가방이나 의상을 개미처럼 짊어진 스타일리스트들이 분주하게 대기실을 오락가락 지나다니는 사이, 메이크업을 받는 메이블만이 영상을 멈춰둔 것처럼 자리에 꼼짝 않고 앉아있었다. 무대가 코앞이니 바쁜 건 어쩔 수 없고, 딱히 도와줄 생각은 없었지만 만약 좋은 마음으로 자리에서 일어난대도
“후회 안 한다며?” “누가 한대요?” 나를 뭐로 보고. 그렇게 투덜거리듯 바라보는 메이블이 뚱한 표정을 지었다. 밀런은 ‘뺨이 퉁퉁 부었네’따위의 문장을 놀림조로 읊어대며 키득거렸다. 저 얄미운 콧대를 콱 깨물어버리면 조용해지려나. 메이블이 그가 자랑으로 여기는 높은 콧대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신나게 목을 울리던 밀런이 말한
츠키노 아이카는 자신이 아이돌을 동생으로 둔 사람이라는 사실에 익숙해진지 오래였다. 하루네코 고등학교에서 스쿨아이돌로 활동을 시작한 동생의 유명세로 이름을 알린 카페가 점차 단골을 늘려가며 성황을 이루는 것도 좋았다. 돈은 옳다. 그래서 아이카는 동생을 나름 '복덩이'로서 잘 대해주고자 마음먹었다. 하지만 츠키노 아이카는 여느 집안의 남매와 별 다를 바
은주아가 열린 문 밖으로 세찬 빗소리가 들렸다. 비가 오는게 아니라 양동이째로 쏟아붓는 것처럼 매섭다. 문이 사라지자 소리가 뚝 끊겨 대장간은 다시금 고요해진다. 그가 올 것을 알고 미리 음료를 골라 빼둔 배희신은 차게 식은 병을 건넸다. "웬일로 이 시간에 온다 했더니." "비가 오니까 움직이기 귀찮더라고요. 좀 그치면 갈게요." 익숙하게 공간을 가
짙은 어둠 속 푸르스름한 조명만이 옅게 깔린 공간은 바람 한 점 불지 않아도 팔뚝에 소름이 돋을 스산함을 자아낸다. 오로지 듣는 이의 공포심을 불러일으키겠다는 일념 하에 제작된 배경음이 심장을 두드릴 듯 낮게 울렸다. 이쯤되면 사람들은 잔뜩 긴장해 몸을 움츠린다. 다시 뒤로 돌아가고 싶을 쯤, 용기를 내어 한 발자국 앞으로 내딛으면 유난히 큰 발소리가 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