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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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동안 군인으로 살며 몸에 밴 행동 중 하나는 작은 소리에도 금방 깨는 것이다. 함선 전체에 쩌렁쩌렁 울려 정신이 번쩍 들게 만드는 긴급 경보는 당연하고, 눈을 붙인 지 30분도 안 되어 제1전투태세가 발령되었다며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허겁지겁 뛰쳐나간 게 하루이틀도 아니었으니까. 그래도 공식적으로는 죽은 신분이 되어 완전한 일반인으로 돌아간 뒤에는
불길한 예감은 어째 틀리질 않는다더니. 출발할 때부터 엔진 소리가 묘하게 마음에 걸린다 싶긴 했지만 정말로 차가 고장날 줄 누가 알았을까. 심지어는 민가고 뭐고 아무것도 없는, 오로지 광활한 황야를 가로지르는 4차선 도로만이 덩그러니 놓인 이 외진 곳에서. 설마 무슨 일이 생기겠냐고 안일하게 굴며 빨리 출발하자고 보채던 동행인 녀석들의 멱살을 당장이라
한밤중에 문득 잠에서 깨면 마주하게 되는 것이 있다. 대개는 벽과 파이프를 타고 퍼지는 함선의 엔진 소리라던가, 야간 근무를 하는 승무원의 기척이라던가, 아직 잠들지 않은 옆 방에서 흘러나오는 물 소리 같은 것들이다. 하지만 간혹 정말 드물게도 경계할 것이 아무것도 없는 평화로운 운행 중에는 그런 생활 소음조차 없는 조용한 밤을 마주할 수 있었다.
高瀬統也、れん - でも、 인간의 수명은 짧다. 고작해야 백 년 남짓. 생명공학이 이토록 발달한 세계에서도 인간은 과거와 마찬가지로 찰나의 시간을 살고 꽃처럼 스러졌다. 그리고 그 사람의 삶은 그것보다도 짧았다. 향년 32세, 갑작스러운 교통사고였다. 고통조차 느끼지 못할 만큼 짧은 순간이었을 거라는 말을 다행으로 여겨야 할까. 어제까지만 해도 단단한 팔
Ⅵ THE LOVERS “그러면 네가 지금 잘했다는 거야?” “그러는 형은 뭘 그렇게 잘했는데!” “뭐? 지금 네가 큰소리칠 때냐?!” “내가 못 칠 건 뭔데! 나도 하루 이틀 참은 줄 알아?!” “참았다고? 네가 참았다고? 그러는 나는 안 참았던 것 같아?! 너야말로 내 말을 듣기는 해?” “와, 진짜 어이없다. 그거 지금 누가
1 카나가와에 이사를 온 후 료타는 종종 어떤 꿈을 꾸었다. 내용은 항상 같았다. 어떤 길 위에 있는 꿈이었다. 위를 올려다보면 청량한 밤하늘에는 손톱 같은 초승달이 걸려 있었다. 주변에서는 찌르르 울리는 벌레 소리와 함께 향긋한 풀내음이 맡아졌다. 료타의 키만큼 높게 자란 수풀이 길의 양옆으로 끝 모르고 펼쳐져 있었다. 그렇다면 이곳은 아마
水槽 - カペラ 정대만의 사랑은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모를 리가 없었다. 온전히 닿아 오는 시선과 행복하게 웃어 보이는 얼굴 때문이 아니더라도 그랬다. 그 사람이 보여주는 모든 행동이, 골라 내뱉는 단어가, 사소한 표현 하나하나마저도 정대만이 송태섭을 마음 깊이 사랑함을 증명하고 있었으니까. 사귄 지 1년도 안 된 연인을 지구 반대편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오고 시작이 있으면 끝도 있다. 훈기 섞인 바람 속에 피어나는 분홍빛 벚꽃과 함께 3학년들은 졸업을 맞았다. 만 1년도 되지 않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수많은 추억을 같이 쌓아 올린 사람들과 헤어지는 것이 못내 아쉬워 후배들은 선배들을 쉽게 보내지 못했다. 졸업을 한다고 관계가 끊기는 건 아니지만 오후부터 저녁까지 매일을 함께하던 사
Dios - Misery 코트에 발이 닿는 순간 미츠이 히사시는 알았다. 이제 무릎이 꺾일 것이다. 익숙하고 잘 아는 통증이 그를 덮칠 것이다. 다시 일어날 수 없을 것이다.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미츠이는 무릎을 움켜쥐고 코트에 쓰러졌다. 놀란 선수들과 심판들이 그의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관중석에서 웅성웅성 수군대는 소리가 들렸다. 부축을 받
1 일방적인 청혼 사실 그건 거의 장난이었다. 창창한 대학 시절, 아직 뭣도 모르는 스물 셋넷 정도에 친한 선배와 술을 먹다가 한 장난. 왜 그 얘기를 했었더라. 아마 한나와 결국 이어지지 못하고─끝내 고백조차 하지 못했으니 한나의 탓을 할 수는 없다. 등신 같은 송태섭.─미국 생활에 치이느라 이 나이가 되도록 연애 한 번 못 해본 제
1 Dios - 残像 정대만의 연인은 강하다. 힘들다는 이야기를 하는 법도 없고, 사람을 곤란하게 하는 법도 없다. 늘 혼자서, 몇만 km나 떨어진 타지에서도 항상 기운 찬 목소리로 제 안부를 전한다. 별일 없어? 라는 질문에 돌아오는 대답은 언제나 같다. 별일 없어, 괜찮아요. 걱정 안 해도 돼요. 정대만의 걱정은 괜한 것이 된다. 그는
며칠 전부터 케이크에 눈길이 갔다. 엄마가 종종 들르는 정통 베이커리의 진열대 뿐만 아니라 여자애들이나 좋아할 법한 귀여운 인테리어의 디저트 가게에도 저도 모르게 시선이 머무르곤 했다. 딱히 케이크를 먹고 싶어서는 아니었다. 단 것을 싫어하진 않지만 굳이 찾아 먹을 정도로 좋아하는 것도 아닐 뿐더러, 아버지가 사업 차 손님을 만날 때마다 롤케이크를 선
“…아.” 일정을 보기 위해 휴대폰의 달력을 넘기던 태섭이 작게 탄성을 질렀다. 다음 달 초순경 어느 날짜에 등록된 디데이가 눈에 들어온 탓이었다. 그 아래에는 고딕체의 시스템 폰트로 단 세 글자가 적혀 있었다. 기념일. 가만히 날짜를 세어보던 태섭은 헛웃음을 흘리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벌써 5년이나 됐나. 들고 있던 펜을 책상 위에 툭툭 두드리
정대만은 원하는 것은 쟁취하려 드는 남자였다. 스포츠 선수로서의 승부욕이나 타고난 정복욕 때문이 아니더라도 그는 대개 욕심 나는 것은 가져야만 직성이 풀렸고 마음이 흡족해졌다. 그렇다고 해서 무언가를 갖겠다고 멋없이 억지를 부리는 사내는 또 아니었다. 그는 쟁취하기 위한 노력을 아낌없이 기울일 수 있는 열정을 지닌 사람이었고 그러려면 어떤 전략을 취해야
그날 저는 골목에 쭈그려 앉아 울고 있었습니다. 술 취한 여자가 혼자 훌쩍이는 모습이 꼴사나울 거란 걸 알았지만, 밝고 번잡한 전철이나 버스에서 우는 것보다는 으슥한 골목이 더 낫다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울고 있으니 담배를 피우러 나왔던 사람들조차 가까이 오지 않았어요. 그것도 다행이었습니다. 나의 추태를 혼자만 알면 되었으니까요. 특히 같은 서클 사
“크루즈 여행 가자.” 넓게 펼쳐진 캐리어에 원정 경기를 위한 짐을 싸고 있던 태섭의 손이 뚝 멎었다. 내가 지금 뭘 들은 거냐는 얼굴로 노트북 화면을 향해 삐걱대며 고개를 돌렸다. 반쯤 개어진 옷을 엉거주춤 들고 있는 꼴이 분명 우스워 보였겠지만 화면 속 대만의 얼굴은 놀리는 기색 하나 없이 진지하기만 했다. 크루즈 여행이요? 기가 막혀 되묻자 대
“야, 태섭아. 너 평행세계라는 거 믿냐?” 대만이 뜬금없이 물었다. 테이블 반대편에서 수학 문제를 풀고 있던 태섭이 고개를 들었다. 갑자기 무슨 뜬구름 잡는 소리냐는 시선이 대만에게로 향했다. 대만은 입에 빨대를 문 채 심각하게 생각에 잠긴 얼굴로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각자의 공부를 하려고 모인 자리에서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딴짓에 딴소리나
송가의 남자들은 바다와 연이 깊었다. 누가 가르치지 않아도 물장구를 치고 물고기를 잡을 줄 알았다. 바다 깊이 오래 잠수해도 지치지 않았다. 파도와 물결의 흐름을 손바닥 들여다보듯 훤히 읽어냈다. 그들이 오른 배에는 물고기가 잡히지 않는 날이 없었다. 마치 바다의 사랑이라도 받는 것처럼, 그들은 바다 사람이 받을 수 있는 축복을 아낌없이 타고난 핏줄이
土屋 アンナ - 黒い涙 온몸이 부서지는 것처럼 아팠다. 피부에 입은 상처는 약을 바르고 밴드를 붙이면 되지만 발로 차이고 주먹으로 얻어맞은 배며 가슴의 안쪽은 어떻게 손을 댈 수도 없는 곳이라, 충격을 입은 장기는 계속해서 고통을 호소했다. 누가 조금만 건드리면 그대로 쓰러져서 위액까지 전부 게워낼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여전히 숨을
Penthouse - 雨宿り 체육관에서 나온 태섭을 반긴 것은 콧잔등을 적시는 물방울이었다. 오늘 일기예보에 비 소식이 있었던가. 젖어드는 가방을 뒤져봤자 우산 비스무리한 것은 흔적도 없을 거란 걸 잘 알았다. 쏟아지는 빗줄기를 그대로 맞으며 태섭은 힘없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유달리 힘든 하루, 유달리 지치는 훈련, 유달리 속상한 제 실수와
태섭은 옆에서 잠들어 있는 대만을 바라보았다. 창을 등진 채 태섭 쪽으로 몸을 향한 대만은 아주 평화롭고 온순한 표정이었다. 그 모습을 한참 동안 뜯어보던 태섭은 손을 뻗어 천천히 대만을 매만졌다. 남자답게 잘생긴 얼굴, 짧게 깎은 스포츠머리, 여전히 턱에 남아 있는 작은 흉터, 근육이 잘 잡힌 어깻죽지, 그리고 제 허리를 감싼 팔까지. 태섭이 사랑하는
바다에서 태어난 이는 평생 바다를 갖고 살아간다. 그건 단지 어부들이 말하는 바다 사나이 같은 소리뿐만은 아니다. 어렴풋한 기억이 시작하는 시점부터 태섭에게는 바다가 함께 했다. 눈을 돌리면 바다가 있었고 발을 옮기면 바다가 있었다. 바닷바람을 맞고 바닷물을 맛보며 바다 냄새를 맡는 것이 당연했다. 바다와 함께 태어나 바다와 함께 살고 바다와 함께
어둠이 완연히 내려앉은 공항으로 비행기 한 대가 매끄럽게 들어섰다. 도착 현황을 알리는 전광판의 글자가 ‘착륙’으로 바뀌었다. 대기 의자에 앉아 있던 대만은 하품과 함께 기지개를 한 번 켰다. 미지근해진 커피를 한 번에 들이키자 입이 써 절로 인상이 찡그려진다. 분명 똑같은 프랜차이즈일 텐데도 희한하게 공항 커피는 더 맛이 없다. 그래도 카페인이 들어있
철컹. 현관이 닫히는 소리가 유달리 크게 울렸다. 닫힌 문에 등을 기대고 멍한 눈으로 어두운 천장을 올려다보던 태섭은 그대로 주르륵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하. 힘만 더 드니까 이제는 한숨 쉬지 말자고 다짐한 게 불과 5분 전인데, 몸에서 기운이 빠지자마자 반사적으로 깊은 한숨이 또다시 터져 나왔다. 쿵. 쿵. 뒤통수를 문에 가볍게 부딪히며 태섭은
“아윽……. 흐으…….” 살짝 열린 방문 틈으로 억눌린 신음이 새어 나왔다. 감자칩 봉지를 가지고 나오던 송아라 양은 오빠의 고통스러운 신음을 듣고 발걸음을 멈췄다. 방 안을 넘겨다 보자 조금 전 귀가한 송아라 양의 오빠가 배를 감싸쥐고 웅크린 채 뒤돌아 앉아 있었다. 어깨를 가늘게 떨며 계속 심호흡을 하는 것이 생각보다 많이 힘들어 보이는 모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