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케이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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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앞에서 수많은 사람이 죽어나갔다. 그것이 일개 조직원, 혹은 일반인이었다면 며칠도 채 되지 않아 이름조차 잊어버렸을 텐데. 그게 ‘라텔’이라서, 그 이름 하나를 수없이 되새기는 것은 내게 너무도 쉬운 일이 되어버려서, 그렇게 네가 아닌 너의 죽음의 수를 세어왔다. 237명의, 내가 모르는 너의 시체를 옮기고 237송이의 국화를 사 바쳤다. 이곳에는 마
전혀 곱게 다루어 주지 않으리라는 주인의 의지 표명이 확실한 상처투성이의 스마트폰에서 진동이 울렸다. 방바닥 한가득 분해된 총기의 부품들이 널려있었고, 그 사이에서 답지 않게 느린 손길로 부품을 닦던 엘의 눈이 한순간 날카로워졌으나 곧 누그러졌다. 오랜만에 얻은 휴가니 건드리지 말라 통보한 상태에서 연락을 해오는 간 큰 녀석은 없었고, 정말 급했다면 전화
Prologue. 차가 폭발했다. 이 한 문장으로는 도통 상황을 파악할 수가 없었다. 액정에 금이 간 스마트폰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는 몹시 급했고, 워낙 두서가 없어서 엘은 결국 벌컥 짜증을 냈다. 그래서 뭐가 어쨌다고? [언더보스가 휘말리신 것 같습니다.] 순간 무슨 생각을 했더라. 그 폭발이 차가 아닌 제 머리에서 일어나기라도 한 듯
최근,이라고 할까. 요 몇 년 새 생긴 취미 중 기묘한 것을 꼽자면 넬슨 대륙에 풀려있는 이종족에 관한 책을 수집하여 읽는 일이었다. 독서라는 행위 자체는 그다지 이상한 게 아니다. 그 오랜 시간 동안 지하에 틀어박혀서 자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일이 달리 있었을까. 하지만 특정 소재에 집착하는 일 없이 손에 집히는 대로 읽는 타입이었다는 것이 지금과 다
하신이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슬금슬금 고개가 내려가더니 푹 꺾이기 직전 다시 번뜩 올라온다. 손바닥보다 조금 큰 정도의 소설책을 한 손에 든 채 가만히 읽고 있던 아이나르는 어이없다는 눈으로 하신을 쳐다보았다. 왜 이렇게 불편한 자세로 졸고 있는 건지. 원래 성질같아선 그 답답한 꼴을 못보고 당장에 깨워 들어가서 자라고 등을 떠밀었을 아이나르였으나 오늘
신이 떠나갔을 때 나는 그를 위해 단 한 방울의 눈물도 흘리지 않았다. 내가 울던 것은 분한 탓이요, 비참하기 때문이었으며, 그 누구도 우리 두 사람을 구원하지 못함을 알았지만, 오직 너만이 나를 나만이 너를 구원할 수 있음은 모르는 무지한 사람이었던 까닭이다. 그 어느 날. 하늘은 어땠고, 계절이 어땠고. 모든 것이 잿가루로 문댄 것처럼 검고 흐릿했으나
기나긴 세월 속에 제일 먼저 무뎌지는 것이 바로 시간 감각이 아닐까. 어차피 나이 차이 따위 아무짝에도 소용없어질 것을 알면서도 아이나르는 늘 하신에게서 형이라 불리고 싶어 했다. 하신은 작은 아이였다. 아이나르도 작은 아이였던 시절이 있었으나, 그때에도 하신은 그보다 더 작고 여렸다. 고작 한 살 차이라고는 하지만 그의 막내라는 위치와 자그마한 몸은 아
추억이란 사실 별거 없다는 사실을, 아이나르는 꽤나 뒤늦게 깨달았다. 한자리에 머물러 있는 것을 좋아 하... 기보다는 움직이는 것을 내켜 하지 않는 그에게 굳이 돌이켜 곱씹어 보고 싶을 만한 기억이 없는 탓이었다. 이제는 제대로 기억조차 나지 않을 만큼 오랜 옛날에 떠나버린 부모. 자신의 자식과도 같은 종족이 아닌 생판 남에 이기적이기까지 한 인간들을
비가 오면 전선은 한층 고요하고, 치열해진다. 빗소리 뒤로 감춘 비밀스러운 발소리가 몇이요, 웅덩이에 섞여 흐려진 핏방울이 몇 개인지 셀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으랴. 높은 나뭇가지 위에 앉아 전황을 살피던 새 한 마리조차 모두 헤아릴 수 없는 혼란이었다. 온 깃털이 척척히 젖어 볼품없이 말라 보이는 새는 그 빛깔만큼은 가시지 않아 온통 화려했다. 붉은
욕망이란 어려운 것. 입 밖으로 내는 것도, 실현하는 것도 무엇하나 쉬운 게 없기에 사람들은 그것을 원한다. 굳이 찾지 않아도 아무렇게나 손에 들어오는 것을 사람들은 '욕망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눈에 보이지만 손을 뻗으면 닿지 않는 그런 것들, 하여금 어느 순간 '갖고 싶다'라고 생각하게 하는 것들이 있다. “네가 원하는 것을 말해.” 비스바나는
엘은 식은땀을 흘리며 침대에 앉아있었다. 한밤중이었다. 몹시 어두웠고. 몸부림치듯이 일어난 자세 그대로 꼼짝도 못 하고 제 다리에 휘감긴 이불을 응시할 뿐이었다. 그 모습은 영락없이 악몽에 시달린 사람이었다. 그렇게 대부분의 사람이 예상할 수 있듯이, 그래. 엘은 악몽을 꿨다. 엘은 어디선가 날아온 총알에 머리를 맞았고, 그 자리에서 손쓸 틈도 없이 죽었
“이건 또 무슨 재앙이야.” “큽…!” 엘이 무심코 중얼거리자, 인이어에 연결된 팀원들이 황급히 소리를 끄는 차단음이 동시다발적으로 들려왔다. 그리고 두 사람을 제외한 모두가 타이밍이 늦어 터진 웃음을 미처 숨기지 못한 누군가의 명복을 빌었다. 한 사람은 누가 어떻게 되어도 별 신경을 쓰지 않는 엘이었고, 다른 한 사람은 그 누군가를 작신 밟을 예정의
앞면이 있으면 뒷면이 있고 빛이 있으면 그림자가 생긴다는 세상의 당연한 이치처럼, 이제는 곧 자동차도 날아다닐 거라 떠들어대는 찬란히 발달된 문명시대라지만 그 이면에는 여전히 변하지 않는 것들이 존재했다. 사람들이 지나다니며 무심코 버리고 간 쓰레기가 그득히 썩어가고 피우다 남은 담배꽁초가 백골처럼 쌓인 골목. 부서진 콘크리트에서는 채 마르지 못한 페인트
처음 입대할 때 했던 질문을 기억하나요? 어떤 군인이 되고 싶냐고 물었죠. 나는 대답했어요. 사람을 지키는 군인이 되고 싶다고. 결국 되지 못했어요. 나는 사람을 지키는 군인이 아니라, 괴물을 죽이는 군인이 되었어요.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것뿐이었어요. 당신들이 내게 그것만을 가르쳤으니까. 한때는 착각했어요. 내가 정말 사람들을 지키고 있다고. 하지만
레파르시아의 능력은 공격계라 하기엔 단박에 큰 화력을 낼 수 없었으나 다양한 패턴의 공격수단이 있었고, 방어계라 하기엔 조잡하다 할 수 있으나 여러 위협에서 몸을 지킬만한 정도는 되었다. 어두운 공간에서 빛을 내거나, 허공에 발판을 만들어 몸을 띄우는 등의 보조역할도 수행하였으니 잡탕이라 하여도 할 말은 없다. 만능이라 하면 만능이라 할 수 있었고, 애매
끈적하게 흘러내릴 듯한 짙은 꿀색의 술은 그 달콤한 색과 달리 홧홧한 알코올향을 남기며 목구멍을 훌렁 넘어가버렸다. 폐점시간이 다가오는 늦은 새벽. 마지막 손님의 무모한 원샷 장면을 눈 앞에서 지켜보던 마스터가 호두턱을 만들며 얼굴을 구겼다. "그렇게 먹지 말라고 했잖아요. 몸도 안좋으면서. 전에 피를 토하던 장면이 아직도 생생하다고요." "그건 지병이
"잠깐만요! 노이즈씨?" 병원을 나서려던 찰나 레파르시아의 발걸음을 붙잡은 것은 간호사의 목소리였다. 익숙하다 생각했더니만, 이안의 병실을 관리하여 자주 마주치곤 했던 간호사였다. 간호사는 걸음이 왜그렇게 빠르냐며 숨을 몰아쉬곤 웃었다. 레파르시아는 갑작스레 불안해져 이안에게 그새 무슨 일이 생긴 거냐고 물으려다가, 그 웃는 얼굴을 보곤 다른 용건임을
병실의 문을 열자 복도에서 풍기는 것보다 더욱 진한 소독약의 냄새가 코를 찔렀다. 싫어하는 것은 아니지만 절대로 익숙해질 일은 없을거라 생각하며 안으로 들어선다. 문을 여는 소리에 누워있던 병실의 주인은 바스락거리는 이불을 걷어내며 몸을 일으켰다. 다리를 꼼꼼히 감싼 붕대에 잠시 시선이 가고, 눈을 든 레파르시아는 미소지으며 인사를 건넸다. "잘 지냈어
레파르시아 레데르타에게 실패란 두려운 것이 아니다.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없고, 어떤 일을 똑같이 해도 어긋나는 날이 오기 마련인데 실패를 하나하나 따지고 들자면 사람은 이 세상에서 가장 쓸모없게 될 터였다. 그러므로 지금 느끼는 것은 단지, 남은 괴물들의 새끼를 전부 불태우지 못하고 남기고 온 분노. 쏟아내지 못한 감정이 타오르는 숯덩이를 삼킨 것마냥
“새하얀 번개가,” 뜸을 들이며 입을 다무는 사이 으득, 이를 가는 소리가 섬뜩하니 울렸다. [ 내리치고 ] [ 내리치고 ] [ 내리치고 ] [ 내리치고 ] 도막도막 느리게 끊겨 나오는 어절은 희번득 빛나는 창이 되어 쉼없이 내리꽂혔다. 구역질이 날 만큼 눌러담아 벼려낸 감정이 목에서 울려 혀를 타고 끊임없이 흘러나온다. 내비칠 것조차 남지 않아 그
[내일 하늘이 두 쪽 날지도 몰라.] 스마트폰 스피커 너머로 깔깔대는 목소리가 고막을 때렸다. 꽤 오래 알던, 나름 친구라 칭할 만한 인물이지만 저 경박한 웃음소리는 영 적응이 안 된다. 미간을 찌푸리며 폰을 잠시 멀리 떼었다가 다시 귀에 붙은 엘은 못마땅한 목소리로 다시 말했다. “그래서 받는다고 만다고?” [아, 어. 받아야지! 드디어 배은망
“고생하셨습니다.” 너덜거리는 몸을 이끌고 돌아온 파트너는 간신히 목소리를 끌어올렸다. 오늘 임무의 난이도는 평소보다 높았지만, 평소보다 쉬웠고, 그 어느 때보다도 힘들었다. 그 이유는 당연히 보스가 임시로 불러들인 그 유명한 ‘전 카포’ 탓이었다. “저, 엘그비르 씨.” “왜.” 엘은 기분이 좋아 보였다. 임무 내내 늙은이 어쩌고 죽어라 저
일개 건달부터 정부에서조차 함부로 손댈 수 없는 마피아까지 온갖 더러운 인간군상이 밀집된 지역이라지만 어차피 그들은 범죄자에 불과했기에 그들이 활동하는 장소의 대부분은 버려진 시가지 따위일 수밖에 없었다. 토박이 수준의 엘은 조금 과장 보태면 눈감고도 길을 걸어 다닐 수 있을 정도였다. 왜 과장을 보태야만 하느냐. 그것은 매일 같이 벌어지는 크고 작
엘은 술을 그리 즐기는 편은 아니었다. 못 마신다는 건 아니고, 상황이 될 때나 마시지 굳이 혼자서 바에 찾아와 스트레이트로 마셔댈 만큼 좋아하는 건 아니라는 소리였다. 그러니까 ‘굳이 혼자서 바에 찾아와 스트레이트로 마셔대는’ 엘의 행동은 이상한 것이었다. 같은 카포- 즉 라텔 밑에 속한 스나이퍼 팀의 A는 지금 저기 앉아있는 사람이 엘이 맞는지 잠시
“들어간다.” 감히 라텔의 사무실에 노크 한번 없이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얼마나, 라고 해봐야 고작 두셋? 그 안에 엘이 들어있는 것은 말하면 입 아픈 사실이었다. 들어간다는 예고야 뭐, 들어오라 말라 허락조차 받지 않는데 의미가 있을 리 없었다. 문을 벌컥 열고 들어갔지만 이미 익숙해졌기에 안에서는 놀란 기색 하나 없다. 다만 오늘은
“화이트데이가 뭔데.” “와, 그거 진짜 상처받는 발언이네요.” 아이나르의 싸늘한 시선이 하신에게 닿았다. 말이 '싸늘하다'지, 애초부터 눈매가 사납고 더러운 아이나르였으므로 지극히 덤덤하고 일상적인 눈빛이었다. 아이나르는 받지도 않은 상처에 가슴을 움켜쥐는 하신을 보며 정말로 싸늘해지려는 시선을 다잡았다. 이 호들갑스러운 드래곤같으니. “상처받
어쩐지 눈이 시리다 했지. 아이나르가 차가워진 모래 속에서 머리를 드러내고 몸을 추켜세우자 새까만 산이 불쑥 솟아오르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그의 몸 위에 쌓여있던 모래더미가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렸다. 모래찜질하며 잠깐 잔다는 것이 한나절이 지나버린 모양이다. 슬쩍 고개를 돌려보니 옆에 있어야 할 하신이 보이지 않았다. 아이나르는 온몸이 경직되는 것
온종일 비가 내렸다. 어제까지만 해도 흙먼지가 훌훌 날릴 만큼 메말랐는데. 또 트로비가 무슨 심술을 부린 건지…. 아니, 어쩌면 기분이 좋아서 그런 걸지도 모르겠다. 뭐든. 사실 트로비가 기분이 좋든 싫든 노래하며 춤을 추든 그것은 까맣고 작은 드래곤이 상관할 바는 아니었다. 그러나 ‘비가 하루 종일 내린다’라는 것은 그에게 꽤나 큰 심각성을 안겨주었다
- 이름 : 엘그비르 델론 / Elgvir Delon - 키 : 175cm - 몸무게 : 62kg - 나이 : 32세 (+α) - 외관 : 대충 잘라 뻗친 어두운 적갈색 머리카락. 평소에는 무스 따위로 넘겼으나, 그것도 이제는 귀찮아진 듯 내리고 있는 경우가 많다. 대체로 무덤덤한 표정으로, 약간 날카로운 눈매와 오른쪽 눈밑의 찢어진 흉터가 성격이 나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