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린스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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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즈키, 잠깐 여행 다녀오자.” 대화의 요령이란 발화된 말을 듣고는, 거기에 담긴 속뜻을 추정한 뒤 상황과 입장에 맞게 답하는 기교라 할 수 있겠다. 아키야마 미즈키는 생각한다. 방금 자신이 들은 여행이란 단어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일단은 유연하게 해석해본다. 오다이바 레인보우 브릿지 인근의 유명 디저트 가게에서 얼마 전 판매 개시 했다는 여름
흘러내린 눈물이 뺨을 적셨다. 축축하게 스며드는 물기가 괴로워 옅게 신음하다가, 아가씨는 눈을 떴다. 온통 어두워 무엇도 보이지 않지만 코에 닿는 냄새는 익숙하다. 외롭게 홀로 떨고 있지 않아도 된다고 다독여주는 듯한 안온한 향기. 손등으로 눈가에 남은 눈물을 닦아내고는 아사히나 마후유는 상체를 일으켰다. 덮고 있던 얇은 이불이 사르륵 흘러내린다. 이불의
아사히나 마후유는 착한 아이다. 정말이지, 아사히나 마후유는 착한 아이다. ‘착하다’ 는 표현의 정의가 다소 협소할지라도, 그녀를 두고 착한 아이라고 평하는 이들의 의도는 가감없이 표출되고 전달된다. 유치원에 들어가던 시절부터 의무교육 시기를 지나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지금에 이르기까지, 마후유는 단 한순간도 빠짐없이 언제나 착한 아이였다. 이 세상 부모들
3월의 하늘은 맑았다. 봄이 시작되는 시기였지만 불어오는 바람에는 포근함을 시샘하는 겨울의 질투가 묻어났다. 목의 리본을 매만진 다음, 아사히나 마후유는 가디건을 걸쳤다. 거울을 마주하고 옷매무새를 가다듬으며 아가씨는 찬찬히 자신의 모습을 훑었다. 단정한 교복에 붉은 리본, 짙은 검은색 스타킹. 지난 몇 년 동안 매일 같이 입으며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1.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실로폰 건반 두드리듯 울린다. 장마가 시작되기에 앞서 빗물받이 배수관을 한 차례 정비했다는 이야기를 듣긴 하였다. 배수관을 정비하는 과정에서 처마 아래로 뻗은 빗물길이 비스듬하게 설치된 걸지도 모른다. 기울어져서 높이가 달라진 이음매마다 빗물이 고이고, 아래로 뚝뚝 떨어지는 물방울들은 각기 다른 위치 에너지를 가진 채 툭 뻗어
누군가가 생전 안하던 일을 하겠다고 나서면 그건 위험 신호라고 했던가. 그 뜬금없는 행동이 심경의 변화를 암시하는 지표로 보이지 않더라도 촉각을 곤두세울 일이다. 일상의 궤적을 벗어나는 행동은 예측할 수 없는 결과값을 만들어낸다. 평소와 다르게 행동하는 사람이 있다면 관심을 기울여야만 하겠지. 당사자가 따라붙는 관심을 곤란하게 여기더라도 주의 깊은 관찰은
<상술된 내용과 같이 ‘고금저문집’ 에서는 뱀을 질투의 상징으로 묘사하였습니다. 다른 이를 질투한 경험이 있습니까? 있다면 그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본문에 제시된 내용에 대한 의견을 서술해봅시다.> 언젠가 작문 수업의 과제로 주어진 문항을 앞에 두고, 아사히나 마후유는 한참 동안 아무런 문장도 쓰지 못했다. 소녀에게 있어 질투란 막연하게 부정적인 어감을 가
가을이 이르게도 겨울의 스산함을 흉내내기 시작한 시기였다. 계절이 바뀌어도 공기가 차갑고 건조해질 뿐 세상이 돌아가는 원리는 그리 달라지지 않을 터였다. 언제나의 일상이 질리지 않을 만큼의 양념만을 곁들이며 하루하루 반복되리라. 그런 염세적인 예측은 깜짝 놀랄만한 대사건으로 인해 일부나마 깨어졌다. 대사건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시노노메 에나가 공모전에서
*첫째 날 09 : 40, 역에서 / 요이사키 카나데 x 시노노메 에나 기차의 출발 시간은 오전 10시 20분이었다. 역에서 만나기로 약속한 시간은 9시 45분. 그리고 시노노메 에나가 역에 도착해 상대를 기다리기 시작했던 시간은 오전 9시 10분. 30분이라는 시간 동안 에나는 역 한켠의 의자에 앉아 전날 약속 상대와 나눴던 메신저의 대화 내역을 질리
“고백받았어.” 말하는 어조가 워낙에 평이했기에 소녀는 상대가 이번에 마신 차에 대해 품평을 남기는 걸로 착각하였다. 그랬기에, 한 박자 늦게 말의 의미를 인지하고 어깨를 움찔 떨어버렸다. 복숭아꽃차에서 복숭아 과즙 맛이 나는 건 어떻게 된 일인지, 과실의 달콤함과 꽃의 향긋함은 별개의 사안 아니었는지에 대해 고민하던 내용은 싹 잊어버리게 된다. 고백을
<아, 죽었다.> 느슨한 침묵을 깨고 톡 튀어나온 말은 뜬금없어서, 고개를 숙인 채 제각기 다음 곡을 위한 작업 아이디어를 모으던 이들 모두의 주목을 끌어버린다. 죽었다니, 뭐가? 나이트코드 멤버들의 작업은 어디까지나 곡을 만들고 가사를 입히며 거기에 어울리는 아트로 꾸며진 MV를 제작하는 선에서 그친다. 졸리고 어지러워서 죽을 거 같아, 라는 한탄은 마
“소문대로의 위용이네. ‘정상에 트뤼플을 올린 초코 시럽 가득 캐슈넛 퓌레 가득 호화 극치 가을맞이 계절 한정 몽블랑’ 이란 이름 그대로야. 이건 어느 각도에서 찍어도 반응을 잔뜩 끌어내는 사진이 되겠어!” “그 이름을 다 외웠구나. 직원도 주문 받을 때 그냥 한정 몽블랑이라고만 하던데.” “홍보하는 걸 봤을 때부터 반드시 먹을 거라고 점찍어뒀거든. 아이리
제자백가 중 하나인 열자가 남긴 말이다. 궁도란 무심의 경지에 달해 활을 쏘는 것이기에, 유심의 상태로 당기는 활로는 그저 궁술을 행할 뿐이다. 무심에 이른 이는 화살이 과녁에 닿을지 염려하지 않는다. 그저 시위에 물린 화살을 때가 되어 놓아줘 자연히 목표에 닿게끔 만든다. 주변이 아무리 소란스럽더라도 마음은 한 점 흔들림 없이 평온하여 올곧게 나아간 화살
어느 평론가가 말했다. 성공한 작품에는 일상의 의외성과 비일상의 친숙함이 공존한다. 세상은 일탈을 꿈꾸게 해주는 이야기를 좋아할 뿐, 일탈을 유발하는 이야기는 좋아하지 않는다. 언제나 품고 다니는 극히 날것의 욕망, 있는 그대로 직시하기엔 때로는 추악할 수밖에 없는 그것을 조금 색다르면서 정당한 모습으로 바꿔 선보여주길 기대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받아들이
“하이드 씨 최면?” “원래는 내면 심리 어쩌구 관련 기제 각성 저쩌구 하는 이름이던데, 알지도 못할 말 길게 써두면 복잡하잖아. 그래서 다들 그렇게 부르나봐. 여기, 쓰는 법 간단하다구?” “흐응-” 들이밀어진 액정에는 곁눈질로 보기만 해도 벌써 속이 울렁거리는 화상이 흐르고 있었다. 지켜보기 괴로울 정도로 명도와 채도가 높은 무지개색이 부담스럽게 번쩍
그건 무더위가 찾아들기 전의 이른 여름, 휴일이 끝난 뒤 돌아온 어느 월요일이었다. 학년이 바뀌고 2달 가량의 시간이 흐른 시점이었기에 사교성이 좋은 아이들은 일찌감치 무리를 지은 터였다. 이마이 리사 또한 활발한 성향의 아이들 사이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당연하다 싶을 정도로 자연스럽게. 타인의 말을 잘 들어주고, 얼핏 보기에 사소한 일에도 신경을 기울여
관계를 유지한다는 건 저울의 균형을 수평이 되도록 계속해서 조정하는 일과 비슷하다. 저울이 한쪽으로 기울어지면 반대쪽에 힘을 실어주되 역으로 치우치지 않게끔 그 강도를 조절하고, 양쪽의 균형이 맞춰진다면 그 상태가 계속 유지되는지 쭉 지켜봐야만 하겠지. 과하지 않게, 덜하지도 않게 오는 만큼 다시 돌려주며. 정말로 간단하면서도 동시에 조금도 쉽지 않은, 그
하필이면. 정말이지 하필이면- 이라고, 요이사키 카나데는 한탄한다. 1980년에 제작된 고전 호러 스릴러 영화가 하필이면 느긋하게 숨을 돌리던 저녁 시간 눈에 들어온 게 사태의 시발점이었다. 물론, 단순히 무서울 뿐인 영화라면 카나데가 자발적으로 그를 감상할 일은 없었겠지. 호러 스릴러란 장르에 맞지 않게 고명한 클래식 음악가가 삽입곡을 담당한 작품이었다는
“이거 봐, 요즘 입소문 탔다는 배스밤이라는데 물에 넣으면 엄청 예쁜 색이 나온대. 노을 하늘에 몸을 담그는 기분이라나.” “노을이라기보다는 홍차물을 담아둔 거 같은데.” “감수성 없네. 노을이야, 노을! 무슨 아저씨 같은 소리를 하고 있어. 딱 봐도 예쁘잖아.” “투명하게 맑은 느낌이긴 하네.” “괜히 인기 많은 게 아니겠지. 보기에 산뜻한 기분이 들어야
편의점에 들어설 때만 하더라도 시노노메 에나는 무엇을 마시는 게 좋을지에 대해 골몰하고 있었다. 일기예보에서 말했던 이상으로 해가 가혹하게 쨍쨍한 날씨였다. 미술학원을 마치고 나오는 순간부터 아가씨는 갈증을 느꼈던 터였다. 적당한 수분을 공급받지 못한다면 집에 도착하기 전에 길가에서 뻗어버릴지도 모른다. 학원 내에 정수기가 있긴 하지만, 밍밍한 냉수를 들이
지루함에 우열을 두기란 쉽지 않다. 특색없고 밋밋하여 아무런 가치도 매길 수 없기에 지루하다고 평하게 되는 거라면, 이 세상 시시한 것들은 하나같이 몰개성할 수밖에 없을 터. 어느 쪽이 더 시답잖고 무의미한지를 판별하는 건 공기를 저울에 달아보는 행위만큼이나 쓰잘데없다. 허망함에 제멋대로 값어치를 매긴다고 누가 그걸 사주기라도 할까. 그러니 어제와 오늘 중
히노모리 시즈쿠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초가을 공활한 하늘 위로 비행기 구름이 일자 궤적을 그리고 있었다. 청명한 배경 속으로 조금씩 흩어지는 흔적을 멍하게 바라보다가 아가씨는 문득 생각하였다. 하늘은 어떠한 벽도 없이 넓게 열려있으니, 비행기 씨는 길을 헤매는 일이 없으려나- 하고. 아니, 오히려 기준점으로 잡을 지표가 없어 더 헷갈리게 되려나. 이쪽도
아키야마 미즈키가 새로 개장하는 화장품 전문 매장, ‘코스메 아 라 모드’ 에서 일하게 된 과정에는 약간의 사연이 있었다. 개장일에 맞춰 짧은 기간만 일하는 임시 근무일 뿐, 원래 일하고 있는 의류 리폼 아르바이트를 그만두는 건 아니다. 정식으로 고용 계약을 하는 형태였다면 미즈키는 새로 생기는 매장에서 일하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을 터였다.
치킨 카레 도리아 한 그릇과 모듬 오뎅 한 봉, 거기에 생크림 모찌 롤케이크. 아사히나 마후유가 사온 식사는 화려하지는 않아도 제대로 후식까지 갖춰져 있어 구성이 충실했다. 편의점에서 공수해온 음식들이란 점을 생각하면 이보다 고급스럽기를 기대하기도 힘들겠지. 얄팍한 크기의 컵라면 하나와 비교하자면 흠잡을 구석 없는 만찬이다. 요이사키 가로 들어서자마자 식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