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록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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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숨을 쉬며 템페스토는 의자에 앉았다. 다행히 체온이 더 이상 떨어지는 건 어찌어찌 막았지만. 마력 보충제, 기력 회복제를 줄줄이 달고 누워있는 여자는 하루가 다 지나도록 여전히 미동도 없었다. 처음에 봤을 때는 어디서 시체를 주워온 줄 알았다. 온몸은 얼음장 같고, 마력은 거의 남아있지도 않아서 숨만 겨우 붙어서는. 요새 좀 잠잠하나 했더니만 또 이렇게
이레시아는 이제는 위장이 쥐어뜯기는 것 같은 고통에 잠시 숨을 골랐다. 평범한 슬라임 같은 하등 괴이가 아니였다. 표면이 어떤걸로 뒤덮인 지는 몰라도 닿는 것은 모조리 녹이려 드는 것 같았다. 적어도 집 한 두 채는 부숴버릴 파괴력을 가진 이그니스도 통하지 않았다. 저것도 현자의 돌의 힘인가? 그렇다면 아예 흔적조차 남지 않도록 날려버리는 건 어떨까.
록하트 산맥은 거대하니 마음 먹고 숨어들면 그들을 찾아내지 못할 것이었다. "인간의 삶은 이제 끝났어. 뒤돌아봐도 돌아갈 수 없어." "흐윽... 흡...!" "인간의 삶은 모두 잊고 이제부터는 괴이로써 살아가도록 해." 자꾸만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프리실라가 그녀를 올려다봤다. 그 모습이 아이린과 닮아 설핏 웃음이 지어졌다. "아무리 엿 같아도
생각 이상으로 잘 짜인 판국에 너무나도 잘 놀아났다. 우연으로 시작된 골목길에서부터, 의도된 길로 안내하던 그 모든 이야기까지. 하지만. "미안하지만 여기서 그만둬야겠어, 프리실라." "... 싫다고 하면 어쩌시겠어요?" "우리는 아직 그자가 필요해. 그 남자가 가짜 현자의 돌의 위치를 알고 있어. 이 모든 일을 끝내려면 여기서 죽게 할 수는 없어
"저것 좀 봐, 쥰아." 저런 건 처음 봐. 아이린이 하늘로 치솟아 오르는 불기둥을 가리켰다. 도시 경비원들이 허둥지둥 그곳으로 인원을 충당하는 모습도 보였다. 벌써 한 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 꺼지지 않고 계속 타오르고 있었다. "뭐지? 마법인가?" 쾅...! 그러다 느닷 없이 열리는 문에 화들짝 놀라 동화책을 떨어트렸다. 뚱한 얼굴로 함께 있던
"프리실라!!" 늦은 시간, 여관에서 한창 마감 청소를 하던 프리실라가 놀라 걸레를 떨어트렸다. 요새 카일과 한창 붙어 다니며 사고를 치고 다닌다는 술주정뱅이 남자였다. "마, 마루? 무슨 일이야?" 프리실라는 본능적으로 그를 경계하며 주춤거렸다. 마루는 웬일로 술에 얼큰하게 취하지 않고 멀쩡한 상태였지만, 사사건건 폭행 시비를 일으키기로 유명한 건달
하여간. "으억!" 달려드는 사내의 뒷목을 내리쳐 기절시킨 이레시아는 성가시다는 듯 혀를 찼다. 벌써 몇번째야. 처음 늑대와 둘이서 왔을 때와 달리, 빈민가로 향하는 골목길 내리 하루살이들이 달라붙었다. 히아센이 급하게 준비해온 드레스와 구두 차림으로 이런 골목길을 혼자 함부로 거니는 것이 저들 눈에는 굴러들어온 먹이나 다름이 없겠다만. "골목길
이레시아는 편편한 돌 위에 앉아 쏟아지는 햇살을 맞고 있었다. 한 손으로 턱을 괸 채 그녀는 문뜩 이렇게 한가롭게 햇빛 아래 있어 본 게 오랜만이라는 사실을 떠올렸다. 원래라면 햇빛은 질색이었을 텐데, 오늘은 그다지 나쁘지 않았다. 어쩌면 하루 반나절을 꼬박 광산 안을 헤매다가 나와서 그런 걸지도 모르고. 그나저나, "날 새겠구나." 햇살 아래 나
"누가 보면 목숨이 여러 개 되는 줄 알겠어." 저 지옥 속으로 알아서 기어들어 갈까 고민하는걸 보니까 말이야. 붉은 눈이 가늘게 좁혀졌다. 뭐든 도망칠 수 있을 때 도망치는 것이 좋다. 더 늦으면 돌이킬 수 없을 테니까. 그녀처럼. "되지도 않는 고집 부릴 생각이면 나갈 길이나 찾아." "어쩐지 기분이 좋지 않아 보이네." 이레시아는 대꾸도 없이
햄스터 이야기를 할 거면 하지도 않았을 거다. "햄스터가 서로 농담 따먹기는 하지 않지." 그래서 더 미치겠는 거지. 도저히 말이 안 통한다고! 히아센은 어쩐지 점점 머리에 열이 오르는 것 같았다. "그래 놓고는 다른 사람은 절대 못 건들게 한다니까?" 프리실라는 어쩐지 땀이 삐질 나는 것 같아 말없이 웃음만 흘렸다. 고민 상담 같은 건가, 이거?
이레시아가 숨을 헐떡거리며 돌무더기 위로 흠뻑 젖은 모습을 드러냈다. 다른 한 손에는 축 늘어져 간헐적으로 기침을 내뱉는 늑대의 뒷덜미를 잡고 있었다. ... 하여튼. 이레시아가 이를 악물고 그를 돌 위로 질질 끌어올렸다. 뭐가 아래는 물이라서 다행이라는 거야? "콜록! 콜록!" 이레시아는 늑대의 옆에 주저앉아 거칠게 기침을 하며 물을 토했다.
늑대는 땅을 박차더니 단숨에 독사들 사이로 파고들었다. 날카로운 독니를 드러낸 독사들이 아가리를 벌리고 달려들었다. 그러나 독니가 채 닿기도 전에 이레시아가 쏘아 올린 칼날 같은 바람에 머리가 썰려 나갔다. 이레시아의 두 손에서는 끊임없이 수식들이 피어올랐다. "뒤는 신경 쓰지 말고 달려!" 이레시아의 말에 늑대는 빠르게 달려 나갔다. 검을 휘둘때마다
빠르기도 하지. 이레시아는 히아센이 늘어놓은 옷가지들과 소지품을 내려다봤다. 밤늦게 돌아온 히아센은 어딘가 속이 좋지 않은 얼굴로 그것들을 내려놓고, 작고, 투박하고 역겨워. 더러워... 더러운걸 봐 버렸어... 라며 울상을 짓고는 사라져버렸다. 늑대는 미간을 좁힌 채 제게 떠넘기고 간 봉투를 뒤적였다. "그건 뭐야?" 이레시아의 질문과 함께 봉투
"저는 맹세코... 단 한 번도 응한 적 없어요." "..........." "한 순간도..." 프리실라는 손가락에 걸린 반지를 보며 읊조렸다. 세 사람은 아무 말 없이 그녀를 응시할 뿐이었다. 갈색 눈에 눈물이 가득 차오르는가 싶더니 이윽고 그녀의 얼굴이 일그러지며 참고 있던 말이 터져 나왔다. "단 한 순간도 원한 적 없어요!" 붉은 반지 위
욕실에 들어선 이레시아는 떨리는 손으로 벽을 짚었다. 얼굴로 흘러내린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고개를 들자 거울과 눈이 마주쳤다. 채 붙잡아 두지 못한 매혹의 힘이 스멀스멀 흘러나오고 있었다. 아, 이런. 이레시아는 잠시 눈을 감으며 그것을 갈무리 했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아까보다 확연히 줄어든 것이 보였지만, 아지랑이처럼 피어나오는 것은 어쩌질 못했다
늑대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누군가 찾아오기에는 너무 이른 시간대였다. 책을 덮고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늑대는 붙잡힌 옷깃을 보며 잠시 고민에 빠졌다. 똑똑. 그러나 다행히도 다시 한번 울리는 노크 소리에 이레시아가 뒤척였다. 반대편으로 돌아 누워 쥰을 끌어안은 것을 본 늑대는 문밖의 불청객을 응시했다. 이 시간에 객실 청소를 하러 오진 않을 테고. 소
어째서 이런 꿈을... 왕은 이레시아를 끌어당겨 이마 위에 짧게 키스를 떨어트리며 토닥거렸다. "왜 벌써 깼어, 아가." 더 자자. 왕은 잠긴 목소리로 이레시아를 끌어안았다. 그녀의 눈이 낮게, 저 아래로 침몰했다. 제발 그만... "... 꿈이라면...... 제발, 그만해..." 달달 떨리는 입술에서 흐느끼는 것 같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등
복도를 거닐며 이레시아는 생각에 잠겼다. 어딘가 석연치 않은 기분이 드는데... 그들 사이에 무슨 일이 있던 건지는 몰라도 확실한 건, 프리실라는 뭔가를 알고 있다는 거였다. 마음 같아선 매혹의 힘으로 아는 걸 다 떠벌리게 하고 싶었지만... 순간 느려지던 발걸음이 다시 움직였다. 고작 한 번의 정신 지배로도 인간의 정신력은 쉽게 무너질 정도로 약했다.
쥰은 볼을 부풀린 채 창밖을 내다봤다. 아이린은 그 옆에서 괜스레 꼼지락거리며 주의를 끌고 있었다. "너 이름이 쥰이라며?" "........" "내 이름은 아이린이야. 아이린 오르테즈." 쥰은 여전히 뚱한 얼굴로 그녀의 통성명을 무시했지만 아이린은 끈질기게 계속 말을 걸었다. 겨우 할아버지를 찾아달라 부탁해놓고 이제 와서 무를 수는 없는 일이었다.
처음 이 집에서 나던 역겨운 곰팡이 냄새의 원인은 이것이었다. 그것은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울 정도로 거대한 몸집에 검은색의 광택이 흐르는 몸을 가지고 있었다. 잔 가시가 나 있는 6개의 다리와 긴 더듬이를 가진 거대한 벌레. 바선생. 더럽고 습기가 높은 곳에 더러 나타나는 거대 곤충이었다. 문이 열린 걸 알아차린 듯 더듬이가 이리저리 움직였다. 필시
거리는 이미 개와 늑대의 시간이었다. 이레시아는 제 옆의 남자를 올려다봤다. 검정 일색의 사제복을 입은 남자는 목의 로만 칼라가 답답한지 손끝으로 그것을 느슨하게 잡아당기고 있었다. "불편해?" "... 편하진 않지." 당연한 소릴 묻는다는 듯 늑대가 대답했다. 다른 건 다 괜찮지만 이 목을 조이는 듯한 로만 칼라는 시간이 지나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쥰은 그래서 이제 괜찮은거야?] 마력으로 불러낸 통신 아티펙트 너머로 히아센의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늑대는 쥰의 방에서 조금 떨어진 테라스에 있었다. 방금까지 한바탕 난리가 있던 것 치고 날씨가 좋았다. 그게 어딘가 아이러니해서 점차 노을이 지고 있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그 붉은 빛이 여자의 눈동자와 어딘가 닮아있었다. '괜찮아. 그 사람들
"그런 이야기는 못 들었는데." 이레시아가 프리실라에게 들은 건 약혼자에 대한 이야기 뿐이었다. 설마하니 약혼자는 죽고, 조부는 이번 사건에 휘말려 실종 상태라는 건가? 게다가 아직 한참이나 어린 동생까지. 이레시아의 눈빛이 깊어졌다. 짊어지고 갈 것들은 많고, 앞날은 가시밭길이 따로 없는 여러모로 기구한 인생의 여자네. 게다가 아까 골목에서 위협했던
"어느 신전의 사제인지는 알고 있나?" 프리실라와 대화는 계속 이어졌다. 그녀의 질문에 프리실라는 생각에 빠진 듯 잠시 말이 없었다. "정확히 이름은 기억나지 않지만... 분명, 쌍둥이 여신을 섬긴다고 들었어요." "쌍둥이 여신이라면..." 서로 등을 맞댄 채 기도 하는 쌍둥이 여신상의 모습이 떠올랐다. "클레어와 테레사." "앗, 맞아요! 어어
프리실라가 안내한 여관은 낡았지만, 부지런히 관리해서인지 그럭저럭 나쁘지 않았다. 전망이 잘 보이는 큰 창문부터, 삐걱거리는 소리가 조금 나지만 깔끔한 침대까지. 아마 이 여관에서 가장 큰 방을 내어준 게 분명했다. 간단히 샤워를 맞힌 이레시아는 샤워 가운을 걸친 채 욕실에서 나왔다. 분명 몇 시간 전에도 샤워를 한 것 같은데. 몇 번을 하던 크게 상
쥰이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축축하게 물들어가는 드레스를 소매로 문질렀다. 그러나 오히려 이레시아의 옷자락을 더욱 번지게 할 뿐이었다. '... 토했다.' 토해버렸어. 한 번도 이런 적 없었는데. 따끔따끔한 목이 쌔액거리는 소리를 내었다. 흔들리는 두 눈이 공포심에 물들며 옛 기억이 고개를 들었다. '성가시니까 그만 따라붙어!' 저를 향해 버럭 짜증
루시안. 그 뒤에 붙는 긴 이름은 생략하고, '플라티나'의 유명 인사라고 하면 그녀를 빼놓을 수가 없었다. 귀족 특유의 와인색 머리칼과 눈동자. 여우같이 날렵하게 올라간 눈꼬리, 자칭타칭 플라티나의 간판. 하루 일과의 대부분을 손님들과 도박게임을 하는 '플라티나'의 종업원이자 간부인 그녀는 괴이를 혐오하기로 유명했다. 때문에 이레시아가 플라티나에 들어
의뢰장을 받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외출 허가가 떨어졌다. '티파의 영주가 어지간히 재촉한 모양이네.' 덕분에 이레시아는 오랜만에 '플라티나'의 로비에 모습을 드러냈다. '플라티나'의 로비는 다양한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각각의 영토마다 문화와 법, 인종, 하물며 흐르는 시간까지도 모두 달랐으니까. 그리고 그녀는 2년 전부터 이곳
늑대가 베일 것 같이 서늘한 눈으로 그녀를 내려다봤다. 그 속에는 보이지 않도록 잘 숨겨놓은 증오심과 역겨움이 슬쩍 내비쳐 보이기까지 했다. "저런, 내 선심이 마음에 들지 않았나 보네." 싫음 말라는 듯 이레시아가 어깨를 으쓱하고 다시 고개를 돌렸다. 알려줄 생각도 딱히 없었지만, 그가 날이 선 표정을 지을 때마다 저열한 희열이 드는 건 자신의 성격
세상은 인간들이 사는 언더(Under), 괴이들이 사는 오버(Over)로 나뉘어 있다. 그들은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는 걸 용납하지 않았다. 괴이들은 인간을 잡아먹고, 인간들은 그런 괴이들을 용병들로 하여금 토벌했다. 그리고 괴이를 토벌하는 집단인 '플라티나'는 기본적으로 몸을 숨기기에 적합한 곳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플라티나'는 거대한 이슬레이
단검에 찔리는 순간 이레시아는 이 상황이 몇번이고 반복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매번 찔리고 나서야 그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기억해냈을 때는 이미 늦었다는 것도... 복부에 단검이 꽂힌 채 이레시아는 맨발로 또 다시 힘겹게 도망치고 있었다. 길게 찢어진 상처에서는 금방이라도 내장이 쏟아질 것 같았다. 고통에 시야가 하얗고 빨갛게 점멸했다. 비틀거리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