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클로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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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리엔 제베라는 이따금 보내지 않을 편지를 쓰곤 했다. 편지 맨 위에 적는 수신인은 매번 달랐다. 용병 친구인 에르바나일 때도 있었으며, 죽은 동생인 베루리아일 때도 있었고, 아예 여백으로 둘 때도 있었다. 편지를 쓰는 방식마저 그때그때 달랐다. 어떤 때는 한 자 한 자 감정을 담아 꾹꾹 눌러쓰고, 어떤 때는 의식의 흐름에 따라 비문 따위 신경 쓰지 않고
축축한 공기에 물 내음이 가득하다. 자정을 훌쩍 넘긴 밤은 캄캄하여 빗줄기가 보이지 않는다. 천체관측 탑의 탁 트인 꼭대기 층의 돌바닥을 시원하게 두드리는 빗소리만 들려올 뿐. 세오르데인 에이아르가 들고 있던 우산을 기울이자, 앞에 선 여성의 우의 위로 떨어지던 빗물이 흔적을 감춘다. 키가 한 뼘은 작은 아델하이트가 세오르데인을 올려다본다. “시간도 늦었으
해가 지는 시각의 술집은 열기가 넘치고 시끄러웠다. 저녁 먹으러 온 사람들, 고된 하루를 잊으러 술 한잔하러 온 사람들, 집에 들어가고 싶지 않아 시간 보내러 온 사람들이 한군데 뒤엉켜 뭐라 형용할 수 없는 소음 덩어리를 만들어냈다. 바로 앞사람의 대화조차 잘 들리지 않을 만큼 여러 목소리가 섞여 들어 누군가와 이야기하기에 걸맞은 장소는 아니었다. 미카엘라
나와 함께 가지 않겠느냐고 그가 물었다. 나를 내려다보는 청회색 눈동자가 언젠가, 오래전 보았던 하늘의 색을 떠올리게 했다. 이제는 먼지와 오염으로 가득해 본래 무슨 색이었는지 알아볼 수도 없는 하늘을 바라보다가 다시 나를 염려하는 눈을 마주 보았다. 나와 함께 신전으로 가지 않겠느냐. 두말할 것 없는 호의고, 어쩌면 다시는 찾아오지 않을 기회였다. 숙식과
어느 12월, 리시안 시나레타는 칼리엔 제베라에게 물었다. “촛불에 소원을 비는 행위는 신에게 올리는 기도와 비슷한 의미인가?” 뜬금없는 질문이었다. 그러나 리시안과 함께한 시간이 늘어난 만큼 칼리엔은 이제 놀라지 않았다. 질문의 원인으로 추정되는 종이가 리시안의 손에 들려있었다. 칼리엔이 저벅저벅 다가가 그의 손에서 종이를 빼앗아 들었다. 보석 같은 새파
소녀여, 네가 네 것이 아닌 꿈을 꾼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는다. 한낱 인간의 정신으로 엿본 세계의 끝과 시작이 두려웠으리라는 것을 안다. 그 증거로 너는 지금도 나의 얼굴을 오래 쳐다보지 않는다. 그러나 이는 신을 향한 두려움에서 나오는 경외심이 아니다. 네 빛나는 금색 눈동자에 서린 것은 이유 모를 친근감에서 비롯된 거북함이다. 그 감정은 네 것이 아니기
“너, 예쁜 사람 한 번 찍어보지 않을래?” 부활절 연휴가 끝나고 회사로 복귀한 화요일 아침. 수상쩍게 상냥한 미소를 지은 선배가 칼리엔 제베라에게 쑥 말을 걸어왔다. 컴퓨터를 켜고 메일함을 확인하던 칼리엔은 생글생글 웃고 있는 선배를 향해 눈을 돌렸다. “일감 들어왔어요? 그런데 이 업계에 예쁜 사람이 한두 명인가. 누구길래 이렇게 뜸을 들여요?” 그으게
“그래, 당장은 받아들이기 어려울 수도 있겠지. 언젠가 다시 얘기하자. 나중에 너를 찾아올게.” 장례식이 언제였는지 쿠레아는 정확하게 기억한다. 1998년 5월 3일, 오후 1시. 폭발 사고 후 무너진 연구소의 폐허에서 사상자의 시신을 전부 수습하는 데 총 13일이 걸렸고, 올리비아 노바의 사체는 그중 제일 늦게 발견되었다. 연고 없던 이들의 합동 장례식은
별을 동반자 삼아 죽음의 궤도를 걷는 레유스티테 레텐시아의 첫발에는, 평범했던 소년 티테 엘리스가 있었다. 죽음은 공평하지만 공정하지 않다. 티테 엘리스는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죽음은 부자와 가난한 자, 노인과 어린아이, 꿈이 많은 자와 꿈이 없는 자를 가리지 않고 이 땅에 발붙이고 사는 이들을 평등하게 거둬간다. 제발 이 사람만큼은 데려가지 말라
우리는 이 가시밭길을 같이 걸어야 함을 인정한다. 그러나 우리는 결국 서로를 부정하고, 서로의 정의를 부정한다. 수많은 부정 끝에, 오직 하나의 인정만이 우리의 운명을 한 배에 묶었다. 바람을 간신히 막아주는 낡은 판잣집 내부는 지독히도 어두웠다. 쥐새끼처럼 남의 집에 숨어들어 집주인을 기다리는 자기 모습이 미카엘라는 퍽 못마땅했다. 자신의 신념에 당
문을 굳건히 두드리는 노크 소리가 아늑한 사무실 안에 퍼졌다. 고개를 숙이고 오래된 신문을 살피던 알베라는 시선을 들었다. 앞으로 쏠린 회색 머리카락을 손으로 걷어내자 닫힌 문이 보였다. 혹여 잘못 들은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던 차에 다시 똑똑, 딱딱한 소음이 들렸다. 착각이 아니었다. 눈길이 문 옆의 벽시계로 돌아갔다. 평범하게 둥그런 벽시계의 큰
천유는 푹신한 쿠션이 달린 나무 의자에 앉아있었다. 옆에는 똑같이 생긴 의자에 아델하이트 에이아르가 긴장이 역력한 얼굴로 손가락을 꼬았다 풀고 있었다. 앞에는 낮은 테이블 하나를 사이에 두고 하얀 신관복을 단정하게 차려입은 히스토리아의 신관, 카렌 키르헤가 심기 불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천유는 작금, 이 상황이 매우, 엄청나게 불편했다. “아델하이트 양
광활한 제국의 주인, 붉은 황제시여. 당신의 광채 영원하여라. 먼 훗날 오늘을 다시 회상했을 때, 쓰라렸던 과거의 흉터조차 아름다워 보일 만큼 기적의 장미처럼 만개하여라. 장미란 친숙하고도 가증스럽다. 아름다움을 과시하며 그 어느 꽃보다 크고 화려하게 만개하는 푸른 겹꽃은 자랑스러운 솔레유 황가의 상징이다. 나 역시 꽃의 아이 시절부터 태양과 장미가
있지, 혹시 생각해본 적 있어? 내가 만약 처음부터 모든 의무를 저버렸다면, 우리는 오늘 서로를 마주 보며 웃고 있었을까? 만약 우리가 행복할 수 있었던 꿈을 꾼다면… 계기는 분명치 않다. 너는 물끄러미 네 쌍둥이를 바라보다가 툭 입에서 말을 떨군다. - 만약 모든 것을 버려야만 행복해질 수 있다면, 너는 어떡할래? 평소 같았으면 너는 수업에 가기 싫
우리는 현재에 살지 않아요. 내 시선은 삶이 종결되는 시간에 머물러있고, 당신의 의식은 밤이 뿌리내린 망망대해를 유영하고 있죠. 그러니 내게 당신의 악몽에 대해 말해주세요. 우리 홀로 외로이 방황하지 않도록. 알테라의 겨울은 매섭다. 일 년 대부분이 겨울인 나라는 하얗게 친숙하다. 짧은 여름이 지나면 몇 밤 가지 않아 새벽 풀잎에 낀 서리가 보인다.
밤이 짙게 드리운 고요한 시각의 도서관을 그 누구도 찾지 않는다. 책을 찾으러 왔던 손님도 집으로 돌아가고, 부지런히 일하던 사서도 퇴근한 지 오래. 밖에서 귀뚜라미 우는 소리도 한참 전에 멈췄다. 사람 한 명 남지 않은 도서관, 높게 세워진 책장 사이, 둥그런 홀 한가운데서 한 노인이 천장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전등 하나 켜있지 않았지만, 천장에 은은하게
누군가 말하길 절망은 물속에서 호흡하는 감각과 비슷하다 했다. 한 줌 공기를 얻기 위해 숨을 들이마시는 순간은 시련이 되며, 살아가려 발버둥 칠수록 무거운 무게가 온몸을 짓누른다. 들이키고 내쉬는 것이 더는 공기인지 눈물인지조차 구분할 수 없다. 그렇게 천천히 잠겨간다. 간절히 누군가가 수면 위에서 손을 내밀어주기를 바라며. 혹은 빠르게, 고통 없이 숨이
Heart Bloom (오리지널 영문 글 링크) 오늘도 그저 그런 날 중 하나였다. 미오는 이미 그런 날에 익숙해져 있었다. 미오는 황혼이 깔린 마을을 터벅터벅 걸으며 이방인이 하룻밤 머물 곳을 찾아 시선을 곳곳이 옮겼다. 하다못해 몇 시간 동안 편하게 드러누울 수 있는 건조한 부드러운 흙바닥이라도 마다하지 않을 것이었다. 시야 끄트머리에 튼튼한 나무
숨조차 함부로 쉬기 버거운 어둠 속에서, 칠흑의 옷을 입은 성녀가 홀로 무릎을 꿇었다. 가까운 곳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촛불이 켜졌다. 동시에 눈앞에서 석상의 윤곽이 희미하게 드러났다. 하얀 대리석 얼굴에 새겨진 표정은 눈이 어둠에 익숙해지지 않아서인지 전혀 읽을 수 없었다. 미미하게 흔들리는 작은 촛불 사이로 들리지 못한 한숨이 아스라이 흩어졌다.
별 도서관의 관장 72세의 아델하이트는 어떤 삶을 살고 있나요? 응? 꼬마 손님이 오셨군요. 이렇게 이른 시간에 도서관을 찾다니, 미래가 참 창창해 보이네요. 특별히 찾는 책이라도 있을까요? 없어도 괜찮아요, 때론 도서관에서 마음 편히 돌아다니다가 눈에 띄는 책 한 권 집어 드는 즐거움도 있으니까요. 꼬마 손님이 원한다면 같이 둘러봐 줄까요? 부담 갖지
모험을 좇는 학자 32살의 아델하이트는 어떤 삶을 살고 있나요? 어, 안녕하세요? 학술지에 관해 물어보러 오신 거면 당장 시간을 내기엔 조금 어려울 것 같은데… 아 그건 아니라고요? 좀 부끄럽네, 학술지를 낸 후로 가끔 그에 관해 이야기 나누러 오는 사람들이 생겨서 오해했나 봐요. 무엇에 대한 학술지냐고요? 으음, 간단하게 말하자면 별은 그저 밤하늘에 반
새로운 세계로 딛는 걸음 22살의 아델하이트는 어떤 삶을 살고 있나요? 전 잊어버린 게 너무 많아요. 물론 얻은 것도 많죠. 아직 기억나는 게 그리 많지는 않지만, 옛날의 세상은 살기 좋은 곳은 결코 아니었으니까요. 그래도 전 비교적 운이 좋은 케이스였다고 생각해요. 세상이 바뀌기 전에 희생된 사람도 많았고… 그러고 보니 제 가족은 어떤가요? 어머니는?
비밀 도서관으로 찾아간 소녀 12살의 아델하이트는 어떤 삶을 살고 있나요? 비밀 하나 들어볼래요? 전 마법의 별 도서관에 가본 적 있어요. 신전 도서관에서 길을 잃어서 모르는 구역에 들어간 거 아니냐고요? 아닌데. 진짜 거짓말 아니라니까요? 내부 구조부터가 달랐다고요! 지금의 신전 도서관처럼 번쩍번쩍하지도 않고, 커다란 대리석 기둥도 없었고, 책도 사실
Beethoven Sonata No.17 Tempest 3rd Movement 그런 날이 있다. 유독 일이 꼬이고, 조율 안 된 피아노 음처럼 모든 게 어긋나고, 기분전환으로 산 커피마저 잘못 나와 인생보다 배로 쓰게 느껴지는. 정말 아무것도 되는 게 없는, 그런 날이 있다. 그런 날에는 공부고 약속이고 중요한 일정이고 다 팽개치고, 따듯한 코코아나 타
울면 안 돼, 울면 안 돼. 산타 할아버지는 우는 아이에겐 선물을 안 주신대. 그러니 난 울지 않을게. 울지 않고 기다리고 있을게. 다시금 산타가 나에게 선물을 주러 올, 그날까지. Away In a Manger - David Hicken Piano Solo 소녀는 한때, 입김이 나올 정도로 추운 날 볼 수 있는 하얀 눈을 좋아했다. 손끝이 파랗게 얼
Winter Gerbera - E3 (music commission) 칼리엔에게, 오늘 마당에 거베라꽃이 피었어. 울타리 구석쟁이에 볕이 유독 잘 드는 곳 있잖아? 채소를 기르기엔 면적이 너무 좁다고 엄마 아빠가 내가 마음대로 쓰는 걸 허락해주셨거든. 우리 작년에 눈이 녹던 날 시장에서 사 온 꽃씨 기억나지? 마땅히 심을 곳이 없어서 계속 보관만 하다
White Lisianthus - E3 (music commission) 하루종일 질척하게 눈이 내렸다. 그리 신기한 현상은 아니었다. 엘로하임 대신전이 있는 리베르 키리오스 섬은 온후한 기후의 히스토리아 섬보다도 훨씬 북쪽에 위치해, 날씨는 일 년 내내 혹독했다. 신전의 교리는 그것을 축복이라 여겼다. 시련과 고난은 신의 뜻을 품고 살아가는 종들에게 숨
Heart Bloom (번역본 링크) It was just one of those days. She was already used to them. Mio trudged through the twilight town, glancing around in vain attempts to stumble across on a place that seemed fri
봄이라 함은 웅크려있던 꽃봉오리가 따스한 이슬을 맞아 피어나는 것이고, 또한 봄이라 함은 잠들어있던 생명이 깨어나 기지개 켜며, 움트는 잔디에 발을 딛는 것이고, 마지막으로 봄이라 함은, 겨우내 그리던 그대 미소를 두 눈에 담아, 세상에 색이 다시 물드는 것이니라. 그대를 처음 본 것은, 어느 이름 없는 꽃밭에서였지요. 햇볕이 잘 드는 꽃밭에서, 그대는
“더워……….” 칼리엔이 테이블 위로 엎어졌다. 여름 폭염에 달아오른 볼에 닿는 나무의 감촉이 시원하니, 열기가 조금 가시는가 싶기도 겨우 몇 분. 사람의 체온에 의해 데워진 테이블은 오래 위안이 되지 못했다. 칼리엔은 앓는 소리를 내며 양손을 나무 테이블 위로 꾹 눌렀다. 손가락 끝에서부터 시린 한기가 뻗어 나와 얇은 얼음 장막이 유리처럼 테이블을 얇게
세상 사는 것, 참 힘들다. 새삼스레 깨달은 사실은 아니었지만, 오늘 같은 날엔 한층 더 깊이 마음속 새겨두게 되는 만물의 진리이자 세상의 이치였다. 목구멍에서부터 끓어 올라오는 비명인지 한숨인지를 삼키며 칼리엔은 방금 확보한 나이프를 꽉 쥐었다. 손마디가 새하얗게 질려갔다. 그래. 아무래도 오늘은 내가 죽든지, 저 새x를 죽이든지 해야겠다. 나날이, 내
어떠한 형태의 기록으로도 남겨져선 안 되는 이 이야기에 구태여 이름을 붙여야 한다면, 그저 <무명 서기의 우울>이라 부르는 것이 최선이겠지요. 저는 서기입니다. 제 이름을 물어보시는 건가요? 그런 건 그다지 중요하지 않으니 대답하진 않겠습니다. 혹시나 오해하실까 미리 밝히자면 제가 신분을 감춘 높은 귀족이다, 이런 거창한 이유는 아닙니다. 그 반대로
처음 너를 봤을 때 설렜냐고 묻는다면, 당연히 아니라 답했을 것이다. 당사자들의 의사는 전혀 반영되지 않은 그 만남에, 달리 무엇을 느껴야 했을까. 그러나 은색으로 반짝이던 너의 눈동자를 보는 순간, 어째서인지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어찌 보면 달을 닮은 듯한 색채가 마음에 들어서였을까. 나를 보던 그 눈길이, 오염되지 않은 맑은 호수처럼 티 하나 없는 순
空の上の無慈悲な神々にはどんな叫びも届きはしない 하늘 위의 무자비한 신들에게는 어떤 절규도 닿지 않아 Lacrimosa…… Kalafina :: Lacrimosa ++ 선고 ++ “칼리엔 제베라. 너의 목숨을 거두러 왔다.” 죄였을까. 죄라고 단정 지어지기엔 충분히 억울했을 만도 했다. 칠흑 같은 사제복을 입은 은발의 사내 -얼핏 보기에는 여인 같았지만-
내 이름은 준, 준 이엘. 유토피아 프로젝트의 리더. 빛나는 세상으로 나아가는 선도자. 어둠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가여운 장님들을 낙원으로 이끄는 선구자. 나는 언제부터 ‘준 이엘’이었더라. 언제부터 낙원으로 향하는, 얼어붙은 꽃이 피어난 가시밭길을 자처해 걸어가게 되었더라. …그래, 모든 것은 그 순간부터 시작되었다. 아카식 레코드라는 끝없는 바다에서
오늘도 밤을 조용히 주시하는 녹색 눈동자는 흔들림이 없다. 어둠 속으로 잠식된 붉은 머리칼도, 카디날의 색을 띤 붉은 망토도 마치 그림자와 다름없었다. 차디찬 겨울밤에도 미동 없는 너의 눈에는 무엇이 담겨있는가. 어떤 생각을 하며 밤을 지새우는가. 기억을 더듬어보아라, 아리스카. 너는 아직도, 그 머나먼 12월을 어제처럼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겠지. 손에 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