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해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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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이 병상에 누운 지 사흘이 지났다. 사냥을 나섰다가 곰을 마주쳤다고 했던가, 그와 함께했던 정예들은 대체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그러나 그 소식을 들으며 멜레아강은 앞뒤 상황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왕은 개나 양을 비롯한 짐승들이 그에게 으레 순하게 굴었듯 곰이라고 해서 다를 것 없으리라 생각했을 것이다. 깊은 숲속에서도 홀로 마음을 놓고 방심
모처럼 시내 나들이에 신이 난 앤은 피앙세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나룻배에서 훌쩍 뛰어내린다. 새로 갖춰 입은 드레스의 치맛자락이 산뜻하게 휘날린다. 앤은 저도 모르게 콧노래를 흥얼거린다. 혼자서 외출하는 건 그만큼 흔치 않은 일이었다. 처음부터 지상으로 찾아올 수도 있겠지만, 그래서야 기분이 안 나니까. 기왕이면 배를 타고 나오는 편이 더 근사하기도 하고.
해가 저물기 시작한 늦은 오후, 어머니의 일터에 함께 도착한 에밀리아는 빗물에 미끄러지지 않게 조심하며 마차에서 내린다. 그리고 눈앞에 펼쳐지는 풍경에 저도 몰래 마른침을 삼킨다. 여름 장마철인데도 한겨울만큼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를 풍기는 ‘검은 아나벨라’는 특유의 형용할 수 없는 불온함으로 순식간에 사람을 압도한다. 이제 겨우 열 살 남짓 된 에밀리아의 눈
황혼녘, 울창한 숲 한가운데에서 눈을 뜬 여자는 자신이 이곳에 누워 있게 된 경위조차 기억하지 못한다. 삐걱대는 몸을 간신히 추슬러 고개를 들면 커다란 나무에 처박혀 새까만 연기를 피워올리고 있는 자동차가 보인다. 그 너머로는 그저 끝없는 초록뿐인 것을 보아하니 사람이 오가는 도롯가에서는 한참 멀어진 게 분명하다. 온몸에서 매캐한 냄새가 난다. 빽빽이 솟아
창가에 앉아 있던 루브는 천천히 눈을 깜박인다. 갑자기 쏟아지기 시작한 비 때문에 주변이 소란스러웠다. 순식간에 젖어드는 보도블럭, 머리를 가리고 뛰어가는 사람들, 개중 몇몇은 급히 카페 안으로 들어오기도 했다. 루브는 오른편 벽에 붙어 있는 시계를 곁눈질한다. 곧 출발해야 하는 시간이었다. 노트북을 접어 넣고, 빈 커피잔을 치우고. 루브는 여유롭게 가방에
파티가 한창인 저택에는 아름다운 사중주가 울려퍼지고 있었다. 드넓은 홀은 인파로 가득하고, 화려한 차림새의 사람들이 저마다 파트너와 짝지어 춤추거나 술을 마시며 떠든다. 루브는 그들을 감흥 없는 눈길로 바라본다. 격식을 갖춰야 하는 자리에는 좀처럼 익숙해질 수가 없었다. 제게 날아든 초대장을 당장 구겨 버리지 않았던 것은 오로지 거기에 적힌 문구 때문이었다
검은 봉투 하나가 책상에 단정하게 놓여 있었다. 라울에서 온 초대장이었다. 내심 기다리던 것인데도 어째 반길 수가 없으니 이상한 일이지. 루브는 손에 쥔 페이퍼나이프를 만지작댄다. 내용이야 뜯어보지 않아도 알 만한 것이었으므로, 결국은 선택의 문제였다. 이제 와 화합이라니 웃기지도 않는다. 그토록 긴 시간 동안 서로를 죽이지 못해 안달이었던 족속들인데. 루
거울 속에서 익숙한 낯을 마주하는 순간, 너절해진 프레드릭의 머릿속에서 기억이 한꺼번에 역류한다. 여태껏 당연했던 프레드릭,이라는 이름은 억지로 걸친 남의 옷처럼 단숨에 불편하고 낯선 것이 된다. 이게 아니야, 다시. 나는 ‘잭’이지. 그래. 뱀파이어에게 안식이란 건 사치나 다름없는 거야. 기껏 고생해서 죽어 봤자 내가 편안히 묻힐 수 있는 땅 같은 건 애
눈밭에 튀기던 피의 잔상이 삭막한 병실의 천장 위로 검붉게 남는다. 눈을 깜빡일 때마다 위치를 바꾸어 가며 되살아나는 혈흔은 쉽사리 지워질 기미가 없다. 팔다리를 죽 뻗고 누운 채로, 루브는 시선을 내려 제 몸을 살핀다. 가슴팍을 가로질러 동여매 놓은 천조각에 진득한 핏물이 배어난다. 그밖에도 여기저기 찢긴 상처마다 붕대가 범벅이었다. 몸 구석구석을 찌르는
잭의 연애는 이번에도 처참한 결말을 맞았다. 그러니 그의 사랑 또한 마찬가지였다. 수신인 없는 편지에 하등 의미가 없듯, 가닿을 곳 없어 추락한 마음 또한 진창에 처박혀 이전의 실패와 한데 엉겨 썩을 뿐이다. 잭은 이제 옛사랑이 된 연인이 마지막으로 남겼던 단말마 같은 말을 곱씹는다. 도무지 저를 이해할 수가 없어서 무섭다나, 뭐라나. 너무 많이 들어서 이
지난날의 기억들이 환등으로 스쳐 간다. 색 바랜 필름이 희미한 영상을 띄운다. 장면은 마지막 식사 이후, 그 끝도 없던 기다림에서부터 시작한다. 그렇게 영겁 같던 세월을 뛰어넘어 다시 첫 재회, 나를 잊은 너를 저주하는 절망 속에서도 차마 떠날 수 없었던 시간들. 그러다 문득 계시처럼 기억을 되찾는 너와, 온화한 날들을 지나는 사이 태어난 아이와, 그럼에도
머리가 아프다. 목소리가 들린다. 계속해서 귓가를 맴돌며 어두운 충동을 부추기는 낯익은 음성. 몸을 잔뜩 웅크린 채 선잠에서 깨어난 흰토끼는 참았던 숨을 겨우 몰아쉰다. 시야 바깥에서 어스름하게 밝아 오는 새벽하늘은 언뜻 물 탄 핏빛 같기도 하다. 사방이 고요하다. 다시 잠들기는 어려울 것 같네. 흰토끼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앉는다. 곁에 아직 잠들어
명렬은 연구실 한켠의 해골 모형에게 습관적으로 말을 붙인다. 명순아, 나 왔어. 이름까지 지어 두고 정성스레 닦아 가며 관리하는 모형과의 대화는 늘 이렇듯 간단한 안부 인사로 시작된다. 실은 일방적인 토로에 가까운 그 대화란 것이 날마다 조금씩 길어지고 있다는 사실은 명렬 혼자서만 모르는 일이다. 얘깃거리야 항상 시답잖은 것들뿐이지만 달리 털어놓을 데도 없
뒤로 갈수록 최신 작업물입니다
― 1 정오의 태양빛을 한껏 빨아들인 검날이 고고히 번뜩인다. 백금색 몸체에 새겨진 검푸른 문양은 그간 익히 보아 왔기에 더없이 잘 알고 있는 것이었다. 예식을 거행하기 위해 소집된 기사들이 일렬로 늘어선 채 깃발을 드리우고 있었다. 두터운 천이 미풍에 흔들리며 맑은 하늘 위로 새파란 궤적을 덧그린다. 압도적인 풍경이었으나 생경함은 들지 않았다. 노
살리에리는 작은 친구에게 손을 내밀어 그가 마차에서 안전히 내릴 수 있도록 한다. 화가로서 그의 입지를 다지기 위한 방문인 만큼, 살롱에 발을 들이며 그는 제법 긴장한 것도 같다. 시종이 그들의 도착을 알리면 그때부터가 본격적인 활동의 시작이다. 화려한 장식으로 가득한 살롱의 문 너머에는 내로라하는 귀족들이 저마다 자리를 차지하고 늘어져 다과를 즐기고 있다
어느 날 갑자기, 봄밤 내리는 부슬비에 젖어든 옷자락을 알아채듯이. 에릭은 문득 그의 연인이 베풀고 있는 사랑의 크기를 감히 짐작할 수 있다. 매번 숨 쉬듯 당연스레 받아들이고 있던 것들이 실은 얼마나 무거운 증명이었는지. 에릭은 약지에 자리잡고 있는 반지를 가만히 어루만진다. 내리깔린 그의 시선이 품속에 곤히 잠들어 있는 앤에게로 옮겨 간다. 세상모르고
거친 콘크리트의 질감이 등을 사납게 친다. 머리를 부딪힌 것은 아닌데도 뒷골이 서늘하게 당겼다. 장기철이 틀어쥔 목깃 아래가 답답하다. 사람 뒤나 캐고 다니는 주제에 뭐가 이리 당당해? 코너에 몰렸지만 강혜린은 조금도 움츠러들지 않는다. 몇 대 더 맞아 주다가 상황을 봐서 반격하면 그뿐, 아무래도 피할 이유가 없다. 강혜린이 바라보는 것은 장기철의 눈이다.
몇 차례 노크에도 응답은 돌아오지 않는다. 이 시간이면 자리에 있을 법도 한데, 그새 또 밖으로 나간 걸까. 잠시 고민하던 한스는 조용히 서재의 문을 열고 들어간다. 업무에 집중했을 때의 콜린은 그를 부르는 소리를 듣지 못하는 일도 종종 있었다. 바쁜 사람을 방해해서는 안 되겠지만 그래도 오랜만에 보는 거니까, 잠깐 정도는 괜찮을지도 모른다. 새로 쓴 원고
한참 추격전 끝에 광장 한복판까지 내몰린 빌런이 가쁜 숨을 몰아쉰다. 그를 뒤쫓느라 있는 대로 인상을 찌푸린 레이가 품속에서 주저 없이 권총을 꺼내들어 위협사격했다. 진작 이랬어야 하는데 쓸데없이 힘을 뺐다는 생각이다. 난데없는 총성에 거리를 오가던 시민들이 비명을 지른다. 이대로라면 정말 잡혀 죽겠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주변을 마구 두리번거리던 빌런이 곁
힘차게 이어지던 뱃노래가 이제는 다 끝나 간다. 불안과 공포를 몰아내기 위해 시작한 노래였으나 그 즈음 에르위나는 자신감을 거의 되찾은 상태였다. 유령을 묶은 매듭은 세상 무엇보다도 튼튼하다. 그가 아무리 힘세고 난폭하다고 한들 제 머리통 만한 그녀의 밧줄을 단번에 조각내지는 못할 것이다. 축 늘어진 유령에게서 멀찍이 떨어져 책상에 걸터앉은 에르위나는 스스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어요? 당분간 공백기라 쉬고 있어요. 그래도 산책 자주 나가려고 노력하고, 밥도 세 끼 꼬박 챙겨 먹고. 기분은 어때요? 특별한 일은 없었나요? ……모레가 A 일주기예요. 무언가 열심히 타이핑하던 상담사의 손이 공중에 멈춘다. 조붓한 상담실 안에 적막이 내린다. 늦은 오후, 작은 들창을 타넘고 들어오는 겨울 햇살이 새하얀
우리가 함께 꾸던 꿈을 이어서 사랑해 주길 바라며 마음 깊이에 빛나는 별 A 안녕, 나야. A. 지금 잘 찍히고 있는 거 맞나? 편지 자주 쓰긴 하지만 영상으로는 처음이라 좀 어색하네. 그래서 내가 갑자기 왜 이러고 있냐면, 음. 이거 유서야. 당연히 심각한 거 아니고, 특별히 무슨 일도 없었으니까 걱정하지 마. 그냥…… 얼마 전
쏘―냐. 말끝을 늘어뜨리는 그 특유의 어조가 귓가에 껌처럼 들러붙어 떨어지지를 않는다. 그를 보지 못한 지도 꽤 오래되었는데, 하필 목소리만큼은 왜 아직까지도 선명하게 남아 머릿속을 채우고 있는지 영문을 모를 일이었다. 고개 숙인 쏘냐의 얼굴 위로 갈색 곱슬머리가 쏟아져 그늘을 드리웠다. 차갑게 식은 발코니의 난간이 화를 삭이느라 열 오른 피부를 식힌다.
그날은 비공식적인 휴일이었다. 이른 새벽부터 미친 듯 비가 퍼부었다. 어지간한 날씨였다면 일정은 당연스레 강행되었겠으나, 함께 밀어닥친 돌풍 탓에 곳곳의 창문이 박살나고 더러는 사람이 차도로 떠밀려 내려가기도 했으므로 모처럼 종일 내근이 결정되었다. 출장 없는 날이라니 휴일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날만큼은 모두,가 위에 계신 분에게 내심 은밀한 감사를 올렸을
미지의 신사, H 씨는 그가 스스로 긴 잠에 들어야 할 때가 가까워 왔음을 직감한다. 하지만 너무 놀라거나 슬퍼 마시길. 그는 영영 죽거나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그를 곧잘 불러 소용하던 이에게 그가 더는 필요치 않게 되었을 뿐이므로. 그는 이제야 밀린 휴식을 취하러 떠나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셈이다. 그간 얼마나 많은 곳을 누비며 바삐 지내왔는지. 한동안
명계의 문턱 앞에 피투성이로 쓰러진 채, 혜은의 아쉬움은 단 하나뿐이다. 그것은 형편없을 정도로 평범한 보통의 인간 하나가 저를 죽음으로 내몰았다는 비극보다도 우선된다. 그녀는 삶에 특별한 애착을 가진 것도 아니요, 숨이 붙은 존재라면 누구든 마땅히 끝을 맞이하게 된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도 아니다. 그러니 그녀가 중요히 여기는 일이라면 언제나 명렬에 관한
전쟁이 끝났지만 죽음은 어디든지 널려 있었다. 오래 굶주린 사람들이 견디지 못하고 마른 땅에 쓰러졌다. 약탈을 일삼던 버릇을 고치지 못한 사람들이 마구잡이로 칼을 휘둘렀다. 누군가는 제 턱밑에 총구를 들이댔고, 또 다른 누군가는 문고리에 목을 맸다. 비탈길에서 발을 헛디딘 사람이나 강에 투신한 사람 혹은 열차에 들이받힌 사람도 있었다. 새로울 것 하나 없는
아가씨가 죽었다. 아니, 돌아가셨다,라고 하는 것이 올바른 표현인가. 어쨌건 아이딘 페트로프는 이제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그녀의 주검은 장례를 위해 모스크바로 옮겨질 것이다. 그녀의 가족들은 그녀가 이토록 추운 겨울에 죽었다는 사실을 다행으로 여겨야 한다. 아가씨, 결국 당신이 해결한 일은 하나도 없군요. 세상 모든 일을 꿰뚫어볼 수 있다는 듯이, 그렇
노랗고 흰 조화로 빠듯하게 꾸며진 식장은 순식간에 인산인해가 되었다. 너의 이름을 아는 모두가 너를 배웅하기 위해 걸음했다. 셀 수도 없는 지폐가 너를 위해 불에 태워졌다. 이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너는 너무 빨리 잊혀졌다. 그것은 너를 위해 치러졌던 마지막 예식의 규모와 무관하다. 아니, 어쩌면 둘은 모종의 비례 관계에 놓여 있었는지도 모른다. 너의
불필요한 가정은 하지 않는다. 그것이 애머디가 새롭게 정립한 가장 첫 번째 수칙이었다. 정확히는, 지금껏 사용해 온 ‘불가능’의 범주를 약간 조정하는 것이다. 상실 이후의 삶은 이전과 같을 수 없다. 절대로 바꿀 수 없는 몇 가지 사실에 관해서라면, 이제 와 어떤 대처도 무용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했다. 이를테면 다음과 같은 생각들에는 아무런 효용
무엇이든 결과로 증명해 보이겠다던 사람은 이제 없다. 여기저기 찢기고 불탄 제복만이 그가 남긴 결과다. 중요한 건 절차가 아니라거나, 기억되는 것은 최후의 승자뿐이라거나. 그런 이야기들을 토오루는 이제 와서야 절감할 수 있다. 이것 봐요, 이렇게 죽어버리다니. 당신 노력을 나 아닌 누가 알아 주겠어요. 자기가 한 말도 못 지키는 바보 같으니라고. 창백하게
더없이 화려한 장례식이었다. 빽빽하게 늘어선 백색의 조화를 사이에 두고, 검은 옷을 차려입은 사람들이 파도치듯 밀려들었다. 발 디딜 틈조차 없는 인산인해였다. 문간에 붙박여 있는 동안 낯익은 얼굴들이 간간이 곁을 스쳐 갔지만 모리타는 구태여 아는 체하지 않았다. 시야가 온통 극명한 흑백의 물결로 가득했다. 구석에서 서성대기를 얼마쯤 했을까, 기어코 까치발을
네불라는 간수가 철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깨어난다. 아직 기상 시간 전이었고, 교도관의 호출이었다. 졸린 눈을 억지로 끔벅거리며 네불라는 떨떠름한 표정을 짓는다. 이제 며칠 후면 출소인데 무슨 문제일까. 어쩌면 제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복역 기간이 연장된 건지도 모른다. 그편도 나쁘지는 않지, 네불라는 생각한다. 어차피 갈 곳도 없었다. 삭막한 복도를 따라
앤을 잃었을 때, 에릭은 이미 한 번 죽었다. 그는 연인의 마지막 숨이 흩어지던 순간에 제 호흡 역시 남김없이 소진되어버렸음을 알았다. 구차한 삶을 연명하도록 그를 돕는 것은 여전히 불멸하는 음악뿐이다. 사랑을 잃고도 살아남은 예술이 그를 간신히 지탱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이승에 붙들려 있는 것이 더 이상 무슨 의미를 가질 수 있다는 말인가. 노
아직 땅이 마르지 않았다. 오래된 어항의 그것처럼 비린 냄새가 코를 찌른다. 사방이 음습한 물기로 가득해 황망한 걸음은 자꾸만 미끄러진다. 한 발짝 뗄 때마다 철퍽대는 소리가 났다. 저녁 내내 퍼붓던 비가 겨우 그친 참이었다. 제롬은 머리를 숨길 우산조차 없이 폭우를 뚫고 걸어 여기까지 왔다. 지금이 한밤중인 줄도 모르고 달려왔다. 간신히 사울의 거처 앞에
“지금까지 클럽 드바이의 보컬, 구본하였습니다.” 조명은 꺼졌고, 공연도 끝났다. 무대에서 내려온 구본하는 등에 기타를 둘러멘다. 물을 충분히 마셨는데도 목이 탔다. 구본하는 괜히 헛기침을 몇 번 한다. 그리고 삐걱대는 클럽 계단을 끝까지 올라간다. 제법 묵직해 보이던 철문은 아무런 저항 없이 부드럽게 열렸다. 바깥은 아직 어스름이 깔린 새벽인데도 공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