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필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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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저한 사전 준비로 전투 대형과 전략이 이미 정해져 있었기에 토벌 회의는 금방 끝났다. 잠시 거실이 시끄러운 듯 했지만 피로한 학자가 먼저 들어간 후로 금방 조용해졌다. 주방에 남아있던 건브레이커는 거실에 아무도 남지 않게 되자 조용히 적마도사를 불렀다. 그는 예상대로 아직 잠에 들지 않은 상태였고 가을 밤의 주방은 제법 쌀쌀했기에 몸에 담요를 두른 채였다
가장 먼저 돌아온 건 적마도사였다. 돌려 준 책보다 받아 온 책이 더 많은지 두께도 굵직한 책들을 잔뜩 들고 저녁이 채 되기 전에 돌아왔다. 품 안에 책을 가득 든 채 들어오는 적마도사를 발견한 백마도사는 마당에 쌓아 둔 박스에서 내려 와 자연스럽게 책을 나눠 들었다. “아… 감사합니다.” “무슨 책이 이렇게 많아요?” “멀리 동방 쪽에서 급히 조사해줬으
“벌써 사흘 째다쿠뽀…….” 림사 로민사의 배달부 모그리였다. 편지 수십 통을 꾹꾹 구겨 담고 안갯빛 마을의 한 켠으로 배달 온 것이 벌써 세 번째였다. 삼 일 동안 수 통의 편지가 각자 다른 곳에서 왔지만 수신인은 항상 똑같았다. 모그리는 초인종을 누를까 하다가, 마당 안쪽에 인기척을 느끼고 그만뒀다. “편지 배달 왔다쿠뽀!” 마침 마당에 나와 있던
소녀는 시간여행자였다. 아니, 세계여행자라고 부르는 게 맞을까. 시계를 깨트리는 것으로 지금 있는 세계를 벗어나 다른 세계선으로 이동하는 게 가능했다. 우선 한 번 시계를 부수면 아무것도 없는 세계선의 교차로에 떨어졌다. 끝이 없는 것만 같이 무한한 공간에 눈부신 하얀 빛만이 가득했다. 그리고 고개를 들면 마치 영화 필름처럼 생긴 거울 세계들이 천장을 메우
이슈가르드의 빈민가에 바로 닿아 있는 재개발 구역, 지고천 거리의 한 모퉁이에 그림자 지평선이라 간판을 건 가게가 있었다. 그 가게는 겉으로 보기엔 술집이나 다름 없었지만 출입하는 이들은 죄 그림자 속에서 활동하는 용병들이요, 때론 무법자들이라. 벽을 뒤집으면 비밀스러운 방이 나오고 게시판엔 수상한 전단들이 가득하며 오가는 말들은 험악하기 그지없는 욕설과
비윤리적, 비도덕적, 인격 모독적, 불법적 설정 및 식인과 카니발리즘을 소재로 한 케이크 버스 기반 글입니다. 하루종일 속에 있는 것들을 게워냈다. 나중엔 더 토할 게 없어서 위산만 뱉어냈다. 그래도 종일 속이 메스껍고 역겨웠다. 사람을 먹었다는 사실 자체가 끔찍했다. 미맹인 것은 알았지만 포크였다곤 생각하지 못했다. 그저 드물게 나타나는 미각 이상일
비윤리적, 비도덕적, 인격 모독적, 불법적 설정 및 식인과 카니발리즘을 소재로 한 케이크 버스 기반 글입니다. 세간에선 타고 난 미맹 중 특별한 이들을 포크라고 부르는 모양이었다. 그들이 미맹을 앓는 자들 중에서도 특별한 점은 무엇인가 하면, 케이크라 불리는 극소수의 인간의 맛을 느낀다는 점이었다. 대체로 단맛이 느껴진다곤 하지만 그 맛은 천차만별로 일
해가 뜨지 않는 거리를 소녀가 걷는다. 발걸음은 잔뜩 비틀거렸고 걷는 길마다 붉은 발자국이 남았다. 천 년 만에, 아니면 만 년 만에 내린 눈은 거리에 지독히도 쏟아졌다. 하여, 발자취는 남는대로 곧장 사라졌다. 거리에 두텁게 쌓인 눈이 서둘러 걷는 소녀의 발목을 붙잡았다. 정면으로 불어오는 칼바람이 매섭게 얼굴을 에고 긴 머리칼을 흩날려 눈을 가렸다. 앞
처음이었다. ■■가 이상에게 화를 낸 것은. 스스로도 화를 내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지만 저도 모르게 날카로운 말이 튀어나갔다. 가늠하지도 못 할 만큼의 시간 동안 이상은 한 번도 그의 분노를 받아본 적이 없었다. 많은 기억이 후에 쌓였지만 그 시간들 속에서도 ■■가 남이 들으면 아플 감정을 폭발시킨 적은 없었다. 죽이려고 들 때 조차 웃으며 괜찮다고 했으니
기억 추출은 비정기적으로 행해졌고 아침 시간이 부산스럽고 베르길리우스가 본사로 갈 준비를 한다면 그것이 신호였다. 불길한 예감은 항상 맞아 떨어져서 이상이 묻기도 전에 베르길리우스는 오늘은 휴일이라며 버스 안에서 소란 피우지 말고 쉬라는 안내를 했다. 그리고 잠겨있는 안쪽 방으로 가서, 이제 막 깬 듯 부스스한 차림의 ■■를 데리고 버스 밖으로 나갔다. 처
다음 날 아침엔 그것을 찾지 않았다. 어쨌든 억지로 다친 손목을 보려고 들었으니 마주쳐도 껄끄러울 수 밖에 없었고 찾아간다 한들 무슨 말을 건네야 할지도 몰랐다. 뭐라고 하면 좋을까? 어쩌다 그렇게 되었냐고? 아프진 않냐고. 아무 짝에도 도움되지 않는 걱정을 몇 마디 건네면 될까. 그 안을 보진 못했으니 어떤 형식으로 그것이 인간임을 증명하려고 했는진 모르
그것은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났다. 잠시 정차한 메피스토텔레스의 앞을 가로막고 쏟아지는 장맛비를 맞으며 서 있었다. 제일 먼저 찾아낸 것은 운전석의 카론이었다. 카론은 베르길리우스를 부르더니 앞에 서 있는 것을 손가락질 했다. 메피가 배고파해. 베르길리우스가 조금만 더 무신경 했다면 분명 저것은 곧장 공복에 허덕이는 버스의 아가리로 들어가 산산조각 났을테지.
림버스 컴퍼니 소속 패스파인더. 일반적인 정보 연소된 듯 새하얀 머리카락이 바닥까지 길게 늘어진다. 머리가 매우 길어서 바닥에까지 끌리지만 딱히 자를 생각은 없는 듯 하다. 끝도 없이 시계를 돌리는 과정에서 성장이 멈춰버린 듯, 풍부한 경험에 비해 상당히 앳된 얼굴을 하고 있다. 본인의 말로는 딱 스무 살 때의 모습이라고 한다. 눈은 시리게 빛나는 금색
파도ASMR 반도의 작은 바닷가 마을을 지배했던 조직에게 화합의 손길이 있은지 일 년이 채 되지 않아 거짓된 평화는 깨졌다. 만 리 타지의 이국으로 떠나려던 계획은 좌절되었고 십 년 전의 과오를 징벌하려던 야심도 이뤄지지 못했다. 검거, 그리고 증거 불충분이라는 형태로 아무도 이기지 못한 전쟁이 끝나고 남겨진 건 고작 몇 년뿐의 단죄였다. 해광이 앗아 간
살얼음판 같은 인생에게도 가끔은 일상이라는 것이 있어서, 그날은 보기 드문 조합으로 동네 오락실을 찾았었다. 말하자면 사카모토 하나가 가게에만 있기 싫다며 투덜거려서인데, 마침 레몬 사워 사탕을 사러 사카모토 가게를 찾은 손님이 있었던 탓에 일행이 많아졌다. 들뜬 채로 밖으로 나선 것은 좋았으나 하늘이 무심하게 내린 비에 일행은 쫓기듯 눈앞에 보이는 오락실
이다키소 사쿠가 처음으로 남의 작품을 아름답다고 느낀 날과 역겹다고 느낀 날은 정확히 같은 날이었다. 슬슬 쌀쌀해지는 날씨를 무시 못하고 긴 셔츠를 꺼냈을 무렵이었다. 등받이 없는 의자에 앉아 있던 이다키소 사쿠는 타인의 작품을 보고 있다가 창 너머 이제 막 겨울이 오려고 하는 하늘로 시선을 옮겼다. 모르는 척 하고 싶을 정도로 날이 맑았다. 구름 없이 파
月乃-지구 최후의 고백을 도쿄는 한 번 재가 되었다. 사람들은 잃어버린 것을 되돌리는데 필사적이었다. 도쿄가 통째로 무너져도 사람들은 수도를 새로 정하는 것이 아닌, 모든 지역의 자원을 총동원하여 도쿄를 재건하는데 힘을 썼다. 어쨌든 인간이라고 하는 하잘 것 없는 종은 그 느슨하고 얇은 명을 어떻게든 태워내서 또 다시, 눈부신 도쿄를 세워냈다. 모든 게
처음 만나고 몇 개월, 그것은 어느 날엔가 나구모 요이치의 일상에 침투했다. 갑작스러운 호출이 있고 난 며칠 후부터 그것은 본격적으로 나구모가 있는 장면에 빠지지 않고 등장했다. 다른 날은 차치해도 임무가 있는 날이면 꼭 그랬다. 그것은 항상 나구모 요이치를 비롯한 ORDER들 보다 훨씬 빨리 현장에 나타나 밑준비를 마치고 기다리고 있었다. 몇몇은 귀찮은
스스로가 우습다는 걸 모르지는 않았다. 그게 시덥잖은 질투라는 것도. 하지만 알았을 땐 모든 게 너무 늦어 있었다. 나구모 요이치는 자신이 지독한 늪에 빠져 있음을 몰랐다. 코토다마 나기사라고 하는 그 불쾌한 늪지대 심핵에는 오래 전 그의 이름에 새겨진 죄가 있었고 죄책감이 여지껏 그를 강하게 끌어당기고 있었다. 그는 언제든지 나가려고 하면 그 바깥으로 나
그것은 도쿄의 여름 거리에 서 있었다. 다만 나구모 요이치와 만나기 전의 긴 곱슬 머리를 하고 있었고 하얀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늘 가지고 다녔던 장도도 없었고 눈밑 짙은 그림자도 없었다. 그것은 그냥 어디에나 있을 것 같은 여름날의 소녀였다. 얌전하고 차분한, 그리고 다정한. 코토다마 나기사가 만약 그 자체로 존재할 수 있었다면 꼭 그런 모습이었을 것
코토다마 나기사의 사망으로부터 3년. 나구모 요이치는 킬러를 그만뒀다. 싸구려 비극처럼 엉망진창이었던 그 삶은 마지막 역시 보잘것 없고 허무해서, 코토다마 나기사의 죽음은 어떤 절벽에서 일어났다. 그것은 벼랑 끝에서 떨어졌고 그대로 깊은 바다에 떨어져 다시 되찾지 못했다. 나구모 요이치가 알게 된 것은 그 모든 일이 다 끝나고 난 후였다. 그는 시체를 찾기
지금이라면 알 수 있었다. 그날 왠지 모든 것이 이상하게 돌아갔다는 것을. 코토다마 신코우는 구태여 항상 데리고 다녔던 사용인에게 이상한 잔심부름을 시켰다. “나기사. 여기 있는 물건들을 구해 오면 좋겠는데. 급하게 좀 필요해서 말이야.” 그렇게 말하며 내민 얇은 종이에는 날린 글씨가 빼곡했다. 한자어와 가타가나가 가득했는데 한자를 잘 읽지 못하는 코
일본 살인청부업자 연맹 ‘살연’ 직속 특무부대 ‘ORDER’. (앞) 이미지 출처↓ 일반적인 정보 잘 벼려낸 장도를 쓰는 검사. 정돈되지 않은 검은색 샤기컷에 그림자 진 검은 눈, 이따금씩 나타나는 특수동공이 특징적이다. 발끝까지 덮는 기다란 메이드복 위에 케이프를 입고 있다. 체구가 왜소하다. 말을 전혀 하지 않는다. 말을 전혀 하지 않기 때문에 일상생활
소년이 무슨 생각을 하든 해가 지면 달이 뜨고 달이 지면 다시 해가 떴다. 시간만은 무심하게 흘러서 계절이 한 번 바뀌는 동안 소년은 아이에 대한 것을 까맣게 잊었다. 그 아이가 다시 산호탑에 찾아오는 일은 없었고 소년은 친구를 바라는 것이 분수에 넘치는 일임을 알았기에 아이에 대한 것을 빠르게 잊어버렸다. 소년은 하루하루를 바쁘게 보냈기에 애쓸 것까지도
그 아이는 유독 체구가 작은 사막 부족이었다. 어깨에 간신히 닿는 단발은 밀밭을 닮았고 옅은 안광이 찍힌 두 눈은 맑은 하늘색이었다. 겉모습만으로는 아이가 여자 아이인지, 남자 아이인지 알 수가 없었고 다른 누군가에게 물어본들 남자인지 여자인지 추측이 난무할 뿐이었다. 아이는 항상 인상을 쓰고 다녔는데 누군가 말을 걸거나 잡기라도 하면 매섭게 쏘아붙이곤 했
“그러고보니 내일은 저 아이 생일 파티인데. 너도 올 거니?” 비술사 길드 마스터 투뷔르가임은 길드에 찾아 온 달의 수호자 소년에게 인자하게 미소지었다. 소년은 도끼술사 길드 소속이고 그곳의 마스터인 뷔른쵠이 돌보고 있지만 비술사 길드에 친구가 한 명 있는 탓에 자주 모습을 보였다. 처음 뷔른쵠에게 소개 받았을 땐 얼굴에 어두운 빛이 가실 줄 모르는 침울
평소 한산했을 오후 세 시의 바닷가. 림사 로민사의 두 길드에서 나온 사람들로 항구는 인산인해를 이뤘다. 한쪽에선 비술사 길드 접수원이 책을 탑처럼 쌓아놓고 있었고 반대쪽에선 도끼술사 길드 소속 도끼술사가 터질 듯 가득 찬 배낭을 옮기고 있었다. 책으로 된 탑 옆에 유독 체구가 작은 사막 부족 라라펠이 서 있었다. 그는 다 낡은 책을 들고 있었고 가벼운 배
부채춤: 발단 일사바드의 섬나라 사베네어에는 유랑 극단이 하나 있는데, 그 극단에는 무술 무용에 능한 무도가들이 여럿 있었다. 오네드웨스프는 그 중 한 명으로 그는 극단을 처음 만들었던 늙은 무도가였다. 그는 전쟁 난민으로 부채꼴 결정Ornedwesfv 산을 떠나 일찍이 일사바드에 정착한 비나 비에라족의 후예였다. 그는 나이 든 노인 비에라였지만 늙지 않는
BGM DOES-Shura 성지 골모어 대산림을 지키는 숲의 수호자들이 있다. 그들은 라바 비에라라는 이름의 비에라 부족인데 으슥한 숲 속에 스며들어 그 어떤 자도 숲에 허락 없이 들어오지 못하게 만든다. 라바 비에라 여성은 일반적으로 고향에서 전통을 지키며 지내지만 남성은 성인이 되었을 때 고향을 떠나 유랑한다. 소년은 그 밀림을 한참 전 떠나 작은 숲
FFXIV - The Lochs 그리하여 기라바니아 산악지대. 알라기리에 도착한 일행을 제일 먼저 반긴 것은 자나이로였다. 그는 이제나 저제나 그들을 기다렸던 것처럼 에테라이트 근처에서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다. 제일 먼저 도착한 것은 닌자였고 낯선 이를 보자마자 자나이로는 그를 덥석 붙잡고 학자의 행방을 물었다. “학자님 일행이시죠……! 학자님은요?”
하루를 꼬박 새웠다. 상처가 심한 사람들을 순서대로 돌아보고 급한대로 처치를 끝내니 이미 한밤중이었고 명검상단 숙소 터 쪽은 저녁 중에 일이 마무리가 됐다. 전사 역시 저녁 내내 이젠 폐허가 된 터와 알라기리를 오갔다. 그들은 아무 대가도 약속받지 않았고 그 흔한 식사 대접조차 받지 못했지만 아무런 불평 없이 밤새 사람들을 돌봤다. 흥분에 가득 차 소란스러
“호위?” 가장 먼저 반문한 것은 백마도사였다. 그는 식사하던 손을 멈추고 다음 임무 소식을 발표한 파티 리더를 바라보았다. “누구를 호위하는데요?” “음… 그게…” “누굴 호위하는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잖아요. 우린 맡은 일만 하면 되니까. 어차피 8명이 다 갈 필요도 없어요.” 어물거리는 전사의 입을 막은 건 학자였다. 말하는 것을 보면 호위 대상이
아무도 대답하지 않는 시간이 길게 이어졌다. 분명 살아있는 것이 열 한 개나 됐는데도 모두가 죽은 것처럼 조용했다. 그때 약속된 타이밍처럼 8시가 됐고 지하 계단에서 쌍둥이 로봇이 나타났다. …블러디와 포레스트. 이 게임의 가증스러운 사회역할을 맡은 기계 소녀들이었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상큼하게 웃는 얼굴에 표정이 절로 구겨졌다. 웃는 얼굴엔 침을 어떻게
아침이 밝았습니다. 천장 스피커에서 방송이 나온 건 7시 쯤이었다. 잠을 설친 난 결국 인상을 팍 구긴 채로 1층 로비로 내려갔다. 내려가는 길엔 아무도 마주치지 않았다. 1층 계단을 내려오자 먼저 로비로 나온 사람들이 보였다. 일찍도 나왔네. 나는 일부러 적당히 거리를 유지한 채 1층을 훑었다. 프론트 쪽엔 사서 청람이 담요를 팔에 걸친 채 서 있었다.
빨간 소녀는 우리가 여자 화장실에서 처음 만났을 때 그랬듯이 기계팔로 전등을 도로 덮어놓곤 가버렸다. 전선을 억지로 뽑는 바람에 빛은 아까의 절반도 되지 않았지만. 사라지고 기척이 완전히 없어졌을 때 나는 흡연구역 바닥에 주저앉았다. 손을 어떻게 만든건지 파르르 떨고 있는데도 아무 감각이 없었다. 등 뒤에 기댄 자판기 벽면이 차가웠다. 쥐 죽은 적막 속에
꿈을 꿨다. 그 꿈 속에서 우린 함께였다. 최악의 형태로 말이다. 어쩌면 누군가에겐 최악이 아닐지도 몰랐다. 그때 우리 곁을 떠났던 녀석들 또한 그 자리에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것만으로 유쾌하다고 느끼기엔 상황이 좋지 못했다. 우린 또 다시 이 영문을 알 수 없는 도서관에 갇혔고 나갈 방법 역시 마땅치 않았으니까. 한 번 탈출했음을 기억하고 있던 건 오로지
그 방의 존재를 가장 먼저 알아차린 건 파우스트였다. 놀라울 일은 아니었다. 파우스트는 이 버스를 만든 사람이었고 그 버스에 통로를 붙인 것도 그였다. 직접 만든 것이니 밝혀지지 않은 것이 있다면 알고 싶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둠 속으로 걸어 갈 이유는 그것이면 충분했다. 그 중 심히 이상한 방이 있었는데 그 방은 다른 방에 비해 문이 아주 작았고 또
아주 오랜만에 온화한 꿈을 꾸었다. 기다란 원피스를 걷어 올린 채로 커다란 소 위에 올라타서 시골의 논두렁을 지나가는 꿈이었다. 곁에는 그리운 시절의 그가 있었다. 그는 마구 흔들리는 소 위에서 불안하게 흔들리는 소녀를 보며 은은하게 웃었다. 균형을 못 잡고 쓰러질 것만 같을 때 그 손을 잡곤 균형을 맞춰 주었다. 이상의 옆엔 벗이 두 명 있었다. 오랜 여
태양을 독점하고 싶었다. 해가 공평하게 세계를 비추듯 소녀는 누구에게나 친절하고 다정했다. 지나치며 마주치는 모든 사람들에게 반갑게 아침 인사를 건네고 제 몫의 식사를 나눠주었으며 때로는 손을 붙잡고 앞으로 이끌었고 소리 내어 웃었다. 남모르게 소녀를 연모하는 이들이 늘었다. 소녀 본인은 알지 못했던 것 같았지만 소녀가 검계의 많은 조직원들에게 사랑받고
기억 추출은 다소 급하고 빡빡한 스케줄로 진행되었다. 처음 버스 안에 모습을 드러냈을 땐 여려보이는 겉모습이 무색하게 건강하고 활기찼지만 황금가지를 수거하러 버스가 출발한 이후로 ■■는 빠르게 쇠약해졌다. 앓는 일이 늘었고 잠이 부쩍 늘었다. 이상의 노력으로 로쟈와 공명한 황금가지를 꺾어올 때 쯤엔 족쇄를 차고 버스 안을 돌아다닐 수 있을 정도의 자유를 허
허무맹랑한 꿈이었다. 선우빈이 다시 도서관에 갇히다니. 선우빈은 제 자신이 꿈을 꾸고 있음을 알았다. 다시 일어나지 못할 현실이라고, 그야 그렇겠지. 봐라, 우리 모두가 살아있다. 선우빈은 그것이 얼음보다도 차가운 환상임을 알았다. 참으로 잔인한 악몽이었다. 모든 것이 그때와 똑같이 흘렀다. 사람들은 감금 당한 사실을 알아채자마자 서로 저마다 다른 말들로
첫 번째 만약, 도서관에 다시 돌아가게 된다면 그는 마침내 도달했다. 세계의 끝이라는 곳에. 절벽 끝에 선 그는 바이크에서 잠시 내려 사진을 찍었다. 핸드폰에 줄줄이 달린 스트랩이 흔들거렸다. 단 한 장 찍은 사진에선 저멀리 벌건 태양이 수평선 너머로 뜨고 있었다. 그는 어쩐 일인지 곧바로 SNS에 올리지 않고 다시 바이크에 올라탔다. 지구의 마지막 땅이
나는 당신에겐 별로 연이 없는 인간이다. 나는 날적부터 문제아였고, 지금도 그렇다. 당신과 또래이면서 번듯한 일도 하나 없이 그저 내키는대로 돌아다닐 뿐인, 열 일곱 살 적 불량 소녀에서 달리 달라진 게 없는 사람이다. 더러운 진창 같은 현실의 최전선에서 살고 있는 내가, 따듯하고 온화한 세상을 그리는 당신과 연이 있을 리가 없잖아. 우린 결국 이때 한 철
나중에 밝혀진 사실이지만, 그 구름은 악의 그 자체라고 한다. 그 속에 들어간 사람에게 악의에 가득찬 세계를 보여준다. 끝없는 어둠을 보여주고, 결국에는 그 속에 집어삼켜지게 만든다. 그리고 그 어둠 끝에 보이는 유일한 빛에 마음을 빼앗겨버린다고 한다. 뱉어버리고 나선 귓가에 저주스러운 말들을 속삭이고 위험한 충동을 끊임없이 일으켜 주변을 쑥대밭으로 만들게
그 여자를 비탄에 빠트린 것은 무엇이었을까? 아직도 그 검은 인영의 정체를 알 수가 없다. 처음에는 거대한 블랙홀처럼 보였던 그것은 그날 철학자 광장 위에 드리워 원형 건물을 통째로 집어삼킬 것처럼 우르르 울었다. 그리고 미처 상황을 알지 못했던 에린 진잘이 문을 열고 나온 순간을 노려 그 모습 그대로 집어 삼켰다. 우리는 그가 사라졌을 것으로 생각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