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정원사
총 71개의 포스트
1. “이런 좋은 날씨에 표정이 왜 그래?” “좋기는 무슨.” “좋잖아? 바람 시원하고, 하늘과 바다는 청량하고 맑고. 요트 타기 딱 좋지 않아?” 그자의 말대로였다. 햇빛은 강했으나 불어오는 바람 덕분에 덥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요트의 돛은 바람을 받고 부풀어서 시원하게 바다 위를 미끄러졌다. 항해는 순조로웠고, 운전할 사람을 제외한 다른 세 사람
1 끝없이 눈이 내리던 어느 겨울날, 아루잔은 죽음 인근에 이르렀다. 정확히 어떻게 그리되었는지 아루잔은 알지 못한다. 세찬 바람이 휘몰아쳤으며 거친 눈발이 쏟아졌다. 시야가 지독히도 희뿌옜으며 한 발자국 앞도 보이지 않았다. 몸이 덜덜 떨렸고 고통스러울 만큼 추웠다. 동서남북 중 어느 쪽에 자신의 유르트가 있는지 도무지 보이지 않았다. 돌아가고자 디딘
머리가 카펫에 짓눌린다. 펠트 카펫의 까슬까슬한 감각이 뺨을 긁었고 아루잔은 간신히 고개를 비틀어 눈와 코가 바닥에 닿는 것을 피하려고 해보려고 한다. 신의 형상은 거대하고 손가락 한 하나만으로 사람의 머리를 땅에 박아둘 수 있었다. 제 두 팔로 신의 손가락을 밀어내거나, 땅을 짚고 일어나려는 시도는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상대할 수 있는 범위의 압력이 아
명일방주 AU 한 전달자가 초원을 걸었다. 파릇하게 듬뿍 돋아난 풀밭이 그의 발을 받들어 안았다. 전달자는 이파리들을 내려다보았다. 특별한 것 없이, 흔하디 흔한 종류이지만 그것을 바라보는 전달자의 눈은 퍽 부드럽고 상냥하다. 아무리 무수히 많은 것이라도 이 대지의 기반이었는데, 통으로 잃어버릴 뻔하고야 귀중했음을 깨달았다. 요 풀들이 죄다 노랗게 말라갔
1 아루잔은 아직 시카고에 있었다. 신에 의한 전쟁이 끝난 지 삼 일이 되는 날이었다. 잠시 전쟁터가 되었던 시카고는 이제 조용하다. 전투가 끝난 곳에 군대가 계속 머물러야 할 이유는 없다. 게다가 이곳에 온 이들은 원래 군대가 아닌 개개인의 집단이었으므로 더 그러하다. 승리한 자들은 축가를 부르며 떠났다. 그들은 인간이 신 없이 살아갈 수 있음을 선포
아루잔은 어느 순간부터 동물의 말을 알아듣게 되었다. 어느 양이 수렁에 빠졌을 때 도와달라고 외치는 소리를 들었으며 어느 새끼 염소가 개에게 도전하려고 도전장을 던지는 울음을 들었다. 그 소리는 직관적이고 간단했으며 꼭 인간의 언어로 치환되는 종류도 아니었다. 따라서 아루잔은 그 소통을 숙련의 결과로 여겼다. 자신의 가축들을 오래 돌보았더니, 울음소리만으
1 이스마엘은 물고기를 발견했다. 놀랄 일은 아니었다. 이스마엘은 고기잡이배 위에 있었고, 이스마엘은 그 배의 선원이자 어부였다. 그런 그에게 물고기는 익숙하다 못해 훤히 꿰고 있는 대상이었다. 대략 40인치 정도의 붉은 도미. 멕시코만에서 많이 잡히는 물고기이다. 요 며칠 사이에도 같은 종류의 물고기를 제법 잡았다. 그런데 왜 이것은 여기 있는가?
그런 종류의 제안을 넙죽 수락하는 자는 부주의한 자들이다. 그들은 방금 만났을 뿐이고 상호 간의 신뢰는 아직 형성되지 않았다. 오라클도 그 정도는 알았다. 다만 그는 한가지 실수를 했다. 너무 끈질기게도 많이 말하며 밀어붙였다. 도움을 강요하며 즐거움을 얻었던 오라클은 이제 자신이 했던 말을 책임져야 하는 때가 되었다. 방어적으로 나오던 페네트라가 그걸
잠시 후 페네트라는 로브의 앞에 서 있었다. 소통이든 대화이든 도움이든 뭔가를 저것은 하기를 원한다. 그렇다면 질질 끄는 대신 빨리 해치우고 떠나자는 결론을 내렸다. 표정을 풀거나 유순하게 굴지는 않았다. 제 속내를 숨기고 웃는 것을 할 줄 모르지 않았고 오히려 능숙했지만, 상대가 제 속을 빤히 알고 있다면 겉치레가 무슨 소용인가? “그래, 오라클. 무
그것은 자신의 존재를 자각하는 것으로 시작하였다. 눈을 떠보니 낯선 광경이라는 말이라거나, 포근한 침대 위에 누워있었다거나, 어디선가 들려오는 외침에 정신을 차리게 되었다는 말로는 설명할 수 없다. 그 당시에 육체의 감각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시각도, 촉각도, 청각도 없었다. 다만 뇌만이 있었다. 뇌는 잃어버린 육신을 움직이려 시도했고, 제각
페네트라는 벌떡 일어났다. 일어날 수 있었다. 그리고 소리를 질렀다. “이바나!” 몸을 숨기라고 했는데, 이바나는 그러지 않았다. 이바나는 멀리 가지 않고 주위에서 전황을 살피고 있었다. 페네트라에게 뒤에 적이 있다고 외친 것은 이바나였다. 그리고 그 자에게 총을 쏜 것도 이바나였을테다. 그자는 방탄조끼를 입었지만 방탄조끼가 팔이나 다리에 날아드
“정신이 들어?” “응. 얼마나 지났어?” “아주 잠깐밖에 안 지났어.” “이상하네. 아주 긴 시간이 지난 줄 알았는데.” 이바나는 풀밭에 누워있었다. 그 상태로 하늘을 보았다. 페네트라는 주위를 지키느라 단단히 움켜잡고 있던 총을 조금 내리며 이바나를 따라 올려다보았다. 잠깐이었지만 그사이에 해가 빠르게 기울었다. “몸 상태는 어때?” “아무렇지도
“내가 이바나라고?” 아이에게 서늘하고 냉랭한 미소가 걸렸다. “그러면 잘못 찾아왔어. 나는 이바나가 아니야. 나는 아델라라고 하는 녀석이고, 이바나는 없어. 지긋지긋해. 저리 가.” 많은 풍파를 거친 이들이 가지게 되는 냉소적인 태도가 드러났다. 그 얼굴이 낯설면서도, 어디선가 많이 본 듯 익숙했다. 페네트라는 그 표정을 오래 보다가 씁쓸함을
이바나 체르니는 13살의 안드로이드였다. 정확히 말하면 원본이 13살에 죽고 안드로이드가 되었다. 페네트라가 7살일 때 이 마을로 이사 왔고 그런 페네트라에게 자신이 13살이라고 일러주었다. 그리고 페네트라가 14살이 되자 잠시 고민하더니 안드로이드가 된 이후의 시간을 합쳐서 21살이라고 주장했다. 페네트라는 깔깔대며 웃고서는 딴지를 걸었고, (‘네가
페네트라는 이불 사이에 구겨져 있었다. 그 몰골은 쓰레기를 둘둘 말아서 길거리에 버린 비닐봉지와 비슷했다. 실제로 그가 걸친 방호복의 비닐 재질이 그런 인상을 주는데 크게 이바지했다. 시작은 순백이었을 방호복이 먼지와 흙 따위로 더럽혀져서 그다지 깔끔하지 않다는 점도 일치했다. 그 사실을 페네트라도 알았고,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원래도 깔끔하고 예의
페네트라는 놀랍게도 그것에 대해 무감했다. 어린아이가 겪어야 했던 고난에 대해 마땅히 가져야하는 연민이 일지 않았다. 조사하면서 우연하게도 그것의 흔적을 별로 마주치지 못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것의 행동을 보지 않은 것은 아니나 페네트라가 보았던 행동들은 순진무구한 장난으로 해석되지 않았다. 능란한 해커의 수작이었고 계획적인 악의였다. 다른 조들은
“마을에는 따라오지 마세요.” 페네트라는 팔짱을 끼고 그렇게 말했다. 각종 방호복을 꼼꼼하게 갖추고 안전벨트까지 착용한 모습은 뻗대고 있다거나, 건방져 보인다는 인식을 주기 상당히 어려웠다. 그러나 페네트라는 목소리와 자세만으로 앞에 언급한 인상을 전해주는 것에 성공했다. 하지만 미즈리 요원은 도발 당하지 않았다. “이유는?” “현지인 마음대로.”
햇살이 부드러웠다. 그것은 창가의 문양을 따라 도형을 그리지만, 테두리가 부드럽게 번져 벽을 물들었다. 페네트라는 이상하도록 따스한 노란 무늬를 멍하니 보았다. 내 방에 이렇게 아름다운 것이 있을 수 있었나? 왜 그간 못 봤지? 주위는 고요했다. 그 고요가 마음에 들었다. 또한, 기분도 신선했다. 몸이 이렇게나 가벼운 느낌은 오랜만이었다. 상쾌하고 머리
페네트라는 숲을 달렸다. 이 지점에서 바위를 뛰어넘고 바닥에 착지. 다섯 걸음을 내디뎌서 내리막을 미끄러지고 완전히 바닥에 내려왔을 때 잠시 멈춰서 바지를 털어낸다. 이 옷이 자신의 옷이 아니라는 생각이 잠시 들었지만, 일단 넘어간다. 그리고 물소리가 들릴 때까지 달리다가 좌측으로 튼다. 그곳에는 기다란 나무가 쓰러져서 시냇물을 가로지르는 다리를 만들고 있
페네트라는 옆구리에 책을 끼고 어슬렁어슬렁 걸어 나왔다. 집까지 걸어가는 길은 지겨웠다. 스케이트보드를 타고 발로 땅을 박차듯 바닥에 발을 문질러보았으나 흙먼지만 일어서 그만두었다. 도서관에 들르면 이게 문제였다. 책을 옆구리에 끼느라 손이 자유롭지 못해 스케이트보드를 타고 갈 수 없었다. 물론 두 손을 호주머니에 넣고 스케이트보드를 타는 묘기 정도는 부릴
체코의 작은 마을의 유일한 초등학교는 지난 십여 년간 교사진이 거의 바뀌지 않았다, 6년 전에 외국어 교사가 추가로 부임한 일을 제외하면 그대로였다. 그러니 그들은 그 마을의 아이들에 대해 잘 알고 있었고, 꽤 노련하기까지 했다. 그런 교사진 중 한 명이자, 페네트라의 담임 선생님은 드물게도 난처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페네트라는 언젠가 자신이 학교의
“야! 파비우스!” 페네트라는 화들짝 깨어나 땅에 책을 떨어뜨렸다. 그리고 의아해하며 떨어진 책을 보았다. 왜 떨어졌더라? 아, 저걸 읽다가 누워버렸고, 빛이 거슬려서 자연스럽게 얼굴 위에 덮었지. 그리고 순조롭게 잠들었지. 페네트라가 잠기운이 덜 가신 상태로 책을 주워들었고, 겉표지를 확인해보고 친구가 보내준 책이 아님을 확인했다. 다행이었다. 친
스산한 기류가 흐르고 있었다. 오가며 마주칠 수 있는 해파리의 수가 눈에 띄게 줄었고, 그나마 보이는 이들은 평소보다 더 유령 같았다. 대체 무슨 일인가? 며칠 전까지만 해도 안개협곡이 이렇지는 않았다. 퀴렐은 계속 주위를 두리번거렸고, 결국 배회하는 해파리 하나를 붙잡아 물었다. “저기요? 실례가 안 된다면 잠시 말씀 좀 묻겠습니다.” 다리가
호넷의 위치는 애매했다. 겉으로 보기에는 그러했다. 호넷의 아버지는 왕국을 재건하여 신성 둥지에서 강대한 영향력을 미쳤으며 호넷의 어머니는 그의 지배를 거부하는 야수들의 중심이었다. 그들은 각각 창백한 왕과 야수 헤라라고 불리었다. 간단히 말하자면, 서로는 각자의 세력이 가장 먼저 떠올릴 수 있는 적이었다. 그 사이에서 호넷은 태어났다. 눈물의 도시
호넷과 기사는 높은 건물에 꼭대기에 서 있었다. 빗물이 떨어져 그들의 우비 자락에 앉은 후, 다시 수백 미터 아래로 아찔하게 추락했다. 그러나 둘 중 누구도, 떨어질 것 같다거나 빗물이 불쾌하다며 요란을 떨지 않았다. 둘 다 농담이나 나누는 이들은 아니었기 때문에 곧잘 있는 일이었다. 또한, 잠입을 앞두고선 진중해야 했다. 눈물의 도시는 계획되어 지어진
1 엔리카는 홀로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거대한 성당이었다. 수백 명이 모일 만큼 넓었으나 촛대에 세워둔 불빛은 구석에 가닿지 못했다. 어둠이 곳곳에 스며있었다. 그 사실을 의식할 때 마다 엔리카는 움츠러들었다. 낯선 장소에서 어두운 귀퉁이는 사람을 두렵게 만드는 법이다. 낮이라고 이 공간이 포근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낮이면 속속히 드러난다. 이 공
라리안은 고개를 돌려 옵시디언을 보았다. 옵시디언은 잠이 많아졌다. 자주 유약하게 잠들어 있었고, 이번에도 그러했다. 라리안은 손을 뻗었다. 옵시디언의 머리카락이 흘러 내려와서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주려고 했다. 그러다가 허공에 걸린 듯 덜컥 멈췄다. 더 가까이 가지 못했다. 라리안은 손을 내리고 꽉 쥐었다. 옵시디언이 접촉하지 말아달라고 했다.
언성듀엣을 다녀온 이후의 옵시와 라리안에 대해서 연인은 서로 사랑하며 사랑을 나누기로 약속한 자들을 뜻한다. 그러나 사랑하며 사랑을 나누는 이들이 연인은 아니다. 이것은 단순한 논리이다. 참의 역은 참이 되지 않다. ‘옵시디언과 자신은 연인이었다. 그리고 더는 연인이 아니다.’ 라리안은 이 명제가 불변의 진리일지는 고민해봐야 했다. 인정하고
구두 소리가 복도에 울렸다. 비올렛은 빠르게 걸으며 예리한 목소리로 질문만을 뱉었다. “상황은?” “서장이 난리지. 우리 관할에서 또 이런 일이 발생했다고.” 케이든은 보폭을 벌려 따라갔다. 그러나 답변은 태연하고 느긋하기까지 했다. 비올렛은 미간을 찡그리며 말했다. “그런 상황 묻는거 아닌거 뻔히 알잖아, 케이든. 사건과 관련한 상황만을 말해.” 케이든은
1 에델슈타인 사건 보고서 XXXX년 XX월 XX일 에델슈타인 시가지에서 약 200m² 크기의 부지가 파괴되고 건물이 파손되는 사태가 발생했다. 시간이 행인이 드문 밤중이었기 때문에 큰 인명 피해는 없었다. 하지만 사태 이후에도 현장에서 정체불명의 30m 가량의 높이의 검은 너울이 관측되었다. 따라서 혹시 모를 추가 피해를 막기 위해 시민의 접근을 통제
“언니가 왜 여기 있어?” 캐니안은 가면을 쓴 사람의 망토를 붙잡고 물었다. 그 자는 답하지 않았다. 가면을 쓴 이는 레헬른에 널려있었다. 이유야 어쨌든 잠입하기는 편리했다. 그저 가면을 쓰고 어울리면 되는 것이다. 같이 파견된 몇몇 동료는 축제보다도 가면 자체에 들떴다. 정체를 숨기고 누가 누군지 모르는 장소에 섞여드는 것이다! 캐니안은 가면을 썼다고
1 “지능은 한마디로 정의할 수 없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 것이 그렇듯 시처럼 함축적으로 표현하려면 못 할 것도 없겠지만 정의를 내리는 것은 다르다. 섣부른 정의는 지능의 다양한 기능 중 일부를 배제시킬 수 있다. 따라서 지능은, 지성체가 출현한 시점, 혹은 그 이전부터 존재했고 긴 역사에 걸쳐 인지되어 왔음에도 불구하고 정의가 내려지지 않은 영역이었다.
“순간이동 마법이라는 것이 막 간단하게 손을 딱 튕기면 되는 그런 단순한 게 아니야. 엄청난 고도의 기술이라고! 물론 마법 중급 연산 과목에서 다루기는 하지. 너희 나름 이해도 했다고 생각하겠지. 대상 공간 격리, 이동 공간 파악, 위치 안전 확보, 이동, 격리 해제, 끝. 대충 이렇게 배웠겠지? 근데 그게 다가 아니라고. 이동 부분을 보자. 좌표를 받아서
남자는 곧은 손가락을 뻗어 펜촉으로 글씨를 가만가만 써 내려갔다. 얇은 커튼을 넘어오는 밝은 햇살 아래 잉크 방울이 반짝였다가 서서히 마르며 양피지에 글씨가 아로새겨졌다. 남자는 겨우 한 문장을 쓰고는 펜을 놓았다. 그리고 고민하며 한참을 들여다보다가 보다가 방금의 문장을 읊조렸다. “모든 학문은 공익을 위해서 연구되고 발전시켜나가야 한다.” 맞은
휴대 전화가 울렸다. 전화 올 곳이 보험권유나 설문조사 같은 것 밖에 없을텐데, 아니면 일 시키려고 하나...... 세나는 시큰둥하게 휴대폰을 뒤집어 보았다. 뜻밖에도 휴대폰에 뜬 이름은 반가운 것이었다. 드물고 소중한 친구의 연락. 세나는 싱긋 웃었다. “지현!” 세나는 광장에서 손을 크게 흔들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스쳐갔으나 그 사이에 붉은 머리의
“분석 결과가 나왔어요.” 잔잔한 여성의 음성이 전해졌다. 라리안은 수화기를 고쳐들었다. “어떻습니까.” “사람의 혈액이 맞아요. 그 안의 유전 정보로 신원까지 파악하였어요. 이름은 베르덴 휴. 나이는 28세. 몇 년 전 실종되었던 인물이고 그간 발견되지 않았다가 이번에 처음으로 나타났어요. CCTV로 확인한 이미지와 인상착의도 일치해요.” “그렇
라리안은 콘크리트 바닥을 쓸었다. 장갑에 혈흔이 묻어났다. 손가락으로 문질러보자 핏물이 미끄러졌다. 라리안은 장갑에 묻은 핏물을 유심히 바라보다가 중얼거렸다. “사람이었을까?” 뒤에서 지켜보던 러브가 물었다. “오토마타일 수도 있지 않을까요?” 라리안은 돌아보지 않으며 고저없이 답했다. 유독 냉랭하게 구는 것은 아니었고 원래 그런 사람이었다
그날 일어난 일의 범인이 누구였는지는 이 이야기에서 비밀이 아니니 먼저 밝히도록 하겠다. 범인은 공연 관계자 전원이었다. 마술사 A씨는 무대에서의 매너 있는 태도와는 달리 사실 인성이 그닥 좋은 사람이 아니었다. 공연 관계자들에게 행패를 부리고 악덕같이 부려먹었다. 원래 그런 관계에서는 잘못한 사람은 자신이 잘못한 것을 모른다. 따라서 마술사의 사이코패스는
“야, 하진.” 공안국 건물 옥상이었다. 사람이 특별히 올 리가 없는데? 하진은 뒤를 돌아보았고 그러자마자 작은 물체가 가볍게 날아왔다. 하진은 척 받아냈다. 간단한 사이코패스 측정 단말기였다. “이건......” 하진은 미심쩍은 눈으로 물건을 보고 태연하게 걸어오는 세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세나?” “여기 바람 좋네.” “그렇죠? .
형사과 4계의 감시관 한 명이 다른 부서로 발령받아 떠나고, 일주일간 4계의 감시관은 세나 혼자였다. 그 사이 사건이 참 다채롭게도 터졌다. 인터넷에 어느 작자가 의도적으로 잔인하게 합성한 영상을 불법으로 뿌려서 시민의 사이코패스가 다량으로 악화되어서 잡으러 가야 했으며 불법 약물이 암거래되고 있다는 신고가 들어왔고 뭔 사이비 종교 단체가 처박혀서 수상한
그리 멀지는 않았다. 몇 걸음 더 쫓아 걷자 나무 그림자가 확 걷히고 시야가 트였다. 그리고 가운데로 나 있는 오솔길이 보였고 그 주위로 제철의 풀꽃이 만발했다. 희고 노랗고 푸른, 또는 붉거나 보라 기운의, 분홍빛의. 점점이 찍혀있는, 선을 그리는, 다발로 묶인 형태들이 바람에 한들거렸고 홀로 톡 튀어나오거나 무리를 지어서 군락을 이룬 것들이 지금 그들이
그즈음은 학교에 있는 중 가장 자유로운 나날이었다. 기말고사가 끝나고 방학은 아직 되지 않은 시점. 수업은 없고, 선생님들은 바빠서 교무실에 박혀 있다가 성적 확인하시러 잠깐 들리고 다시 가신다. 그러니 나머지는 해방의 시간이었다. “해방이라니, 이것들아. 자습이야, 자습!” 지나치게 신나하는 기색을 감추지 못한 학생들에게 선생님이 핀잔을 던졌다.
하늘이 느닷없이 무게를 가지고 조각조각 추락한다. 그 너머에는 밤과는 다른 텅 빈 공백이 있었다. 세상이 무너져 내렸다. 이곳은 심상 세계, 심상세계는 마법의 근원. 그 마법이 흩날리는 눈처럼 부서지고 흩어지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나 아직은 미약하게나마 남아있다. 하늘에 대항하여 대지는 아직 버틸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처럼 빛을 발한다. 무너지는 세
가을 밤의 축제를 찾아가는 것은 어렵지 않다. 무작정 숲의 가장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면 속삭임이 들린다. 어떻게든 꾀어내려는 온갖 것들의 속삭임. 그러면 그중 하나를 잡아채서 장소를 불게 만들거나 속삭임에 홀린 척 뒤를 따르면 된다. 간단한 것은 두 번째이다. 조금만 뒤따라 걸으면 금세 시끌벅적한 축제 음악이 놓칠 수 없게 들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의
“누나, 누나. 저기 축제를 열고 있어.” “그러네? 이런 시골에 무슨 일이래.” “가보자!” 앤디는 베시의 손을 잡아당겼다. 어릴 적부터 앤디는 고집이 셌다. 그리고 그걸 말리는 것은 베시의 역할이었다. 베시는 단호하게 딱 잘라 말했다. “안 돼, 앤디! 이만 늦었으니 돌아가야지. 축제 구경은 다음에!” 앤디가 배시의 눈을 마주 보았다. 그러더
아가야. 시월의 보름달을 조심하렴. 죽음에 너무 가까운 계절, 마력을 가득 채운 달의 빛이 세상을 물들이면 우리가 발 담근 세계가 난생처음 시야에 가득 차오르지. 희미했던 것이 선명해지니, 움츠려야만 했던 것이 부풀어 오르니 얼마나 즐겁겠니. 우리는 밤의 마력에 취하여 흥겨워지겠지만 그날은 절대 축제 날이 아니란다. 휘돌며 뛰놀다가는 자칫하면 돌아오지 못할
그림은 연필로 선을 긋는 것부터 시작된다. 일반적인 정의는 아니다. 그냥 내가 그렇다는 말이다. 피그먼트 펜이나, 볼펜, 만년필 같은 지워지지 않는 펜을 무턱대고 종이에 대는 일도 있지만 그건 약간의 만용이 더해졌을 경우이다. 아니면 낙서거나. 끝없이 수정할 수 없는 밑그림 없이 그림을 시작하는 건 아직 내 실력 밖의 범주인 것 같다. 가끔은 도전해보기
그 다음부터 엔리카의 아지트는 둘의 아지트가 되었다. 둘은 힘을 합쳐 물건들을 세우고 옮겼다. 앉을 자리가 좀 더 만들어지자 하이파이브를 나누었다. 그리고 공간이 또 하나 있어서 기계장치가 있다는 것도 발견했다. 엔리카는 둘러보다가 표면의 이끼를 쓸었고 점멸하는 전등을 발견하였다. “오래된 기기인가봐요. 아직 살아있어요. 한번 조작해 볼 수 있겠는데요?”
레이엔리 1000일 기념 동화 눈의 여왕 AU 옛날옛날의 이야기야. 어느 작은 마을에 어려서부터 친하던 두 아이가 있었어. 한 아이의 이름은 엔리카, 다른 한 아이의 이름은 레이피스였어. 두 아이는 작은 꽃이나 풀에도 감탄하며 신비로워하는 순수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어. 둘이 뱉었던 탄성을 그 마을에서 자랐던 꽃이라면 전부 들었어. 두 아이는 서로에게
레이엔리 니어 오토마타 AU, 해당 작품의 스포일러 있음 해가 환한 날이었고, 바람이 세게 부는 날이었다. 구름이 빠르게 오갔다. 나뭇 가지가 바람에 따라 꺾이며 요동쳤다. 굳이 이런 날이 아니더라도 고층지대는 항상 바람이 불곤 했다. 과거에 라디오 등에 전파를 공급했다던 높은 구조물에서 올라가 엔리카는 정찰을 하고 있었다. 높은 곳에 올라가서 살피는 것
레이엔리 니어 오토마타 AU, 해당 작품의 스포일러 있음 콘크리트가 갈라지고 건물이 무너진 도시였다. 그들의 문명을 잃은 인류는 절망했다지만 세월이 더해지자 마냥 참담한 광경은 아니게 되었다. 파편의 날은 무뎌지고 식물이 피어나 틈새를 메웠다. 육중한 나무는 건물에 얽혀 숲을 이루었고 새나 다람쥐 따위의 소동물이 깃들어 살았다. 언젠가 인류의 귀환을 위
라리안은 어릴 적부터 건조하고 무심하였다. 그것이 천성인지,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책임을 맡기 위해 어른스러워진 것인지, 블랙윙에 대한 적의를 누르고 숨기기 위해 정적인 태도를 가장했고 그것의 결과일지는 오너도 잘 모른다. 하여튼 핵심은 어릴 적부터 그랬다는 것. 캐니안은 감정적이고 딱 그 나이 또래가 그럴만큼 제멋대로였다. 그리고 부모님이 블랙윙에
당신을 볼수록 내 죽음이 가까워지는데, 내가 계속 살고 싶어지는거야. 그리고 당신을 안고 싶어지는 거야. /연극, 카포네 트릴로지: 빈디치 세상이 멸망해간다. 나풀나풀 눈이 내리듯 죽음이 가볍게도 내려앉고, 모든 것을 가져간다. 시야에 닿는 모든 것은 이미 죽음에 점령당했다. 말라 비틀어진 풀잎, 뚝뚝 끊어져 바닥에 깔린 나뭇잎. 황폐한 것만이 가득하
자캐 커뮤니티 기계인형의 춤 애프터 합작 “저기 좀 봐.” “아, 그 아기들?” “다행이야. 그 작전에서 무사히 빠져나왔나봐.” 안드로이드들의 시선들이 닿는다. 몰래 보며 신기한 듯 쑥덕거리는 이가 있었고 대놓고 바라보며 한없이 귀여운 것을 보는 표정으로 흐물흐물한 미소를 짓는 이가 있었다. 물가에 내놓은 아이를 보는 양 걸음마다 시선을 떼지 못
글월 문집 2회차 왕이 왕으로 즉위한 날이었다. 왕은 그간의 관례대로 성의 한쪽의 예배당에 들어가 밤을 보내며 신께 기도했다. 자신이 이 나라에 왕이 되었음을 알리는 일이라고 했다. 그러면 신께서 굽어보시고 그 왕이 통치하는 동안 축복을 내린다는 것이다. 낮에는 백성들에게 알리는 일이 있었다. 커다란 망토와 금실과 보석 단추로 한껏 꾸며진 옷을 입은 채
글월 문집 1회차 “무엇을 보고 있어?” “토끼.” “토끼?” 나는 눈을 바로 뜨고 선희가 보는 곳을 보았다. 마른 수풀밖에 없었고 바스락거리는 낌새도 없었다. 그러나 그 애는 집중해서 보고 있었다. “응, 토끼. 저기 봐. 알록달록한 저고리를 입고 있어. 아까는 여우가 멋진 옷을 입고 지나가던데. 호랑이의 생일잔치에 가나 봐.” 선희는 무언가의
그는 열두시면 내 방에 온다. 나는 새파랗게 눈을 뜨고 암흑 속에서 그를 기다린다. 간혹 잠옷을 입거나 슬리퍼를 신더라도, 머리를 풀어헤치더라도 긴장이 풀어지는 일은 없다. 졸음에 노곤해져서 꾸벅꾸벅 조느라 그 일을 소홀하게 넘기는 일도 없다. 걸음마다 죽음이 묵직하게 따라붙었으므로. 나는 그것의 무게를 한 번도 잊은 적이 없었으므로. 지금은 십분전.
0. 너는 나를 미워하게 될 거야, 엔리카 페 아르다. 그때는 절대 도망치면 안 돼. 우리는 서로를 겨누게 될 거야, 레이피스 팬케일. 그러니까 조심해... 약속이야. 1. 당신을 처음만난 순간을 기억한다. 당신이 기억하는 순간보다 조금 앞선 순간일 것이다. 내가 크리티아스의 시장 거리를 오빠와 한창 이야기 하며 걷고 있을 때 푸른 망토가 스친 때가
뜀틀 연성 주제:고독 Log ... Day 97344나는 고독하다. Day 97345이상하다? 저게 뭐지? 내가 저런 걸 썼나? [AI Isolation: Day 97344의 로그 내역을 삭제합니다.][System: 실패하였습니다. Log 수정 권한이 없습니다.본부의 승인을 얻은 후에 시도하여주시길 바랍니다.] ‘나는 고독하다.’ from Day 9
“라리안, 책 속의 원칙이 현실과 다르다면 내가 배우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나요?” 사무실 한구석에 가만히 앉아 책을 읽던 라티에는 난데없이 그리 물어왔다. 라리안은 잠시 서류에서 시선을 떼어 아이에게 눈길을 주었다. 라티에가 들고 있는 책은 법의 역할에 대해 청소년 수준으로 설명하던 책이었다. 며칠 전에 그 책을 가지고 법의 의의에 대해 가르쳐준 적도
바람이 가볍게 불며 들을 스쳤다. 드넓은 벌판이 너울거렸고 우리는 나란히 앉아 하늘을 바라보았다. 구름을 바라보았다. 하늘 끝에서 끝까지 구름이 흘러가는 것을 보다가 구름이 언덕을 넘어가려고 하면 따라가 보자고 그렇게 벌떡 일어났다. 그러곤 둘이서 손에 손을 잡고 걸어 나갔다. 그렇게 행선지가 하루하루 걸음을 내딛을 만큼 단순하고 평온한 나날이었다. 그러나
자캐커뮤니티 빛의 종말2 애프터 합작 1 비행선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몇몇은 선착장에 그대로 서 있었다. 그들은 눈을 맞으며 그 광경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모두가 배를 탄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연합은 비감염자와 면역자만을 선별해서 태웠다. 감염자와 보균자, 그리고 탑승을 거부한 이들은 그대로 남겨질 수 밖에 없었다. 누군가는 화를 냈다. 누군가는 울음
꿈속에서는 맡은 역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된다. 나는 학자이고 그 사람의 지인이다. 그 사람도 학자이고 각각 임하는 분야는 다르지만 사이는 원만하다. 원만하다는 단어를 쓰는 건 내쪽이다. 좀 더 인간관계에 감성적인 입장을 가진 그 사람이라면 친밀하다고 칭할 것이다. 그 사람, 엔리카 페 아르다와 나는 먼 친척이다. 학자와 친척이라는 연 덕분에 그 집안에서
“당신의 찻잔에 독을 넣었습니다.” 성기사 테오클레이아는 그가 보필하는 성녀 아리스티드에게 말했다. 아리스티드는 차향을 음미하기 위해 반쯤 감았던 눈을 살며시 뜨고 테오클레이아를 보았다. 테오클레이아는 눈매나 입가, 찻잔 속 물의 파문에서 감정을 읽어보려고 했다. 지나치게 평온했다. 성녀는 본래 항상 그리 웃었지만 그런 말을 듣고도 반응이 없다는 것은
9 “마법사 언니.” 밥먹다 말고 소녀는 엔리카를 올려다보았다. 이것저것 호기심이 많은 피난민 소녀였다. 호기심을 풀어주는 엔리카를 곧잘 따르곤 했다. 커다란 눈을 동그랗게 무언가를 유심히 바라볼 때가 많았는데 지금 엔리카를 바라보는 시선이 그러하였다. 엔리카는 암울한 표정에서 미소를 끌어올렸다. 오로지 습관으로 인해 소녀에게 웃어보였다. “왜
1 엔리카는 비틀거리다가 넘어지며 풀밭을 턱 짚었다. 온몸이 덜덜 떨리는 상태여서 진정하고 일어나는 것은 쉽지 않았다. 숨이 턱까지 차올랐고 심장 박동에 귀가 먹먹해질 정도였다. 그러나 몸이 떨리는 것은 한계치까지 달렸기 때문만이 아니었다. 사고가 불가능할 정도의 극심한 공포에서 헤어 나오질 못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죽음이라는 것은 익숙하지 않은 자들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