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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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해냈어!” 켈레브림보르는 그날만 해도 열네 번째로 외쳤다. 나르비는 질리지도 않고 허공에 움켜쥔 주먹을 치켜들었다. “끝났다고!” “지긋지긋했어!” “다신 안 할 테다!” “나마리에!” 낄낄거린 켈레브림보르가 잔을 비웠다. 그의 잔에는 크하잣둠의 자랑인 밀맥주가 채워져 있었(었)다. 나르비의 잔에서는 아직 도르위니온산 포도주가 검푸른 빛깔로
파라미르 ts 설정 꿈 속에서 그는 늘 멈춰선 쪽이었다. 산맥을 넘어 범람하고 쇄도하는 것은 언제나 새하얀 물결이었고 그는 무력해서. 마침내 대양이 쏟아져들 때마저도 그가 선 대지는 요동칠지언정 굳건하게만 느껴져서, 그는 단 한 번도 몰락을 실감한 적은 없었다. 단지 그는 다가오는 파도를 보았고, 알았다. 끝은 심장이 멎을 만큼 가까웠다. 그는 깊
그는 언젠가 충고 아닌 충고를 들은 적 있었다. 굽이치는 단발이 보기 좋았던 런던의 어느 소녀에게서, “군인에게 마음 주어선 안 돼요, 알죠?” 라고. 침침한 조명 속에서 중위는 가벼운 걸음걸이로 무대 위에 뛰어올랐다. 반쯤 그림자에 묻힌 입매가 쑥스러운 미소를 머금던 것도 잠시였다. 잿빛 눈동자 위로 눈꺼풀이 내리깔리는 것을 지켜보며 글로르핀델
여름이 끝나가는 도시에는 더위가 채 마르지 않은 땀방울처럼 남아있었다. 핀두일라스는 긴 소매를 접어 올리며 난간에 두 팔을 올렸다. 이맘때의 미나스 티리스는 거대한 해골 같았고 순백의 묘비 같았다. 바람에 해어지고 파도에 쓸려 흰 나뭇결밖에 남지 않은 난파선 같았다. 허공을 잠식하는 열기가 단지 태양의 것만은 아니리라고, 이따금 핀두일라스는 상상하고
기반 “글람호스.” 보드 위에 검은 말 열여섯 개를 내려놓으며 켈레브림보르가 말했다. 안나타르는 켈레브림보르의 손등에서 뼈마디가 도드라지는 것을 흥미롭게 바라보았다. 손가락과 손등이 만나는 곳에서 가는 뼈가 솟아오르고 가라앉는 모습이 악기를 타는 움직임처럼 부드러웠다. 사슴 가죽을 씌운 사각형 나무판에는 붉은 실로 여든한 개의 정사각형이 수 놓여 있
이제 베렌은 그 땅으로 깊숙이 들어갔는데, 손에는 펠라군드의 빛나는 반지를 끼고 있었고 자주 이렇게 외쳤다. '여기 오는 것은 방황하는 오르크나 첩자가 아니라 바라히르의 아들 베렌이고, 한때 바라히르는 펠라군드의 총애를 받았었노라!' 그렇게 그는 검은 바윗돌 위로 포말을 일으키며 노호하는 나로그 강의 동쪽 강변에 다다랐고, 녹색 옷을 입은 궁수들이
하지만 그분이 조금 이기적이라곤 생각지 않나요? “미안합니다.” “무엇이요?” 에오윈은 쾅 방문을 젖혔다. 빈 방이었다. 전쟁에도 불구하고 미나스 티리스의 인구는 예전 같지 않았으며, 걷지도 못할 환자들이 아니라면 대부분 모란논을 향해 떠나 버렸기에. 에오윈이 발 딛는 곳마다 피어오르는 먼지를 바라보던 파라미르는 결국 그를 뒤따라 방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그 말에 정신을 차린 후린의 아들은 사납게 쏘아붙였다. ‘난 벨레그 곁에 머물 겁니다. 신실치 못한 목소리여, 내게 그를 떠나라 하지는 마십시오. 만사가 허무하군요. 아 검은 손의 죽음이여, 그대 내게로 가까이 오라! 후회가 그대를 감화할 수 있다면, 나를 애도에서 해방시켜, 패배한 채 그의 차가운 가슴에 안기도록 하라!’ 그러자 귄도르의 공
“하지만 아이를 낳을 마음은 없는 겁니까, 페아나린케?” 묻는 바부터 그 끝의 호칭까지 완벽하게 그의 심기를 거스르는 질문이다. 켈레브림보르는 눈을 가늘게 뜬 채 안나타르를 노려본다. 이 무렵의 그는 아직 안나타르를 친구처럼 여기지는 못하나, 그렇다고 몇몇 장인들이 그러듯 숭배하지도 않기에. 두 나무의 빛 아래에서 자란 그에게 서녘의 사자는 그 신분
그러고 나서 카란시르는 인간들을 호의적으로 바라보았고 할레스의 명예를 크게 높여 주었다. (중략) “당신 일족이 여길 떠나 좀 더 북쪽으로 올라와서 살겠다면, 그곳에서는 엘다르의 우정과 보호를, 그리고 당신들만의 자유로운 땅을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할레스는 자존심이 강하여 남에게 이끌리거나 다스려질 뜻이 없었고, 할라딘 일족 대다수도 비
안드레스 | 희망이 무엇입니까? 좋은 일이 일어나리라는, 확실치는 않으나 알려진 것에 기반을 둔 기대요? 그렇다면 우리에게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핀로드 | 그것은 인간이 희망이라고 부르는 한 가지입니다. 우리는 이를 암디르 곧 ‘올려다보기’라 부르지요. 하지만 더 깊은 곳에 기반한 또다른 희망도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믿음 곧 에스텔이라 칭합니다.
힘라드의 요새에 도착했을 때 아레델의 흰 사냥복에는 거미줄 같은 그림자가 엉겨 있었다. 아레델이 백마에서 훌쩍 뛰어내리자 그림자는 눈 녹은 물처럼 흘러 떨어졌다. 켈레고름은 요새 문 밖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고 아레델은 고삐를 쥔 채 서두르는 법 없이 천천히 걸어갔다. 켈레고름의 입꼬리가 조금 삐뚜름했다. 말소리가 들릴 거리의 다시 절반까지 다가가니
“이게 난쟁이들이 하는 놀이라고?” 핀곤은 핀로드를 의심스럽게 노려보다가 곡주를 쭉 들이켰다. 핀로드는 낄낄거리며 웃었다. “재미있을 것 같지 않아?” “하지만 왜 하필 페아노르의 아들들이야?” 아란디스가—아니지, 이제는 켈레보른이 지어준 이름대로 갈라드리엘이었다—불만스레 물었지만, 핀곤이 있는 자리였기에 동족살해자란 말은 나오지 않았다. 핀로드는
빛의 속도를 재어 보았느냐고, 언젠가 안나타르 아울렌딜이 그에게 물었었다. 켈레브림보르는 고개를 저었다. 기예란 극한으로 치닫을수록 모순으로 가득했으며 그의 요정석은 재료의 합보다 무거웠지만, 이제껏 광속을 재려 해 본 적은 없었다. 이유를 꼽기는 어려웠다. 힘링에서 타오른 봉화가 단 몇 분 안에 바라드 에이셀에 닿는 한 무엇이 더 필요하겠는가—아마
“사람들이 너를 멜리안에 비견한다더군.” 별 것 아니라는 투로 흘러나온 한 마디는 허공에 나른하니 흩어졌다. 안나타르는 씩 웃으며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았다. 순백의 예복이 몸 아래에서 구겨지며 바스락거렸다. 작업실에야 온갖 미완성작과 도면이 너저분하게 흩어져 있었으나, 켈레브림보르의 침실은 그리 넓지도 않을 뿐더러 책상 하나 없이 단출했고, 가구라
At the beginning of the Second Age he was still beautiful to look at, or could still assume a beautiful visible shape—and was not indeed wholly evil, not unless all “reformers” who want to hurry u
안장 밑에서 군마가 거칠게 요동쳤고 손에 쥔 창자루는 피에 젖어 미끄러웠다. 비라도 한바탕 뿌려준다면 좋으련만, 고작 며칠 전 지난 난 둥고르세브에서마냥 어두컴컴하게 드리운 그림자는 전의를 지독히도 갉아먹었다. 무뎌진 손가락에서 창이 한 번 훅 튀어오르기가 무섭게 갑옷이 찢긴 자리를 향해 도끼날이 닥쳐들었다. 그는 가까스로 허리를 젖혔다. 기괴한 투
“우르웬!” 다급한 외침이 방 안에 울리기 무섭게 그녀는 벌떡 일어섰다. 나동그라진 수틀이 저만치 굴러가다 벽에 부딪혀 쓰러졌다. 잘못 가눈 바늘에 가운뎃손가락에 피가 맺혔다. 그러나 그녀는 상처를 살필 새도 없이, 허겁지겁 방으로 달려든 형제의 어깨를 붙잡고 간신히 눈을 맞추었다. 검은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오빠! 오라버니, 이게
늦은 아침, 엘렘마킬은 지독한 두통과 함께 잠에서 깨어나 두 눈을 끔벅거렸다. 주변은 낯설지도, 익숙하지도 않았고,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고민한 끝에 그는 제가 두 번째 관문의 숙소에 놓여 있는 모양이라고 결론내렸다. 숙소 바닥에 널브러진 이들은 태반이 돌의 관문의 제복을 입고 있던 것이었다. 엘렘마킬은 머릿수를 거듭 어림해, 잠든 이들의 수가
광기와 이성 사이에는 가느다란 붉은 선이 있어, 세상의 적과 싸우는 이라면 누구든 그 선 위를 걷게 된다 했더랬다. 그러니 이쯤은 아무것도 아니다. 정말로, 에레이니온. 초반에는 분명 잔뜩 달구어졌던 야영지의 공기는 하루하루 식어내렸다. 치료사들이 마에드로스가 죽지는 않을 거라 장담한 탓도, 기운을 차린 핀곤이 여느 때처럼 임무에 복귀한 탓도,
외로운 섬 동쪽 해안에 세워진 저택에는 공식적인 이름이 없었지만, 섬의 주민들은 대부분 그곳을 마르 티알리에바 곧 ‘기쁨의 집’이라 불렀다. 그게 임라드리스의 또 다른 별명이기도 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이들은 많지 않았다. 임라드리스는 언제나 비밀스러운 곳이었고, 그 비밀이 공공연한 성격을 띠게 된 것은 제3시대의 끝자락에 가서야 일어난 변화였으니까
“힝, 더워…….” J는 축 늘어진 채 중얼거렸다. 밤공기가 살갗에 끈적하게 달라붙었다. 덥기만 하면 몰라, 당장 수영을 해도 좋을 만큼 습하기까지 하니 견뎌낼 재간이 없었다. 난감한 기색으로 연신 부채만 부쳐주던 암굴왕은 J의 안색을 살핀 끝에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부인, 좀 쉬겠나?” “그래도 간만에 나왔는뎅…….” 그러나 그 말이 오히려
하늘을 뒤엎는 파도, 신을 끌어올린 신 “형은 내가 등선했을 때도 날 보러 오지 않았잖아!” 온 수사부에 째진 외침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선부의 주인, 고귀하신 수사 대인 사무도는 침울하게 생각했다. 이런 썩을. 사청현의 여상은 성대가 문제인지 좀 쟁쟁거리는 면이 있었고, 열 살 때까지 여장했다고는 하나 어쨌건 변성기가 올 만한 나이였을 때
무도회라는 건 J가 예상했던 것보다는 꽤 지루한 행사였다. 그야 날이 날이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화창한 오후가 저물며 찾아든 저녁은 유난히 부드러웠고, 봄바람은 따스했으며, 긴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하늘에는 보름달이 휘영청 밝았다. 반면 무도회장 안은 음악으로 가득할지언정 그 밑바닥에는 사람들의 소음이 깔려 있었던 데다 공기도 그리 맑다고는 못할
“아이가?” 네르다넬은 흠칫하며 되물었다. 여자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혈색이라곤 없이 창백한 안색이었다. “네르다넬 님, 저는…… 감당할 수 없어요.” 떨리는 목소리로 내뱉은 말이엇지만, 네르다넬의 귀에는 거의 들어오지 않았다. 네르다넬의 주의는 여자의 품 안에 안긴 아이에게 못박여 있었던 까닭에. 아주 갓난아이는 아닌 모양이었다. 어느 정도
김이 자욱하게 서린 욕실 안으로 가냘픈 인영(人影)이 들어섰다.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뜨리고 흰 가운을 걸친 여자였는데, 가운 자락은 여자가 한 걸음씩 내디딜 때마다 소리 없이 흔들리고 벌어지며 깎은 상아 같은 종아리와 날씬한 발목을 드러냈다. 그 아래는 아무것도 신지 않은 맨발이었다. 욕실 바닥에 낮게 깔린 물기가 걸음걸음마다 작게 찰박거리는 소리
아침 공기는 차가웠고 바람은 긴 머리카락을 휘감아 돌았다. 춤을 추자 조르는 어린아이 같은 움직임이었다. 장난스러우면서도 거슬리지 않았다. 바람과 머리카락이 스텝을 밟도록 내버려 둔 나우플리온은 하늘을 한 번, 땅을 한 번 바라본 다음 몸을 굽혔다. “봄이 올 때가 되었는데.” 말은 그렇게 했으나 나우플리온은 섬의 추위가 길다는 것 또한 알고 있었다
저녁의 티리온은 황홀하도록 아름답다. 민돈 엘달리에바 꼭대기를 태양의 배가 스치고 지날 때쯤 피나르핀은 마지막 접견자를 물렸다. 사람들이 빠져나간 알현실에는 까마득히 높은 천장 아래, 늘어선 열주의 기다란 그림자뿐이었다. 금빛으로 물든 대리석을 한 발짝씩 디디며 피나르핀은 조용히 알현실을 가로질렀다. 세상에 빛이 돌아온 이래 닫힌 적 없는 문을 지나
프로아울리아 섬의 혼례는 겨울에 치르는 것이 전통이었다. 엄지와 검지 사이로 백금빛 머리카락을 한 움큼 잡은 나우플리온은 조심스레 은으로 된 가위를 들었다. 그를 올려다보는 S의 입술 사이로 하얀 김이 몽글몽글하게 솟아올랐다. 늦은 오후의 하늘은 희끄무레했지만, 눈이 내릴 날씨는 아니었다. 서늘한 바람만이 제단 앞에 선 네 사람을 휘감고 돌았다.
늦저녁 찾아온 손님은 S가 예상했던 사람이었다. 익사형은 신속하게 집행되었었지만, 소문의 속도는 그보다도 빨랐다. 마침 모르페우스의 연구실에 들렀던 S는 수군거리며 지나가는 사람들의 말에서 사정을 분별해 냈다. 온 섬을 들었다 놓은 화재 사건이 곧 막을 내릴 모양이었다. 그것도 퍽 극적인 형식으로. 그러나 S는 익사형을 구경하러 가지는 않았다. 사람
“이걸 다 먹을 수 있기나 한가?” “에헤이, 모르는 말씀!” 유쾌하게 대꾸한 J는 테이블 위에 과자를 와르르 쏟아놓았다. 그리 좁지 않은 테이블이 과자 봉지로 반 넘게 차자 암굴왕은 떨떠름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남은 자리에 자신이 들고 있던 봉투까지 내려놓으니 테이블은 정말로 부서지는 게 아닐까 싶은 지경에 이르렀다. 그가 멀뚱멀뚱 바라보는
이인일묘 가정의 평화가 깨진 것은 어느 화창한 토요일 아침이었다. 동거를 시작하고도 얼마간 암굴왕은 J의 고양이와 데면데면한 관계를 유지했다. 키라가 유독 암굴왕에게 경계심을 품는 까닭도 있었고—암굴왕이 보기에 미인의 반려로서 아주 바람직한 자세기는 했다—그가 고양이란 생물에 대해 큰 관심이 없던 탓이기도 했다. 물론 고양이는 선원의 훌륭한 벗이다!
늦저녁, 운 나쁜 당번들이 접시를 씻으러 간 사이 S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다가왔다. “오늘 밤에는 나로 배를 채워도 좋아.” 아스타리온은 설핏 고개를 기울였다. 어느새 의례처럼 변한 말이었지만, 사냥감 삼을 만한 짐승이 죄다 흉측하게 변형되어 있던 그림자 땅을 지난 뒤 한동안 듣지 못했던 말이기도 했다. 그가 바로 대답하지 않자 S는 눈썹을 찌푸리더
“우리가 해냈어, 솔져. 이제 도시는 괜찮을 거야.” 붉은 석양이 아득히 지고 있었다. 나루터 끝에서 카를라크는 저무는 태양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황급히 달려온 동료들이 어쩔 줄 모르고 망설이던 중 비로소 카를라크는 그들을 돌아보았다. 그를 보았다. “너도 그렇고.” 불길이 솟구치기 전에도 그는 이미 사태를 짐작했다. 그러지 않으려 해야 않을 수
몽테크리스토 백작이 약혼자를 얻었다는 소식은 일파만파로 퍼져나갔다. 어찌 됐건 그는 대단한 부를 소유한 남자였고, 과거가 비밀스러울지는 모르나 박식하며 정중한 인물이었다. 그에 더해 상당한 미남이기까지 했으니 감춰진 과거 정도야 신비주의를 심화해주는 요소로 볼 만도 했다. 그런 그에게 약혼자라고? 파리 사교계가 뒤집히진 못할망정, 한 번 크게 흔들
“멋지당!” J는 탄성을 질렀다. 암굴왕은 유난히 부드러운 눈빛으로 J를 돌아보더니 웃었다. “마음에 드나?” “엄청! 암굴쿤, 데려와 줘서 고마워!” 엄밀히 말하자면 그들을 이곳, 이 시간에 떨군 것은 성배의 힘이었지만, J를 샹젤리제 거리의 저택으로 데려온 것은 암굴왕이었다. 발코니 난간을 짚으며 정원을 향해 쭉 손을 내밀던 J는 다시 빙글 돌아
최후의 빛 여관에 도달한 다음에야 일행은 긴장을 늦출 수 있었다. 자헤이라와 하퍼들이 그들을 완전히 믿어주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림자 저주에 휩싸인 바깥보다는 어둠을 염려할 필요 없는 이곳이 백 배 나았으니까. 반가운 얼굴들까지 있으니 실은 기대치 못한 행운을 맞은 셈이었다. 이 땅에 발을 들인 후 잠시 중단했던 기록을 그가 다시 떠올린 것도 여관에
“□□□□ 님.” 정중한 인사에 S는 고개를 숙여 묵례하는 것으로 화답했다. 청년은 어설픈 미소를 지어 보였다. 얼마 전부터 나우플리온의 집에는 검의 길을 걷는 젊은이들이 돌아가며 한 명씩 머물고 있었다. 낮에는 가벼운 말 상대 노릇을 하려 들다 쫓겨나기 일쑤였지만, 저물녘이 다가오면 나우플리온도 그들을 대개 내버려 두었다. 오늘의 청년이 문간 안쪽
“휘핑크림 올려 드릴까요?” “뭐래?” J는 무심코 물었다. 암굴왕은 J를 흘낏 내려다보고는 친절하게 되풀이해 주었다. “휘핑크림을 올리겠냐고 물었다.” “많이 달라고 해줘. 엄청 많이.” 얼굴에 못 미더워하는 빛이 비치기는 했지만, 암굴왕은 고개를 끄덕였다. 딴 데 정신이 팔린 J는 암굴왕이 직원에게 말을 옮기는 것도, 직원이 미소를 숨기며 주문
5월. 달의 섬을 돌아보는 일정이 거의 마무리되었을 즈음이었다. 기원섬으로 복귀한 나우플리온은 마을 사람들과 서클릿의 사제에게 몇 가지를 물어본 후 짐을 풀지도 않은 채 다시 길을 나섰다. 마을 어귀를 떠날 무렵은 이미 늦은 오후였지만, 그는 한 시도 미뤄서는 안 될 용무를 가진 사람처럼 움직였다. 혹은, 미뤘다가는 영영 처리하지 못할 일을 아는 사
꿈자리가 사나웠다. 깨고 난 후에는 내용도, 의미도 기억나지 않는, 오직 꺼림칙한 뒷맛만을 남겨놓는 꿈이었다. 비척비척 일어나 앉으려니 식은땀에 젖은 셔츠가 몸에 달라붙었다. 벽난로는 어느새 꺼져 있었다. 여관방 안에는 늦가을의 싸늘한 공기가 술렁거렸다. 창으로 비쳐드는 달빛은 아직 이 밤이 절반도 지나지 않았다는 점만을 일깨워 주었다. I는 한 손
청색산맥 기슭에서 일몰을 기다리던 중, 잉귀온은 지루한 시간을 흘려보낼 화젯거리라도 내놓듯 말했다. 머잖아 이 산맥이 가운데땅의 서쪽 경계가 될 거라더군요. 이쪽에는 해안만 좀 남기고요. 과연, 본인의 심성이야 어떻든 엘다르의 영원한 왕자란 화술을 공부할 필요는 없는 법이었다. 당장 피나르핀조차 저 말에 뭐라고 해야 부드러운 대답이 될지 머리를 쥐어
포스타입 남자는 초겨울 어느 해질녘에 성문을 두드렸는데, 그 직전까지도 망루를 지키던 경비병들은 남자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했다. 병사들이 한바탕 발칵 뒤집히고 그들의 주군이 다급히 불려오고 군식구 애들까지 슬쩍 소동을 구경나온 뒤에야 비로소 문이 열렸다. 엘론드는 마글로르의 등에 반쯤 몸을 숨긴 채 남자를 지켜보았다. 아몬 에레브에 이방인이 방문하는
포스타입 그해 여름은 무더웠다. 세차게 내리는 폭우조차 식히지 못하는 더위였다. 오히려 비는 한여름의 습한 대기가 품은 앙심처럼 쏟아부었고, 며칠을 내리 달구어졌던 땅은 기꺼이 그에 호응했다. 야트막한 언덕을 오르는 내내 진흙은 장화 밑창에 달라붙었다가 끔찍하게 끈적이는 소리를 내며 떨어져 나가 형체 모를 곤죽 속으로 녹아들었다. 빗물은 장화와 망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