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송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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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 트레센 학원의 입학식, 그날 아그네스 타키온은 맨하탄 카페와 만났다. 기념할 만한 입학식이라고 하나, 타키온에게 그런 겉치레는 관심 밖의 일이었다. 흩날리는 벚꽃잎, 기대와 흥분으로 가득 찬 학생들, 그들을 환영하는 현수막과 간판들. 그런 일련의 행사가 타키온에게는 아무런 의미 없는 예식에 불과했다. 어차피 입학은 정해진 사실이고 그에 뒤따르는 절차
"뭔가 안 좋은 일이라도 있으신가요?" 카페의 물음에 타키온은 앞으로 쏠려있던 귀를 쫑긋 들어 올려 뒤에서 들려온 소리를 들었다. 시선은 여전히 정면의 책상을 바라보는 채였다. 타키온의 눈앞에는 그가 띄워놓은 데이터들이 어지러이 널려있었다. 타키온은 기분이 썩 좋지 못했다. 그는 일찍이 자신의 다리가 가진 한계를 깨달아 사츠키상 이후로 출주를 무기한 중
3년 전 겨울에 그 애를 처음 만났다. 진눈깨비가 흐리게 내리던 날, 눈 바로 아래까지 흰 마스크를 썼던 세영이의 첫인상을 기억한다. 상견례를 위해 들렀던 레스토랑, 엘리베이터에서 물끄러미 층수를 헤아리던 검은 눈. 같은 층에 내려 서로를 힐끔거리다 같은 테이블에 앉게 되었을 때, 눈을 크게 깜박이며 천천히 마스크를 벗어내던 앳된 얼굴. 무릎 언저리로 올
https://youtu.be/smdmEhkIRVc?si=YoisXc_kHSuY37IE (비비 - 밤양갱) “이제 우리의 관계를 정리하겠네.” 식탁 머리에서 타키온은 그렇게 선언했다. 카페는 들어 올린 커피잔을 내려놓지 못하고, 그대로 타키온의 선언을 맞았다. 그리고 몇 초간 대답을 헤매다, 잔을 받침 위에 돌려놓고, 아주 긴 숨을 내쉬었다. 혼란스러
비가 오면 귓가에서 울리는 목소리가 또렷해진다. 언제나 그치지 않는 목소리가 선명한 윤곽을 가지고 뇌를 파고든다. 짓누르는 공기의 무게로 비를 알았다. 몸을 감싸는 이불을 걷어내고 몸을 일으킨다. 떠도는 흙의 냄새, 피부를 감싸는 습기, 귀를 울리는 노이즈가 좋지 못한 것들을 부른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것들. 그것들은 나의 친구였지만, 항상
꿈을 꾸었는지도 모른다. 모든 것은 바다로 흘러가는 거예요. 부서지는 파도 소리 속에서 네가 말했다. 샘에서 강으로, 강에서 바다로, 내리고 내려서 가장 낮은 곳으로, 모든 것은 흘러가는 거예요. 나긋한 목소리가 바다의 고동 소리에 흐려졌다. 예외는 없어요. 모두 언젠가는 바다에 다다라요. 그러니까 슬프지 않아요. 나에게는 슬프게 들리는 목소리가 자꾸만
교사 한편의 어느 조용한 교실. 이질적인 두 면이 만나 기묘한 조화를 이루는 이과 준비실. 알코올램프 위에 올라간 약품이 부글거리는 소리와 입술 사이로 커피를 들이켜는 소리만이 작게 울리는 교실에서, 맨하탄 카페와 아그네스 타키온이 있었다. 평소처럼 수집품인 소파에 앉아 블랙커피를 마시던 카페는 잔 너머로 타키온을 힐끔 내다보았다. 타키온은 여느 때와
지면에 닿는 순간, 세상이 빙글빙글 돌았다. 히토리는 비틀거리며 롤러코스터에서 내려와, 바닥에 손바닥을 대고 구토했다. “우웨에에엑!” “어머, 히토리쨩, 괜찮니?!” “여기 비닐봉지 있어!” “에이, 언니, 더러워.” 주위를 둘러싼 가족들의 존재를 느끼며, 히토리는 계속해서 속을 게워 냈다. 아아, 올록볼록한 바닥이 수챗구멍처럼 빨려 들어간다. 그래
매미 소리가 따가운 여름이었다. “오늘 연습은 순조로웠네.” 해가 저물었음에도 타박거리는 신발 밑창 아래에서 올라오는 열기가 아직도 뜨거웠다. 바로 옆에서 걸어가는 키타의 구두 소리조차도 히토리에게는 멀게 느껴졌다. 여름의 열기 속에 거리가 흐무러져서 껌처럼 길게 늘어지는 듯이 히토리의 걸음은 느리게 나아갔다. “히토리쨩, 듣고 있어?” “아, 네,
※ 4장 전편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 카야모리 루카의 생일은 6월 24일입니다. 생일 축하해, 루카! 서서히 햇빛의 따가움이 살갗에 닿고, 공기가 무거워지는 계절이 다가오고 있었다. 감정이 쉽게 달래지지 않는 계절에, 혼란스러운 진실과 함께 한 명의 동료를 떠나보낸 31A는 임무 중에도 마음이 흩어져 있었다. 다섯 명으로 임무를 수행하는 것도 익숙해질
6월 모고가 다가오고 있었다. 미지근해진 문고리를 잡은 채로 나는 심호흡했다. 입시 학원의 강의가 한창일 시간이었다. 몇 번째일지 모를 망설임을 다시 새기며 나는 문에 귀를 대보았다. 두꺼운 철문 너머로는 기척이 잘 느껴지지 않았다. 운이 좋으면 엄마는 장 보러 나갔을 수도 있었다. 아니면 주에 세 번씩 나가는 문화 강좌의 아줌마들과 같이 카페라도 갔
※ 5장 전편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문득 지금은 몇 시일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눈동자를 움직이기 전에, 내려다보고 있는 전첩에 반사되는 눈부심으로 정오에서 얼마 지나지 않았음을 먼저 짐작했다. 전첩의 상단 바에서 13:27이라는 숫자를 확인한 유키가 고개를 쭉 들어 올렸다. 프로그래밍 작업이 계속되어서 피로한 목을 주무르며 잠깐 눈을 감았다. 레이징
잠이 안 온다. 캄캄한 천장을 바라보며 이즈미 유키는 되뇌었다. 잠이 안 와. 억지로 눈을 감아도 생각은 끊이지 않고, 다시 전선에 서야 하는 내일에 대한 걱정과, 오늘 먹었던 점심 맛있었지, 같은 사소한 회상과, 앞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에 대한 상념을 차례로 떠올리다 보면 머리가 바쁘게 돌아가 잠들지 않는 밤이 흘러갔다. 큰일인데. 내일도 정찰
투수가 투구 자세를 취한다. 그에 지지 않고 한쪽 다리를 높이 들고, 배트를 쥔 팔을 크게 당겨 공을 기다린다. 오직 1점 차의 아슬아슬한 순간. 땀이 괴는 손에 힘을 준다. 동시에 야구공이 던져지고, 다가오는 공을 있는 힘껏 쳐낸다. 경쾌한 깡 소리가 울렸다. “홈런!” “젠장!” “해냈다!” 결과는 멋지게 승리! 같은 팀인 이치고와 하이 파이브를
“만약에 말야.” 갑자기 운을 떼는 루카 덕분에 유키는 잠시 젓가락질을 멈추고 정면을 보았다. 먼저 말을 꺼내고도 루카는 젓가락으로 음식을 헤집으며 뜸을 들였다. 그런 루카를 재촉하지 않고 유키는 등을 반듯하게 세워 루카를 바라봤다. 오늘 웬일인지 둘이서만 아침을 먹자고 할 때부터 무언가 할 말이 있다는 것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당연하다는 듯
※ 2024년 만우절 기념입니다. “윳키, 정말 싫어!” 다짜고짜 쏟아진 말에 유키가 고개를 들었다. 익숙한 제복을 지나 시선을 올리면, 아름다운 이목구비의 얼굴이, 심한 말을 내뱉었다고는 상상하지 못할 미소를 띠고 유키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마주한 미소와 다르게 유키는 웃지 않았다. 얌전히 벤치에 앉아 전첩을 만지던 사람한테 찾아와서 하는 말
※ 5장 전편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윳키, 요즘 힘들지 않아?” 루카의 갑작스러운 걱정에 유키가 퍼뜩 고개를 들었다. 동시에 나란히 앉아있던 루카와 시선이 맞았다. 햇볕이 따스하게 비쳐드는 벤치에서 오전의 휴일이 천천히 흘러가는 자유 시간. 언제나처럼 0과 1로 이루어진 세계로 도피하려던 유키는 한순간에 찌르고 들어온 루카의 질문에 목표를 잃고 방황
※ 5장 전편 스포일러 주의 ※ 루카유키 전제 ※ 히구치 세이카의 생일이라는 설정이지만 실제 생일은 11월 8일입니다. 히구치 세이카의 아침은 늦다. 연구를 하다 보면 밤을 새우게 되는 일이 잦고,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시각은 늦어졌다. 이 때문에 사령부에서는 히구치에게 세라프 부대원들이 필수로 하는 아침 점호를 면제시켜줬다. 애초에 기숙사에서 머무는 시간
그날 루카의 눈은 일찍 떠졌다. 유키가 매일 아침 루틴으로 헤비메탈 곡을 틀기도 전에 루카 스스로 일어났다. 루카가 좋아하는 시끄러운 음악을 저장해둔 전첩에 스피커를 연결하려던 유키는 눈을 반짝 뜨고 있는 루카를 보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해가 서쪽에서 떴다는 듯이 바라보는 유키에게 루카가 힘차게 인사했다. “윳키, 좋은 아침!” 평소와 다른 모습에 잠
※ 5장 전편 결말까지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평화로운 휴일의 오후였다. 이어지는 싸움의 나날도 멀게 느껴지고, 한때 마음을 적셨던 소동도 가라앉았을 무렵. 하지만 오늘이 지나면 다시 소녀들은 전장으로 나서야 하고, 아직 모두의 가슴을 할퀸 상처로부터 한 달도 지나지 않은, 그런 하루였다. 그런 날에도 이즈미 유키는, 한가할 때면 언제나 앉는 아레나 앞
“원, 투, 쓰리, 체크 오케이. 해치 개방합니다.” 하얀 벽이 열리고 검고 반짝이는 우주가 눈앞으로 펼쳐진다. 중심을 잡기 어려운 무중력 상태에서 공기를 분사해 앞으로 나아간다. 고개를 돌리면 우리의 푸른 행성이 찬란한 아름다움을 보여주었다. 거기서 반대편을 향해 무수하게 빛나는 천체를 바라본다. 분명 감탄해야 마땅할 광경인데도 내 심장은 침착했다.
지금 일본 세라프 부대 기지에서는 한가지 소동이 일어나고 있었다. 여느 때와 같은 점심시간, 31C 부대의 분고가 세계 멸망을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은 덕분에―항상 하던 역할극이라는 뜻이다―텐네의 약이 부대원들의 식사에 섞여 들어갔고, 지금 그 효과가 나타나는 중이었다. 그렇게 약의 효과로 모든 세라프 부대원은 진심을 털어놓을 수밖에 없는 상태가 되었다
"윳키는 좋아하는 사람 있어?" 그 질문에 나는 조금도 고민하지 않고 없다고 답할 수 있었다. 나는 해커고,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보다 컴퓨터를 만지는 게 더 편하고, 누군가를 좋아하는 자신을 상상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사랑이 아닌 호감이라면 나도 누군가를 좋아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매일 지나는 거리에서 주위의 소음을 지우기 위해 나는 귀에 이어폰을 꽂
[지금 카페테리아 앞에 있어. 데리러 와줘.] 전첩을 터치해서 린네를 보낸다. 답장은 안 봐도 괜찮을 테니까 송신을 마친 전첩은 주머니에 넣는다. 처마 밖으로는 겨울답지 않은 장대비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쏟아졌다. 축축한 한기를 몰아내려고 나는 팔짱을 끼고 발을 동동 굴렀다. 춥다. 하지만 이제부터 기다리는 즐거움을 생각하면 미소가 빙그레 떠올랐다.
어떤 사람들은 아침마다 같은 습관을 공유한다. 잠에서 깨어나 뿌연 시야를 자각하고 머리맡 혹은 침대 옆 탁자 같은 곳을 더듬는다. 그리고 찾던 물건을 손에 들어 눈앞에 쓴다. 이즈미 유키도 컴퓨터 화면을 오래 들여다봐야 하는 해커였기에 시력이 좋지 못했다. 매일 아침 깨어나면 제일 먼저 안경을 찾는다. 그날도 마찬가지였다. 기상 나팔이 울리지 않는 휴일
스무 해에 조금 못 미치는 기억 속에서 밴드를 하게 되리라고 생각한 적 따위 조금도 없었다. 본업은 해커이고, 어떤 밴드를 좋아하긴 했지만, 나도 밴드를 하겠다는 마음이 들진 않았다. 그런 당연하게 여겼던 생각을 뒤집고, 나는 드럼 앞에 앉아있다. 인류를 위협하는 외계 생명체와 싸우는 군대에 들어온 것만으로도 충분히 놀랄 일인데, 거기서 밴드까지 해야
특별히 힘든 싸움은 아니었다. 돔 주변의 경계 임무, 허브 캔서 없이 산발적으로 돌아다니는 야생 캔서를 정리하기만 하면 되는 간단한 임무였다. 이미 허브 캔서를 몇인가 토벌해 온 31A에게는 쉬운 일이었지만, 긴장을 푼 탓일까 마지막에 와서 예기치 못한 사고가 있었다. “루카!” 마무리를 위해 뛰어들다 정면으로 캔서의 음파 공격을 맞은 루카가 비틀거렸다
지금 카야모리 루카의 인생에서 중요한 순간이 다가오려 했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으려고, 루카는 두 눈을 이즈미 유키에게 고정했다. "루카, 너 왜 밥은 안 먹고 나만 뚫어져라 쳐다보는 거야?" "응? 아냐 아냐, 지금 먹으려고." "왠지 수상한데. 너 나한테 무슨 짓이라도 했어?" "그럴 리가! 그냥 윳키가 먹는 반찬이 먹음직스러워 보여서 그래." "평
※ 마도카가 토오루를 짝사랑하고 토오루가 프로듀서랑 결혼합니다. 아름다운 것은 금방 사라져버리고 만다. 만물은 영속하지 않고 끊임없이 변화하며, 아름다움을 느끼게 하는 것도,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도 거스를 수 없는 흐름에 따라 변해가므로, 아름다움은 영원하지 않다. 그러니 사람은 찰나에만 존재하는 아름다움의 그림자만을 간직하며 그리워할 뿐이다. 코이토는
4박 5일간의 로케가 끝났다. 길었던 촬영은 만족스러운 결과물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매번 촬영할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로케는 피곤하다. 정식으로 데뷔하고나서 좋아하는 음악을 마음껏 할 수 있다는 것은 좋았다. 하지만 그 외 이미지 메이킹이나, 예능 같은 방송 출연이나, 음악을 하기 위해서 부수적으로 따라오는 것들은 솔직히 지겨웠다. 물론 새로운 사람들
평온한 오후였다. 큰 고비를 넘긴 세라프 부대는 한동안 긴급한 출동 없이 느긋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더욱이 오늘은 휴일이니 정기수업과 훈련도 받지 않고 느지막한 점심을 먹은 뒤 벤치에 앉아 따사로운 낮의 햇살을 즐기고 있었다. 옆에는 무표정으로 전첩을 만지는 윳키가 있다. 임무도 훈련도 같이하니까 휴식까지 함께할 필요는 없지 않느냐고 생각할 수도 있지
다시 파도가 밀려들었다. 모래사장을 때리는 바닷물은 하얀 포말을 일으키며 물러가고, 그 자리엔 무너진 모래성이 남아있었다. 몇 번이나 반복한 광경이었다.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루카는 또 한 번 모래성을 쌓았다. 하얀 다리에는 검은 모래알이 붙어있었다. 치마는 바닷물을 머금고 짙게 젖었고, 허리께까지 축축했다. 하지만 루카는 어린애 같은 미소를 띠고
※ 올캐러 논 CP 지향이지만 루카유키, 카렌츠카, 메구타마를 파는 사람이라 관련 요소 있을 수 있습니다. ※ 한국 2차인데 일본 문화 요소가 많아서 괜찮은가 싶긴 하지만 일단 완성했습니다. 불편하신 분은 뒤로가기 해주세요. "신사에 가자." 여느때와 같은 아침 식사 시간, 루카가 갑자기 그런 말을 꺼냈다. 아침을 먹고 있던 31A 부대원들이 일제히 루
윳키는 이상하다. 이즈미 유키. 고등학생이면서 천재 해커. 오키드라는 해커 조직의 일원으로 활동해 세계 3차 대전을 막는 활약을 했다. 지금은 세라프 부대에 소속되어 31A의 부대원으로서 많은 전공을 세우고 있다. 31A의 균형을 잡아주는 츳코미 담당이자 참모 역할이다. 원조 She is Legend의 팬으로 나, 카야모리 루카를 좋아한다. 문제는 마지
※ 평화 AU ※ 성인물 걸기 애매해서 안 걸었는데 수위 묘사 있습니다. 주의. 문을 눈앞에 두고 긴장한 채로 목을 가다듬는다. 초인종을 누르면 익숙한 목소리가 들리고 문이 열릴 것이다. 머릿속으로는 몇 번이나 상상했지만, 지금 처음으로 맞는 순간이었다. 밖에는 하얀 눈이 내리고 있다. 차가운 공기가 몸을 떨리게 한다. 하지만 단순히 추위만으로 떨리는 것
※ 공식이 11월 26일은 좋은 목욕의 날이라고 하네요. 휴일의 아침이 밝았다. 전날까지는 훈련이니 임무니 바쁜 날의 연속이었지만, 오늘만큼은 자유롭게 시간을 보낼 수 있다. 일주일 중 하루밖에 쉴 수 없다는 것은 안타깝지만, 인류가 위기에 처해있는 요즘 같은 때에 불만을 말할 수야 없었다. 그나마 요즘은 부대 연합 작전 같은 큰 임무가 없어서 다행이다.
공기 중에 향긋한 홍차의 향기가 피어오른다. 메지로 가의 집사가 우려낸 차를 찻잔에 따르자, 마음이 진정되는 향이 방안을 채웠다. 고풍스러운 메지로 가의 저택에 어울리는 고급스러운 향. 메지로 맥퀸이 그에 맞는 완벽한 예법으로 찻잔을 들어 올렸다. 차분한 티타임을 즐기는 맥퀸의 마음은, 그러나 요동치고 있었다. 애써 평상심을 가장한 표정을 지었지만, 메지
※ 할로윈 기념 서큐버스x수녀 ※ 중세도 아니고 무언가의 창작 AU. 보고 싶은 것만 쓴 느슨한 설정입니다. 이즈미 유키는 똑똑했다. 보통이라면 경외와 환심을 샀을 일이었지만, 이즈미 가의 부모님에게, 그리고 그 이웃들에게 그 사실은 징그럽고 두려운 것이었다. 단순한 이유였다. 이즈미 유키는 여자였다. 자고로 여자는 순종적으로 남자에게 복종하면 족한 생
※ 헤븐 번즈 레드 4장 전편까지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시점은 4장 후편 이후) 발치에서 마른 낙엽이 바스러진다. 어느새 나무는 옷을 갈아입고, 스산한 바람이 몸속을 파고든다. 거리의 풍광에서 계절이 완연히 가을에 접어들었음을 새삼 깨닫는다. 루카가 떨어진 낙엽 줄기를 집어들어 빙글빙글 돌려보았다. 그렇구나, 벌써 그런 계절이 되었구나. 벚꽃이 흐
※ 10월 4일에 썼던 프세터 백업 ※ 헤븐 번즈 레드 세라프 검도 무술제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어두운 식장, 오로지 단상까지 이어진 길과, 길 끝에 놓인 단상만이 밝았다. 나지막한 시라카와 부대장의 목소리가 식장을 울렸다. "신부 입장." 스가와라 씨가 정성껏 만든 귀여운 웨딩드레스, 길게 늘어뜨려진 끝자락을 밟지 않도록 조심하며 츠키시로
※ 9월 1일 프세터에 올렸던 글 백업입니다. ※ AI 파인모션을 창조한 에어 샤커의 짧은 글입니다. (1,000자 미만) 샤커. 기억 속에 남아있는 것과 다르지 않은 목소리로 그것은 말을 건다. 다정한 향수를 느끼게 하는 목소리. 음성의 조율은 다른 팀에 맡겼는데 예상보다도 훌륭한 재현도였다. 그게 오히려 짜증 나, 샤커는 혀를 찼다. 뭐라도 묻지
※ 9월 21일 프세터에 올렸던 글 백업입니다. ※ 우마무스메 프리티 더비 2기 애니 최종화 이후 시점을 기반으로 합니다. 그것은 어느 쉬는 시간에 시작되었다. “좋아하는 사람?” 다이와 스칼렛이 꺼낸 화제에 토카이 테이오가 고개를 갸웃했다. “응. 테이오는 좋아하는 사람 없어? 아니면 이상형이라던가.” “나는 당연히 회장이지~! 당연한 거 아니야?
아사쿠라 토오루가 그 방에 있었다. 아직 키가 문고리에 채 닿지 않을 시절. 어린 내가 아직 키에 채 닿지 않는 문고리에 손을 뻗어 방 안으로 들어간다. 차분한 하늘빛의 방. 그 안에서 한켠에 놓인 침대 위가 볼록했다. 나는 그대로 침대에 다가가 위로 솟은 이불을 들춘다. 하얀 이불이 펄럭이며 들추어지고 나면, 그 속에는 토오루가 있었다. 뭐 하는 거
료는 난간에 기대어 하늘을 보고 있었다. 구름이 잔뜩 낀 회색 하늘. 보고 있는 나까지 마음이 가라앉아서 우울해지는 그런 하늘이었다. 얼굴을 스쳐 지나가는 바람이 싸늘하게 뺨을 식히고, 가슴 한가운데에 구멍이 뚫린 듯이 허전함이 느껴지는 날씨였다. 나는 그 속에서 물끄러미 공기의 흐름에 흔들리는 새파란 머리카락을 보았다. 말없이 하늘을 올려다보는 료에게
※ 생일과 상관없는 내용이지만 9월 18일은 야마다 료의 생일입니다. 생일 축하해, 료! "자, 그럼, 다음 라이브를 위한 회의는 여기까지! 다들 수고했어. 좀 쉬었다가 연습 시작하자." "수고하셨습니다…." "수고하셨어요!" "짝짝짝." 몇십분간 이어졌던 회의가 드디어 끝났다. 니지카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히토리는 탁자 위에 널브러졌다. 료의 시선이
※ 프세터에 올렸던 히구유키. 이즈미 유키의 생일은 9월 17일입니다. 기다림은 시간의 낭비다. 더러는 설렘이나 낭만으로 포장하는 한가한 녀석들도 있겠지만, 냉정하게 말해서 약속 시간을 지키지 않는다는 건 방만이다. 시간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사람을 상대할 가치가 있을까. 그러한 녀석들은 되돌아오지 않는 재화를 무참히 소모하는 벌레와도 같다. 그러니 무슨
※ 이즈미 유키의 생일은 9월 17일입니다. 생일은 어떻게 보내면 좋을지 알 수 없었다. 가족들도 각자 바빠서 없는 듯이 지나가는 날이 많았고, 친구들한테 선물을 받아도 진정으로 갖고 싶은 것은 물질적인 게 아니어서 오히려 부담감만 들 뿐이었다. 생일을 축하해주는 것을 고맙다고 느끼면서도 마치 다른 누군가가 불렸어야 할 파티에 잘못 초대된 것처럼, 내 생
포도 주스. 갑자기 온 메일에는 그렇게 쓰여 있었다. 발신자, 아사쿠라 토오루. 그걸 확인하고 나는 메일을 무시했다. 10분쯤 지나서 다시 메일이 왔다. 포도 주스. 빨리. 메일을 보고 20초 정도 고민하다 몸을 일으켰다. 가벼운 외출복으로 갈아입고 부엌으로 갔다. 다행히 냉장고에는 포도 주스가 남아있었다. 포도 주스 팩을 들고 밖으로 나갔다. 열
채워진 술잔을 흔든다. 투명한 액체가 넘칠 듯이 찰랑인다. 아, 위험해. 진짜 넘칠 뻔했어. 물론 애초부터 흔들지 않으면 되었겠지만. 그렇게 생각하고 웃는다. 별로 유쾌하진 않은데 웃음이 나다니. 히나나 취한 걸까나. 스스로 생각하고 혼자 납득했다. 취했네. 하지만 별로 기분 좋게 취하진 않았다. 전부 이름은 알까 싶을 정도로 여럿이서 시끄럽게 떠드는 술
빛이 넘친다. 화악, 하고. 창문으로 넘친 빛은 천장에 물결친다. 일렁인다. 몇 번이고, 몇 날이고 반복된다. 해가 질 때까지. 그리고 다시 해가 뜨면 또 똑같이. 나는 소파에 앉아서 그것을 바라본다. 이곳은 수조다. 수조에서 유일하게 유리로 막히지 않은 천장을 바라본다. 가정부 아주머니는 조금 전에 왔다 갔다. 오늘도 무언가 만들어주셨다. 냄새가 난
끝나지 않을 것만 같은 꿈을 꿨다. 광장의 시계탑을 오르는 꿈. 실제로는 계단을 오르는 게 힘들긴 해도 오르다 보면 정상에 닿을 텐데, 꿈에서의 시계탑은 공중으로 연결된 계단이 한없이 이어져서, 나는 계속해서 그 탑을 오르고 거기서 기억의 조각을 모아 모두의 기억을 되찾으려고 영원히 끝나지 않을 탑을 오르는 꿈이었다. 고독한 꿈에서 깨어보면 아직 방안은
※ 헤븐 번즈 레드 3장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수확의 계절이다. 츠키시로 모나카가 양말을 벗고 장화를 신었다. 그리고 팔을 걷어붙인 츠키시로가 낫을 쥐었다. 부쩍 쌀쌀해진 바람이 벼 이삭을 흔든다. 사각거리며 벼가 살랑이는 소리가 그늘진 숲 사이를 헤쳤다. 좁은 논이라 귀 기울이지 않으면 놓치기 쉬울 작은 소리였지만, 분명 실제로 경작하는 넓은 논에서는
※ 헤븐 번즈 레드 2장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처음에는 부모님이 칭찬하는 것이 좋았어요. 저는 스스로 자신을 갖지 못해서, 누군가가 저를 옳다고 말해주어야만 확신을 할 수 있었어요. 어린 시절에는 그 누군가가 부모님이었죠. 아니, 어쩌면 비교적 최근까지도 그랬을지도 모르겠네요. 지금도 부모님에게 거슬러본 기억 따위 없으니까요. 부모님에게 인정받고 싶
※ 4장 후편 이후 시점이지만 큰 스포일러는 없습니다. 태양 빛이 따가운 여름이었다. 스컬 페더의 격파로 새로운 영역을 탈환한 인류. 이에 맞춰 세라프 부대는 새로운 기지의 건설로 어수선했다. 일부 부대에서 구성원의 재배치가 이루어지고, 부대원 대부분이 바쁘게 일을 처리하는 시기였다. 하지만 그 이유가 희소식이었기에 일이 끊이지 않는 상황에서도 기지 내
※ 헤븐 번즈 레드 2장 및 이벤트 스토리 Requiem for blue 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 스토리 본 지 한참 되어서 설정 충돌 있을 수 있습니다. 어슴푸레한 숲 사이로 비가 내렸다. 봄이건만 봄비 같은 보슬보슬한 비가 아니라 채찍처럼 내려치는 장대비였다. 빗줄기에 시야가 흐리다. 젠장. 이치고는 작게 푸념 같은 욕설을 내뱉었다. 다른 3
※ 2장과 "Requiem for the Blue" 이벤트 스토리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나른한 몸을 누군가가 부드러운 손길로 흔든다. 이치고는 무심코 눈살을 찌푸렸다가 자신을 흔드는 손길의 주인을 떠올리고 미소를 지었다. 모르는 척 침대에 늘어져 있고 싶은 마음을 죽이고 눈을 뜬다. 이치고의 눈에는 최고로 귀여운 얼굴이 시야에 가득 찼다. 곧 눈앞의 얼굴
※ 헤븐 번즈 레드의 메인 스토리 2장, "여름! 수영복! 트로피컬 축제!" 이벤트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 7월 7일은 아오이 에리카의 생일입니다. 생일 축하해, 아오이! 눈을 떠보면 푸른 하늘이 펼쳐져 있었다. "카야모리 씨?" 아직 무엇이 어떻게 되어가는지 잘 알지 못하는 상태로, 그저 들려온 목소리를 따라 반사적으로 루카가 고개를 돌렸다. 옆
※ 헤븐 번즈 레드 4장 후편 시점이지만 큰 스포일러는 없습니다. 달이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연한 하늘에 조각달이 걸려 있었다. 아직 해가 저물지 않았는데도 햇빛이 희부예서 하늘만이 옅푸르고, 그런 구름이 섞인 하늘에 희미하게 하얀 달이 나룻배처럼 떠 있었다. 하늘을 올려다보는 것도 오랜만이다. 직업이 해커다 보니 자연스레 실내에 머무는 일이 잦았고,
"좋아해." 갑자기 떨어진 한마디가 가라앉은 공기에 물결을 일으켰다. 그 목소리에 어깨를 움츠리고 턱에 주름이 지도록 머리를 푹 숙이고 있던 히토리가 반짝 고개를 들었다. 기울어진 햇살이 부시게 눈을 찌른다. 잔잔한 연못 위에 조약돌이 빠진 듯이 히토리의 감정에도 일렁임이 일었다. 소리 없이 벌어진 입술 사이로 정돈되지 않은 숨이 터져 나왔다. 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