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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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도 더운데 같이 냉면이나 먹으러 갈래? 네. 좋아요. 어디 아는 집 있어요? 응. 모르는 집. ......? 그런 내용의 카톡을 주고받은 지 며칠 전이었다. 조금 거리가 있는 역 앞에서 만나기로 한지라 약속한 시간보다 조금 일찍 나왔는데, 그래서인지 아직 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근처를 둘러보며 적당한 나무 그늘 아래에 자리잡은 한도윤은 간단한 퍼즐
자네, 루프라는 말을 알고 있는가? 루프요? 계속해서 반복된다는 뜻이지. 1 마지막 날에는 비가 세차게 내렸다. 서재호도, 양시백도 침묵한 채 내리는 비를 우산도 없이 맞고 있었다. 백석 빌딩 앞이었다. 그들은 자신이 듣고 만 소리에 못 박힌 것처럼 허망한 눈으로 가만히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눈을 찔러드는 빗방울에 때때로 시야가 가려지고 바로 옆이
"아빠!" "아연아!" 어느 고등학교 정문. 모처럼 딸을 마중나온 아빠와 반갑게 아빠에게 다가가는 딸. 흔한 광경은 아니었지만 아예 보기 드문 광경도 아니었다. 교복을 입은 딸의 가슴에는 유아연이라는 노란 명찰이 여름 오후 햇빛을 받아 반짝였다. "정문에 있어서 깜짝 놀랐어. 어쩐 일이야, 아빠?" "간만에 오프 나서 마중나왔지." "안녕하세요." "안
사건 관계자-지금은 한 사무소에서 한솥밥을 먹는 사람들 중 류태현과 제일 교분이 깊은 건 하무열이었으나 그마저도 밀실에 얽히게 되면서 알게 된 인연이라 그 이전의 류태현은 잘 알지 못했다. 그렇기에 하무열은 더 전에 만났다면 류태현이 어떻게 웃었을지 궁금해하곤 했다. 물론 류태현이 웃지 않는 사람은 아니었다. 류태현은 평범한 선에서 감정이 풍부했기에 순경
"지은이 넌 끝까지 꼼꼼하구나." "네?" "아니, 다른 애들은 일이 없다 싶으면 농땡이도 피우고 가끔 누락도 하고 그러는데, 너는 그만두는 날까지 그러는 걸 본 적이 없는 거 같아서." "후후후, 눈치챌 수 없게 한숨 돌리는 게 진짜 기술이라구요. 점장님 깜빡 속았죠?" "그래, 깜빡 속았네. 자, 나머진 내가 할 테니까 그만 들어가." "시급 깎는 거
원래도 업무 메모는 잘 해두는 편이었지만 (존경하던 상관이었던 형님이 세월의 흐름을 삼킨 수첩을 늘 지니고 다니며 자주 메모하는 것에 영향을 받았다) 서재호가 본격적으로 메모하는 습관을 들이게 된 건 천직이라고 생각했던 경찰을 그만두고 기자로 이직했을 때였다. 어느 것이 옥석인지 가릴 수 있는 눈썰미가 길러지지 않은 상태이기도 해서 제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아이가, 양시백이 없었다. 직업소개소의 끝에 다다라 본 것은 나뒹구는 흉기와 그것을 들었을 소년에 가까운 청년들이었다. 방마다 혈투를 벌이고 전진하면서 양시백을 본 기억은 없었다. 당장 짜낼 수 있는 답은 하나였다. 저를 해하려 드는 자들을 쓰러뜨리고 한 발 먼저 직업소개소를 빠져나갔다. 그의 시체를 보지 않은 것만으로 감사히 여겨야 할 일이었으나 지나온
"관장님, 여기 달력에 표시해둔 날짜 뭐예요? 수강료 입금날은 아닌데." 제자의 물음에 최재석은 뜨끔한 기색을 드러내지 않으려 노력하며 대답했다. "어어, 별 거 아냐." "별 거 아닌데 표시까지 해두셨어요?" "볼일이 있는데 그렇게 오래 걸리진 않을 거거든." "그래요?" "그래." 그럼..뭐. 제자, 양시백은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도장 내 정리정돈
"아저씨, 다음달이면 졸업식이 있는데, 와주실 수 있으세요?" 아버지 손에서 자란 권혜연에게는 친척이 없었다. 정확히는 어머니가 살아있었지만 그는 부녀와 연을 끊고 이뤄놓은 가정이 있었고, 구태여 그를 돌봐줄 필요성을 느끼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어떻게 대답해야 하나 고민하던 주정재는 문득 중학교 졸업식 때에도 혼자였던 건 아닌가, 생각했다. 그가 권혜
"낯빛 좋군." "이게 좋아 보이냐고 하고 싶지만, 그래, 나쁘지 않아. 형사님 쪽은 어때?" "이젠 형사 아니지. 초기 소규모 사업체가 겪는 고충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네." "잘 됐군." "콩밥은 맛있나? 자네가 내가 아는 누구처럼 통뼈라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네." "흥, 마음에도 없는 소릴 다하기는." 그렇게 총을 맞고도 살아남는 사람은 없다,
세 사람은 여행을 가게 됐다. 느닷없이 여행을 가게 된 이유는 많았다. 첫째로는 당분간 서울에 있고 싶지 않았고, 둘째로는 팔자에도 없었던 여행이란 것에 치유받고 싶은 마음들이 있었다. 셋째로는. "거 이렇게 된 거 핫바를 비롯해 부산에서 맛난 거 먹으면서 방바닥이나 뺀질나게 긁어보자는 거지." 허건오가 적극적으로 부산 여행에 대한 의견을 피력했기 때문
똑똑똑. 똑똑똑. 노크 소리. 소리쳐 부르지 않는 것으로 보아 아직까지는 휴식 시간이다. 상대는 누굴까. 언제부터 노크를 계속 했을까? 예상은 가지만 문 옆으로 다가가 낮게 물었다. "누구야?" "...저예요. 양수연." "...수연 씨? 별일이군. 나한테 무슨 볼일이라도 있나?" "얘기를 나누고 싶은 게 있어서.." "지금 문을 열지. 들어오라고."
주정재는 선진화파에 오래 몸담았다. 오래 몸담았다는 말에는 제 주변 사람들이 속되게 말해 '물갈이' 된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는 위치라는 의미도 있었다. 흐르는 시간은 많은 것을 약속하지만, 잠입요원은 단순히 시간을 흘려보내고 살아남는 것으로 안전을 보증받지 못한다. 신입이든 오래 물 먹은 놈이든, 진짜 수상한 놈이어서 꼬리가 밟힌 건지, 재수없는 상황에
"떡볶이 먹으러 가자." "떡볶이요?" "엉. 어때? 혹시 딴 거 먹고 싶으면 말해줘." "먹으러 가죠. 떡볶이." "잘 아는 집 있는데 거기로 가자." 휴일에 도장을 찾아왔다가 느닷없이 떡볶이를 먹게 생겼다. 양시백은 식사 때 사람을 그냥 보내지 않았고 이번에도 그랬다. 매번 거절하기도 그래서 하태성은 이번엔 받아들이기로 했다. 양시백은 씩 웃으며 멀지
시작은 아주 작은 초인종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그냥 무시했어야 했는데! 조용호는 문을 열자마자 지독하게 후회했다. "이야~! 오늘 이 친구 생일이라지 뭐야? 다 같이 축하해주자고!" "안녕하세요. 홍설희에요." "아유, 거 생일 축하드립니다 아저씨!" "아저씨라고 부르지 마!" "조용호 씨라고 하셨죠? 권혜연이라고 해요. 재호 씨에게서 이야기 많이 들었습니
"시백 씨!" "양시백이!" 위험한 일에도 발 벗고 나서는 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고, 해야만 하는 일이기 때문에, 그 사실을 똑똑히 아는 이상 모른 척 할 순 없었다. 그저 남겨질 사람들이 걱정되었다. 섬뜩하게 헤집어지는 감각과 함께 툭 하는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는 아주 짧은 시간 주마등을 볼지도 모르지만 나는 그렇지 않다. 정확히 말하자면 나는,
"생일 축하드려요~!" "생일 축하드립니다, 경위님, 국장님!" 케이크 위의 촛불을 불어 끈 오늘의 당사자 유상일과 박근태는 환호하며 축하해주는 동료들에게 인사하며 웃어보였다. 유상일에게는 이번 생일이 남달랐는데, 경찰로 복귀한 뒤 처음으로 맞는 생일이기 때문이었다. 주변에 널린 조폭들에게 생일 축하를 받아도 받은 것 같지 않았던 잠입요원 시절의 설움과
주정재는 쉴 틈이 없었다. 경찰일을 할 때도, 표면적인 업무가 끝나고 나서도 일, 일, 일. 계속 일이었다. 누군가는 저 놈만큼 느긋하고 뻔뻔하게 일하는 놈도 없을 거라는 평가를 내리기도 했지만 본인 앞에서는 말하지 않았고, 그럼에도 주정재의 귀에 그런 말이 들어오는 날이면 네까짓 놈이 내가 하는 일들을 다 아느냐고 속으로 욕을 퍼부어주는 게 일상이었다.
경찰을 그만 두고 기자가 된 뒤로 이토록 완연한 봄을 느낀 적이 또 있었을까. 나 생일이요, 하고 자랑하는 일은 없지만 한 번 알려주고 난 뒤 달력에 적어두기라도 하는지 12시 땡하자마자 예약이라도 해놓은 듯 문자로 생일 축하한다는 문자가 도착했다. 생일날 시간 비어있으면 저녁이나 같이 먹자는 말에 고맙다고 인사하고 너무 늦게 자지 말라며 답장을 보내
눈을 뜬 양시백은 침대에서 일어나지 않은 채 저 멀리서 면도하는 서재호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전날 밤 수염 따가워요. 라고 말한 바로 다음날 아침이었다. 뭐가 그리 좋은지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면도 중인 모습에 괜히 놀려주고 싶은 느낌이었다. "아저씨, 면도 자주 안 하죠?" "어허이, 무슨 그런 섭한 말을?" "볼에 닿으면 따갑다고요. 아차하면 산적 수
통통통. 노크라기보다는 주먹을 가볍게 쥐고 두드리는 놀이를 하는 것처럼 경쾌한 노크소리에 서재호는 누가 왔나 싶어 재빠르게 현관문으로 이동해 바깥을 살폈다. 양시백이었다. "연락도 없이 어쩐 일이야?" "요 근처 지나가다가 점심 안 먹었으면 나가서 먹자고요." "정해둔 거 있어?" "네." 양시백은 서재호보다는 고등학생인 신호진이나 문현아 쪽의 입맛에
"실례합니다." "아, 은창 오빠, 왔어요?" "어, 안녕. 혜연아. 아버지...경감님은?" "아빠라면 잠깐 요 앞에 나갔다 오신다고 했어요. 한 10분 20분 걸린다고 했나?" "그래..." 정은창은 손을 깨끗이 씻고 옷을 걸어 놓은 뒤 권혜연에게 물었다. "맨날 얻어먹기도 뭐하니, 오늘은 내가 식사 준비를 해도 될까?" "오빠가요?" "걱정마, 뛰어
-결정했어. 나, 잠입요원 일에 지원할 거야. 박근태는 그 말을 처음 들었던 날을 똑똑히 기억했다. 돈의 흐름을 따라 하나 둘씩 서울로 상경한 조폭무리는 적지 않았다. 개중에서 가장 큰 세력을 지닌 것이 바로 선진화파였다. 호랑이를 잡고 나면 호가호위하는 무리들은 금세 뿌리 뽑을 수 있을 터. 경찰의 옷으로 보기 좋게, 드러나지 않게 가렸을 뿐, 박근태는
죽다 살아난 이후 종종 복권을 샀던 서재호는 거짓말처럼 간소한 금액에 당첨됐다. "체, 저도 아저씨 따라서 복권 사볼 걸." "헹, 자동으로 뽑힌 거라 안 됐을 걸?" "당첨금으론 뭐하실 거예요? 컴퓨터 바꾸시나?" 당첨금 수령하지도 않았건만 권혜연과 양시백의 두 눈이 반짝거렸다. 세금 떼고 나면 실수령액이 줄어든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랬다. 아직까지는
"하태성, 카페 가자." "그럴까요?" 둘은 장을 보고 돌아오는 길이면 적당한 카페를 골라 들어가 잠시 노닥거리곤 했다. 카페는 몇몇 사람이 있었지만 대체로 아늑한 분위기였고 또 적당한 사람소리가 났다. 인사와 함께 주문받을 준비를 마친 종업원이 두 사람의 얼굴을 보고 먼저 물었다. "혹시 아이스 아메리카노에 아이스 초콜릿 라떼, 주문하실까요?" "아,
최재석은 최근 자리를 비우는 일이 많아졌다. 일전의 사건 이후 줄어버린 관원들을 재모집하고, 주위 태권도장 관장들과 어울리며 근황을 주고받는 등 적극적으로 활동했기 때문이었다. 당연히 유상일과 양시백이 함께하는 시간도 길었다. 양시백은 비록 유상일을 용납할 수 없었지만 최재석이 용인하는 이상 일방적으로 적의를 표할 수도 없었다. 최재석이 있을 때는 적당히
양시백은 사람이 싫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모든 사람들은 양시백을 마주할 때 선입관을 갖고 그것을 강요했다. 그저 그가 타고난 눈매가 매섭다는 것만으로도 째려본다느니, 싸움을 건다느니 시비를 걸었다. 원래 눈매가 이렇다, 시비를 걸지도 않았고 그쪽이 누군지도 모르고, 지나가는 길이었다, 시비는 지금 당신이 걸고 있는 게 아니냐. 난 상관없다. 오해받을 만한
서재호는 삼복을 잘 챙기는 편이 아니었으나 올해는 달랐다. 초복에는 옛 친구 오미정과 함께 들깨삼계탕을 먹었는데, 엊그제 같았던 초복이 지나더니 중복이란다. 양시백이나 권혜연, 홍설희와 함께 몸보신 음식이라도 먹으러 갈까 했는데 다들 시간이 되지 않았다. 삼계탕을 또 먹긴 뭐하고 감자탕 같은 거라도 먹으러 가볼까. 할 참이었다. 집앞에서 가까운 감자탕집에
강재인은 어릴 적, 이제는 기억도 나지 않는 어딘가에서 집토끼를 본 적 있었다. 기다란 귀에 또렷한 눈. 강아지나 고양이보다는 눈에 띄는 애완동물. 여려보인다, 귀여워 보인다. 언뜻 그렇게 생각하다가 퍼득 튀어오르는 불쾌감을 느꼈다. 애초에 토끼같은 자식 운운하는 말들도 좋아하지 않았다. 제 처지가 그 토끼와 얼마나 다르다고. 1. 물론 강재인은 토끼가
초등학교에 이어 고등학교에 이르러서야 다니는 학교가 같아졌지만 셋은 늘 함께 다녔다. 세 사람의 부모님들이 아는 사이였기 때문에 조금 먼 거리기는 해도 못 만날 정도는 아니었고, 중학교라는 간극이 있었지만 고등학교 입학 후 한 반이 된지라 어울리는데 문제될 것은 없었다. "으, 오늘따라 선생님 종례 엄청 안 끝나더라." "뭐 안 좋은 일 있으셨나..."
양시백은 가끔씩 서울을 배회했다. 도장은 여전히 폐업 신세여서 먹고 사는데 지장이 있었지만 그동안 먹어온 세상 물정이 있어서 입 하나 정도는 풀칠하며 살 수 있었다. 넉넉하지 않음에도 겨우 쥐어짜낸 여유를 짧게 만끽한 양시백은 따뜻하진 않지만 춥지도 않은 옷차림으로 도장을 나섰다. 날은 햇빛조차 얼음으로 빚어낸 것처럼 싸늘했지만 개의치 않았다. 그렇다고 해
쿵쿵쿵. 쿵쿵쿵. 쿵쿵쿵.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잠이 깼다. 눈꺼풀이 무거운 것을 보니 비가 왔거나, 곧 오거나, 흐리거나 셋 중 하나였다. 누군지는 모르지만 꼭 안에 사람이 있다는 걸 아는 것처럼 무시하려고 하면 주기적으로 두드렸다. 아는 사람의 범주에서 이 집 주소를 아는 사람을 꼽아보았다. 저토록 끈질기게 두드릴 사람은 세 명 정도 있었다. 둘은 욕
정은창은 종종 반추했다. 그런 말을 하지 않았더라면, 일찍 돌아갔더라면, 복수를 다짐하지 않았더라면 많은 것이 바뀌었을 거라고. 정은창은 꿈을 꾸고 있었다. *** "대기업 경호원 일자리 거절하고 하는 일은 좀 어때?" "매일같이 찾아와주는 단골손님 덕분에 그럭저럭 풀칠하고 있어." "나 말고 다른 단골손님도 있나 보지?" "유감스럽게도." 강재인은
국회의원 살해 사건. 범인은 과거 서대문 인질극 사건의 피해자이자 박 의원의 부하였던 유 모 씨로 밝혀져... 딸을 잃은 슬픔과 자신을 비리 사실을 잡아낸 일로 박 의원에게 앙심을 품고... "멋대로들 말하는군." 남자는 신문을 접었다. 직접 겪지 못했을 뿐 대강의 이야기는 접했기에 더 살펴볼 필요성을 못 느꼈다. 불쾌하기만 했다. 유상일이 10여 년
차 위로 떨어져내린 최재석의 몸. 가속도가 붙은 몸뚱이에 실린 힘이 어느 정도였는지 찌그러진 차의 천장이 보여주고 있었다. 양시백은 최재석의 얼굴을 보았다. 아무것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파란색 츄리닝 차림이 보라색으로 보일만큼 고였던 새빨간 피가 울컥거리며 차체를 타고 한 방울, 두 방울, 뚝뚝 흘러 땅을 적셨다. "허어억!" 양시백은 꿈속
-출소를 앞두고 발송되었어야 할 무명의 편지는 존재하지 않았다. 유상일이 출소했다. 10년 전 비리로 몰락한 경찰 영웅이었던 그의 출소 소식은 생각보다 크게 다뤄지지 않았다. 자리를 떠나기 전 줄곧 기다리던 옛 친구를 만나 밥을 먹고, 이야기를 조금 나눈 게 전부였다. 밥을 먹고 나니 무어라도 할 것이 없었다. 적당히 자리를 파하려는 유상일을 붙잡은 친구
아저씨. 아저씨는 경찰이죠? ..저를.......주세요. 그는 칼잡이다. 아직 칼로 누군가를 죽인 적은 없지만 칼을 써서 누군가를 위협하고 협박해 먹고 사는 사람이므로 칼잡이였다. 누군가는 왜 칼잡이가 되었느냐고 물었지만 그도 처음부터 칼잡이가 되기를 소망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니까, 그의 아버지가 갑작스럽게 돌아가시기 전까지는. 그는 제 아버지가 범죄
"국장님." "....." "...국장님!" "아, 아.....미안하네. 근태. 뭐라고 말했나?" "큰 게 아니라 국장님의 안색이 몹시 좋지 않아 보여서 잠시 눈을 붙인다거나 바람을 쐬고 오는 건 어떠실까 해서.." "철야인데 어떻게 안색이 좋겠나. 다들 고생하고 있는데 지금 존 것으로도 충분하네." "다른 팀원들도 잠시 숨 돌리고 있는 걸 확인해보고 오는
배준혁이 가끔씩 찾아와 양시백이나 최재석의 안부를 묻는 일은 종종 있었다. 최재석은 원체 벽을 두르는 타입이 아니었을 뿐더러 친자식이나 다름없는 양시백의 은인인 배준혁을 싫어하지 않았다. 거기에 절친한 유상일의 후배였던 만큼 예의를 지키는 선에서 친밀하게 대했다. "안녕하세요." "옙. 안녕하세요." "시백 씨는..?" "양시는 아버지랑 같이 장 보러 갔
"도 형사, 오늘 시간 있어?" "예에 뭐..철야인가요?" 다른 팀원들이었다면 일찍 보내주려나 희망을 갖겠지만 도세훈은 달랐다. 팀에 몸담은 시간도, 권현석의 휘하로 보낸 시간도 적지 않았기에 시간 있냐는 말에 자동적으로 오늘도 제 시간에 집에 돌아가지 못하겠구나, 하고 빠르게 퇴근을 포기했다. 누군가는 짬 찼다고도 하는 빠른 체념이었다. 권현석은 쓴웃음
"...아니..." "아내와 아들이 장을 보러 간 사이 깜찍하게 찾아왔다네. 어떤가. 차 한 잔 없이 늙은이를 내치진 않겠지?" "......." 수사국장이자 치안감 하성철은 그리 유복하지 않았고, 집 역시 다소 외지고 거친 길목을 지나야만 다다를 수 있었다. 아마도 차가 들어올 수 있는 데까지는 차를 타고 오고 남은 길은 장희준이 노쇠한 몸을 이끌고 직
양시백이 태권도장 일을 오랫동안 하면서 태권도 이외에 는 게 있다면 종이 공작 실력이었다. 자르고, 접고, 붙이고. 성인반이나 특기생들의 비중도 꽤 있었지만 아이들이 제일 많았기 때문에 어린이날이나 크리스마스 같은 날이면 일찍 마치고 먹고 마시는 시간을 갖곤 했다. 작은 트리와 꼬마전구뿐만으론 다소 휑한 구석이 있어서 반짝반짝 빛나는 (일반 색종이에 비해
토요일이면 이른 오전에 빠른 아침을 마치고 집안일에 뛰어들었다. 지금이야 방학이니 주말에도 쉴 수 있는 것이겠지만, 아이들이 개학하고 나면 이 여유도 사라질 게 분명했다. 다행히 둘 다 아침잠이 없어서 일어나는데 용을 쓸 필요는 없었다. 외려 하태성이 더 일찍 일어나서 아침 준비를 할 때가 있어서 경찰 일을 할 때도 저렇게 부지런했을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권현석이 죽었다. 박근태 자신의 선택, 자신의 결단이었다. 그 결정 과정에 장희준은 없었다. 말을 보탠 적은 있었지만 유상일처럼 격양시켜 자멸시키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도세훈 경사를 죽인 것은 오인 사격이었다. 장희준이 덮고 스스로 묵인해 오인으로도 자신이 죽였다는 생각에서 벗어난 박근태에게 권현석의 죽음이야말로 최초의 살해나 다름없었다. 살의를 내재하고
"야, 먹어먹어! 식을라! 어여 먹어!" "..넌..내가 교도소에서 쫄쫄이 굶었을 거라고 생각하냐?" "나 참, 뭐래? 너 그렇게 먹다간 근육 다 빠져서 허우대만 크고 비실비실거리게 될까봐 그렇지! 직업인의 말을 믿어." 직업인이라는 말에 걸맞게, 최재석은 태권도장의 관장직을 맡고 있었다. 경찰을 그만두고 새로운 길을 찾아내 작은 성공을 이룬 유상일의 친
꺄하, 하고 까르륵거리는 소리가 놀이터에 울렸다. 있는 힘껏 그네를 타고 노는 두 아이는 환하게 웃고 있었고, 속도를 천천히 낮추면서 그네에서 내린 뒤에는 -또래 애들이 그렇듯 어느 정도 속도가 적당히 낮아지면 뛰어올라 모래밭에 착지하는 것을 즐겼으나, 어머니들이 제지하자 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벤치에 앉아있는 어머니들에게 인사하곤 시소도 타고 계단을 타
"웬일이냐, 영화를 다 보자고 하고." "극장엔 가기 싫고, 영화는 보고 싶고, 혼자 보기엔 비도 겁나게 오는데 기분 추적해질 거 같아가지고 불렀다. 어때, 좋지?" "좋긴 개뿔이 좋아." "새끼가 형님이 영화 보여줘, 밥도 줘, 술도 주는데 말뽄새가..어휴, 됐다. 영화나 보자, 영화나." "뭔 영화인데?" "보면 알아." 남자는 형사, 주정재의 심보를
꿈을 한번도 꾸지 않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하루에도 몇 개의 꿈을 연달아 꾸는 사람도 있기 마련이다. *** "..준혁 씨의 수술이 성공했다니, 정말 다행이구나. 양시." "나 참, 선생님..보다 관장님 몸 걱정이나 하세요. 몇 개월 동안 침대 신세 진득하게 져야 할 분이 누굴 걱정하고 있는 거예요?" "하하, 윽....크, 본 성격이 이래서 어쩔 수
-..오미정, 형사. 오미정이 형사라는 직업의 딱지를 뗀 지도 10년 째가 되던 어느 날이었다. 자신을 미정 형사라고 불러준 이는 몇 없었다. 그렇게 불러줄 이도 이제 거의 없었다. 한 사람을 제외하면. 오미정은 수화기 너머의 상대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지만 잊혀진 울림을 떠올리듯 상대의 이름을 조심스레 입에 올렸다. "..상일 경위님?" 수화기 너머
서재호는 푸하푸하거리며 잠을 도롱도롱 자는 양시백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책상에 앉아 고개를 우측으로 돌리면 자는 얼굴이 정면으로 보였다. 컴퓨터 쪽을 보고 자면 불빛이나 열기가 느껴져서 되려 잠을 이루기 힘들지 않냐는 물음을 던진 적이 있었고, 양시백은 예전부터 늘 그래와서 괜찮다고 대답했다. 너무나도 당연해 생략되어 있었지만 그 사이에는 최재석 관장님과
...상일이가 죽은지도 어느덧 한달이 지났다. 매정한 노릇일지도 모르지만 어느덧 알게 된 사람들 모두 제자리로 조금씩 돌아가고 있었다. 재호 씨와는 앞으로도 백석을 쫓겠다고 했다. 나 역시 꼭꼭 감춰둔 것들을 풀어내야 할 때라고 생각해 서로들 몸이 나아지면 이야기를 해 보고자 약속을 잡았다. 양시 녀석은 자기가 해야만 하는 일을 찾아낸 상태였고, 권혜연 씨
안개 낀 길 위. 그 길 위에 유상일이 있었다. -근태 형. 별도 달도 없는 밤하늘의 도로 위. 밤이 깊지 않아 오고가는 자동차 한둘쯤 있을 법 한데 안개가 짙어서인지, 교통사고가 빈번하게 일어나는 곳이어서인지 자동차는 한 대도 지나가지 않았다. 그런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길 한가운데 저렇게 서 있는 것이겠지. 유상일은 두 팔 벌려 어서 오라는 듯
"은창, 운전면허 정도는 따 두는 게 좋아." "왜, 차로 치어버리라고?" "쯔, 그런 거 말고. 물론 이 일 하는데에도 운전면허가 필요하기도 하지만...만약에 네가 나중에 조직에서 나가더라도 운전이라도 할 수 있음 어디 가도 그렇게 꿀리지는 않을 거 아냐." "......." 애초에 복수를 바라고 선진화파에 투신한 정은창이었다. 복수를 완료하기도 전에
"크하, 추워 죽겠네~!" 외투를 벗어 옷걸이에 걸어둔 뒤 텔레비전 앞에 놓여있는 소파로 도도도 달려가 털썩 앉은 허건오는 손을 싹싹 비볐고, 김주황 역시 옷을 걸어둔 뒤 조용히 옆자리에 거리를 조금 두고 앉으면서도 허건오의 부산스러운 행동에 표정을 살짝 찡그렸다. "늙은이 같기는.." "고릴라가 나보다 나이 더 많거든?" "1살 차이는 나는 것도 아니
"오랜만." 서재호가 의자를 끌어당겨 앉으며 인사했다. 당연하지만 오미정은 대답하지 않았다. 과거 같이 일하던 시절에도 오미정에겐 기가 죽곤 하는 서재호였는데, 지금의 오미정의 모습은 서슬이 푸르다 못 해 서늘할 정도였다. 하지만 이제는 그렇다고 해서 웃는 얼굴로 무마하거나, 져 주는 듯 넘어갈 수는 없었다. 오미정은 유상일에게 동조해 죄 없는 아이를 죽
"젠~장할, 눈 오는 빨간날 크리스마스면 뭐하냐고! 나 혼자인데." "야, 주! 네 목소리 복도 끝까지 다 들린다!" "뭐야 촐싹이 아냐." "얌마, 내가 한 촐싹 하는 건 맞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서 촐싹이라고 부르면 섭하다고." "내참, 그럼 뭐라고 불러줘?" "네가 성 따서 주, 하고 불리는 것처럼 나도 '소' 나 '소 형' 쯤은 되지?" "됐네요.
"좋아할까요?" "좋아하겠지." "오빠 생일이 12월이었구나..." "재호 씨는 어떻게 알았어요?" "언론계의 황야에서 살아남은 기자에게 못 알아낼 것이란 없지." 권혜연 뿐만 아니라 홍설희 역시 빤히 바라보는 바람에 서재호는 허세 부리던 것을 그만두고 사실대로 말했다. "자연스럽게 내 생일 알려주면서 양시백이 생일도 물어봤어." "전 2월 14일이에요
노랗게 물든 은행잎이 얇게 떨어져 길을 덮을 시기에, 장희준은 경호원과 거리를 둔 채 공원을 산책했다. 적이 많은 지라 경호원 없이는 잘 다니지 않았으나 이 작은 공원에서는 종종 거리를 두고 거닐곤 했다. 겨울로 접어드는 늦가을, 가끔 짬을 내어 사람 없는 공원 벤치에 앉아 자판기에서 뽑은 커피를 한 잔 마시며 사색에 젖어드는 것도 한가롭고 나쁘지 않다고
김주황이 허건오를 데려다가 제 집에서 먹이고 재우게 된 건 이제 어언 한 달 여가 되었다. 박근태의 비호 아닌 비호에서 벗어나게 되자 당장 먹고 살 길이 막막해졌다는 게 이유였는데, 대장 나리네 얹혀살까? 라는 되도 않는 농담을 (허건오는 진심 반 농담 반이라고 했지만 하태성도, 김주황도 질겁했다.) 던졌기 때문에 김주황이 눈물을 머금고 자신을 희생하는 수
-혜연이....부탁해.... 주정재가 사경을 헤매는 중에도 그 말만이 선명하게 들렸던 것은 권현석의 마지막 말이기 떄문이기도 했고, 그 마지막 말을 저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스스로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웃기는 일이었지만 결과적으로 틀린 말도 아니었다- 정은창에게, 죽일 만큼 각별하고 죽일 만큼 증오하는 정은창이 견딜 수 없이 질투났기 때문이기도 했다.
남자는 형사와 함께 종종 밥을 먹곤 했다. 매일 먹는 것은 아니었고, 일이 있을 때만이었다. 그마저도 점심 쯤이었고 형사의 경우 본 업무로 곧장 복귀해야 하곤 했어서 배를 채웠으니 술을 마시자! 는 상황은 두 사람 사이에서 거의 없는 일과 같았다. 밤에 '일' 이 떨어지지 않는 한에는. 하지만 백반집에서 배를 채우고 나오는 길에 담배를 물며 나오는 상황은
"재석이, 그리고 시백이도. 잠시 여기 좀 앉아보자." "무슨 일 있어?" "왜, 아빠?" "다들 냉장고를 열어봤다면 알겠지만...상태가 갈락말락 하는 것들이 많아. 버리자니 아깝고 더 내버려두면 100% 못 먹을 게 돼. 그러기 전에, 잔반과 그 재료들을 처리하자." "하긴 추석 음식 많이 받아놨더니 밥값은 굳었지만 금세 물려서 골치가 아플 정도야." "
"...저, 작은 형님." 쭈삣거리는 기색이 역력한 조직원이 김성식에게 다가왔다. 김성식은 이놈이고 저놈이고 잘못한 놈마냥 빌빌거리는 꼴이 보기 싫었지만, 그렇다고 으스대는 놈은 더 질색인지라 제 성격을 누르며 고개를 까딱하는 걸로 대처했다. "뭐야. 도진 형님이 부르기라도 해?" "아, 아뇨. 그..새로운 신입놈을 뽑는 것 때문에 말씀드릴 게 있어서요
아빠. 아버지. 박수정에게 아버지는 인자한 -그러나 경호원과 사용인들이 어려워 하는 기색이 어김없이 느껴졌다- 할아버지보다 더 어려운 존재였다. 단순히 무뚝뚝하다거나 감정 표현이 서투른 게 아니다. 박수정이 그걸 깨달은 것은 초등학교에 들어갔을 때였다. 입학식에 참석하지 못 했다던가, 하는 점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아주 단순한 것이었다. 같은 반 친구
"...형님, 요즘 드라이브 취미가 생기신 겁니까?" "엉?" "그게, 저녁 먹고 항상 드라이브 하러 나가자고 하지 않으십니까. 그, 궁금해서요." "궁금해?" "아, 예...." 자신을 포함해 운전수 역할을 할 조직원을 대동하기도 하고 김성식이 직접 운전할 때도 있었다. (그럴 때에는 혼자 외출하는 경우였지만) 정은창은 그 드라이브에 주기가 있다면 파악
"정은창, 저녁에 시간 돼?" "엉?" "저녁 나가서 먹을 건데, 혼자 먹으러 가긴 좀 그래서 같이 갈 사람을 찾고 있었거든. 근데 재석이는 곯아떨어져 있고, 주정재는 먼저 나갔는지 방에 없더라고." "술까지 마실 거라면 안 가." "오늘은 그냥 고기만 먹을 거네요. 그것도 보통 고기가 아니란 말이지. 그래서 어때? 같이 갈래?" 황도준 사건 이후 유상일
비 한 번 긋고 나니 지독한 무더위가 조금 누그러진 기분이 들었다. "다녀올게요." "그래, 잘 다녀와라, 양시. 친구 데려올 거면 미리 말하고." "관장님도 참, 제가 애에요?" "헉...설마 우리 양시, 친구 없냐?" "나 참, 농담 그만 하세요." 말은 그렇게 주고받았지만 모처럼의 외출이었다. 빠르게 다가와 길게 지속되는 무더위에 관장님은 여름 휴
평평하게 서 있던 몸이 사선으로 턱 기울어졌다. 황급히 뒤를 돌아본 짧은 순간 모든 것이 멈춘 듯 딱 멎었다가, 거짓말처럼 휙 하는 소리와 함께 눈앞이 시커매졌다. 귓가를 매섭게 하는 소리도, 쿵 하는 소리도, 뜨뜻한 것이 콸콸 쏟겨지는 축축하고 기분 나쁜 소리도, 무어라 소리지르는 것도 모조리 휙휙 지나가 사라지고 나는 아무 생각도 할 수 없게 되었다.
"아, 대장 나리도 같이 왔으면 좋았을 텐데." "광수대에 복귀해서 시간이 통 나지 않는다니 어쩔 수 없지, 어머님도 사양했고." "할머니, 체력이 많이 떨어지셔서 여행 이전에 가벼운 운동부터 하셔야 겠더라." 캡 모자를 쓴 김주황과 허건오는 기차 안 좌석에 앉아 조곤조곤하게 이야기를 나눴다. 말한 것처럼 본래는 하태성과 그의 어머니 박재분과도 함께 시간
남자는 길을 걸었다. 한없이 익숙한 서울이었지만 때때로 눈에 익지 않은 상황들을 마주할 때마다 전신을 얼음에 댄 듯한 낯설음을 느끼곤 했다. 그것이 불행을 예비하는 종류의 것이라면 경계하거나 마땅히 몸을 사려야 함이 맞으나 그런 종류의 낯설음은 또 아니었다. "은희 씨. 여보. 우리 설희 동생이 무어가 먹고 싶어하는지 알려주시겠소?" "글쎄요. 새큼한 게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듯 서재호는 잘 때 무언가를 껴안고 자곤 했다. 인형 같은 건 유년기를 벗어난 뒤로 전혀 취급하지 않았기 때문에 대부분은 이불이나 여분의 베개가 그 대상이었다. 혼자 자면 뭘 껴안고 자든 무슨 상관이겠냐마는, 일련의 사건 뒤에 양시백을 종종 제 집에서 재웠기 때문에 이제는 베개나 이불 대신 어김없이 양시백을 껴안은 채 잠에서 깨곤 했다
양시백이 자고 가는 날이면 서재호는 그렇잖아도 좁은 제 침대를 양시백과 같이 쓰곤 했는데 -절대 내려가서 자는 일은 없었다- 잘 자다가 난데없이 떨어지지 않으려면 틈 없이 꼭 붙어서 자야 했다. 아침 잠 없는 서재호가 이른 아침 눈을 뜨자 덥수룩한 머리카락이 잠결에 뒤엉켜 얼굴을 푹 가린 양시백의 모습이 보였다. 이젠 놀랍지도 않을 만큼 익숙했다. 서재호는
관자놀이를 꿰뚫렸던 두 사람이었고, 그 상처는 둘 다 살아남은 것이 한없이 기적에 가까울 만큼 치명적이었다. 그나마 조속히 구급요원들이 경찰과 함께 들이닥쳤다는 것, 마침 남은 것이 불량 탄환이었다는 것이 두 사람의 목숨을 겨우 이승에 붙들어 놓았다. 총구를 당긴 건 유상일이었지만, 유상일이 박근태와 총구 사이에 있었기 때문에 박근태의 손상은 유상일보다는
-현실의 존재가 환상으로 탈바꿈하려면 몇 가지 방법이 있는데, 그 중 제일 극단적인 것은 그 존재의 말살이었다. 완전히 사라져 죽어버린 기록으로만 남게 되면, 언젠가 저를 발견한 사람에게 드문 확률로 환상을 선사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 방법은 몹시 확률적이고...... 그래서 그는, 어느 쪽을 선택했는가? 사람이 무지개를 쫓는 이유는 그 아름다움을
-그는 환상이 갖고 있던 현실감을 두 눈으로 목격한 유일한 사람이 된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 감정을 품은 것도 순간, 깨지는 것도 순간이었다. 어둑한 저녁에 다짜고짜 사람을 불러와 모델로 삼아 그림을 그려내기까지는 꽤나 많은 시간이 흘렀다. 나는 나대로 열기에 들뜬듯이 손을 열심히 놀렸고 수많은 종이를 구기고 찢으며 내던지다가 마지막 한 장에 겨
-그는 사실 현실과 이상의 괴리에 대해서 아주 오래 전부터 깨달은 상태였다. 카페의 명의는 분명 내 이름으로 되어있었지만 건강이 좋지 않아 개업 직후 몇 번 얼굴을 비춘 것 외에는 요양 명목으로 지방에서 몸을 추스리고 있었다. 그래서 재석이에게 카페 일을 전적으로 맡겼었는데, 이번에 녀석이 갑작스럽게 뺑소니 사고를 당하게 되면서 며칠간 카페의 문을 닫을
-그는 현실에 만족하지 못 했기 때문에 현실이 아닌 곳에서 그의 이상을 찾아냈다. 단골 카페의 어느 한 구석에 걸린 초상화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린 사람의 이름도, 그려진 사람의 이름도 몰랐지만 그런 것에 구애받지 않고 느낀 것이 하나 있었다. 현실의 사람을 모델로 그려낸 것인지, 그려낸 사람의 상상력과 이상적인 남성미가 뒤섞여 구체화 된 것인지까지
서재호의 집을 나선 양시백이 도장으로 돌아가는 길의 날씨는 점점 매서워질 겨울인데도 그날따라 푹하다고 해도 될 만큼 따사로웠다. 양시백이 골목길을 꺾어가며 몸을 움직이자 목에 걸린 인식표가 서로 맞물리며 짤랑 거리는 소리를 냈다. 양시백이 하고 있는 군번줄 목걸이는 오래된 물건이었다. 10년 전쯤, 직업소개소에 흘러들어갔다가 아닌 밤중의 홍두깨마냥 칼에
똑똑- 노크 소리에 배준혁은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었다. 익숙한 얼굴. 양시백이었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어서오세요." 배준혁이 문을 연 채로 물러나 사무실 안으로 들어가자 양시백이 인사를 하고는 사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양시백은 종종 근처를 지날 때마다 배준혁의 사무실에 들러 이런저런 것들을 건네기도 했고, 일을 도와주기도 했으며, 안부를
-재석아, 오늘 시간 어때? "요즘 기온이 워낙 오락가락해서 애들이 죄 감기에 걸려가지고 당분간은 휴무 상태지. 상일이 넌 왜, 점심 같이 먹자고?" -나 오늘 비번인데, 아연이는 학교 갔거든. 혼자 먹기는 그래서 같이 먹자고 할 셈이었지. 벌써 시백이랑 먹었어? "아니, 양시는 친구들 만나러 갔어." -피차 잘 됐네. 그럼 1시까지 우리집 앞 사거리로 나
성인이 되고, 일자리를 찾고, 거기에 익숙해져 비로소 정착하고, 또 다시 바뀌고. 스물 남짓, 사회로의 첫 걸음과 함께 철이 들었을 즈음 부모님이 돌아가셨다. 평소에 더 잘해드리지 못 한 것이 슬펐지만 산 목숨, 마냥 울기만 할 순 없었다. 시간이 지나자 삐걱거리던 몸과 마음을 수습할 수 있었다. 부모님이 그리워지는 날이면, 더없이 생각나는 날이면 종종 찾
한 해가 밝았다. 연말에 감회에 젖는 것도, 목도한 새해에 두근거려하면 부푼 마음을 말로서 풀어놓는 것도 백석 저택과는 동떨어진 이야기였다. 이 곳은 그저 시간이 멈춘 듯 조용했고 적적했다. 장희준은 번드레한 말이 많은 것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제 심성 때문에 좁지도 않은 집이 더욱 적적하게 느껴지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역시, 아이가 태어나
양시백의 수면시간은 대개 10시에서 그 이후로 그 사이에 자기는 하지만 불규칙한 구석이 있었다. 대체로 그렇게 늦게까지 깨어있다 보면 최재석과 야식이나 간식을 주워먹기도 했고 그러다 보면 소화 시킨다고 텔레비전을 보거나 얼마 없는 책을 뒤적여 읽거나 하는 일로 더 늦은 잠을 자곤 했다. 양시백의 경우 이번에는 후자였는데, 조용하던 두 사람이 -최재석은 책상
"모두...꼭 이래야만 했던 겁니까?" 으득, 남자가 이를 갈았다. 육신의 상처만이 모든 상처를 대변하지는 않는다. 그 점에 입각한다면 이 사람이고, 저 사람이고, 죄다 엉망진창이었다. 죽어가는 자와, 그의 옆에 선 자. 그 이전에 마주 보았던 자들 모두가. 목숨이 아깝지 않느냐는 중년의 말과 함께 철커덕 하는 쇳소리가 강압적으로 눌린 침묵에 울려퍼졌다.
"결국 경찰대는 떨어졌구나." "..네. 하지만 순경 시험을 치는 방법도 있으니까요. 포기하지 않을 거에요." "꼭 경찰이 되겠다는 의욕만큼은 합격점이구나. 왜, 아저씨한테 맡기지 않고? 못 미더우냐?" 권혜연은 주정재를 바라보았다. 두 눈동자는 아버지의 것과 꼭 닮은 다갈색이었다. 고개를 저은 권혜연이 말했다. "정재 아저씨를 못 믿긴요. 다만 제 힘
자박. 복도의 침묵을 깨던 걸음소리가 멎었다. 두 소리가 겹쳐진 걸음소리 중 하나가 멎은 셈이었다. 멈추지 않은 걸음소리가 자박자박자박 중간에서 끝까지 계속되었다. 소리가 멎은 곳에서 걸음이 멈추고 끽 문이 열리는 소리가 작게 울렸다. 중첩된 걸음소리가 그 안으로 스며들듯이 끌려들어갔다. "오랜만이지." "..잘, 지내셨어요?" 안경을 쓴 남자는 옅게
허건오는 제 일이 끝나면 -최소한의 생계 유지를 위해 아르바이트를 여러 개 구했고, 그 뒤 짬짬이 남는 시간에 하태성에게 검정고시를 위한 과외를 받았다- 가끔 김주황을 마중하러 나오곤 했다. 어느 날엔가 김주황이 먼저 돌아가 있는 게 좋지 않냐고 했더니 허건오는 집에 가는 가깝지도 않은데 둘 다 밖에 나와있으면 타이밍 맞춰서 같이 가는 게 낫지 않냐고 대답
딩동~ "나가요~" 최재석이 성큼 현관문 앞으로 걸어가 문을 열었다. 봉투를 들어올린 채 가볍게 흔들어보이는 유상일과 살짝 뚱해보이는 -누가 보면 심통나거나 짜증난 것으로 오인하기 쉽지만 이게 평소 표정이었다- 정은창의 모습이 보이자 최재석은 방긋 웃었다. "야, 일찍 왔네. 둘 다 저녁 아직이지?" "저녁은 뭘. 야자도 안 하는데 당연히 아직 안 먹
"강 비서님, 오늘 생일이시라면서요." "어머, 양 실장님, 그런 것도 기억해주세요?" "..본인 생일이 아니십니까?" "그만큼 의외였다는 거죠." 양 실장님 쪽에서 기억해 줄 필요가 있었던가? 그렇게 생각하는데 양 실장님이 말을 이었다. "강 비서님이 맡으신 일들이 워낙 많으시니 회장님께서 따로 조기 퇴근을 시켜준다거나 하지는 않으시겠지만 또 모르잖습
"준혁 선생님, 손 놓으시면 안 돼요!" 투명한 눈물. 그리고 붉은 피가 방울져 배준혁의 얼굴로 뚝뚝 떨어졌다. 둘 모두 배준혁의 것은 아니었다. 까마득한 백색 심연으로 떨어지려는 자신을 꼭 붙잡고 있는 양시백의 것이었다. 배준혁은 위기감도, 두려움도, 슬픔도 없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서 양시백이 저토록 간절하고 급박하게 말하는 데도 하나도 와닿지
남자는 담배에 불을 붙였다. 남자를 아는 누군가가 그 모습을 봤다 해도 말을 붙이기 힘든 분위기에 눈길을 주거나 다가서지 못 하고 등을 돌렸을 것이다. "야, 오늘이 생일이라고 했지?" 주정재는 일할 때 빼고는 남자와 잘 어울리는 편이 아니었다. 일단 대외적으로 형사였기 때문에 제게 맡겨지는 일을 처리해 나가느라 바빴고, 그 일을 할 때에도 서로 맡겨진
정은창은 담배에 불을 붙였다. 누군가 그 모습을 봤다면 생일날 아침부터 담배냐고 핀잔을 주었을 것이다. 생일이라고 해서 대문을 여는 순간 폭죽이 터져나온다거나, 머리 위에 뜬 태양이 마음을 바꾼 듯 서늘하다거나 하는 종류의 날은 아니었다. 생일은 그냥 생일이었다. 모든 게 신기하고 모든 게 특별했던 어린 시절에도 생일에 목매던 기간은 짧았다. 딩동- "
쿵쿵쿵- "관장님이세요?" 관장실 안쪽에서 한창 컴퓨터를 만지작 거리던 -게임 용도로- 양시백은 그렇게 말했다. 쾅! 그리고 대답은 두드린 건지, 걷어찬 건지 모를 큰 소리로 돌아왔다. 아이들 장난인가 싶어 양시백은 그제서야 관장실을 나와 도장 마루를 가로질러 걸어 문을 열었다. "누구..." "비켜비켜비켜비켜!" "우왁!" "어우, 양시, 왜 이
서재호는 가끔 도장 근처를 들를 때면 먹을 걸 사다가 양시백에게 챙겨주곤 했다. 식성도 좋은데 식사를 제대로 챙기지 못 할 것 같다는 생각이 종종 들어서였다. 어느 날 여덟시를 막 넘긴 즈음 이것저것 사서 받아둔 보조 열쇠로 잠긴 도장 문을 열고 들어온 것도 같은 이유였다. 도장 안은 적막한데다 싸늘했고, 불까지 꺼져있어서 도무지 사람 머무는 곳으론 보이지
-여, 시백이랑 혜연이. 같이 있어? "네. 설희랑 도장에서 놀아주고 있어요. 이쪽으로 오시게요?" -아니. 지금 가봤자 거기서 자고 올 거 아니면 왕복이 피장파장이라서. 주말 동안은 설희와 보내기로 했을 테니 내일까지 쭉 있을 테고... "무슨 일이라도 있어요?" -아, 아니, 괜찮으면 다 같이 맛있는 거 싸들고 꽃놀이 가자는 거지. 다들 가고 싶어했잖아
-나는, 권현석 경감님의...친구란다. 여자아이는 눈물을 그득 담은 얼굴로 남자를 보다가 고개를 숙였다. 하얀 빗살 섞인 눈물은 희게 흐드러져 볼을 타고 방울져 떨어졌다. 남자는 다른 사람들처럼 무어라 위로의 말조차 건네지 못 했다. 여자아이에게 위로가 되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그런 위로를 겉치레로도 건넬 자격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먼저,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구나." 양시백은 대답하지 않았다. 예상한 바였다. "내가 누릴 수 없었던 44살의 시간을 누리게 해 준 것, 내가 다시는 볼 수 없었던 소중한 사람들을 다시 만나게 해 준 것. 그들과 내가 불행하지 않은 서울을 소망해 준 것까지 모두." 짜릿할 만큼 싸늘한 바람이 불어와 체온을 삽시간에 야금야금 앗아가기 시작했다. 바람
"모처럼 홀가분해 보이는 얼굴인 거 알아, 아빠?" "응?" "요즘 내내 시무룩하거나 우울해보였는 걸." "걱정 끼쳐서 미안해." "미안해 하라는 게 아니라..." "그래. 무슨 일 없냐는 거지?" 확인은 했다. 그 때문에 오늘 밤으로 내 추격은 끝을 맞이할 수도 있고, 좀 더 계속될 수도 있다. 그 기간은 길지 않았지만 흔들리지 않겠다 결심했고, 또 결
"준혁이." "예." "경찰을 그만두고 싶다고 생각해 본 적이 있어?" 준혁이는 갑작스러운 물음에 약간 곤혹스러워 하는 빛을 보였다. "...아주 예전 일입니다. 서대문 인질극 사건 당시 그런 생각을 했었습니다. 당장 아이를 구하고 싶은 마음과는 달리 무력하기만 한 자신에게 화가 났고, 혹여 아이를 구하지 못 했다면 지리멸렬하게 자리만 차지하고 있다가
몇 개의 담배를 한없이 하늘거리며 흩어지는 연기로 만든 뒤 코트를 벗어 소리나게 몇 번 털었다. 다시 안으로 들어가려고 발을 들인 순간 막 나오는 사람이 보여 한 발자국 물러나 지나온 바깥의 경치에 시선을 주었다. "권현석 경감." 어느새 발걸음 소리는 멈춰있었다. "국장님..!" "..현석이. 그 자리에서 물러난지 얼마나 됐는데 아직까지 직함으로 부
무거운 발걸음을 이끌고 겨우 집에 다다랐을 즈음에는 얼마만큼의 시간이 흘렀는지 가늠하기 힘들었다. 내가 지금 누리고 있는 서울. 그리고 누릴 일 없는 서울의 기억은 어지럽게 혼재되어 있었지만 사실 그 둘의 구분은 너무나도 쉬웠다. "아빠, 연락도 없이 늦었잖아. 얼마나 걱정했는지.." 나를 마주하는 혜연이의 얼굴에서 경찰이 된 혜연이의 얼굴을 보았다.
-저는, 양시백이라고 합니다. "네 이름은..양시백이라고 하지." 청년, 양시백은 내 말에 살짝 표정을 굳혔다. 이름 석 자를 시작으로 번쩍, 또 번쩍하며 많은 생각들이 우수수 자라나듯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지금까지 내가 몰랐던 것들이. 내가 지금까지 잊고 있었던 것들이. 양시백. 스물 일곱. 양지 태권도장의 사범. 어린 시절 부모를 잃고 시설을 전전하
일요일 아침이 밝은 뒤 식사하면서 혜연이에게 같이 양지 태권도장에 가지 않겠느냐고 물었는데, 혜연이는 아직 일을 마무리 짓지 못 해 다음에 제가 찾아가보겠다고 말하며 거절했다. 너무 무리하지는 말고. 미완된 일감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며 그렇게 말했지만 한 번 선택했으니 만족스러울 때까지 붙잡고 있을 것이 눈에 훤했다. 결국 오늘도 혼자 집을 나오게 되었다.
정신을 차리고 시계를 보니 어느새 한낮이었다. 휴일이라고 하루의 반을 잠으로 보내는 정도는 아니었는데.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손으로 대충 정리하고 부엌으로 가니 혜연이가 식사 준비를 하는 모습이 보였다. "아빠, 이제 일어난 거야?" "그게..그렇게 됐네." "많이 피곤했었나 봐." "이제 아빠도 늙었나보지." "또 그런 말 한다. 정재 아저씨한테 옮았다니
보이지 않고, 말할 수 없고, 들을 수 없었다. 손가락 하나 까딱 움직일 수 없는 상황에서 '내' 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오로지 생각하는 것뿐이었다. 나는 누구인가. 안개처럼 몽롱했던 생각은 사고가 전개될수록 선명해지면서 사람의 정신으로서 정련되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기억만큼은 흐릿했다. 기억에 대한 생각은 이상할 정도로 뭉근한 신체 감각에 대한 생
"...리." "....." "...나리." "....게 늑장 부리는 것도 오랜만..." "대장 나리!" 하태성은 근 3일간 들어온, 자신을 가리키는 익숙한 호칭에 눈을 떴다. 머리를 꿰뚫는 듯한 두통에 인상을 찡그리며 몸을 일으켜 멋쩍은 듯 목 뒤를 긁는 김주황과 제 앞머리를 집으며 손장난 중인 허건오를 바라보았다. "대장 나리, 많이 피곤했나 봐.
옛날 생각이란 참 쓸데없는 걸로 불러일으켜졌다. 이게 다 그놈의 고릴라가 가족이 있네 없네 꼬치꼬치 캐물은 탓이다. 가장 보고 싶은 것은 이제는 얼굴도 흐릿하게 기억나는 엄마였지만 가장 많은 생각이 들게 하는 건 형이었다. 형은 상냥하거나 다정한 성격이 아니었다. 하지만 형이었다. 손찌검, 심하면 발로 차는 등의 숱한 폭력에도 언젠가는 마음을 고쳐먹을 거
김주황은 제 집 위에 딸린 옥상에서 종종 담배를 피곤 했다. (그 점은 건물 거주자 중 김주황만 해당하는 것도 아니었다.) 원래 담배를 피우지 않았었지만 언제부턴가 입에 달게 된 것이었는데, 그 계기가 제 동생이 자살하면서부터였다는 것을 깨닫곤 혀를 찼다. 그리 의 좋은 형제도 아닌 평범한 형제였다. 감당할 수 없는 빚을 떠안고 울던 동생을 때려주고 싶을
"건배~" 다섯개의 소주잔이 부딛혀 가볍게 짜장, 하는 소리를 냈고, 찰랑이던 소주들은 첫 술을 기념해 빠르게 사라졌다. "크아, 소주 마시는 것도 오랜만이네..그보다 다들 잘은 지냈냐? 특히 거기 경찰 2인조." "우리야 뭐..아직까지 별 일은 없어." "최재석이 저놈 저거, 꼭 경찰 일 안 해본 것처럼 얘기한다니까." "별일도 없다면서 왜 얼굴을 통
"이야, 으리으리한 저택이네." "확실히, 죽은 이경환이네 임대 건물이나 고상만이네 공장보다는 훨씬 나아보이네." "조용히 하십시오. 소란 피우다 상대가 알아채면 곤란하지 않습니까." 하태성이 제지에 김주황은 쩝하며 입을 다물었고, 허건오는 그러거나 말거나 으쓱이면서 열린 대문으로 걸어들어가 현관문을 두드렸다. "여-보-세-요." "...혹시, 없는 걸
닫힌 눈꺼풀 안은 당연하게도 검었다. 빛났다가 사라지는 조명의 잔상이 섞여 옅우 붉은빛이 섞인 눈꺼풀 안의 어둠은 이윽고 까맣게 가라앉았다. 여느 날처럼 단락 없는 잠을 청하는 과정이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사방을 가득 채우고 있던 어둠이 물에 섞이듯 조금씩 말갛게 희석되더니 마치 기체인 양 바람을 타고 위로 흩뿌려졌다. 그와 동시에 눈이 번쩍 뜨였
08:58:00 08:59:00 09:00:00 관장님이 돌아오지 않은 지도 며칠이 지났다. 그 사이에 용역업체 직원이라는 어깨들이 관장님을 내놓으라며 우르르 몰려와 도장을 한바탕 뒤엎고 갔다. 걱정되는 마음, 정말로 10년 넘게 알아온 날 배신한 거냐는 마음. 어느 마음이 우위에 놓여있는지 분간도 하지 못 한 채 아침에 눈 뜨면 대충 끼니를 때우고 관장
"..기사, 봤어요." 양시백은 서재호의 방으로 들어서는 것과 동시에 굳어진 얼굴로 그리 말했다. 서재호는 평소와는 달리 인상을 찡그린 채였다. "..백석 쪽에서 손 쓴 거지. 예상은 했었지만 저렇게 뜨자마자 즉각 대응할 줄은..." "이제부터 어쩔 작정이에요? 그 제보자는?" "달라지는 건 없어. 편집장님과 다른 분들에게는 미안하게 됐지만...서로 이
"혜연 씨, 생일 축하해요. 이건 저랑 설희가 같이 고른 선물이에요." "고마워요. 받아도 될까요?" "언니, 대신 집에 가서 풀어보세요!" "응, 그럴게. 고마워, 설희야." 권혜연 씨는 설희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웃었다. 겨울이 막 가실 즈음의 생일이다. 주변을 둘러싼 것들은 달라진 것이 없고 여전히 막막한 느낌이지만 그렇게 처질수록 더욱 서로를 챙겨주
"...요리하는 것보다 그냥 어...시켜먹는 게 낫지 않았을까?" "집들이 음식을 배달음식으로 때운다고?" "그, 그렇게 볼 것까진 없잖아!" 유상일은 창문을 활짝 열어두고 신문지를 깐 뒤 전을 굽고 있었고, 최재석은 투덜거리면서도 상을 차리고 이런 저런 반찬들을 그릇에 담아 올리고 있었다. 도장을 막 신장개업한 것도 아닌데 갑자기 집들이를 한다고 하니
"...쪼그리고 뭐하세요?" 집 안으로 들어오니 경감님이 바닥에 무언가를 잔뜩 늘어놓은 채로 끙끙거리는 모습이 보였다. "종이접기. 같이 할래?" 종이를 접어서 어디다가 쓰냐고 묻고 싶었지만 어린 시절에도 그런 한가로운 취미에 관심을 둘 만큼의 여유가 없었던지라, 솔직한 호기심이 들어 작은 책을 펼쳐두고 종이를 이리접고 저리접는 경감님에게 다가갔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오냐, 양시. 새해 복 많이 받아라." "시백이도 새해 복 많이 받고." 아빠는 품에서 흰 봉투를 하나 꺼냈다. 스무살이 넘은 지 한참이 지났는데도 아빠는 늘 세뱃돈 겸이라며 조금씩 돈을 주었다. 세배한 것도 아니고 무엇보다 구정도 아닌데. 전에 챙겨주지 못 한 것들이 미안해서 많은 걸 챙겨주고 싶은 것으로 생각되지만 내가
"생신, 축하드립니다." 하성철은 박근태의 말에 눈을 깜빡인 채로 대답이 없었다. 일견 무표정하게 보였지만 오랜 시간 그 옆에서 함께한 박근태는 그 얼굴이 무시가 아닌 의아함을 표시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제 생일을 인지하지 못 한 사람의 얼굴이었다. "벌써 날이 그렇게 됐나?" "국장님의 생신은 딱 한 해를 열흘 남긴 날이어서 일정을 체크하다
정은창은 우편물 확인을 드문드문하는 편이었고, 그때문에 제게로 온 우편물이 꽤 희끗하게 꼬리를 보일 즈음에야 회수하곤 했다. 발신인은 적혀있지 않고 정은창 씨에게, 라고만 간결히 적혀있는 흰 편지 봉투는 보통 문방구나 우체국에서 파는 것과는 달리 안내 카드를 넣으면 알맞은 크기였고, 종이 재질 자체도 좋았다. 그의 거처를 아는 사람들은 편지를 수고스레 보내
"그간 일들을 돕느라 고생이 많았지. 많이들 먹어." 김성식의 상냥한 말에 입을 다물었다. 보통 당근과 채찍이라고 하던가. 김성식은 본인 비유대로 그렇게 야박한 성격이 아니라서 성과급 같은 건 제대로 챙겨주는 사람이었다. 허나 아무리 조심한들 무의식중으로 김성식의 심기를 거스를 수 있다는 점, 장단에 맞춰야 춤이라도 출 텐데 김성식은 특히나 그 폭이 좁고
"어우, 춥다, 다녀왔습니다." 밖은 한창 겨울 칼바람이 불고 있었다. 도장 불은 꺼져있어 안이 보이지 않았지만 종종 관장님이 곤히 낮잠을 자는 경우가 있어서 열쇠로 잠긴 문을 열고 들어오며 그러려니 하며 인사했다. 어쩐지 유독 어두워 보여 잠시 머뭇거렸다. "다녀왔습니다!" "엥?" "아, 아니, 새, 생일 축하합니다!" 뚱딴지 같은 소리가 멍 때리
"다녀왔다!" "엇." "엉?" 박력있게 문을 박차고 들어온 최재석은 도장 바닥에 신문지가 깔려있는 것과 뭔가 작고 덩어리 진 것이 툭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얼빠진 소리를 낸 양시백은 갑작스럽게 들린 소리에 방금까지 먹고 있던 찐 고구마를 놓친 채 출입구를 볼 뿐이었다. "아, 관장님! 깜짝 놀랐잖아요! 간 떨어질 뻔했네!!" "네 반응에 내가 애 떨
"...단체로 모래사장에 파묻으려는 건가?" "...아니면 바닷물에 수장?" "아냐, 인파가 몰리는 걸 생각해서 뒷골목에서 슥삭할지도.." "야, 정은창, 뭔가 아는 거 없냐?" "알면 내가 이러고 있겠냐?" 주정재가 머리를 굴리다가 내게 물었지만 나도 아는 게 없어서 가볍게 빈정거렸다. 김성식은 도통 종잡기 힘든 놈이다. 갑자기 휴가 가고 싶지 않냐는
하얀 셔츠에 검은 재킷. 단정해 보이는 것에 중점을 둔 교복이라지만 지극히 평범한 디자인. 그런 옷을 입은 남학생 세 명이 굳게 닫힌 문 앞에 서 있었다. "....큼." "....꼭 그렇게 나가야겠냐?" "한 번쯤 교문 타고 넘는 게 학교 생활의 묘미 아니겠어?" "아니지." "보통은." "크~ 둘 다 샌님 같은 면이 있다니까." 최재석은 닫힌 교문을
빗줄기가 사방에서 쏟아져내렸다. "두 사람, 내게는 각별했어." 그러나 그렇게 말하면서도 주정재는 내게 겨눈 총구를 치우지 않았다. "...정말이야." 쓴맛이 배어나올 것 같은 얼굴을 하면서도 정말로 나를, 경감님을, 처리해 버리기로 마음 먹은 것이었다. 그렇게 마음먹었다면 소중했다느니, 각별했다느니 하는 이야기는 하지 않아도 된다. 진정 그랬을지
누가 불시에 뒤통수를 후려갈긴 것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누군가가 시비를 걸거나 그게 폭력으로 번지는 건 아주 흔한 일이었다. 지금에야 좀 줄었지만- 그 뒤로 먹먹했다. 그리고 정신을 차리고 나니 귀신의 집보다 더 살풍경한 방 안에 나뒹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눈앞의 아저씨는 내가 깨어나기만을 오매불망 기다렸다고 손을 털면서 투덜거렸다. "그래서,
웅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것이 말의 형태로 바로잡히자 눈이 떠졌다. 주위를 둘러싼 조명의 불빛은 강하지 않았고, 어두운 것에 가까웠다. "괜찮으십니까?" "괜찮습니다...당신은?" 사실 아직까지 두통이 따라왔으나 걱정하는 듯한 물음에 눈을 찡그리며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눈을 바로 뜨자 순경복을 입은 남자가 눈앞에 있었다. 모두는 아니었지만 성중서의
"저기, 미정 형사." "왜요?" "나랑, 데이트 해 주지 않겠어?" "...데이트요?" 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서 밖으로 불러낸 서재호의 말에 오미정은 눈을 날카롭게 빛냈다. 전에 있었던 일로 기분이 몹시 상한 터라, 업무에 관련된 것이 아니면 사소한 말도 잘 안 붙였다. 대놓고 혹한의 바람이 부니 다른 팀원들도 무슨 일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밖에 없었
상일 경위님은 내 도움을 필요로 한다고 하셨다. 직접 찾아오시기까지 아직 시간이 있었다.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도울지, 돕지 않을지에 대한 것이 아니었다. 나는 이미 전자로 결론을 둔 상태였고, 그것은 변함이 없으리라. 생각해야 할 것은 앞의 것과는 다른 문제였지만, 가장 본질적인 문제였다. 나는 상일 경위님을 사랑하고 있다. 그것은 부정할 수
찬거리를 사 들고 도장으로 돌아가던 중이었다. 누군가 골목 안쪽에서 이름을 부르며 불러 세우는 것에 멈춰 서서 골목 안을 바라보았다. 안은 가로등의 불빛이 닿지 않아 어둡기 그지없었다. “최재석.” 잘못 들은 것인지 다시금 고개를 갸우뚱 할 때쯤 다시금 이름이 불린다. 남자의 목소리였다. 발걸음 소리와 함께 천천히 걸어 나온 것은 남자였다. 낯이 익었다
시백이가 설희를 돌봤고, 주말에는 혜연이가 설희와 함께 지내곤 했다. 딱 잘라서 정한 건 아니었지만 어느 순간부터 암묵적으로 그렇게 되어있었다. 주말이라고 시백이의 일상이 확 달라지는 건 아니었다. 도장을 청소하고, 부족한 잠을 자고, 고장났던 텔레비전을 얼기설기 고쳐 방송을 시청하는 정도였다. 내가 그렇듯이. 그러다 그 주말의 두세번쯤 내 집에 찾아와
"상일이. 생일 축하해." 유상일은 자신을 부른 박근태가 옅게 웃으며 던진 말에 어? 하고 어리둥절한 소리를 냈다. 어린 시절이 지난 뒤에는 생일을 그렇게 꼬박꼬박 챙기고자 하는 의지도 수그러들었고, 자신도 잊고 지내는 터라 생일이 지나갔구나 하는 정도였다. 올해의 생일도 그렇게 보낼 뻔 했고. 그러다 문득 제 앞에 있는 사람 또한 생일이 같다는 사실을
양시백이를 보며 제일 먼저 하는 생각은 그것이었다. 준혁이에게 습격당한 이후 병원에서 절대안정 딱지가 붙은 채 의식을 차리지 못 하고 있다가 사건이 끝나고도 남은 한참 뒤에야 내가 함께할 수 없어 결락된 부분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가 찾던 최재석 관장과의 재회, 그리고 죽음, 준혁이와 상일 형님, 박근태 의원의 최후, 하태성 경위의 일, 무사히 구